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2월 2일)
[2003년] 하벨 체코대통령 퇴임, 극작가로 복귀
하벨(Havel, Vaclav, 1936~ )은 1936년 10월 5일 프라하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48년 체코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부르주아적인 배경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택시운전기사 등 노동을 하였다. 그후 프라하 예술아카데미를 졸업, 작가의 길로 매진하였으며, 1963년 희곡 《뜰의 축제 Zahradni slavnost》로 국제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검열을 거부하여 국내에서는 20여 년 동안 작품발표가 금지되었다.
1968년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후에는 트로트노바 근처의 외딴 농촌에서 은거하며 양조장 직원으로 일하였으며, 수많은 동료 반체제운동가들이 투옥 등으로 활동에 제한을 받는 가운데 반정부운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8월 '인권헌장77'을 공동기초하여 투옥되었고, 1979년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로 4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러자 그의 희곡을 읽지 않은 체코슬로바키아인들도 그를 반체제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받아들였다.
1989년 11월 그는 반체제연합 '시민포럼'을 조직, 공산당의 권력독점 폐지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여, 1940년 동안 군림해 온 공산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어 12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의회에 의해 비공산당 출신으로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립 이후인 1993년 1월 말 실시된 선거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naver
[1997년] 제1회 세계습지의 날
국제습지협약의 내용과 습지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정한 날.
습지(濕地)는 물이 흐르다 고이는 오랜 과정을 통하여 다양한 생명체를 키움으로써 완벽한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갖춘 하나의 생태계이다. 또한 습지는 많은 생명체에게 서식처를 제공하고, 습지의 생명체들은 생태계를 안정된 수준으로 유지시킨다. 습지는 각종 무척추동물·어류·조류의 서식지이고, 미생물은 유기물을 먹고 사는 곳이다. 이들은 오염원을 정화하고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습지는 생물적·생태적·환경적인 면은 물론 수리적·경제적으로도 그 보존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습지보존을 위해 1971년 12월 이란의 람사르(Ramsar)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국제습지조약을 채택하였다. 목적은 물새서식지인 습지를 국제적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조약에 따르면 가맹국은 철새의 중계지나 번식지가 되는 물가의 습지를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가맹할 때에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1개 이상 보호지로서 지정해야 한다.
이에 국제습지조약에서는 1997년 2월 2일을 세계습지의 날로 지정하였다. 정부와 시민단체, 국제비정부기구에서는 이날을 국제습지조약의 내용 및 습지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날로 활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부터 해양수산부와 환경부에서 공동으로 기념식을 개최한다. 또 습지보전에 대한 세미나, 연구발표 및 탐조대회 등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 대한 습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로 삼는다. /naver
[1996년] 미국 영화배우 진 켈리 사망
← 역대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Singin` in the Rain’에서의 진 켈리.
영화 ‘싱잉 인 더 레인(Singin` in the Rain)’ 등으로 잘 알려진 영화배우 진 켈리가 1996년 2월 2일 83세로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사망했다. 미국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배우 켈리는 이날 오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부인 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94년 7월 이후 2차례의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계속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환상적인 율동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던 켈리는 1940∼50년대 영화 ‘파리의 미국인’ ‘닻을 올려라’ 등에서 주연했으며 무용수, 안무가, 가수, 감독으로도 활동한 공로가 인정돼 지난 1951년 아카데미영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춤 속에 노동자들의 역동적인 삶을 묘사했다는 평을 들었던 켈리는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피츠버그에서 무용강사로 명성을 떨치고 1930년대 뉴욕 브로드웨이로 진출, 뮤지컬 배우 겸 안무가로 변신했다.
그는 1942년 MGM 영화사에 픽업된 후 영화배우로 나섰으며 1950년대에는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춤의 제왕’으로 불렸다.
[1994년] 국어학자 이숭녕(李崇寧) 박사 별세
←이숭녕
1908. 6. 7 ~ 1994. 2. 2
원로 국어학자 심악 이숭녕 박사(86)가 1994년 2월 2일 서울 원자력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우리나라 국어학의 거봉으로 추앙받았던 이숭녕 박사는 우리말의 음운체계를 실증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구명하는데 한평생을 바쳐왔다.
이 박사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어학과를 졸업한 뒤 평양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8.15 광복과 함께 경성대-서울대에서 국어학을 강의하면서 우리나라 국어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국어학을 필생의 연구과제로 삼고 음운론, 문법론, 어휘의미론 등 연구영역을 확대해 오면서, 지금껏 1백30여편의 연구논문과 20여권의 저술을 냈다. 대표적 저서로는 ‘음음론 연구’ ‘중세 국어문법’ ‘국어음운론 연구’ ‘국어학 논총’ 등이 있다.
학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문화상(1956) 3.1문화상(1962) 대한민국문화포장(1962) 국민훈장동백장(1970) 국민훈장모란장(1973년) 등을 수상했다. /조선
[1989년] 로드리게스, 파라과이 군부 쿠데타로 실권 장악
-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35년 만에 실각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에서 1989년 2월 2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장군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지난 35년간 이 나라를 강압 통치해 온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이 축출됐다. 스트로에스너는 1954년 집권한 이래 경찰국가에 의한 공포정치를 확립, 강화해 통제사회를 구축했다.
나치스 도망자와 국제적인 마약밀매조직에 은신처를 마련해주며 거액의 보수를 받는 등 불법적인 행동을 취해왔다. 이에 미국정부가 1970년대부터 원조를 중지하자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에는 경제상태가 악화돼 민중봉기가 빈발했고 지배층도 분열하기 시작했다.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 약 300여명이 사망했고 스트로에스너르는 해외로 도주했다. /조선
[198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보타(Botha, Pieter Willem) 대통령, 당 총재직 사퇴
1989년 2월 2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피터 빌렘 보타(Pieter Willem Botha) 대통령이 남아프리카 국민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보타는 인종차별주의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바탕으로 대다수 흑인들의 인권을 유린해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보타는 1948년 총선에서 남아프리카 국민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해 1978년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정국불안을 군사정책으로 대처해 주변국 반정부 세력을 지원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아시아계를 비롯한 유색인종에게 극히 제한된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는 신헌법을 제정했다. 1984년 백인우위의 선거인단 투표로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지지세력과 저항세력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혔다. 1989년 2월 2일 당 총재직에서 사퇴했으나 남아프리카 국민당과 내각의 반발에 직면할 때까지 대통령직에서는 물러나지 않았다./브리태니커
[1970년] 영국 철학자 러셀(Russell, Bertrand) 사망
← 버틀란트 레셀
1872. 5. 18 ~ 1970. 2. 2
영국의 철학자이며 노벨상수상자, 그리고 정치가로 알려진 버틀란트 러셀이 1970년 2월 3일 웨일즈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향년 97세였다. 러셀은 유행성독감으로 고생해오다 결국 이날 숨을 거뒀다.
잉글랜드 몬머스셔 트렐렉에서 태어난 러셀은 트리니티대학과 캠브리지대학의 철학교수로 있었으며, 고전인 ‘수학적 원리’를 포함한 다수의 책을 썼다. 그는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영국 국가유공자 회원의 일원이었다.
그는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과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했다. 또한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난하는 스톡홀름 전쟁범죄재판소를 조직하기도 했다. /조선
[1956년] 북한 조선적십자회, 국제적십자위원회에 가입
조선적십자회는 김일성이 1946년 10월18일 ’북조선적십자사’로 출범시킨 단체로 2년 뒤인 1948년 그 명칭이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직은 1명의 위원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부위원장과 상무위원, 1명의 서기장이 있으며 국제부, 동포사업부, 문화선전부, 조직계획부, 출판보도부 등의 부서를 두고 있다. 또 평양과 남포 등 직할시와 각 도에는 위원회가 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1955년 5월26일 대한적십자사를, 1956년 2월2일 조선적십자회를 각각 국가적십자사로 인정했다. (연합) /조선 2006-10-18
[1953년]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 사망
← 구본웅
1906. 3. 7 ~ 1953. 2. 2
호는 서산(西山). 아카데미즘으로 고착된 1930년대 화단의 일상성을 거부하고 매우 개성적인 표현세계를 개척한 인물로 '한국 야수파 화가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어려서 척추를 다쳐 곱추가 된 그는 화가의 길이 곧 숙명이라고 여겨 18세에 고려미술연구회에 입회, 이종우에게 서양화를 배웠고, 그 이듬해 YMCA 청년학관 미술과에서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웠다. 1921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조각부에서 〈머리습작〉을 출품해 특선에 뽑혔고, 22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를 거쳐 일본대학 전문부 미학과를 다녔다. 1930년 자유로운 화풍을 펼치던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했고, 1933년 졸업 후 귀국하여 시인 이상(李箱), 소설가 김유정 등과 친분을 두텁게 하며 문화의 불모상태에 있던 일제시대 모더니즘 미학의 토착화 작업에 몰두했다.
← 푸른 머리의 여인, 캔버스에 유채 60.4×45.4cm
그는 당시 출세의 지름길인 선전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관전(官展)에 대해서도 '선장없는 기선'이라고 혹평했다. 또한 예리한 비평적 안목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때문에 그의 미술과 문화적 활동은 일제시대 한국미술의 원점과 한계를 알려주는 현주소이기도 했다. 1934년 목일회(뒤에 목시회로 바뀜)를, 1935년 백만회를 창립해 왕성한 전위미술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대 국내 화단에서는 구본웅·이중섭·김환기·유영국이 야수파·표현주의·입체파·추상미술 등 서구의 전위적 화풍을 소개했다. 이들 제2세대 화가들의 등장은 도쿄 미술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아카데미 화단에 커다란 변화의 계기를 주었다.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단체였던 목일회는 1938년 '9인 양화 동인전'을 끝으로 활동을 마감했고 국내 화단은 친일성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구본웅은 1942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양화가의 수묵화전을 끝으로 붓을 놓기에 이르렀다. 해방직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로 천거되었으나 출품을 거부했다. 1953년 〈서울신문〉 제작에 참여하여 삽화 등을 그렸으나, 그해 2월 47세의 나이에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 대표작으로는 〈머리습작〉(조각, 1927)·〈비파와 포도〉(1930년대)·〈여인〉(1930경)·〈친구 이상(李箱)〉(1930년대)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43년] 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전투 항복(종전)
볼가강 하류에 위치한 스탈린그라드는 주요 산업의 중심지이며 카프카스 지방의 유전(油田)과 소련의 주요 지역을 잇는 석유공급로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를 선두로 한 33만 명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하여 기갑부대를 동원하여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10월 중순 무렵 가까스로 소련군을 볼가강 가까이로 밀어냈으나 추위와 보급품의 부족으로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었다.
1942년 11월 중순 소련군은 남북 협공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독일측의 루마니아 군대를 격퇴시켰으며, 23일에는 파울루스의 군대와 기갑부대 일부를 포위하였다. 독일군은 이들을 구출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파울루스는 항복 의사를 표명하였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승진시키는 등 격려하였으나 이듬해 1월 31일 파울루스는 소련에 항복하였고 2월 2일 살아남은 독일군 9만 1000여 명도 스스로 항복을 선택하였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22만여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패배함으로써 수세에 몰리고 소련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반격함으로써 전국(戰局)이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naver
[1926년] 프랑스 제3대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Giscard d'Estaing, Valéry) 출생
← 지스카르 데스탱
1926. 2. 2 ~
독일의 코블렌츠 출생. 명문가에서 자라 파리의 이공과대학과 국립행정학원을 졸업한 후 재무성(財務省)에서 근무하였다. 195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유엔총회에 프랑스대표로 참석, 1962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 드골에 의하여 재무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1966년 사임, 드골파와 결별하였다. 그 후 1969년 대통령 퐁피두 밑에서 다시 재무장관에 취임하여 프랑화의 절하(切下)를 단행하였다. 1974년 대통령 퐁피두의 사망으로 대통령선거에 ‘점진적 개혁’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여 좌익연합의 F.미테랑에게 승리하였다. 1978년 재선되었으나, 1981년 미테랑에게 패배하였다. 1988년 프랑스민주연합(UDF)의 의장이 되었다. /naver
[1922년] ‘율리시즈’ 출판
← ‘율리시즈’ 초판본.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즈’가 1922년 2월 2일 프랑스 파리에서 초판이 출판됐다. 이날은 그의 40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율리시즈’는 1918년부터 미국의 한 잡지에 연재됐으나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한동안 연재와 출판이 금지당하는 바람에 이날 파리에서 출간됐다.
188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조이스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예비학교에서 수학했으나 타고난 언어 감각으로 문학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문학적 경력은 1900년 4월 그가 나름의 미학이론으로 입센을 해석한 ‘입센의 새로운 드라마’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됐다. 조이스의 첫 소설인 ‘더블린 사람들’은 1904년 더블린의 한 신문에 연재됐으나, 작품의 외설성과 더블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영국 왕을 모욕하는 듯한 내용 등으로 책을 출판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어 그는 8년동안이나 책 출간을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결국 1912년 책 출간을 포기하고 아일랜드를 등진 그는 죽을 때까지 평생 조국을 찾지 않았다.
그가 당시 세계문학의 수도였던 파리에 정착한 것은 1920년이었다.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한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세계 문학의 큰 별로 군림하던 그가 파리를 떠난 것은 파리가 2차대전으로 독일에 함락된 1940년이었다.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해 생활했으나 위궤양 수술 후유증으로 1941년 1월 숨을 거뒀다.
[1920년] 한국무용가 한영숙(韓英淑) 출생
1920. 2. 2 ~ 1990. 10. 8
호는 벽사(碧史).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40호 학무 기·예능보유자. 민속춤의 대가인 한성준(韓成俊)의 손녀이며, 아버지는 한희종이다. 충남 천안 출생. 12세 때인 1933년 홍성 갈미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상경, 1942년까지 경성 조선고전음악무용소에서 춤을 배웠다. 같은 시기에 한국무용의 중시조라 할 한성준(韓成俊)으로부터도 춤을 배우기 시작하여 승무 ·학춤 ·태평무 ·살풀이 등을 전수받았고, 이와 함께 해금 ·가야금 등의 국악기도 익혔다. 1937년 서울 부민관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져 명성을 얻기 시작. 1942년 한성준 추도공연을 가졌다. 그해 한영숙고전무용학원을 개설하여 승무 ·살풀이 ·태평무 ·학무 등을 후진에게 전수하였다.
한국국악예술학교(지금의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서라벌예술대학·이화여자대학교·서울예술고등학교·서울예술전문대학·서울시립무용단·수도여자사범대학 등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1963년 미국 30개주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무용극 《법열곡》을 발표하였으며, 1972년 일본 삿포로[札幌] 동계올림픽 파견공연 및 뮌헨올림픽 파견공연을, 1975년 광복 30주년 일본 순회공연을 가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폐막식에서 살풀이춤으로 한국춤의 진수를 세계에 알렸다. 외형적인 기교보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한국무용의 정수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한국무용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1969년 승무로, 1971년 학춤으로 각각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0년 국민포장 대통령장,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승무·학춤·태평무·살풀이춤은 마치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의 품격과 멋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1917년] 독립운동가 이재현(李在賢) 출생
1917. 2. 2 경기 시흥~1997. 2. 24 안양.
일명 해형(海平)·재두(在斗). 1919년 3·1운동 후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1935년 난징[南京]에 있었던 임시정부 산하 학생훈련소에 입교하여 정치훈련을 받은 후, 다음해 김구(金九)의 장남인 김인(金仁) 등과 같이 지하공작대원으로 광저우[廣州]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1939년 충칭[重慶]에서 나월환[羅月煥] 등과 같이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조직, 적후방인 산시 성[山西省]에서 정보수집·적군와해공작·애국청년초모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중국인 지방유격대와 합류하여 유격전을 벌였다. 한편 일본군 제36사단 사령부의 이도순(李道淳) 및 중대통역 고여순(高如順) 등 10여 명을 포섬하여, 동 사단의 상세한 정보를 입수, 중국군에 제보했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허난 성[河南省]·허베이 성[河北省] 일대에서 초모·선전·정보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광복군이 재편성되자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었으며, 애국청년 50여 명을 모집했다. 1944년 한미합동훈련반(OSS) 조교로 본토낙하대를 조직하고 제2조장으로 대원들과 같이 낙하훈련을 실시했으나, 8·15해방으로 국내 침투공작은 실시되지 못했다. 1945년 10월 한국광복군 국내정진군 제2지대 제3조장에 임명되어 베이진[北京]으로 가서 주북경판사처[駐北京辦事處) 주임으로 교포보호 및 일본군 내의 한적사명접수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미군정청·민족청년당 등에서 일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아 수여되었다.
[1914년] 유화 화가 박수근(朴壽根) 출생
1914년 2월 2일 태어남 / 1965년 5월 6일 죽음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 박수근
박수근은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독창적인 한국의 미를 표현한 화가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된 것을 시작으로, 1936~44년에 8회 출품하여 연이어 당선됨으로써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소설가 박완서의 처녀작 <나목>의 소재가 되었듯이, 6·25전쟁 중에는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힘들고 고단한 삶 속에서 실제로 체험했던 가난한 농가의 모습이나 서민들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정경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표현 방법에서도 소재에 어울리도록 굵고 우직한 선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켰다. 또한 물감을 덧칠해 화면을 돌이나 화강암의 표면과 같은 질감이 느껴지도록 표현했다. 한국미의 전형을 이룩함으로써 8·15해방 이후 최고의 유화 작가로 평가받는다.
[1907년] 주기율의 발견자 멘델레예프(Mendeleev, Dmitrii Ivanovich) 사망
← 일리야 레핀이 그린 멘델레예프의 초상화
1834. 2. 8 ~ 1907. 2. 2
시베리아 토볼스크의 알렘장커 출생. 어릴 때부터 과학에 흥미를 가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앙교육전문학교를 졸업, 1855년 22세의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화학과 시간강사가 되었다. 그 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1859~1860), 분젠과 키르히호프의 지도하에 액체의 열팽창 ·표면장력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이것은 후에 기체 ·용액의 연구로 이어지는 물리화학적 연구였다. 유학 중 1860년 카를스루에에서 개최된 세계화학자회의(원자량 ·분자량의 불일치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카니차로의 개혁제안에 찬성하였다. 186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으로 돌아와 유기화학강의를 시작하였으며, 이때 500면이나 되는 대작 《유기화학 교과서》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바른 원자량을 채용하였다.
1867년 화학 교수가 되었고, 1868년 말 무기화학 교과서 《화학의 원리》를 저술하기 위하여, 당시에 알려져 있던 63종의 원소배열순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주기율을 발견하였다(1869). 최초의 주기율표는 1869년 러시아화학회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이 주기율표에는 필연적으로 빈 곳이 생기는데, 새 원소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 채워진다고 예언하고 그것의 원자량 ·비중 ·빛깔까지도 나타내 보였다. 그 후 발견된 갈륨(1875) ·스칸듐(1879) ·게르마늄(1886) 등은 주기율의 자연법칙성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 석유에 관해서도 관심이 있어 원유채굴법 ·처리법 ·이용법 등 많은 연구를 하였다. 1890년 대학의 학생운동이 정치문제가 되어 교수직을 물러났으며, 1893년 도량형국 총재가 되었다. /naver
[1905년] 미술사학자·미학자 고유섭 (高裕燮) 출생
1905. 2. 2 경기 인천~1944. 6. 26 경기 개성.
호는 우현(又玄).
한국미술사 연구의 기반을 닦았다. 인천공립보통학교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나왔다. 1927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독일에서 미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우에노[上野直昭]와 동양미술사 전공의 다나카[田中豊藏]에게서 미학과 동서양미술사를 배웠다. 1929년 이점옥과 결혼하고 1930년 졸업논문 〈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 藝術的活動の本質と意義〉로 학위를 받았다. 졸업한 뒤 같은 대학의 조수로 일하면서 한국미술사를 연구, 〈신흥 新興〉에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고찰〉·〈조선탑파개설〉 등을 발표하면서 학술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장직을 맡아 사망할 때까지 한국미술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여러 신문과 잡지에 논문들을 발표했다.
1934년에 조직된 역사연구회인 진단학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진단학보〉에 탑파(塔婆)에 대한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했고, 1943년에는 일본 도쿄에 가서 세키노 다다스[關野貞]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를 비판하고 양식적으로 탑파를 연구하여 연대를 밝힌 〈조선탑파의 양식 변천〉을 발표했다. 평생동안 노력을 기울인 조선탑파에 대한 연구는 뒤에 〈조선탑파의 연구〉로 정리, 간행되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외에도 그의 연구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대 전반에 걸쳐 고분·건축·불상·도자·회화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의 전분야를 다루고 있다.
1936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강의했으며 회화에 관한 옛 문헌을 뽑아 정리한 자료가 뒤에 〈조선화론집성〉으로 간행되었다. 양식사적·정신사적·사회경제사학적 방법들을 두루 적용하여 한국미술사를 집필하려 했으나 초고만을 쓴 채 간경화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연구는 한국미술사 연구의 초석이 되었으며, 황수영·진홍섭·최순우에게 이어졌다. 주요저술로는 생전에 나온 〈고려청자〉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정리·간행한 〈조선 미술문화사논총〉·〈조선미술사료〉·〈송도 고적〉·〈전별의 병〉·〈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 등이 있다.
[1898년] 독립운동가 박인항(朴仁恒) 출생
1898. 2. 2 평북 선천~1947. 3. 7.
1920년초 선천에서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해 박승도(朴承道)·박인혁(朴仁赫)·유영춘(劉永春) 등과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독립신문 배포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사실을 일경에게 밀고한 선천군 태산면 면장 김병준(金炳俊)과 서기 1명을 사살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이 사건으로 1921년 3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으며, 3월 11일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1921년 다시 안남(安南)의 하노이 시로 망명했다. 1938년 9월 안남에서 다시 상하이로 잠입하던 중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10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했다. 1943년 11월 3일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96년] 독립문을 세우기 위해 영은문을 철거
영은문
독립문(1898)
독립문(獨立門)은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자주독립 결의를 다짐하며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세워졌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19세기 말 자주민권 자강운동의 한 기념물이다.
1894~1895년에 이른바 갑오경장으로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청(淸)나라와 일본의 간섭, 그리고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러시아의 간섭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이 위협을 받게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민족의 자주독립 결의를 다짐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1896년 2월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이 헐리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한 뒤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徐載弼)이 1896년 귀국하면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사대외교의 표상인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다. 독립문 건립은 오래도록 계속되어 온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던 일본ㆍ러시아ㆍ서구열강들의 간섭으로부터 탈피하여 영구 독립을 이루기 위한 상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의 발의는 국민과 애국지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며, 1896년 6월에는 독립문 건립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국왕의 동의를 얻고, 9월 6일에 독립문 건립을 서재필이 담당하도록 하고, 3,852원의 건립비용을 책정하였다. 이때 치욕의 영은문도 헐리고 그 뒤에 있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獨立館)으로 바꾸었다. 11월 21일 대대적인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고, 그로부터 1년여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독립문의 건축양식은 서재필이 구상하여 기본적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凱旋門)을 참고로 이루어진 것이며, 비용 때문에 개선문보다 축소되었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따르면, 문의 설계는 당시 독일공사관에 있던 스위스 기사가 담당하였고, 공사는 우리나라 목수(木手)인 심의석(沈宜碩)이 맡아 시공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러시아 사람인 사바친이 했다고 하여 어느 쪽이 옳은지 분명하지 않다.
독립문은 좌우에 화강석 돌기둥을 세우고 중앙에 홍예(虹霓)를 설치하였다. 그 한쪽에는 내부로 드나들게 출입문을 두어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상부에는 돌난간이 돌려져 있다. 이맛돌에는 대한제국의 문장(紋章)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문 정면과 뒷면에는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지고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獨立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현판석(懸板石)이 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79년 성산대로가 개설되면서 원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세우고,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문 앞에는 영은문 주춧돌(사적 제33호) 1쌍이 서 있다. /naver
[1895년] 한말의 의병 정춘서(鄭春瑞) 출생
1885. 2. 2 충북 청주 ~ 1911. 6
일명 춘서(春西). 1907년 군대해산에 격분해 청주에서 한봉서(韓鳳瑞)와 함께 의병을 모아 기의했다. 같은 해 4월 의병 9명과 함께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일본군의 우편물운반원 2명을 사살하고 소총 2정, 총검 2자루, 탄약함 2개, 탄약 10발을 노획했다. 청주 백자동의 박내천(朴來舛)이 일본경찰에게 의병진의 거점 등을 제보해 피해를 입게 되자, 8월에 이정규(李正奎)와 함께 그를 사살했다. 그해 가을 김덕보(金德甫)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체포되었다. 공주지방법원 청주지부에서 내란·살인·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심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어 순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93년] 독립운동가 박승길(朴昇吉) 출생
1893. 2. 2 함북 온성~1960. 8. 18.
호는 철마(鐵馬). 일명 덕수(德洙)·재근(材根). 1919년 3월 북간도 왕청현(汪淸縣) 백장구(百長溝)로 망명하여 재만동포 수천 명을 동원해 독립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4월 한광택(韓光澤)·최상진(崔相鎭) 등 기독교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한 신민단(新民團)의 왕청현 지부결성에 참여하여 석현지부 군사령관에 임명되어 독립군 500여 명을 양성했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조직시 재간도 신민당 대표로 참여했으며, 만주와 함북지방에서 모연대(募捐隊)를 조직하여 모금한 군자금 3,500원으로 노령(露領)으로 가서 권총 20정, 보병총 30정, 탄환 및 군도 등을 구입해 독립군을 무장시켰다.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군 린쉬비크파 군사령관 셉첸크와 밀약하여 무상으로 소총 500정, 탄환 10만발 등을 들여와 신민단군을 무장시켰다. 1920년 3월경 홍범도와 더불어 봉오동전투에 참전하던 중 부하 20명을 인솔하고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 제19사단 소속 야스가와[安川] 부대를 공격하여 일병 300여 명을 전멸시키고 귀대했다. 이해 명월구(明月溝) 이청림(二靑林)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썼다.
같은 해 10월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정근(安定根)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 단체를 통합해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를 설립했는데, 그는 김창순(金昌順)과 함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표로 참석해 활약했다. 그러나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만주에서의 대규모 독립전쟁이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자, 1922년 코르시카로 망명하여 한인교민들의 교육에 진력했다. 1935년 일본자작농토벌대의 선두에섰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다시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82년] 아일랜드의 소설가, 시인 조이스(Joyce, James) 출생
←James Joyce, ca. 1918
1882. 2. 2 ~ 1941. 1. 13
아일랜드의 문예부흥 기운에 반발하여 학교 졸업과 동시에 파리로 갔으며, 1904년 벌리츠학원의 영어교사로 러시아의 폴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 등지에서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취리히로 피난, 1920년부터 파리로 옮겨 새로운 문학의 핵심적 존재가 되어, 주변에 각국의 시인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침입을 받자 다시 취리히로 가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그는 고향 더블린을 버리고 37년간이나 망명인으로서 국외를 방랑하였다. 빈곤과 고독 속에서 눈병에 시달리면서, 전인미답의 문학작품을 계속 집필하였는데, 작품의 대부분이 아일랜드 ·더블린 ·더블린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젊었을 때 한때 신문발행과 영화관 경영을 계획한 적도 있었지만 둘 다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7년 고전적 아취를 지닌 연애시를 모은 시집 《실내악 Chamber Music》을 발표하고, 1914년에는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을 출간하였다. 그 대부분은 이미 1905년경 이전 탈고로 발표된 것도 몇 가지 있었다. 그 후 1914∼1916년에 《에고이스트》지(誌)에 연재된 자서전적 요소가 많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1917)은 ‘의식의 흐름’을 따른 청신한 심리묘사로 크게 주목받았다.
이어 3막의 희곡 《유인(流人)》(1918)을 간행하는 한편, 1918년부터 《율리시스 Ulysses》(1922) 일부를 미국의 잡지 《리틀리뷰》에 발표하여 풍기상 유해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하기도 하였으나, 조이스라는 이색작가의 존재를 널리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1922년 파리에서 대본업을 하던 미국인 여성 실비아 비치의 희생적 노력으로 《율리시스》가 간행되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은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엇갈렸으나, 출중한 문학적 재능에는 한결같이 경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연구 해설서도 잇달아 출간되었다.
마지막 작품 《피네간의 경야 Finnegan’s Wake》(1939)는 진일보한 실험적 작품으로서 《율리시스》에서 사용된 ‘의식의 흐름’의 수법이 종횡으로 구사되었다. 오늘날의 소설은 매스컴에 용해되어 있으나, 조이스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었던 최후의 예술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시인적 작가였다. /naver
[1848년] 미국과 멕시코, 과달루페이달고 조약 체결
← 포크, Mathew Brday가 제작한 은판사진(1849)
1848년 2월 2일 미국과 멕시코는 멕시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체결했다. 1846년 1월 제임스 K. 포크 미국 대통령은 텍사스 지역의 리오그란데 강을 둘러싼 국경 분쟁이 일자 재커리 테일러 장군에게 분쟁지역을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하자 미국의회는 전쟁선언을 인준했다. 1847년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테일러 장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윈필드 스콧 장군은 멕시코시티에 입성했다. 결국 1848년 2월 2일 미국과 멕시코는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선을 새로 확정했다. 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멕시코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으며, 미국은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서부, 네바다, 뉴멕시코, 텍사스, 유타 등 리오그란데 강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1801년] 천주교 신유박해 시작
← 정약종이 천주교의 교리를 요약한 ‘주교요지’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가 1801년 2월 2일(음력 1월10일)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리면서 신유박해가 시작됐다. 신유사옥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가 당시의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정순대비는 이같은 지시를 내린 것이다.
천주교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반역죄로 다스려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이가환 등 남인들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 등이 처형 또는 옥사했으며 정약전 정약용 등은 유배됐다. 또 가을에는 베이징의 천주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황사영의 백서가 발견되어 관련자들이 처형되는 등 박해가 일단락되는 이듬해인 1802년 2월 4일까지 모두 100여명이 순교하고 400여명이 유배됐다. /조선
[1616년] 프랑스의 화가 부르동(Bourdon, Sébastien) 출생
← 모세와 놋뱀
1616. 2. 2 ~ 1671. 5. 8
주로 역사화나 종교화의 배경에 그린 자연 풍경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또한 다채로운 풍자화와 생동감 있는 초상화로도 유명했다. 다른 화가들의 양식을 모방하고 거기에 자신의 화풍을 약간 덧붙이는 데 뛰어났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개발하지는 못했다.
7세 때 아버지가 그를 어느 화가의 견습생으로 파리에 보냈으나 14세 때 그만두고 보르도와 툴루즈를 여행했다. 재정적인 후원을 받지 못하여 군대에 들어갔으나 한 장교가 그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여 제대시킨 뒤 1634년 로마에 갈 수 있도록 자금을 대주었다. 거기에서 부르동은 화가 클로드 로랭과 니콜라 푸생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작품을 모사하여 미술상인에게 넘겨주는 일을 했다. 그는 1637년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작품을 의뢰받았다. 1643년 노트르담 대성당으로부터 성 베드로의 순교장면 제작을 의뢰받았으며, 이 기간에 '그라몽 저택'의 장식과 샤르트르에 있는 생탕드레 교회의 지부를 위한 〈성 안드레아의 순교 Martyrdom of St. Andrew〉 등 여러 다른 작품들을 완성했다. 1648년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으며, 그곳의 교수 겸 학장이 되어 미술의 당면 문제들에 관한 감명 깊은 공개강연들을 주최했다.
1652년 스웨덴에 가서 곧 크리스티나 여왕의 수석 화가가 되었으며, 여왕은 그를 위해 여러 차례 포즈를 취해주었다. 1653년 파리로 돌아와 생브누아 교회를 위하여 〈죽은 그리스도 Dead Christ〉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정부로부터 여러 작품을 의뢰받기도 했다. 1657년 몽펠리에로 가서 그곳의 대성당을 위하여 〈시몬 마그누스의 타락 The Fall of Simon Magnus〉이라는 대작을 그렸다. 말년에는 쾰른 시와 성 게오르기우스 수도원으로부터 의뢰받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걸작인 '브르통빌리에르 저택'의 미술품 전시실을 위한 장식화는 이 시기에 그린 것이다. 튈르리 궁에 있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헤라클레스의 화신 The Deification of Hercules〉은 그의 죽음 때문에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브리태니커
[1522년] 이탈리아의 수학자 페라리(Ferrari, Lodovico) 출생
Ludovico Ferraro라고도 씀.
1522. 2. 2 파팔 볼로냐~1565. 10. 5 볼로냐.
4차방정식의 일반해를 최초로 구한 사람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때 유명한 이탈리아의 수학자 G. 카르다노의 심부름꾼으로 고용되었다. 카르다노의 강의에 참석해 라틴어·그리스어·수학을 배웠고, 1540년 카르다노의 뒤를 이어 밀라노에서 유명한 수학강사가 되었다. 그때 4차방정식 해를 발견해 나중에 카르다노의 저서인 〈위대한 예술 Ars magna〉(1545)에 발표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저명한 이탈리아의 수학자 N. 타르탈리아와 3차방정식 해에 대해 유명한 논쟁을 하게 되었다. 6차례 글로써의 논쟁 끝에 두 사람은 1548년 8월 10일 밀라노에서 만나 공개적인 수학논쟁을 하여 페라리가 승리했다. 그는 곧 명성을 얻었고 여러 가지 직책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다. 그중 만투아의 통치자인 C. E. 곤자가 추기경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금과세 집행관자가 되어 부유해졌으나 나빠진 건강과 곤자가와의 다툼으로 부귀를 보장하던 그 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그뒤 볼로냐대학교 수학교수직을 받아들였으나 곧 죽었다.
그 밖에
2007년 중국 해저 7천m 탐사 有人잠수정 세계최초 개발
2001년 검찰,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41억달러 해외 유출 발표
2001년 한국부동산신탁, 정부투자 공기업으로 첫 최종부도처리
1995년 이한기 前 총리 별세
1991년 최희용 WBA 미니멈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9년 대학생 과외 전면 허용
1985년 동호대교 개통
1983년 국민학교 4.5.6학년 교과서 개편
1982년 미국 X선 레이저장치 개발
1981년 한국방송공사 교육TV 첫 방영
1981년 한미 정상회담, 주한미군 철수계획 백지화
1970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방우영 취임
1968년 미국 북한 푸에블로호사건 비밀협상 개시
1964년 미국 레인저6호 달 ‘고요의 바다’에 착륙
1962년 미국 일본 관세인하협정 조인. 미국 쿠바와 전면금수
1959년 미국 남부버지니아서 처음으로 흑백공학 실현
1959년 맥밀런 영국 수상 소련방문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1954년 소련의 영화감독 베르토프 사망
1953년 미국 대통령 일반교서 발표, 얄타협정 폐기요청, 대만중립화 해제선언
1953년 바이올린 연주자 채동선 사망
1951년 유엔총회, 한국전쟁개입한 중공 탄핵안 가결
1950년 국회, 농지개혁법 수정안 통과
1949년 초대 주미 대사에 장면 임명
1947년 최초의 폴라로이드 사진 촬영 시연
1946년 제1회 전국 빙상선수권대회 소양강서 개최
1943년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 사임
1932년 국제연맹주최, 제네바 군축회의 개최
1924년 그리스 공화제 선포
1913년 뉴욕의 호화 기차역 그랜드 센트럴 개관
1901년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 출생
1875년 오스트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 출생
1639년 선혜청에 진휼청을 설치
962년 신성로마제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