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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金躍淵) (1869 ~ 1942)】 "대한독립선언서와 3.13독립포고문 발표에 참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근거지가 되어 주었던 북간도 명동촌의 규암 김약연 목사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시인 윤동주의 외삼촌이자 스승이라고 말하면 더 이해가 빠를 것도 같다. 흔히들 김약연을 언급할 때면 ‘간도의 대통령’이라고 별칭한다.
‘명동촌’, 독립을 꿈꾸는 자들의 터
1868년 9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김약연은 어린 시절부터 남종구 등 유학자들에게서 사사하고 유교 경전에 능통할 정도로 촉망받는 재원이었다. 구한말 이미 국운이 기울어버린 조선을 보며 북방의 주민들은 주인 없는 땅, 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32세 나이에 김약연은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가문 등을 포함해 142명을 이끌고 북간도 화룡현 장재촌으로 이주했다. 그 땅에 동쪽을 밝힌다는 뜻의 ‘명동촌’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김약연은 수백 정보의 땅을 사들이고 조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일구었다. 땅 중 일부를 가장 먼저 학전(學田) 명목으로 남겨두었고, 1901년 자신의 호를 딴 ‘규암재’라는 서당을 세워 한학과 함께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가까운 용정에서 이상설이 1906년 ‘서전서숙’을 설립했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 때문에 학교 문을 닫게 되자 교사와 학생들을 수용해 ‘명동서숙’을 설립했다. ‘명동서숙’은 훗날 수많은 우국지사를 길러낸 ‘명동학교’가 된다.
윤동주, 나운규, 문익환 등이 명동학교 출신들이다. 1925년 폐교되기까지 명동학교는 1,200여명 졸업생을 배출했고, 그 중 상당수는 독립운동가가 됐다. 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명동촌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은 가톨릭 사제가 협조를 거부하자 김약연에게 의탁했고 명동촌 뒷산에서 권총 사격연습을 하기도 했다. 명동촌은 조선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의 꿈터와 같은 공간이었다.
1869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부친 김석조(金) 錫祚와 모친 강씨의 4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단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68년 10월 24일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용구(龍九)이고 호는 규암(圭巖)이다. 1875년 7세부터 10여 년간 종성 출신의 유학자 남종구·오삼열·주봉의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맹자(孟子)』를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여서 ‘맹판(孟板)’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안연(安淵)과의 슬하에 정근·정훈·정필·신복 등 3남 1녀를 두었다.
1899년 2월 18일 함북 종성에서 김약연의 전주 김씨 가문 31명, 문병규의 남평 문씨 가문 40명, 김약연의 스승 남종구(南宗九)의 가문 7명, 회령 출신 김하규(金河奎)의 김해 김씨 가문 63명 등 141명이 두만강을 건너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불구라재로 집단 이주하였다. 사전에 중국 국적으로 입적한 이들을 앞세워 불구라재의 청국인 토호 동한(董閑) 3형제 소유의 땅과 임야를 사들였다. 1900년에는 파평 윤씨 윤하현(尹夏鉉, 윤동주의 조부) 가문의 18명이 개산툰 자동(紫洞)으로부터 불구라재로 이주 합류하였다. 이들 네 가문은 장재·용암·대룡·영암 등 4개 촌을 개척하고 ‘명동촌’(明東村)이라 이름했다. 1901년 4월 명동촌의 한인들은 후세 교육을 위해 5만 평의 토지를 매입해 이를 기반으로 ‘규암재(圭巖齋)’라는 서당을 세웠고, 대룡동에는 김하규가 ‘소암재’를, 중영촌에는 남도천이 ‘오룡재’를 세웠다.
1907년 김영학·강백규·구춘선·유찬희·마진 등과 간도교민회를 조직하여 한인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교육계몽, 민족정신 고취에 힘쓰는 한편, 중국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소유권 분쟁 문제를 해결하는 등 한인의 권익 옹호에 주력하면서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06년 12월 설립자 교장 이상설(李相卨)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된 사실이 알려지며 서전서숙(瑞甸書塾)은 폐쇄되었고, 일부 교원과 학생들은 명동촌으로 옮겨왔다. 이에 서전서숙을 계승할 신교육 기관으로 불구라재의 여러 서숙을 통합해 1908년 4월 27일 장재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고 초대 숙장에 취임하였다. ‘명동’은 ‘동국(한국)을 밝힐 인재를 기른다’는 뜻으로, 직접 지었다.
1908년 신민회 회원으로 북간도교육단을 이끌고 룽징촌(龍井村)으로 이주해 온 정재면(鄭載冕)이 명동촌을 방문하였다. 김약연은 정재면을 명동서숙 교사로 초빙하였고, 정재면은 성경을 가르치고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예배를 보게 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하였다. 명동촌은 신문화를 받아들이고 기독교교육을 하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1909년 4월에는 명동학교(명동야소교학교)로 개칭하였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0년 3월 중학부를 증설하고 황의돈(黃義敦)·장지영(張志暎)·박태환(朴兌煥)·김철(金喆) 등을 초빙해 민족교육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1911년 함북 성진의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이 파견한 북간도 선교단 일원으로 명동촌을 방문한 이동휘가 ‘여성이 깨어야 나라가 독립한다’라며 여성교육을 권유해, 그해 3월 명동여학교가 병설되었다. 북간도는 물론 국내 및 만주 각처와 노령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애국애족의 민족교육을 통해 북간도 최고의 민족학교로 성장했으며, 명동 지역은 재만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당시 작문 시간에 ‘애국’, ‘독립’이란 낱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1909년 9월 청·일 간에 ‘간도협약’이 체결되고 일제의 간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1910년 3월 간민교육회가 설립되었고, 이때 간사로 임명되어 민족의식 고취와 경제력 향상 및 항일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연성자치제(聯省自治制)’와 민주공화제 실시라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자 간도 지역의 한인들도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민교육회는 1913년 4월 간민회(墾民會)로 개편하고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 이주 한인의 자치기관을 자임하였다. 국자가(局子街)에 본부를 두고 옌지(延吉)·허룽(和龍)·왕칭현(汪淸縣) 등지에 분회를 설치해 호구를 조사하고 인두세를 징수하고 교육계몽사업을 전개하는 등 북간도 한인 사회의 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중국 관청 또한 일체의 한인 관련 업무를 간민회를 통해 집행하였다.
그러던 중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를 위해 1914년 3월 지방연성자치기관 철폐 명령이 하달되면서 간민회 총회도 해체되었다.
이후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북간도 지역에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창과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졌다. 이듬해 2월 8일 재일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독립을 선언한 소식도 북간도 지역 한인들을 고무시켰다. 이어서 독립운동 지도자 39인과 함께 연서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만주를 비롯해 국내와 러시아, 미주 등지로 전파되었다.
같은 해 2월 정재면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열리는 한족대표자회의에 참석할 북간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3월 초까지 니콜리스크에서 열린 회의의 결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성립시켰고, 본 회의에서 “온갖 협박과 공갈적인 수법을 동원하여 한국인은 일본에 합방을 원한다는 의사를 파리강화회의에 제공할 계략을 꾸미고 있다”라고 폭로하고 대비책 강구를 촉구하였다. 한편 러시아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명의로 발표된 대한국민의회 선언서를 기초에 참여했으며 파리강화회의 북간도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3월 13일 1만여 명의 한인이 옌지현(延吉縣) 룽징 북쪽 서전대야(西甸大野)에 모여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였고,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 배포된 3·13 독립포고문에는 간도거류 한국 민족 대표 17인이 연서했는데, 이름을 첫 번째로 올렸다.
이후 북간도에서는 통일적인 독립운동 단체 결성을 위한 조선독립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의사부원(議事部員)에 선임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조선독립기성회는 간도대한국민회로 개칭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또 같은 해 2월 말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성립하자, 5월부터 대한국민의회 간도지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의 수령(首領)’으로 지목되었고, 중국 옌지현장에 의해서 1920년 옌지감옥에 투옥되었다. 1922년 출옥하여 1923년 봄 명동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3년 2월 26·27일 양일간 룽징에서 열린 30만 간도 한인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을 주장하는 전간도주민대회에서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이후 간도의 자치권 획득을 위해 중국 당국과 교섭하며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러한 면모를 지켜본 중국인들과 중국 지방행정 당국자들은 간도의 ‘한국대통령(韓國大統領)’으로 부르기도 했다.
1924년 흉년에 재정난이 겹쳐 학교 운영이 어렵게 되면서 명동촌을 떠나 룽징으로 이주했고, 명동학교는 소학교만 남기고 중학교는 폐쇄됨에 따라 일부 중학생들을 은진중학교로 전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후 공산주의운동의 영향으로 반종교 투쟁이 번지자 명동학교 운영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명동소학교는 명맥을 이어갔다.
1928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해 1년간의 연구과정을 이수하고 1929년 2월에 졸업하는 특전을 받았다. 졸업 후 캐나다 장로회의 동만노회(간도노회)에서 목사로 일했고, 이듬해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37년까지 명동교회에서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해 항일 민족의식을 전파하였다. 말년에는 캐나다 선교회가 운영한 룽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기독교 전교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1942년 10월 29일 룽징촌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여, 명동촌의 장재촌 산기슭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69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부친 김석조(金) 錫祚와 모친 강씨의 4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단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68년 10월 24일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용구(龍九)이고 호는 규암(圭巖)이다. 1875년 7세부터 10여 년간 종성 출신의 유학자 남종구·오삼열·주봉의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맹자(孟子)』를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여서 ‘맹판(孟板)’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안연(安淵)과의 슬하에 정근·정훈·정필·신복 등 3남 1녀를 두었다.
1899년 2월 18일 함북 종성에서 김약연의 전주 김씨 가문 31명, 문병규의 남평 문씨 가문 40명, 김약연의 스승 남종구(南宗九)의 가문 7명, 회령 출신 김하규(金河奎)의 김해 김씨 가문 63명 등 141명이 두만강을 건너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불구라재로 집단 이주하였다. 사전에 중국 국적으로 입적한 이들을 앞세워 불구라재의 청국인 토호 동한(董閑) 3형제 소유의 땅과 임야를 사들였다. 1900년에는 파평 윤씨 윤하현(尹夏鉉, 윤동주의 조부) 가문의 18명이 개산툰 자동(紫洞)으로부터 불구라재로 이주 합류하였다. 이들 네 가문은 장재·용암·대룡·영암 등 4개 촌을 개척하고 ‘명동촌’(明東村)이라 이름했다. 1901년 4월 명동촌의 한인들은 후세 교육을 위해 5만 평의 토지를 매입해 이를 기반으로 ‘규암재(圭巖齋)’라는 서당을 세웠고, 대룡동에는 김하규가 ‘소암재’를, 중영촌에는 남도천이 ‘오룡재’를 세웠다.
1907년 김영학·강백규·구춘선·유찬희·마진 등과 간도교민회를 조직하여 한인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교육계몽, 민족정신 고취에 힘쓰는 한편, 중국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소유권 분쟁 문제를 해결하는 등 한인의 권익 옹호에 주력하면서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06년 12월 설립자 교장 이상설(李相卨)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된 사실이 알려지며 서전서숙(瑞甸書塾)은 폐쇄되었고, 일부 교원과 학생들은 명동촌으로 옮겨왔다. 이에 서전서숙을 계승할 신교육 기관으로 불구라재의 여러 서숙을 통합해 1908년 4월 27일 장재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고 초대 숙장에 취임하였다. ‘명동’은 ‘동국(한국)을 밝힐 인재를 기른다’는 뜻으로, 직접 지었다.
1908년 신민회 회원으로 북간도교육단을 이끌고 룽징촌(龍井村)으로 이주해 온 정재면(鄭載冕)이 명동촌을 방문하였다. 김약연은 정재면을 명동서숙 교사로 초빙하였고, 정재면은 성경을 가르치고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예배를 보게 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하였다. 명동촌은 신문화를 받아들이고 기독교교육을 하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1909년 4월에는 명동학교(명동야소교학교)로 개칭하였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0년 3월 중학부를 증설하고 황의돈(黃義敦)·장지영(張志暎)·박태환(朴兌煥)·김철(金喆) 등을 초빙해 민족교육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1911년 함북 성진의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이 파견한 북간도 선교단 일원으로 명동촌을 방문한 이동휘가 ‘여성이 깨어야 나라가 독립한다’라며 여성교육을 권유해, 그해 3월 명동여학교가 병설되었다. 북간도는 물론 국내 및 만주 각처와 노령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애국애족의 민족교육을 통해 북간도 최고의 민족학교로 성장했으며, 명동 지역은 재만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당시 작문 시간에 ‘애국’, ‘독립’이란 낱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1909년 9월 청·일 간에 ‘간도협약’이 체결되고 일제의 간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1910년 3월 간민교육회가 설립되었고, 이때 간사로 임명되어 민족의식 고취와 경제력 향상 및 항일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연성자치제(聯省自治制)’와 민주공화제 실시라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자 간도 지역의 한인들도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민교육회는 1913년 4월 간민회(墾民會)로 개편하고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 이주 한인의 자치기관을 자임하였다. 국자가(局子街)에 본부를 두고 옌지(延吉)·허룽(和龍)·왕칭현(汪淸縣) 등지에 분회를 설치해 호구를 조사하고 인두세를 징수하고 교육계몽사업을 전개하는 등 북간도 한인 사회의 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중국 관청 또한 일체의 한인 관련 업무를 간민회를 통해 집행하였다.
그러던 중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를 위해 1914년 3월 지방연성자치기관 철폐 명령이 하달되면서 간민회 총회도 해체되었다.
이후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북간도 지역에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창과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졌다. 이듬해 2월 8일 재일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독립을 선언한 소식도 북간도 지역 한인들을 고무시켰다. 이어서 독립운동 지도자 39인과 함께 연서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만주를 비롯해 국내와 러시아, 미주 등지로 전파되었다.
같은 해 2월 정재면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열리는 한족대표자회의에 참석할 북간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3월 초까지 니콜리스크에서 열린 회의의 결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성립시켰고, 본 회의에서 “온갖 협박과 공갈적인 수법을 동원하여 한국인은 일본에 합방을 원한다는 의사를 파리강화회의에 제공할 계략을 꾸미고 있다”라고 폭로하고 대비책 강구를 촉구하였다. 한편 러시아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명의로 발표된 대한국민의회 선언서를 기초에 참여했으며 파리강화회의 북간도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3월 13일 1만여 명의 한인이 옌지현(延吉縣) 룽징 북쪽 서전대야(西甸大野)에 모여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였고,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 배포된 3·13 독립포고문에는 간도거류 한국 민족 대표 17인이 연서했는데, 이름을 첫 번째로 올렸다.
이후 북간도에서는 통일적인 독립운동 단체 결성을 위한 조선독립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의사부원(議事部員)에 선임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조선독립기성회는 간도대한국민회로 개칭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또 같은 해 2월 말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성립하자, 5월부터 대한국민의회 간도지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의 수령(首領)’으로 지목되었고, 중국 옌지현장에 의해서 1920년 옌지감옥에 투옥되었다. 1922년 출옥하여 1923년 봄 명동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3년 2월 26·27일 양일간 룽징에서 열린 30만 간도 한인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을 주장하는 전간도주민대회에서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이후 간도의 자치권 획득을 위해 중국 당국과 교섭하며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러한 면모를 지켜본 중국인들과 중국 지방행정 당국자들은 간도의 ‘한국대통령(韓國大統領)’으로 부르기도 했다.
1924년 흉년에 재정난이 겹쳐 학교 운영이 어렵게 되면서 명동촌을 떠나 룽징으로 이주했고, 명동학교는 소학교만 남기고 중학교는 폐쇄됨에 따라 일부 중학생들을 은진중학교로 전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후 공산주의운동의 영향으로 반종교 투쟁이 번지자 명동학교 운영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명동소학교는 명맥을 이어갔다.
1928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해 1년간의 연구과정을 이수하고 1929년 2월에 졸업하는 특전을 받았다. 졸업 후 캐나다 장로회의 동만노회(간도노회)에서 목사로 일했고, 이듬해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37년까지 명동교회에서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해 항일 민족의식을 전파하였다. 말년에는 캐나다 선교회가 운영한 룽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기독교 전교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1942년 10월 29일 룽징촌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여, 명동촌의 장재촌 산기슭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 북간도 명동촌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은 고종 5년,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유가(儒家)의 전통을 따라 8세 때부터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 남종구 등에게 한학을 배웠고, 17세에 이미 『맹자』를 만독(萬讀)한 재원이었다.
1899년 2월 18일 김약연은 32세의 나이로 장인 문병규(문재린 목사의 증조부), 남도천, 김하규(문익환 목사의 모친 김신묵의 조부) 등 6개 가족으로 구성된 142명의 이주민의 지도자가 되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 불굴라재로 이주하였다. 김약연은 조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피해서 간도 땅에서 빈부귀천이 없는 이상촌을 건설하고, 민족의 운명을 바꿀 인재를 교육하려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적인 이주로 인해 후대 사람들은 김약연을 “한국의 모세”라고 불렀다.
1885년 청나라의 봉금령이 폐지되면서 200리 두만강 이북 땅은 조선인 이주자들에 의해 개간되었다. 한인들이 북간도에 정착된 이후 이곳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김약연 일행은 장재촌에 정착하여 대부분 삼림이었던 수백 정보의 황무지를 구입하여 개간하였다. 그들은 장재촌을 명동촌(明東)으로 개명하였는데, 명동은 “조선을 밝힌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1905년 명동촌은 마을이 거의 완성되었는데 조선인 이주민들이 7개의 촌에 모여 살고 있었다.
시인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고 썼다. 북간도는 중국의 변방이며 과거 고구려와 발해, 거란족의 근거지였다. 또한 이 지역은 산동, 허난 등 중국 내륙의 이주민들이 모여들었고, 한족, 조선인, 만주족, 몽골인, 일본인들 다양한 디아스포라 백성들이 섞여 살아가는 혼종의 지역이었다. 북간도의 한국인 기독교신앙과 민족 독립운동은 이러한 주변성과 디아스포라적 특징을 가지고 탄생하게 되었다.
2. 교육활동(규암재와 명동학원)
명동촌의 이주민들은 자신들이 매입한 땅에서 제일 먼저 학전(學田)이라는 명목으로 땅을 따로 떼어놓았고 그 다음에 각 가정의 땅을 분배했다. 학전은 교육기금을 조성하여 자녀들을 교육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미국의 초기 청교도들이 먼저 교회를 건축하고 그 후에 자기 집을 지었던 것과 유사하게, 김약연 일행은 교육을 가장 우선되는 원칙으로 세웠던 것이다.
김약연은 1901년 4월 명동촌에 자신의 호를 따서 ‘규암재’라고 하는 서당을 세우고 한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는 주로 민본주의 정신을 담고 있는 『맹자』를 가르쳤다. 그후 1906년에 애국지사 이상설이 가까운 지역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熟)을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작했으나 이듬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말미암아 문을 닫고 말았다. 김약연은 서전서숙의 교사와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규암재의 터를 확대하여 1908년 4월에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다. 이듬 해에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개칭되었다.
3. 기독교 수용과 마을 목회
김약연이 이끌던 명동촌은 초기에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마을이었다. 북간도 명동촌이 기독교를 수용하게 된 것은 애국적 동기와 교육적 동기 때문이었다. 김약연은 1909년 명동학교를 설립하면서 근대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약관의 22세의 청년 정재면(鄭載冕, 1884-1962)을 교사로 초빙하였다. 정재면은 평안남도 숙천 사람으로 평양 숭실을 졸업하고, 서울 상동청년학원과 서울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YMCA)을 졸업하였고,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신민회에서 세운 평양대성학원과 원산보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고, 이동휘의 권유로 ‘북간도 교육단’을 조직하여 교육사업을 물색하던 중 김약연과 조유하게 되었다. 정재면은 훗날 목사가 되었고 한신대 정대위 학장의 부친이었다. 정재면은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린다는 조건으로 교사직을 수용했다. 김약연과 정재면은 학교를 발전시켜 명동중학교(1910)와 명동여학교(1911)를 설립하였고 민족교육은 확대되었다. 명동학교의 교과목은 국어, 역사, 과학, 사범 교육 외에도 애국심교육과 신앙교육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40세의 김약연과 명동촌의 사람들이 유교를 대체하여 기독교를 수용하는 혁명적 결단을 한 것은 기독교를 근대교육과 민족독립운동의 산실(産室)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근대민족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유교보다 우월하고, 일본과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려면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단은 북간도의 기독교인들에게 애국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구한말에 입국한 장로교선교사들은 1901년 장로교선교사공의회에서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이라는 제목 하에 소위 정교분리 선언을 하면서 개인의 정치행동은 자유이지만 교회와 정치의 무관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전해준 이러한 신학적 흐름과는 달리 한국에는 애국애족과 신앙이 하나로 통합된 신앙전통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북간도에서 확인된다.
또한 김약연은 정재면과 함께 1909년에 명동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주일에 명동교회에는 200여명의 교인이 출석하였다. 감약연은 1915년 명동교회의 장로로 피선되었다. 1917년에 명동교회에는 700여명의 교인들이 출석하고 있었다.
명동교회와 명동여학교는 북간도 여성들의 의식과 지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사회에서 이름을 갖지 못했던 여성들은 북간도에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한자로 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여성들 중 50여명은 김신묵(金信黙), 김신우(金信宇), 김신영(金信永), 윤신현(尹信鉉) 등 신(信)자를 항렬로 삼아 이름을 짓는 일도 있었다.
또한 명동촌 안에 있는 여러 마을의 이름이 구세동, 영생동, 명신동, 낙원동 등으로 명명되었는데 그들 사회의 성격이 기독교적임을 나타낸다. 김약연과 명동촌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주할 때 꿈꾸었던 빈부귀천이 없는 이상촌을 신앙적으로 실현하려고 했다. 그들은 기독교적 “천당골”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들은 집단농장에서 함께 노동하고 함께 추수했다. 그들은 축적된 자산을 가지고 가난한 이웃을 돕고 지역 사회를 위해 사용하였다. 또한 교사, 학생, 학부모, 명동교회 교인들은 협동조합운동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이 꿈꾸는 천당골의 사람은 첫째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며, 둘째 의를 위해 고난을 받고, 셋째 애국자로서 삶을 살아가야하는 사람이었다.
4. 북간도의 자치기구
일제는 1907년에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한 후, 간도의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용정에 통감부 임시파출소와 헌병분견소를 설치하여 독립운동가를 단속하고 만주침략의 발판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김약연은 이에 대응하여 1907년에 한인들의 자치기구인 연변교민회를 조직하였다. 1911년 중국에서 손문의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김약연은 연변에 조선인 자치정부를 세우기 위해 간민자치회로 발전시키려하였으나 중국 당국의 방해와 일본인들의 항의로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 1913년 4월 북간도 최초의 한인자치기구인 “‘간민회”가 설립되었고 김약연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간민회는 1919년 용정의 3.13 만세운동과 그 이후 북간도 항일무장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5. 북간도의 독립운동
북간도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과 민족교육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북간도 무장투쟁의 상징은 1920년 봉오동 전투(6월 6-7일)와 청산리 전투(10월 21-26일)였고, 북간도 민족 운동의 상징은 명동학교였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파리강화회의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후, 상해와 북간도에서는 독립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명동학교에는 학생들은 결사체인 충렬대(忠烈隊)가 조직되었다. 김약연은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길림)에서 만주, 연해주, 중국, 미국 등 해외활동 중 독립운동가 39인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 또는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동경의 “2.8독립선언서”와 함께 3.1 독립선언서의 효시가 되었다. 이 독립선언서는 일본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것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는 무장독립전쟁론을 지지하였다. 이것은 김약연의 독립운동의 노선은 당시에 유행했던 외교독립론이 아니라 북간도의 무장항쟁론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후 김약연은 2월 7일 노령에 가서 ‘전로한족중앙총회’에 참가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고 2월 25일 니콜스크에서 열린 대한국민의회에 북간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아침 수천 명의 군중들과 학생들이 명동학교 마당에 집결하여 충열대(忠烈隊)의 선도로 용정으로 들어갔다. 용정에는 3만 명의 군중들이 운집했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3.13’시위는 일제와 일제의 사촉을 받아 출동한 만주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었고 19명이 희생되었다.
김약연은 즉시 귀국하여 간도독립운동 기성총회를 발족하고 군자금을 모금했다. 만세운동이 무장활동으로 확대되는 시점인 그해 5월, 간도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 본부를 명동학교에 두었고, 「자유의 종소리」 신문을 발간하였다.
6. 일제의 박해
1920년 2월 52세의 김약연은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중국지방당국 연길도윤공서에서 체포되어 2년 동안 감옥에 연금되었다. 비록 연금 상태였으나 중국 당국은 김약연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1920년 “훈춘사건”(10.2)이후, 간도에 파견된 일본군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패전하자 소위 “경신년 대토벌”(1920년 10월 이후 3-4개월)을 통해 북간도의 조선인들의 마을과 교회를 불태우고 수만 명의 조선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20년 10월 20일 일본군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명동학교를 방화하여 잿더미로 만들었다. 1922년 석방된 김약연과 명동촌의 교인과 주민들은 폐허가 된 터 위에 임시교사를 지어 민족교육을 지속하였다. 1924년 극심한 흉년으로 명동학교는 운영난에 시달렸고 1925년에는 명동중학교 인가가 취소되어 학생들은 캐나다선교부가 운영하였던 용정의 은진(恩眞) 중학교와 명신여학교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명동소학교는 유지되었다. 명동학교는 1901-1925년 사이에 약 1200명의 애국 청년들을 배출하였다.
김약연의 영향을 받은 애국지사들 가운데는 김약연의 조카였던 시인 윤동주, 독립운동가 송몽규, 통일 운동의 아버지 목사 문익환, 영화 아리랑을 만든 춘사 나운규, 한국인 최초의 전투기 비행사 서왈보 등이 있다. 또한 1920년 1월 4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은행의 돈 15만환을 탈취한 사건, 1930년 ‘5.30 간도폭동’ 등을 주도한 인물들이 명동학교 출신들이었으며,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도 명동학교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7. 용정에서의 활동
김약연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종파와 이념을 초월하여 협력했다. 중국인들은 그러한 김약연에게 “간도의 대통령”이라는 명칭을 붙여주며 그의 포용력 있는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1929년 김약연은 60세의 나이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1년간의 단기 신학수업을 받았고 북간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0년 김약연은 명동교회의 목사로 돌아왔다. 1932년에 용정으로 이주하여 은진중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1938년 2월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시기 은진중학교에서 김약연의 영향을 받은 제자로는 강원용, 안병무, 문동환 등이 있고, 김재준 목사는 은진중학교의 교목이었다.
명동과 용정 그리고 북간도에서 신앙과 교육과 민족운동을 펼쳤던 김약연은 1942년 10월 24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김약연은 가족과 제자들이 유언을 부탁하자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
김약연의 신앙과 사상은 행동으로 증명되었다. 그는 교육자, 신앙인,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지만 늘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교장으로서 1천평 되는 밭농사를 손수 지었고, 거름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가을에는 농군들과 함께 밤 세워 타작을 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김약연이 제자를 가르치는 모습은 마치 공자가 제자들에게 도를 행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전했다.
명동촌 윤동주의 생가에는 명동교회가 있고 그 동쪽에 김약연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김약연 목사의 묘소는 그의 생가가 규암재가 있던 장재촌 뒷산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