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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民族主義) - 2
안원전 / 역사학자
천문학으로 고조선사 증명했다
그럼 이번에는 「환단고기」를 위사(僞史)라 주장하는 친일 노예사관의 일부 강단 사학계와 가타부타 않고 어정쩡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기성사학계도 인정하게 만든 다음의 박 창범 교수의 연구성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박 창범 천체물리학 교수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기사를 천문학적으로 모두 "사실" 이라고 밝힘으로써 그간 국내 학계의 논란을 일으키던 단군 조선의 실재를 더욱 확실히 인정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천문학으로 고조선사 증명했다 >는 다음의 [시사저널] 205.206 함병호 93/9/30.10/7 기사를 잠시 보자
BC 1733년 흘달 단제 시대 단군 조선인들이 보았을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 기법으로 시각화했다.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 (僞書) 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 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 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이다. <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 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사서로, <단기고사>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
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 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박 교수와 라 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흘달 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 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 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 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 교수 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 두 사서 모두 제29세 마휴 단제 9년 (BC 935년) 때 `南海潮水退三倜` 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 22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 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박 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 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 교수 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 교수는 말했다.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 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박 성수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 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 상고사학회` 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는 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 논문집 <상고사학보> 에 박 교수 팀의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 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국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참고로 최근 청동기시대 별자리 판이 확인돼 우리 천문지식의 뿌리가 중국의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고인돌 유적에서 발견된 별자리 판을 컴퓨터 통계기법을 사용 별자리 분석에 객관적 검증을 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서울대 박 창범 교수(지구환경과학부 천문학 전공)는 눈으로 별자리를 확인하는 일보다 컴퓨터를 이용한 객관적인 접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조선은 청동기시대를 배경으로 꽃을 피운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다. 하늘을 살피고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일은 어느 국가에서나 중요한 일이었다.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의미를 떠나서라도 농경을 위해서는 계절을 아는 일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도 별을 관측했을까.
지난 10월 20일 충남대 한국 우주 과학회 한국천문학회에서는 이와 관련해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분석자료가 발표됐다. 다름 아닌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돌판 위에 파인 수많은 구멍들이 북극 근처의 별자리로 밝혀진 것. 북두칠성을 비롯해 작은곰자리, 용자리, 세페우스자리 등이 확인됐다. 이것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에 화제가 된 돌판은 사실 22년 전 고고 미술학자 이 융조 교수(충북대)가 충북 대청댐 수몰지역을 탐사하다가 발견된 것인데 발견 당시에도 별자리일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증거가 부족했다. 최근에야 천문학자와 공동연구를 통해 별자리임이 밝혀졌다. 또한 언론에서는 이번 별자리 확인연구가 마치 눈으로만 이뤄진 것처럼 비쳤으나 사실 이보다 더 객관적인 연구가 있었다./
임 혜상은 한(漢)족을 구성하는 제 1 근간 민족이 화하(華夏)족이요, 제 2 근간 민족이 동이족이라 한 바 있다. 그러나 화하족 자체가 동이족에 뿌리를 대고 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임은 이(夷)를 혹 동이(東夷)라 일컫고 화하계의 동쪽에 거주한다 하였다. 「설문(說文)」에 “이(夷)는 동방의 사람이라, 클 大, 활 弓을 따라 만든 글자”라 했다.
동이는 하나의 명사로 광의, 협의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협의로는 전적으로 진(秦) 이전 지금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에서 사는 자와 회(淮)로부터 그 이북 연해 일대에 사는 이민족을 가리킨다고 했다. 광의로는 진한(秦漢) 이후 판도가 확장되어 대륙 경내에 사는 동이족이 이미 동화되어 만주족, 조선족, 일본족, 유구족 등이 별도로 동이가 됨을 가리킨다. 일본의 팔목장삼랑(八木奘三郞)은 전자가 구(舊) 동이고, 후자가 신(新) 동이(발해만에 둥글게 퍼져 살았던 고대민족)가 된다고 하였다.
중국민족사로부터 이를 말하면, 마땅히 협의적인 구(舊) 동이가 그 범위가 된다. 협의의 동이는 상고시절 곧, 화하계와 더불어 중국에 거주했으며, 주(周) 초에 매우 강했으나 뒤에 왕실 및 제(齊)․노(魯)의 물리침을 받아 마침내 점점 쇠퇴해졌으며, 초 및 오월(吳越)이 흥기해 그 부림을 받았다. 진(秦)이 6국을 멸한 이후 마침내 흩어져 민호(民戶)로 전락했으며 이때로부터 완전히 화하(華夏)계에 동화되었다.
동이의 종류는 항상 아홉이 된다고 일컫는다. 「서전(書典)」<여오(旅獒)> 편에 “생각건대 상(商) 나라를 패배시켜 9이(夷) 8만(蠻)에 길이 열렸다.” 고 했고, 「논어」 자한(子罕 章)에서 “공자가 동방 구이 족 나라에서 살고자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추하거늘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군자가 자리잡고 사는데 무엇이 누추하단 말이요? 하고 말했다.(子慾居九夷 或曰陋如之何 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
그러나 「우공(禹貢)」에 크게 열거한 바, 청주(靑州)의 우이(嵎夷)와 래이(萊夷), 기주․양주의 도이(島夷) 혹 조이(鳥夷), 서주(徐州)의 회이(淮夷) 등 4 종이 있다. 「죽서기년」에 의거해 「후한서」에서는 9 이(夷)의 이름을 상세히 열거하고 있으며, 후에 다시 남이(藍夷) 1 종을 추가했으니 이로써 마침내 10종이 되었다.
「후한서 권 115」에 “왕제(王制)가 이르기를 동방을 일러 이(夷)라 일컫는데, 이(夷)라는 것은 저(柢:뿌리 저, 근본 저)인지라, 말은 인자하고 살려주는 것을 좋아하여 만물이 뿌리되는 땅에서 나왔으므로(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제어하기가 쉬워 군자 불사지국에 이르렀다. 이(夷)는 9 종이 있어 일컫기를, 견(畎)이, 우(于)이, 방(方)이, 황(黃)이, 백(白)이, 적(赤)이, 현(玄)이, 풍(風)이, 양(陽)이라 하므로 고로 공자가 구이에 가 살고 싶다 하였다(故孔子欲居九夷也)”
동서 주(注)에 “「죽서기년」이 말하기를 후설(后泄) 21년 견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에게 명을 내렸으며, 후상(后相) 즉위 2년 황이를 정벌하고, 7년에 우이가 사신으로 내 빈(來賓)하였으며, 후일 소강(少康)이 즉위하니 방이가 내빈했다.” 「후한서 권 115」에 “중정(仲丁)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도둑의 무리를 지었다”
「죽서기년」및 「후한서」에 열거한 이(夷)는 색으로 구별하는 게 많아 마치 「춘추」의 백적(白狄), 적적(赤狄)과 같이 지금의 백묘(白苗), 흑묘(黑苗)와 같다. 백묘, 흑묘계는 의복의 색깔로 구별하는 것이지 진정 인종상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거론한 백이, 적이 등은 아마 또한 이같이 구별하는 비슷한 방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 남이족 한 종이 추가되어 다시 9이의 수와 합치되지 않는다.
위에 거론한 「주서(周書)」<여오(旅獒)> 편의 9 이(九夷) 구절 아래 채(蔡)가 주석 해 이르기를 “9 이(夷) 8 만(蠻)은 명칭이 많다. <직방(職方)>은 4 이, 8 만을 말하고, <이아(爾雅)>는 9 이, 8 만을 말하니, 그 하나가 아니라는 말을 믿으니 그 뿐이다.” 그러므로 이(夷)의 수는 반드시 9가 되는 것은 아니니, 9는 무릇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인종은 부락이 번성해 많으니 화하인이 (수의) 한계가 있음을 아는 바이니 어찌 능히 일일이 그 수를 헤아려 9종이 된다고 확실히 단정했겠는가?
또 「후한서」의 9 이는 혹자가 이르기를 한결같이 회이(淮夷)에 속한다 했으니, 이는 곧 회이(淮夷) 1 종이 나뉘어져서 9 갈래가 된 것이다. 「묵자」 <비공(非攻)> 중에 “9 이의 나라는 빈복(신하로 복종함)하지 않음이 없다(九夷之國莫不賓服)”고 했으며, 손 이양(孫詒讓)의 주(注)에
“<이아(爾雅)>, <석지(釋地)>에 이르기를 9이, 8적, 7융, 6만을 일러 4해(四海)라 말한다. 왕제(王制)에 공(孔:공영달?)이 주석 해 말하기를 9이는 동이에 의거해 9종을 전하는데, 일컫기를 ‘견(畎)이, 우(于)이, 방(方)이, 황(黃)이, 백(白)이, 적(赤)이, 현(玄)이, 풍(風)이, 양(陽)이’라 했다.
이 순(李巡)이 <이아>에 주(注)를 달아 말하기를 하나는 현도(玄菟:호랑이 도), 둘은 낙랑, 셋은 고려(高驪), 넷은 만식(滿飾), 다섯은 부여(鳧餘:오리 鳧지만 여기서는 산 이름 부로 쓰임), 여섯은 색가(索家), 일곱은 동도(東屠:흉노 사투리로 어진 사람을 도기(屠耆)라 하고 흉노왕 휴도(休屠)의 본래발음은 휴저로 저는 본디 흉노왕 저 字로 흉노와 관련), 여덟은 왜인, 아홉은 천비(天鄙:나라 비)라 했으니, 이에 왕제(王制) 주석에 말한 바, 해외 멀리까지 두루 미쳐 이(夷)의 종이 (다양하게) 갈라섰다.
이 9이는 오(吳), 초(楚)와 더불어 서로 가깝고, 대개 곧 회이(淮夷)로 해외(海外)의 동이는 아니다.
서서(書敍)에 이르기를 (주무왕의 아들) 성(成) 왕이 회이(淮夷)를 정벌하여 마침내 엄(奄)을 밟았다(踐). 「한비자」 <설림> 상편에 말하기를 주공단이 9이를 공격하여 상개(商蓋)를 복속했다.(이로써 은상의 뿌리가 동이족인 회이(淮夷)임을 알겠다) 상개는 곧 상엄(商奄)이니 즉, 9이 또한 곧 회이(淮夷)이다.
그러므로 「여씨춘추」 <고악편>에 이르기를 성(成)왕이 서니 은(殷) 민이 반역했다. 왕이 주공을 명해 이를 정벌해 짓밟았다. 상(商)인이 코끼리에 멍에를 메어 부려서 동이에게 가혹하게 학대했다. 주공이 마침내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내쫓아 강남에 이르렀다. 또 <악성편(樂成篇)>에 이르기를, 오히려 *관숙과 채숙의 사건이 있음으로부터 동이 8국과 더불어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不聽之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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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사건은 주(紂)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와 함께 일명 3감(監)의 난(亂)이라 한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 배경설명을 하면, 문왕의 아들 무왕 발(發)은 동생 주공단과 강태공 여상의 보필을 받아 이미 타계한 문왕의 위패를 봉하고 문왕의 이름으로 은상을 멸하고 주(周)나라를 연다. 관숙과 채숙은 주공의 형제며 무경녹보는 은상의 말왕 주(紂)의 아들이다. 주가 은을 멸한 뒤에 상(商)의 기내(畿內:지금의 하남성 기(淇)현 탕음현)를 「시경」의 국풍에 나오는 바와 같이 북쪽의 패(邶), 남쪽의 용(鄘), 동쪽의 위(衛)3국으로 나누었는데, 패에는 녹보를 임명해 멸한 은의 제사를 잇게 하고 용은 관숙, 위는 채숙을(무경녹보는 수도안에 관숙, 채숙, 곽숙을 봉해 3감에 봉함) 임명해 다스리게 했다.(「한서지리지」) 무왕 발이 어린 성왕을 남기고 죽자 주공단은 무왕이 풍(豊)에서 호(鎬)로 옮긴 수도를 다시 낙읍(낙양)으로 옮겨 7년 동안 섭정하며 주의 제도를 정비해 안정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서」 <금슬>에서 보이듯이 관숙․채숙은 주공이 왕위를 찬탈할까 의심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무경녹보와 함께 은의 옛땅에서 반기를 든다. 이것이 소위 3감의 난인데 주공은 동정(東征)을 행하여 이들을 모두 토멸했다. 주공은 문왕이 해석한 64괘의 384효를 해석해 공자에게 성인으로 추존되고 복희, 문왕, 주공의 법통으로 이어지는 장본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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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高) 주(注)에 이르기를 동이 8국이 2 숙(叔)에 붙어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주공이 자리잡고 3년을 섭정하며 엄(奄)을 정벌했으니 「상서」에 기록된 바 동이 8국 중 최대였다. 나머지 7국은 작고 또 먼저 정복한 고로 경서에 기재되지 않았다. 이에 동이 8국 또한 곧 9이(夷)다. 춘추시대 이후로 대개 신민(臣)은 초, 오, 월에 3국에 속했다.(양자강 중류 호북 호남의 초(진에 멸망), 절강성의 월은 월에 멸망한 오와 더불어 묘요 계인 전통적 동이 국가임을 꼭 숙지하고 상고사를 대할 것, 항우는 바로 이 동이국 초 나라의 재건을 내건 바 있다: 필자) 전국시대에는 또 전적으로 초 나라에 속했다.
「설원(說苑)」 <군도(君道)>편에 말하기를 월 왕 구천이 오 나라와 함께 전쟁을 하여 이를 대패시켰다. 아울러 9 이(夷)가 있었다. 「회남자」 <제속훈>에 이르기를 월 왕 구천이 천하의 패권을 잡아 사(泗) 위에 12제후를 두고 9 이(夷) 모두를 거느리고 천자로서 조근(朝覲)을 받았다. 「전국책」 <진책(秦策)>에서 이르기를 초(楚)․포(苞) 9 이(夷)가 사방 천리라 했다. 「위책(魏策)」에 말하기를 장의(張儀)가 가로대 초(楚)가 남양(南陽)을 격파하고 9이(夷) 안에 패(沛) 현을 두니 하남 성 허창 현 지방의 국가 허(許:장의의 말대로 결국 초에 멸망)의 언릉(鄢陵)이 위험하다고 했다.
「문선(文選)」에 이사(李斯)가 진시황에게 서책을 올려 설명하기를, 진이 9이를 포함해 초를 정벌하고 언(릉)과 영(郢:호북성 강릉현 북쪽의 초나라 서울)을 제어한다고 했다. 이(李) 주(注)에 말하기를 9이는 초이(楚夷)에 속한다고 했다. 만일 그렇다면, 9이는 진실로 회사(淮泗:회수와 사수)의 사이에 있으며 북은 제노(齊魯)와 함께 국토를 접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어」에 공자가 9이(夷)의 나라에 가 살고 싶다 하여, 이것저것 조회해 알아보고 조사해 연구하니, 그 강역이 평온 확고해, 가히 곰곰이 생각해 볼 만 하다 했다.
동이는 9이와 비교해 실로 범위가 넓은 말로, 9이는 회(淮)․사(泗)의 한 종족일 뿐이다. 이에 여러 가지 이(夷) 대한 옛 기록을 아래와 같이 간략히 열거한다.
“옛날에 요가 희중(희숙)에게 우이(嵎夷)에 가서 살라 했으니 대개 해가 떠오는 곳이다. 하후(夏后)씨 태강(太康)씨가 실덕하니 이(夷)인이 도망쳐 숨기 시작했다. 소강(少康)으로부터 후세에 이미 왕에게 복종해 일족화 하고 마침내 왕문(王門)에 복종하여 노래와 춤을 바치고 걸이 포악해 학정했다. 모든 이(夷)가 내침했다. 은탕이 혁명하여 이를 공벌하고 바로잡았다. 중정(仲丁)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도둑의 무리를 지었다. 이 때로부터 300여 년간 혹은 복종하고 혹은 배반했다. 무을(武乙)이 노쇠하여 창망(멍청)해졌다. 동이에 침윤됨이 점점 심해져 마침내 경계를 회대(淮垈)로 나누어 옮겨 점점 중토(中土)에 거했다.(후한서 권 115)
이에 동이의 기원으로부터 회수(淮水) 및 태산의 사이에 나누어 살기까지의 구분을 총체적으로 서술한다.
1)우이(隅夷)-옛 청주(靑州), 혹 이르기를 곧 후일의 등주(登州)에 있었다.
“희중에게 따로 명하기를 우이(隅夷)에 가서 살라하니 왈 양곡(暘谷)이다”(서전 요전) “우이(隅夷)는 곧 <우공(禹貢)>편에 우이(隅夷)가 이미 다스리고 있던 곳이다....가로대 양곡은 일출의 뜻을 취한 것이다....대개 관리는 국도(國都)에 있으며 기상 측후소는 우이의 동쪽 역외 땅에 두었다”(동상(同上) 채주(蔡註)) “해대(海岱)는 청주(靑州)가 되니 우이가 이미 다스리고 있던 곳이다”(서전 우공) “청주의 경계는 동북으로 바다에 이르러 서북으로 대(垈)에 도달하니, 대(垈)는 태산(泰山)이다. 설(薛)씨가 말하기를 우이는 지금의 등주(登州) 땅이니, 대략 천하를 경영하여 사방을 공략해 이를 영지의 경계로 삼았다.(채주)
2)래이(萊夷)-래이 또한 옛 청주에 있었으니, 후일 래주(萊州) 땅이 되었다. 그 원주민 사람은 본시 제(齊)나라의 토착인이었는데, 새로 온 제나라 사람과 왕위를 다퉜으나 뒤에 갑자기 제가 멸망시킨 바 되었다. 관중(管仲)은 곧 그 종족 출신이라 전해지는 바, 가히 일부분은 이미 (화하에) 동화된 지 오래다. 오직 춘추시대 말에 제(齊)가 오히려 그 사람(래인)을 이용해 노(魯)의 군주를 협박했으니, 이는 반드시 야만이 됨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지나중심 사관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래이는 목축을 했으며, 공물 광주리에는 *산뽕나무 실이로다.(闕篚檿絲)”(우공) “래이는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래산(萊山)의 이(夷)다. 제나라에 래후(萊侯)란 관직이 있으니 래인은 곧 지금의 래주의 땅 출신이다. 목축을 한다는 것은 가히 방목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夷) 인은 목축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산뽕나무는 뽕나무이니 산뽕나무의 실은 질겨서 거문고, 가야금의 현으로 사용된다. 소(蘇) 씨가 말하기를 생각건대 동쪽의 래(萊)에 이 실이 있어서 그림 있는 비단이 되며 그 견고하고 질김이 이상하여 래인은 이를 일러 ‘산누에고치’라 부른다.”(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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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뽕나무 실이로다.(闕篚檿絲)”(우공)
중국의 모든 음악은 동이족으로부터 시작 되었음은 「산해경」에 자세히 전하는 바다.(略) 여불위의 「여씨춘추」의 기록과 「환단고기」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우(禹)가 2세 부루단군으로부터 금간옥첩을 전해 받아 치수사업을 하기 위해 동이족 도산(塗山)씨의 딸을 만나 정략결혼을 하는 와중에 부른 애모의 세레나데가 남방 국풍인 「시경」의 주남과 소남의 기원이 되었다.「사기」<夏본기 색은>에 세본(世本)을 인용해 도산씨녀의 이름이 여와(女媧)라 했으니 신화상의 여와와는 당연히 동명이인이다. 또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우(禹)가 도산(塗山)에 장가를 갔는데 도산은 지금의 강주(江州) 도산(塗山)이라 하고 강주는 곧 파현(巴縣)이라 했으니 양자강(長江) 동하, 무한(武漢) 북상의 중국대륙 중원의 하남지구에 속하는 동이족 근거지다) 동서에 말하기를 주양(朱襄: 4대 주우양 환인과 동명이인지 불확실)이 천하를 다스릴 때 사달(士達)을 시켜 비파를 처음 만들었다 하며, 전욱이 8방의 바람소리를 모방해 승운(承雲)이란 노래를 지었고, 제곡은 함흑을 명해 당가(唐歌)를 지었으며(전욱, 제곡이 동이족임은 앞서 밝혔다), 요 때는 대장(大章)을 짓고 동이족인 순의 아비 고수(瞽叟)는 기존의 5줄 비파를 15줄 비파로 만들었다. 순 때는 앙연(仰延)이 고수가 만든 15줄 비파를 개량해 23줄 비파로 만들게 했다 하였다. 무릇 주문왕이 동이의 근거지인 기(岐) 땅을 근거지로 은을 쳐 주를 세웠지만(문왕의 모는 동이족) 13세 흘달 단군이 고래로 동이족의 근거지였던 빈, 기 지방을 쳐 빼앗아 하 나라와 대립한 것이나 22세 색불루 단군이 동이족의 근거지였던 은의 수도를 쳐부순 것은 마치 고수와 앙연이 비파줄로 사용한 산뽕나무가 모두 동이 제 족 및 그 땅인 빈, 기, 회(淮),대(垈)와 연관된 것이듯 모두 이와 같은 동이 제 족의 대국적인 역사와 관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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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무왕이 이미 상(商)나라를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어 사상부(師尙父:사는 스승을 말함이 아니고 그냥 존칭을 나타내는 접두어)를 제나라 영구(營丘)에 봉했다. 래후(래이의 제후)가 정벌하러 와서 영구를 놓고 싸웠다. 영구 주변이 래(萊)인데, 래(萊)인은 이(夷)이다. 주(紂)의 난에 모였으나 주(周) 초에 평정하여 멀리 있는 래인들이 미처 능히 모이지 못했으니 이에 써 태공(太公:여상)과 더불어 나라를 다투었다.”(「사기」 권 32) “12월에 제(齊)의 군주(侯)가 래이를 멸했다.”(「춘추」 양(襄) 6년)
“전 2년 제(齊) 군주(侯)가 래(萊)를 멸하니, 래인이 마소 100필로 제(齊)의 시인(寺人:환관) 숙사위(宿沙衛)에게 뇌물을 주고 돌아왔다. 그 해 가을 제(齊)가 래의 젊은이를 불러와 노(魯)를 장사지내는 때에 종부회(대종(大宗)의 맏며느리 회)를 제로 보내도록 했으나 래의 젊은이가 이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연약(宴弱)성 동양(東陽)으로 하여금 래이에 다가가게 하니, 그 경계에 이르러 래(萊)가 성첩(성가퀴)을 지었다. 래성을 포위해 성첩에 가까워져, 마침내 래에 진입했다. 이 래의 공공(共公)이 숭(崇)으로 도망가, 안약(晏弱)이 당(棠:둑)을 포위해 이를 멸했다. 래는 예(郳:산동성 등현 동쪽)로 옮겨갔다. 진무우(陳無宇)가 래이의 종묘 제기를 양궁(襄宮)에 바쳤으니, 고후(高厚), 최저(崔杼)가 그 동방을 평정했다.(定其田:전은 동방이니 「회남자」에 東方爲田이라 했음:필자)”(모검토(毛檢討) 춘추전(春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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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후(萊侯)는 주나라가 천자국을 자칭했을 때 래이를 제후에 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사료를 정밀하게 보면 당시 주나라는 요, 순 당시와 마찬가지로 명실상부한 천자국이 아니었다. 임혜상은 당시 천자국을 자칭하는 나라가 많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거니와 실제로 래이 자체도 천자국을 자칭하고 있어 당시 주나라보다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제후를 두고 있었다. 당시 수많은 동이 제 족이 천자국을 자칭하고 각자 제후국을 두고 있었다. 앞으로 상고사학자들이 정립해야 할 과제다. 특히 중화족의 경우 래이를 제후국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동이족 회이(淮夷)가 관숙과 채숙의 편에서 주 왕실과 싸웠는데 많은 제후를 거느리고 천자국을 자칭하던 래이가 그 밑에서 제후국을 하고 있었을리 만무하다. 당시 주는 래이국을 공식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제후로 봉한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너희를 아무개 제후라 한다고 역사적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러한 것이 사마천으로부터 서로 베끼고 베끼며 전해진 역사왜곡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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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 정공(定公)이 제(齊)의 후(侯:군주)를 협곡(夾谷)으로 밝혀진 축기(祝其)에 회맹을 가지니 공구(공자)가 정공을 수행해 따랐다. 이미(犁彌)가 제(齊)나라 군주에게 말하기를 ‘공구(孔丘)는 비록 예를 알고 있지만 용기가 없으니 만일 래인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해 노(魯)의 군주를 겁탈하면 반드시 뜻을 얻을 것이다’ 제의 군주가 이를 따랐다. 공구가 정공을 따라 물러나며 말하기를 ‘병사라는 것, 양군을 마땅히 합하고, 예이(裔夷:예는 변경or오랑캐)의 포로를 병란에 쓰는 것은 제(齊)의 군주가 제후에게 명해야 할 까닭이 아니다. 오랑캐는 하(夏)를 도모해서는 안되고 이(夷)는 화(華)를 어지럽혀서는 안되니, 포로는 회맹에 간여하면 안되고 군사는 마땅히 위협적으로 다가오도록 끌어들여도 안 된다.’”(좌전 정(定)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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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랑캐는 하(夏)를 도모해서는 안되고...
공자가 화하(華夏)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말로 항상 이상향으로 그리워 했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멀리할 수 밖에 없었던 동이(東夷)에 대한 의견피력으로 유명한 말이 바로 오랑캐는 감히 하를 도모하지 못하며 이는 감히 화를 어지럽히지 못한다는『예불모하(裔不謀夏) 이불난화(夷不亂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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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이(淮夷)-옛 서주(徐州)의 땅에 있었으니 회수(淮水) 근처이다. 유사한 사람이 심히 많아 나뉘어 9이(夷)가 되었다. 주나라 초기에 제노(齊魯)와 더불어 자주 전쟁을 치뤘으며, 또 관채(管蔡:3감의 난을 일으킨 주공의 동생 관숙과 채숙)를 도와 주(周)에 항쟁했다. 주 선(宣)왕, 여(厲)왕, 제 환공, 노 희(僖)공 모두 한결같이 회이(淮夷)에서 변고가 있었다. 곧 춘추 말에 이르러 오히려 화하 계에 완전 동화되지 않았다.
우공(禹貢)에 “해대(海垈) 및 회(淮)는 오직 서주(徐州)이다....(「시경」노송(魯頌)에 “회이내동(淮夷來同:회이도 노나라로 축하사절로 오고), 회이만맥(淮夷蠻貊) 급피남이(及彼南夷)라 하여 모든 동이 제족이 굽히지 않는 나라가 없다고 자존하는 시를 적고 있다.)
회이(淮夷)는 진주(蠙珠) 및 물고기(魚)...”라 했고, <채주>에 “회이는 회(淮)의 이(夷)이니, 빈방(蠙蚌:진주조개와 방합(민물조개))의 별명이다. 주어(珠魚:진주조개)는 회이에서 산출되는데, 각기 생산되는 곳이 따로 있어 다른 곳에서는 나지 않으므로, 그 생산지를 자세히 밝혀 공물로 바치게 했다” 「상서(尙書)」 <금고문주소(今古文注疏)>에 “정강성(鄭康成)이 말하기를 빈주(蠙珠)는 구슬 이름이다. 회이(淮夷)는 회수 상류에 사는 이(夷)의 백성이니 빈주와 맛난 고기를 바친다.” 「서(書) *비서(費誓)」에 “한공씨(漢孔氏)가 말하기를 서융(徐戎), 회이(淮夷)는 모두 구노(寇魯:도적 구를 붙인 것은 노의 뿌리가 본디 동이족 국가이므로 지나족 특유의 앙금이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에서 비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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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전(서경)」 <비서(費誓)>는 노나라 제후 백금이 동이족인 서이(徐夷), 회이(淮夷)족을 정벌하러 가면서 비(費)라는 곳에서 연설한 내용으로 서이는 서융(徐戎)으로 비천하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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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단군조선은 11개의 제후국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중 특히 구려국, 남국, 부여국은 서남지방의 강국이었는데 남(藍)국의 제후 남후는 특히 엄(奄)국과 서(徐)국을 세웠으며 엄(奄)국은 후일 무왕을 도와 주(周) 왕실을 세운 주공단의 아들 백금의 아들 노(魯)나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존주(尊周) 중화주의의 원형을 정립한 노나라 후예 공자는 단군 조선의 제후국 남국이 세운 엄국의 후예인 동이족의 후예였던 것이다. 공자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보는가.주공단의 아들 백금(伯禽:주공이 노의 군주로 처음 임명)이 방백(方伯)이 되어 제후들의 군대의 원수가 되어 정복했다. 소(蘇)씨가 말하기를 회이가 반기를 든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백금이 나라에 종사해 또 서융(徐戎)을 협박해 함께 일어났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옛날 회이, 서융이 함께 부흥했다. 옛날이라는 것은 오히려 이미 지난 일이다.”(「채주」)
「사기」 권 32에 “더불어 주(周) 성왕이 어린 시절, 관숙과 채숙이 난을 지어 회이(淮夷)가 주를 배반해 도망쳐 숨으니, 이에 소강공(召康公)을 시켜 명하니 태공(太公)이 말하기를 ‘드디어 이를 정벌해 얻었다’고 했다. 제(齊)가 이를 정벌하여 얻은 것으로 말미암아 대국(大國)이 되었다” 「후한서」 <권 115>에 “관숙과 채숙이 주(周)에 배반하니 이에 이적(夷狄)을 유인해 불러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 마침내 동이를 평정했다.”
그 주(註)에 “상서(서경)에 무왕이 붕하자 3감(監:관숙, 채숙, 무경녹보의 난) 및 회이(淮夷)가 배반하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 상서(서경)의 <대고(大誥)>편을 지었다. 또 일러 말하기를, 성왕이 이미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여 회이를 멸했다.” 「후한서」<권 115>에 “여왕(厲王)이 무도하여 회이가 쳐들어가 약탈했다. 왕이 괵중(虢仲)에게 명하여 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선왕(宣王)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정벌하도록 명하여 이를 평정했다.”
「시전」<강한(江漢)>에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넘실대고 군사들의 끝없는 행렬 도도하도다. 잠시라도 편히 쉴 틈이 없으니 회이(淮夷)를 찾아 싸우러 가노라.” 동상(同上) 주주(朱註)에 선(宣)왕이 소목공(召穆公)에게 명해 회남(淮南)의 이(夷)를 평정하게 하니 시인이 이를 미화했다...언행자는 모두 서(徐)를 감히 편안히 못하므로 생각건대 회이(淮夷)는 내가 와서 이를 취해 정벌한 것 뿐이다.”
「국어」<제어(齊語)>에 “환공(桓公)....동남은 음란한 자가 많아 래(萊), 거(莒), 서이(徐夷), 오(吳), 월(越) 등과 한 번 싸워 정복해 31국을 인도했다.” 「시전」<비궁(閟宮)>에 “...바닷가 변방까지 이르렀으니, 회이도 한가지로 와서 따르고 복종하지 않는 이 없으니, 노(魯)나라 임금의 공이로다. 부(鳧)산과 역(繹)산도 차지하고, 마침내 머나먼 서(徐)국 땅까지 차지하여, 바다변방까지 이르렀으니 회이(淮夷), 만맥(蠻貊) 및 남이(南夷) 모두가 따르고 복종하지 않는 이 없도다. 감히 명을 따르지 않는 족들이 없으니 노(魯)나라 임금을 모두 따르도다.”
“밝고도 밝으니 노(魯)나라 임금이시며, 지극히 밝으시니 그 덕이로다. 이미 반궁(泮宮:주대의 국학으로 제후의 향사(饗射)를 익히게 하던 곳)을 지었으니, 회이(淮夷)가 복종하는 바이다....선비가 많고도 성하니, 능히 덕 있는 마음이 실로 넓구나. 정벌함이 굳세고 굳세니, 저 동남의 서융(徐戎).....이미 회이(淮夷)를 이겨 공숙(孔淑)이 반역하지 않으니, 늘 머리 숙여 절함이 너 또한 같구나.
마침내 회이(淮夷)를 얻었으니...저 동경해 마지않던 회이(淮夷)가 보배를 가지고 헌상하러 오네.:막강한 회이가 지나에게 흡수, 동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반대로 웅비했던 동이족의 뿌리깊은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시전」에 <유필(有駜:살찌고 억센 말)>, <비궁(閟宮:비는 神이니 신궁이다) 2 수의 시가 있어 주공의 자손이자 장(莊)공의 아들인 노(魯)나라 희(僖)공을 노래하고 있다.
「춘추」 소(昭) 4년에 “여름에 초(楚)의 자작, 채(蔡)의 임금, 진(陣)의 임금, 정(鄭)의 백(伯), 허(許)의 남작, 서(徐)의 자작, 슬(膝)의 자작, 돈(頓)의 자작, 호(胡)의 자작, 심(沈)의 자작, 소주자(小邾子), 송(宋)의 세자가 회이(淮夷)를 도와 신(申)에서 회맹을 갖다.” “추 7월에 초(楚)의 자작, 채(蔡)의 임금, 진(陣)의 임금, 허(許)의 남작, 돈(頓)의 자작, 호(胡)의 자작, 심(沈)의 자작, 회이(淮夷)가 오(吳)나라를 정벌했다.”
「후한서 권 115」에 “더불어 유왕(幽王)이 음란하여, 4이(夷)가 번갈아 침공했다. 제환(齊桓)에 이르러 패(覇)를 갖추어 다스려, 물리쳐 불화했다. 더불어 초(楚)나라 영(靈)이 신(申)에서 모임을 가지니, 또한 회맹에 참여하러 왔다. 후에 월(越)이 랑사(琅邪)로 천도하므로 함께 더불어 정벌전을 벌이니 마침내 제 하(諸夏)를 능멸하고 포악하게 하므로 침략해 멸하고 작은 변방으로 만들었다. 진(秦)이 6국을 병탄하여 그 회사(淮泗)의 이(夷) 모두를 흩어 일반백성의 민호(民戶)로 만들었다.
4)서융(徐戎)-또 칭하기를 서이(徐夷)라 한다. 회이(淮夷)와 더불어 서주(徐州)에 있었다. 용맹하고 사나와서 융(戎)이라 불렀다. 주(周) 나라 초기에 회이(淮夷)와 연합해 노(魯)나라를 침략했다.(위에 거론한 <비서(費誓)>를 보라) 주(周) 나라 강(康) 왕 때에 그 임금을 왕이라 칭했다. 목(穆) 왕 때에 초(楚) 나라에 멸망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나 그 종족은 종전과 같이 거듭하여 있었다. 주(周) 선(宣) 왕이 다시 이를 대거 정벌하니 후에 마침내 평안히 정복되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러 오(吳) 나라에 정복되었다. 양임공(梁任公)의 「중국역사 상민족의 연구」에 말하기를 “서융(徐戎)은 회이(淮夷), 래이(萊夷)보다 강했지만 쇠망 또한 비교적 신속히 이루어졌다. 거의 제 하(諸夏)에 바싹 붙어 근접해 있으니, 멀리 변방에 있는 나라가 능히 구차하게 연명함만도 못했다.”
「후한서 115」에 “후에 서이(徐夷)는 참람한 명호(제후를 거느린 천자)를 칭하고 9이(夷)를 거느려 종주(宗周)를 정벌해, 서쪽으로는 하상(河上)에 이르렀다. 목(穆) 왕이 그 치열한 기세를 거역하기 두려워하여 동방의 여러 왕들에게 자치령을 분담해 서언왕(徐偃王)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토록 했다.(* 독자들이 여기서 알고 넘어갈 사실이 하나 있다. 단군조선은 속진국, 개마국, 부여국, 진번국, 예국, 옥저국, 졸본국, 비류국, 구려국 남(藍)국, 청구국 등 11개의 제후국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중 특히 구려국, 남국, 부여국은 서남지방의 강국이었는데 남(藍)국의 제후 남후는 특히 엄(奄)국과 서(徐)국을 세웠는 바, 엄(奄)국은 후일 무왕을 도와 주(周) 왕실을 세운 주공단의 아들 백금의 아들 노(魯)나라가 되었고, 서(徐)국은 동이 9부의 자치부락국가의 총 맹주가 되어 언(偃) 왕때에는 주(周)나라 목(穆) 왕을 패배시켜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는 등 200여 년의 사직을 지속시킨 천자국이었다.
목왕이 자신이 거역하기 힘든 상대인 서이(徐夷)를 서언왕에게 분담토록 했다는 이 기록은 다음의 36국 조공사실에서 보듯이 명백한 날조이다. 그러나 결국 화하에게 망했기에 너무나 엄청난 강국을 쓰러뜨린 것을 기념해 시경의 <대아(大雅)편:임금의 조례 때 이를 멸망시킨 것을 축하하는 서사시 음악>에 넣어 노래로 들려주는 음악으로 사용했다. 기록의 실상을 본다는 점에서 계속 살펴본다:필자)
언(偃)왕이 황지(潢池) 동쪽 지방 5백 리에 처해 인의(仁義)를 행하니 육지에서 와서 조회를 하는 자 36국이었다.
뒤에 목(穆)왕이 천리마(驥), 녹이(騄駬:주 목왕의 8준마의 하나)를 얻었으므로 조보(造父)로 하여금 길들이게 해 초(楚)에게 고해 서(徐)를 정벌하도록 명령하니 하루만에 도착했다. 이에 초(楚) 나라 문(文)왕이 병사를 크게 동원해 이를 멸했다. 언(偃) 왕이 인(仁)할 뿐 권(權)이 없는데도 참지 못하여 그 사람과 싸웠으므로 패하게 되었다. 이에 북쪽 팽(彭:훗날 항우의 거처)성 무원현(武原縣) 동 쪽 산 아래로 도망가니 그를 따르는 백성의 수가 수 만 명이라 이로 인하여 그 산의 이름이 서산(徐山)이 되었다.”
「시전」<강한(江漢)>에 “「춘추」 희(僖) 3 년에 “서(徐)나라 사람이 서(舒)나라를 점령했다.” 「춘추」 희(僖) 15년 “초(楚)인이 서(徐)를 정벌했다.” “공손오(公孫敖)가 군대를 거느리고 제후의 대부와 함께 서(徐)를 구했다.” “초(楚) 나라 사람들이 서(徐)나라를 누림(婁林)에서 쳐부쉈다.” 「춘추」 희(僖) 16년 “여름에 제(齊)나라가 여(厲)나라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단지 서(徐)나라를 구하고 돌아왔다.” 「춘추」 희(僖) 17년 “제(齊)나라 사람이 서(徐)나라 사람과 (누림(婁林)에서의 복수전으로) 영(英) 씨를 정벌했다.” 「춘추」문(文) 7년 “서(徐)나라가 거(莒)나라를 정벌했다.” 「춘추」 소(昭) 30년 “겨울 12월 오(吳)나라가 서(徐)나라를 멸했다. 서자(徐子) 장우(章羽)가 초(楚)나라로 도망갔다.”
5)도이(島夷)-또 조이(鳥夷)를 만들었으니, 경(經) 주(注)에 새를 잘 잡는 자가 이들이 되었다고 이른 말이 있어, 기주(冀州), 양주(揚州)는 모두 이들이 사는 곳이다. 우공(禹貢)에 “기주(冀州)......조이피복(鳥夷皮服)”이라 하였고, 「채주(蔡註)」에 “해곡(海曲)을 섬(島)이라 하고, 해도(海島)에는 이(夷)가 사니, 가죽옷으로 공물을 바친다.”했다. 「상서」<금고문 주소(注疏)>에 “사가 사마천이 도(島)를 조(鳥:새 조, 땅이름 작, 섬 도=해곡(海曲)이라는 뜻이 있다.)로 바꾸었으니, 마융(馬融)이 가로대 조이(鳥夷)국 정(鄭)씨가 말하기를 조이(鳥夷)는 타고날 때부터 새와 짐승을 먹는 동북의 백성이라 했다.”
「우공(禹貢)」에 “양주(揚州).....도이(島夷)는 풀로 짠 옷을 입으니, 공물바구니인 대나무 광주리에는 무늬비단(織貝), 공물 보따리에는 귤, 유자, 가는 삼베”라 했고, 「채주(蔡註)」에 “도이(島夷)는 동 남해의 섬에 훼초(卉草)로 사는 이(夷)이다....치패(織貝:무늬비단), 금(錦:비단)이 뛰어난데, 무늬비단이 돈(貝文)이 되었으니 시(詩)에 이른 패금(貝錦)이 이것이다.
지금도 남이(南夷)의 목면(木棉:면화)은 만듦새가 정밀하고 좋으니 또한 이를 일러 길패(吉貝)라 한다. 해도(海島)의 이(夷)는 초목을 입고 조공을 바치니, 만듦새가 정밀한 무늬비단(織貝)을 광주리에 넣어온다.”(이로 보면 중국에서 문익점이 면화를 들여왔다는 사실은 그것이 진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본디 상고시대 우리 동이족의 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겠고, 지금도 비단으로 유명한 상해, 항주 소주 지방의 비단이 모두 동이족의 근거지였던 이들 지방에서 비롯한 것임을 가히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대만 인이 풀 옷을 입었으므로 이들 이족을 대만 번족으로 말하는 일인 학자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비단, 모시문화가 대만까지 광역적으로 퍼진 것을 증명하는 것 일 뿐이다.
임 혜상은 일본인 주장의 이 학설을 자신이 뒷받침해 놓고도 황당한 학설이라 하고 동이족 임을 은근히 내비쳤다. 이는 거야발 환웅때 사마르칸드를 지나 실크로드의 원형을 따라 서부개척해 나아간 소호금천씨 계열의 서진이래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까지 수출한 실크문화의 주역 역시 상투를 튼 상고의 동이족 임을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필자)
다음은 모두 「상서」<금고문 주소(注疏)>에 나오는 것이다.
-“주(注)에 정 강성(鄭康成)이 가로대 이 주(州) 아래는 습하여 풀로 만든 옷을 입는다. 그 옷을 바치는 자는 천자의 관공(官貢)을 제 때에 대어 일변해 조(鳥:관작)로 바뀌었다.” “소(疏)에 도이(島夷)는 「한지(漢志)」에 조이(鳥夷)로 바뀌었다. 안 사고(顔師古) 주(注)에 말하기를 동남지방의 이(夷)는 새를 잘 잡는 자라 하였다. 「후한서」 <도상전(度尙傳)>에 말하기를 깊은 산 속 멀리 늪이 있어 상투를 틀고(상투를 트는 건 동이 민족밖에 없으니 세월의 침식과 함께 이질화되었을 것이다.:필자) 조어(鳥語:못 알아 듣는 외국어를 조어라 칭하고 지나인 특유의 비아냥으로 때까치 같다 하여 일명 격설(鴃舌)이라고도 했다:필자)를 하는 사람이 현(縣) 아래 위치해 있다.
주(注)에 이르기를 조어(鳥語)는 말소리가 새와 유사한 것을 이른다고 했다. 서(書)에 이르기를 조이(鳥夷)는 초목으로 옷을 해 입었는데 당(唐) 때에 오히려 조이(鳥夷)로 변했다고 한다. 정(鄭)이 주석한 서(書) 소(疏)를 보면 아래 쪽 습지에 풀로 옷을 해 입는 자가 있다고 했다. 「설문(說文)」에 초사(草衰:풀도롱이)는 비옷이라 했고 진(秦)은 이를 일러 초(草)라 했다. 월(越)나라 말로 이르기로는 비유컨대 사립(衰笠:풀로 만든 도롱이와 삿갓)과 같은데 우기가 닥치면 반드시 이를 구해 입는다고 말한다. 천자의 관리들에게 그 옷을 제 때에 바쳤다.
교특생(郊特牲)이 말하기를 누런 옷 누런 관을 쓰고 제(祭)를 지내니 밭일을 쉬는 농부라 하였다.(전통적인 우리 동이민족의 모습이다) 들판의 농부는 황관을 쓰니 황관은 풀옷이다. ‘대라(大羅)’씨는 천자의 늪에 있는 조수(鳥獸)를 이르는 말이니, 제후들로 하여금 이들을 불러모아 바치게 했다. 풀옷(草笠)은 지극히 소중해 교외의 들판에서 입는 옷이다. 이는 관용(官用)으로 공급되는 훼복(卉服:풀옷)이다. <이아(爾雅)>편에 초(草)를 해석해 말하기를 훼초(卉草)라 했다.” “주(注)에 정 강성(鄭康成)이 말하기를 무늬비단(貝錦)이 훌륭하다. 시(詩)에 말하기를 정성이 패금이다. 무릇 무늬비단은 먼저 그 비단 실을 물들이니 이것이 곧 성(成=誠)이다. 「예기」에 말하기를 선비는 무늬비단을 입지 않는다 했다.”
“소(疏)는 정(鄭)이 주(注)한 것이니 「사기집해」 및 「시(詩)」 소(疏)를 보면, 생각하건대 무늬비단(貝錦)이라는 것은 진실로 대 광주리의 공물이 되고, 또 문채(색무늬)를 잇대어 넣은 비단과 더불어 물 속의 조가비(돈)가 아님을 안다. 「시(詩)」 <항백전(巷伯傳)>에 이르기를 패금(貝錦)은 문채(색무늬)를 넣은 금(錦:비단)이다. 전(箋)이 이르기를 아름다운 문채를 넣은 비단의 색깔들은 마치 남아도는 샘(泉:돈) , 남아도는 개미 알 같이 많은 패문(貝文)과 같으니 이르기를 선비는 아름다운 화려한 옷인 비단 무늬 옷을 입지 않는다.”
일본의 미기수진(尾崎秀眞)이 지은 「대만고대사강」은 도이(島夷)가 풀 옷을 입은 것은 곧 대만의 번(番)족으로 대개 풀 옷과 비단 옷은 대만 번(番)족의 그것과 지극히 비슷하다고 했다. 임혜상의 「대만번족의 원시문화」에 “번족의 옷은 모두 마(麻)직류에 속하니, 풀 옷은 어떤 경우 다시 말해 이를 가리킨다. 치패(織貝) 두 글자는 고주(古註)가 많아 불명료하나, 혹 다시 말하면 비단 옷이 된다. 그러나 패(貝) 자는 마침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으니, 이제 번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옛날부터 조개껍질로 작고 납작한 둥근 구슬모양을 제조해 만드니 곧 화폐가 되었다. 아울러 마(麻)직류의 옷을 꿰매어 상의로 걸치는 것으로 꾸며 입는 성장(盛粧)으로 삼았다.”
귤과 유자 또한 지금도 오직 복건, 대만산이 가장 좋다. 또 대만의 번(番)인은 또한 다시 말하면 도이(島夷)다. 그러나 이 설은 심히 기괴망측하다. 「우공(禹貢)」연후에 과연 하우(夏虞)에서 분명히 드러났으니 대만의 일을 능히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지 않은 즉, 혹 절강(浙江:묘요, 월의 근거지로 남송의 수도인 임안 곧 지금의 항주가 있는 절강성) 해도(海島)에 옛날에 또한 도이(島夷)가 있어 그 사람들 역시 치패(織貝:비단옷)를 입었다.(이 대목이 동이족인 도이족에 대한 임혜상의 최종결론이다:필자) 요컨대, 치패(織貝) 2 글자의 해석 고주(古註)는 진실로 불명료하며, 대만의 패주의(貝珠衣)는 지극히 서로 비슷하다. 이 또한 일대 기이한 일이다.
6)개이(介夷)-제(濟)에게 멸망했다.
7)근모이(根牟夷)-노(魯)나라에게 멸망했다. 이상의 두 가지 이(夷)는 모두 경(經)에서 찿아볼 수 없다.(고동고(顧棟高)의 「춘추대사표(春秋大事表)」)
본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연작 시리즈 1권 서두에서 필자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한 화두를 언급한 적이 있다. 본서 기저에는 새로운 21세기 우주관과 세계관, 신관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므로 기존의 낡아빠진 예수, 석가, 공자 시절의 수 천년 전 낡은 우주관과 신관으로는 본서의 내용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필자가 한민족 1만년 대륙사의 실체를 말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이 한민족 신교정신의 실체와 민족고유의 대경 대법한 우주관, 신관, 구원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천하일체의 만물이 개벽이 있어 존재하고 진화를 통해 발전하며 순환을 통해 세대를 잇는다(則凡天下一切物 有若開闢而存 有若進化而存 有若循環而有)“는 개벽이존(開闢而存), 진화이존(進化而存), 순환이유(循環而有)의 우주 1년 12만 9천 6 백 년의 원회운세(元會運世) 우주관과 신관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동학의 후천 5 만년 무극대도 한반도 출현 복음과 후천개벽 예고는 물론 증산도의 아이덴티티(正體:) 및 21세기를 향해 토해내고 있는 증산도 복음의 에쎈스와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는 다음의 뉴 에이지 메시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안원전의 21세기 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