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모경>에 의하면 낙랑은 남옥저의 땅이라고 한다.
여기의 낙랑은 한4군의 낙랑이 아닌 옛 최리의 낙랑국으로 알려진 곳이다.
낙랑은 본래 동부여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고구려의 건국공신 협부는 낙랑왕 시길의 사위가 되었으며, 낙랑은 동부여와 고구려를 오가며 소식을 전하며 두 나라를 이간질하기도 하였다.
낙랑은 본디 말갈의 한 종족이기도 하였다.
백제 온조왕과 낙랑국이 화친이 깨어졌을 때 낙랑이 말갈을 동원하여 공격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진말한초(秦末漢初)에 유민들이 들어와 한(漢)나라 낙랑군과도 교통하며 지냈는데, B.C.11년 7월에 백제가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움으로 낙랑군과의 교통로가 차단되었다.
나라의 국경에 적을 방비할 수 있은 성책(城柵)을 세우는 일은, 다른 나라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백제 온조왕 당시에 낙랑은 말갈의 영토와 지척에, 백제의 동쪽, 신라의 (동)북부에 있었으며, 낙랑의 영토는 후에 말갈과 백제와 신라에게 잠식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리의 낙랑은 한반도의 동북부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추정된다.
낙랑이 옥저(沃沮)의 땅이라고 하니 옥저에 어떤 뜻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옥(沃)에는 ①물대다 ②기름지다 ③관개하다는 뜻이 있고, 저(沮)에는 ①막히다 ②저지하다 ③방해하다의 뜻이 있다.
옥저(沃沮)를 만주어로 해석하여 산림(山林)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옥저(沃沮)는 산령(山嶺)이나 강물의 방해를 받아 적을 방어하기 쉽고, 땅이 기름져서 농사(특히 논농사)를 짓기 좋아 입국(立國, 나라를 세움)하기 좋은 땅이라는 뜻의 지명(地名)을 나타내는 용어다.
예족이란 예(濊, 물이 깊다, 넉넉하다, 더럽다) 또는 예(穢, 더럽다, 거칠다, 잡초)로 쓰이나 한문의 뜻대로 풀어서는 안 되고, 파자(破字)해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예(濊)를 파자하면 수(水, 물)와 세(歲, 해, 세월)로 나누어지는데, 세세대로 물가에서 산다는 뜻이고, 예(穢)를 파자하면 화(禾, 벼)와 세(歲, 해, 세월)로 (벼)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백제에게 예족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 것은 이들은 논농사를 위주로 하여 생활하였음을 의미한다.
맥(貊)에 대해서 살펴보려면 삼국유사 마한조의 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씌었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었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또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貊國)이다.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다.”
옛날 책에는 맥(貊, 북방종족의 이름, 맹수의 이름)대신에 맥(麥, 보리)라는 이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사람들은 주식이 보리였음을 보여주는 기사다.
그렇다면 말갈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
말갈(靺鞨)을 한 자씩 해석해 보면 말(靺, 북방민족이름, 오랑캐이름, 버선)과 갈(鞨, 북방민족이름, 오랑캐이름, 가죽신)로 나뉘는데, 가죽으로 신발을 해서 입는 다는 이외에는 다른 뜻을 발견하기 어렵다.
신라사초에는 말갈(末曷)이라 하고 있는데, 말(末)은 ①끝 ②중요하지 않는 부분 ③신하 ④백성의 뜻이, 갈(曷) ①어찌하여 ②언제 ③누가의 뜻으로 합성하면 언제 어찌하여 살게 된 백성이라는 뜻이다.
또 靺鞨에 공통적으로 혁(革, 가죽)이 붙는 것으로 보아 유목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백성들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국에 대한 연원은 사서에 자세하지 않으므로 자세한 사항을 살피기 어려우므로 고구려 건국공신 협부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낙랑(국) 등 제국(諸國)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협부가 유리왕에게 쫓겨남을 당하여 바다를 건너 다파라국을 건설하였다하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남한(南韓)으로, 남당유고 고구려사초(략)에는 신라로 갔다고 하였다.
협부가 유리왕에게 쫓겨나서 어디로 갔는지는 사서마다 달리 말하고 있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에는 협부를 탈해와 직접 연결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와 남당유고 상장돈장에는 탈해가 다라파국왕의 아들이라 하므로 먼저 협부가 다파라국을 건설한 이후에 그 무리들이 신라로 건너온 듯 하다.
탈해 또는 다파라왕자라 불렸던 한 인물이 신라로 건너간 것은 A.D.42년경으로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야의 건국과 탈해의 입국기사를 선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다만 수로임금과 싸웠던 탈해는 신라왕 탈해이사금과 동일한 인물이 아니며, 수로왕 역시 파사이사금 기사에 나오는 청예왕과 다른 분이다. 이들은 모두 탈해이사금과 청예왕의 조상들로 같은 시호로 기재함으로써 혼돈이 생겼을 뿐이다.
고구려사초에 온조왕의 셋째 아들로 추정되는 다루(多婁, 다루는 실제로 여러 왕들의 시호로 등장한다. 온조에게서 3명의 아들이 보이는데 그 중에서 온조와 재사공주(예씨의 소생)의 아들을 말함)가 대무신왕에게 박해를 받던 백제계 사람들을 규합하여 남으로 분립(分立)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소서노의 옛 신하들을 서인(庶人)으로 축출한 사건에 이어 등장한다.
먼저 온조왕의 아들을 설명하자면, 온조의 장남 다루(多婁)는 온조의 형인 비류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일찍 죽고, 장남 다루의 아들 양인의 대(代)에서 A.D.41년에 고구려로 흡수되었다. 둘째 아들인 다루(多婁)는 달리 마루(馬婁)라고도 하는데, 이 후손들로 백제가 계승된 것으로 보여 진다. 마한(馬韓)지방에서 자립하였으나 고구려에 내부하면서 신라와 가야의 분립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던 세력으로,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반에 마지막으로 고구려에서 분립하였다.
대무신왕이 온조왕의 아들 중에서 가장 신뢰한 것은 셋째인 다루로 온조왕의 아들 모두가 주몽의 자손이기도 하지만, 특히 셋째는 유리왕의 여동생인 재사공주(추모와 예씨의 소생)의 아들이었다. 대무신왕이 셋째 다루의 분립을 받아들인 것은 남쪽에 있는 신라를 깨뜨리기 위함이다.
대무신왕이 자신의 군대로 신라를 깨뜨리지 않고, 남의 손을 빌려 신라를 깨뜨리려 하였을까 의문이 든다. 본래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의 유명(遺命)은 아들 유리왕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리왕의 아들 도절태자에게 있었다. 이 기사는 남당유고 백제왕기에 보인다. 유리왕은 도절이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신라를 지켜주었으나, 대무신왕의 경우는 배다른 형이고, 적통이 늘 신라에 있는 도절에게 있음으로 인하여, 언제 자신의 자리를 노릴지 몰라 늘 노심초사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도절태자의 신라를 정벌하는 것은 추모의 유명을 거스르는 사직에 중대한 범죄가 되었다.
유리왕의 아들 도절태자는 B.C.6년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지는데, 출발한 시기가 정월이고, 소서노가 죽은 시기가 같은 해 2월이다. 도절이 볼모로 보내진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소서노의 죽음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이 각각 나뉘어져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해 11월에 동부여가 병사 5만을 이끌고 왔다가 동사(凍死)한 사건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있으며 B.C.6년 1, 2, 11월 사건의 발단이 된 내용이 삭제되어 기록하였으므로 이에 대해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삼국사기에는 도절태자의 모후에 관한 기록이 누락함으로써 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 하였다. 남당유고 백제왕기에는 도절태자가 소서노의 딸인 아이후의 소생으로 소서노의 외손자 하였다.
A.D.1년 정월 도절태자가 동부여에서 돌아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그렇다면 B.C.6년 11월에 동부여가 고구려를 침입한 것은 도절태자가 동부여로 볼모로 가지 않음으로 인하여 발생한 전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5월의 비류의 사망기사가 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는 사망사실을 머리기사에 기록하여 전후 관계를 살필 수 없게 하였다.
도절태자가 동부여로 볼모로 갈 때와 돌아올 때 모두 도절의 최근친들이 하나씩 죽었다는 사실이 석연치 않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도절태자 사망당시에 협부가 태보에 올랐다는 기록이다. 추모경에 소서노전에 보면 협부가 소서노의 불구대천지원수라 하였다. 추모경의 기사가 나에게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협부가 소서노 일가에게 왜 그렇게 못된 짓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남당 유고의 전 분야가 해석해야만 하나씩 실마리를 완성할 수 있다.
보다 앞으로 기사를 옮겨 살펴보면 유리가 동부여로부터 고구려로 온 것은 유화부인이 사망한 B.C.24년이다. 동부여에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왔으나, 추모가 외면해 버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추모왕이 사망 직전에 동부여를 탈출하여, 추모가 아들임을 알고 받아들였다는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추모가 왜 아들인 유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B.C.24년 해소(解素, 금와와 유화의 아들, 추모의 동복아우, 유리의 양아버지)의 도움으로 동부여를 탈출하여 송양의 집안에 기대어 살았다. 하루는 추모가 사냥을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활을 준비하여 마침 추모가 노리고 있던 사냥감을 잡아 추모에게 바쳤다. 추모가 몹시 불쾌해하여 벌을 주려하였으나 복장이 낯이 익은지라 살펴보고 자신의 자식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와는 달리 남당유고는 유리를 궁궐로 부르거나 약속이 없이 돌려보냈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유리가 아버지 추모를 원망함이 있었던 것 같다. 혹자는 유리와 궁궐로 들어오는 시기와 추모가 사망한 시기가 유사함으로 인하여, 유리가 추모를 시해하였다고도 추측하기도 한다.
유리가 속상하여 돌아오자 해소가 유리에게 물려준 재산으로 백성들을 보살피고 구휼하면 곧 아버지에게 소문이 들어가 곧 너를 부를 것이라고 하였다. 유리는 송양의 집안에서 머물면서, 아버지의 눈에 뜨이도록 의술과 구휼에 힘썼다. 결국 보람이 있어 소서노의 눈에 뜨이게 되어, 드디어 궁궐로 들어오게 되었다.
남당유고 백제왕기에는 추모에게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에게 기른 정이 도타웠으며, 고구려의 건국의 공(功)을 소서노의 전남편 구태(백제왕기에는 優臺)에게 돌리려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서노가 나라의 제삿밥이 추모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유리를 태자로 세우고 소서노와 구태의 소생인 아이를 비(妃)로 세우자고 하였다. 소서노에게 태자의 지위를 유리에게 양위하자고 권한 것이 협부라고 한다.
당시 추모에게는 몸이 약하고 굳세지 못한 비류를 대신하여 온조가 후계자로 정하여져 있었으나, 소서노의 딸 아이(阿爾)가 유리를 좋아하여 임신을 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되자 협부가 을음을 구슬려서 소서노를 설득하게 하고, 소서노는 유리의 인간됨을 믿었던 지라 온조에게 의사를 물어보니 온조 또한 응낙하여 고구려의 후계가 드디어 유리에게로 정하여지게 되었다.
추모는 자신의 아들임에도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었던지 유언으로 비류와 온조에게 남쪽의 땅을 분할하게 하는데, 이것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의 분국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추모가 죽고 유리가 고구려의 왕위를 잇게 된다. 추모 생존 시 임신하였던 소서노의 딸 아이(阿爾)가 출산하기에 이르렀는데, 유리왕은 전부인 송양의 딸 송씨를 불러 정을 통하였다. 소서노가 사위인 유리를 불러 꾸지람하는데, 송씨와 정을 통한 것도 거슬렸으나 출산의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제왕기에서는 송씨와 불륜을 한 것을 꾸지람했다고 하나, 임금이 여러 명의 첩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날이 출산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장모인 소서노가 유리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신라사초에 보면 아기를 씻기는 일은 아버지가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는 행위로 도절의 정통성문제와도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서노가 유리를 꾸짖는 것이지만, 유리는 영웅호색이라며, 자신이 천자(天子)임을 강조하였다.
사실상 유리를 고구려의 왕으로 만든 것은 자신인데,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생각한 소서노는 아들들과 상의하여, 추모의 유언대로 남하하여 버린다. 그러나 남쪽의 상황이 만만하지 않았다. 비류와 온조 형제가 나라를 세운 곳은 말갈과 낙랑이 가까이 있음에도 가신들만 데리고 나온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분국(分國)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홧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 구태의 소서노의 소생인 아이와 추모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감아(甘兒)를 두고 왔다.
아마도 고구려로 돌아가려는 생각도 있었던 듯하다. 도절을 유리의 후계자로 이어주려면, 어찌되었든 추모의 왕후인 소서노는 궁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B.C.13년 백제와 낙랑이 우호(友好)를 잃었고, B.C.7년 정월에 아이후가 사망하였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도절은 후계구도에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소서노가 가서 외손자를 지켰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해에 금와가 죽고 대소가 섰다.
B.C.6년 낙랑이 동부여에게 고구려에게 도절을 볼모로 요구해 보라고 한다. 이전까지 동부여와 고구려 사이에는 나쁜 감정이 없었다.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인 구태는 금와왕의 아들이고, 유리왕의 어머니 예씨 또한 금와왕의 딸이었다. 고구려 추모왕 당시에 유화부인과 유리가 동부여에 있어서 사이가 나빴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후대를 생각하면 대소가 자신의 딸을 도절에게 시집보내면 도절이 유리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테고, 자신의 외손이 고구려의 왕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한 대소는 도절을 보내달라고 고구려로 사신을 보낸다.
그러나 대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백제계로서는 마음이 불안하기만 하여 B.C.6년 도절이 동부여로 보내지자, 외할머니인 소서노가 미추홀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배웅을 나간다. 소서노의 불안감은 다른 데에서 터지는데, 미추홀이 호랑이의 습격을 받게 된다. 젊은 병사가 없는 미추홀은 호랑이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고, 소서노가 이 일로 병이 들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수수께끼 사건으로 남아있고, 남당유고에도 같은 기록을 반복하여 기록하였다. 그 만큼 은밀히 이루어졌으며 실제로 호랑이가 일으킨 일이라면 무슨 증거가 있겠는가. 백제가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데, 고구려가 그 잘못을 동부여에게 뒤집어 씌웠다. 동년 11월 소서노의 사건에 대한 진실을 따지기 위해 동부여가 군사 5만을 이끌고 고구려로 오지만 결국 동사자만 남기고 돌아가게 된다. 생각해 보면 고구려는 이미 동부여가 원하는 인질을 보냈는데, 무슨 이유로 고구려를 쳐들어와야 하는지 이유는 없고 결과만 있다. 이 사건의 본말이 드러나는 것은 A.D.1년 정월에 도절태자 사망기사와 연결된다.
A.D.1년 정월에 도절(都切)태자가 동부여에서 돌아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동부여에서 망명생활 6년 동안 정상적으로 지내다가 갑자기 고구려로 돌아와 죽는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남당유고 본기신편열전에는 도절태자와 동부여 대소왕의 딸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한다. 아마도 딸의 임신사실을 확인한 대소가 도절을 고구려로 돌려보내기로 하였던 것 같다. 대소의 딸 이름에 대하여 밝혀진 바는 없으나 백제사와 고구려사에서 두 모자가 한꺼번에 사라진다.
한단본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부여제실의 공주 선도성모가 아비 없는 자식을 임신하여 도망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자라서 신라의 건국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신라의 기사가 고구려본기에 들어있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거니와 그렇다면 신라의 건국기년이 몇 년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선도성모의 아버지가 대소왕이고, 혁거세의 아버지가 도절이라면 선도성모는 유복자를 낳은 셈이니 혁거세의 출생은 A.D.1년이다. 신라의 건국기년은 후한 광무제 建虎 元年(建武 元年)인 A.D.25년인 것이다.
도절을 죽었다고 한 계책도 협부에게서 나왔다. 아마도 동부여에서 돌아오는 길에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처럼 속이어 장례를 치른 것 같다. 대외적으로 도절이 죽었다고 공표되자 살아있는 도절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도절은 당시 고구려에 있던 외삼촌 비류를 만났다. 모든 사서가 도절이 죽었다고 하는데, 본인이 죽지 않았다고 하는 연유는 상장돈장에 남해차차웅의 비(妃)인 운제성모의 아버지가 혁거세의 부친과 동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류는 자신의 세력을 모아 도절이 살아있음을 알리려 하나, 그 일이 어이없게도 협부의 귀에 들어가고 만다. 협부가 비류를 비관하여 죽은 것처럼 위장하였다.
비류가 졸본으로 돌아가게 된 동기는 B.C.2년 봄에 낙랑이 위례성으로 쳐들어와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이로 인하여 기반을 잃은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로 가지 않고 졸본으로 간 듯 하다. 동생 온조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조카인 도절의 기반이 송씨의 소생들에 비해 약해졌다고 판단하여, 자신이라도 유리에게 굽히고 벼슬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협부는 비류가 살해 된 것을 자신의 나라를 잃고 조카도 죽어 비관하여 자살하였다고 위장하였다.
살아있던 도절은 자신이 고구려의 왕궁으로 들어갔다가는 자신도 진짜로 죽임을 당할 줄 알고, 동부여로 돌아갔다. 동부여의 대소가 살펴보니 죽었다는 자신의 사위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도절의 장례를 치르고 새로운 태자까지 세워버렸다. 도절을 복귀하려면 소서노, 어머니 아이(阿爾), 적어도 외삼촌 비류의 인지(認知)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모두 죽고 없었다. 동부여 내에서도 도절이 죽었다는 것을 믿었으며, 도절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주는 사람은 부인인 선도성모(仙桃聖母)밖에 없었다. 선도가 밖에 나가 있는 온조에게 힘을 빌어보라 하였다.
당시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너의 나라의 태자이니 데려가라 해도 너희들이 고치지 못할 병에 걸리니 데려다 놓았으며, 우리는 이미 시신을 확인하고 장례를 지냈다 라고 하며 오히려 모든 책임을 동부여에게 지우려 할 것임을 알았다. 당시의 친자 감별이란 닮았는지 아닌지를 육안으로 식별하였으니, 육친의 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도절은 마지막 남은 외삼촌 온조에게 가 보았다. 그러나 온조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동부여가 협력하면 어머니와 형과 여동생의 복수를 모두 할 수 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을 수는 있으나 도절 너에게 유리는 사사로이 아버지가 되고, 너의 아버지 또한 연루되어 있다. 너는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될 수 있으며, 아비를 죽인 왕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며 반문하였다.
도절은 울면서 다시 동부여로 갔는데 세상일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임신한 아내 선도성모와 어디론가 홀연히 떠났다. 도절과 선도성모가 사라졌다 하여, 동부여와 고구려사이에 갈등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동부여에서는 B.C.6년 11월에 고구려로 갔다가 병사 5만을 동사(凍死) 시키고 돌아온 전례가 있어 이번만큼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기에 늦어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구려에서도 마냥 불안해하며 기다릴 수는 없었으므로 A.D.2년 3월 짜여진 각본에 따라 천도를 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멀리 도망가 버리자 우세를 점칠 수 없는 대소는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하여 동부여 내부에 불만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의(不義)한 적을 내버려둔다는 취지의 반란으로 보인다.
온조 또한 협부의 일을 덮을 수는 없었는데, 천도로 인하여 유리와 협부가 틈이 간 것을 확인 한 온조는 그 동안의 일을 유리에게 책망을 하였다. 유리는 얼굴이 붉어지며, 협부를 내쫓기로 결심하였다. A.D.3년 12월 유리가 오랫동안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협부가 간언을 하자, 그 일을 핑계로 협부를 강등하여 버렸다. 개국공신이 쓴 소리 한마디 한 것을 이유로 형편없는 자리로 강등시킨 기사와 자신의 자식을 죽게 만드는 후일의 기사를 보면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읽으면서도 유리가 변덕이 심한 왕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겠으나, 이로 인하여 유리는 자신이 몰랐던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심한 자책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협부는 내쫓았으나 협부와 공모한 송씨(宋氏)의 소생들이 미워하는 감정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하여 A.D.8년 3월 해명(解明)을 죽게 만든 후에 자신이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래의 마음을 되찾고자 노력하였던 것 같다.
A.D.3년 12월 협부는 자신이 관직에서 박탈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곧 유리에게 제거당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왕후 송씨가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가도록 권하는데, 이때 자신의 수하였던 낙랑의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도망치니 이것이 다파라국의 탄생 배경이다. 협부는 일본 초대천황인 신무(神武)로 추정된다.
일본 고서기의 신화는 백제왕기를 매우 닮아있다. 일본 최초의 삼신은 추모와 구태와 소서노이고, 그 사이에 태어난 부부신이 유리와 아이후로 부부신중에 부인이 먼저 죽었다는 이야기도 같고, 신무(神武)가 고천원(高天元)을 파괴하고 달아난 자 임을 설명하는 것도 같다. 일본 초대천황인 신무(神武)는 역신(逆神)인 것이다.
또 다파라국의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추모와 낙랑왕 시길의 아들인 작태자(鵲太子)다. 탈해의 성씨는 석(昔)인데, 작(鵲)에서 조(鳥)가 빠진 것을 자신의 성씨로 하였다. 고구려사초에도 유난히 석(昔)씨 계열의 왕과 고구려가 친하고 백제와는 원수처럼 지냈다. 신라와 백제의 전쟁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도 탈해이사금이 처음이다. 신라가 길선(吉宣)의 송환문제로 다투기도 하였으나, 백제가 길선을 모반을 지원하는 것은 지마계열의 복위를 위한 것이었고, 아달라 시기에 백제와 신라가 좋지 않았던 것은 석(昔)씨인 벌휴가 태자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반적으로 백제와 석(昔)씨는 앙숙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작태자는 추모와 낙랑왕 시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협부의 슬하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며, 협부의 딸과 결혼했던 것으로 보인다. 협부와는 사사로이 이모부이거나 장인과 사위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협부의 일로 신분에 위협을 느꼈던 작태자 또한 달아나 다파라국의 후계자가 되었던 것 같다. 또는 작태자가 협부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남당 유고를 모두를 살핀 것이 아니라 그런 기록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남당유고가 양이 많고 공부를 한 이가 적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돌려 유리는 온조가 모든 일을 알면서도 자신의 허물을 덮어준 온조가 고마웠다. 온조의 그루터기를 길러 그 동안의 잘못을 빌고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아직 동부여와 대치하고 있던 상황으로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있던 유리는 A.D.7년 온조에게 군사와 식량을 3년 동안 보내어 마한의 정벌을 도우니 비로소 백제가 제대로 된 나라를 건국하게 된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마한의 땅을 물려받은 것이 둘째아들 마루(馬婁)로 보인다. A.D.8년 3월 해명(解明)태자가 유리에게 죽음을 명(命) 받은 것은 해명이 백제에게 고구려의 병사를 보낸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고구려의 원조가 3년으로 중단 된 것은 대소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 대불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세력이 역전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동부여의 외침을 걱정하면서도 과감하게 병사를 돌릴 수 있었던 것은 A.D.7년에 발생한 동부여의 대소형제들 간의 내란 때문이다. A.D.10년에 동부여가 남북으로 갈리어 큰 전쟁이 발생하였고, A.D.14년에는 대불이 대소를 죽이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아마도 불의(不義)한 고구려를 정벌하지 않는 대소에 내부의 반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A.D.12년에 후한의 왕망이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후한서에도 등장하는 전쟁기사다. 또 A.D.19년 위나암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다시 본래의 도읍인 졸본으로 다시 옮겨와 살았다. 이는 고구려 강경노선을 주장한 동부여의 새로운 왕 대불(帶弗)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A.D.23년 동부여의 대불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가 왕자 무휼(훗날의 대무신왕)에게 패배를 당하고 돌아갔다. A.D.31년 12월 고구려가 동부여의 정벌을 단행하여, 다음해인 A.D.32년 2월까지 긴 전쟁이 이어졌다. 이 전쟁으로 동부여의 왕 대불이 죽고 이 때부터 동부여는 사실상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이 때부터 고구려와 동부여의 양다리외교에서 살아 숨쉬던 낙랑은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낙랑은 고구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시길의 후손이자 추모의 아들인 작태자 혹은 그 후손을 낙랑의 왕으로 세우게 된다.
한편 동부여의 멸망은 백제계에는 큰 타격이 되었다. 이미 온조와 유리왕은 사망하였으며, 그 자손들이 섰다. 대무신왕은 A.D.41년 11월 미추홀의 수해로 이유로 비류백제를 거두어들이고, A.D.42년 3월 소서노의 신하들을 서민으로 전락하게 하니 백제계가 더 이상 고구려에 붙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백제는 온조가 나라를 3개로 나누어 아들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에 아직 기반을 잡지 못한 터였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한반도 남쪽에 자리 잡은 신라인데, 고구려 내부의 정서를 고려하여 자신의 힘으로 직접 정벌은 불가하므로, 낙랑을 조정하여 수시로 괴롭히게 하였으나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라임에도 나라가 탄탄하였다.
온조왕의 셋째 다루(이하 수로라 바꾸어 칭한다)는 대무신이 자신의 척족들을 잘라내자 불안감에 싸였다. 그리고 관직에서 밀려난 척족들이 자신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무신이 자신을 총애하고 있으나 자신에게로 세력이 몰리면 자신도 의심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내쫓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일로 고심하고 있자, 어머니 재사공주가 남쪽으로 내려가면 어떻겠느냐고 조심히 물었다. 재사공주는 왕실에서 몇몇만이 아는 사실을 아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수로는 고심 끝에 남하하기로 결심하였다. 삼국유사 노례왕 기사에 A.D.42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삼국사기에는 관련 기사가 나타나지 않고, 온조왕의 셋째인 다루가 신라를 치고 남하하려는 사건이 남당유고 고구려사초에 나온다.
그러나 남하하는 것을 어떻게 대무신왕에게 설명해야 하는지 난감하였다. 그리하여 대무신왕이 탐내던 한남(汗南)의 땅은 말갈이 수시로 침입하여 살기 힘드니, 신라를 쳐서 자신의 땅으로 하고 싶다고 건의하였다. 마침 남쪽 신라가 마음에 걸렸던 대무신은 좋은 일로 받아들이나, 수로에게 다른 마음이 있지 않나 의심이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대무신왕은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이 낙랑왕인 탈해가 대대로 우리에게 충성하였으므로 맡겨보자 하였다. 일단 한남의 땅을 취하고, 만약 고구려에 배반할 뜻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한꺼번에 없애버리자고 하였다. 대무신왕이 그 보다 더 좋은 생각은 없을 듯 하여, 수로가 자신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남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드디어 대무신왕이 수로를 불러 한남(汗南)의 땅을 바치고 신라를 쳐서 남하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수로가 부랴부랴 떠날 준비를 하고, 대무신왕에게 보고를 하는데 어떤 장수하나가 대군을 이끌고 와 있었다. 대무신왕이 웃으며 너를 돕기 위해 보낸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
수로는 대무신왕이 장수와 군사를 딸려 보내는 것이 좋은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사양하는 것이 오히려 왕의 의심만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였다. 더군다나 자신들은 일반 백성들을 거느리고 가니, 탈해의 낙랑군(軍)과는 다툴 수 없었다.
수로는 탈해와 함께 낙랑을 지나 신라로 넘어오면서 어떻게 탈해를 따돌려야 할지를 몇몇 참모들과 상의하였다. 참모들은 어차피 자신은 이미 죽은 몸, 주공을 따라왔으니 죽고 살기를 함께 하겠으며, 낙랑군(軍)으로 하여금 신라의 북쪽 변방을 치게 한 후에 자신들은 신라의 서쪽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이미 탈해도 읽히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여부는 미지수였다.
수로는 탈해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그러나 탈해에게는 처음부터 대무신왕의 명령을 받들 생각은 없었으며, 처음부터 수로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탈해가 웃으며 다루에게 내기를 걸어왔다. 네가 나를 이기면 너의 뜻대로 나도 따를 것이고, 내가 너를 이기면 너는 나를 따라야 하고, 승복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애써 변명하였으나 마음을 들킨 것을 안 수로가 탈해에게 진심을 엿 보았다. 그러자 탈해는 나의 조상인 협부의 일을 잘못이라 생각하며, 조상이 지은 죄를 후손인 자신이 갚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네가 만약 나라를 다스릴 줄 모른다면 자신을 따라 신라를 쳐서 남쪽을 함께 경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윽고 탈해는 자신과 함께 오지 않았더라도, 수로 너는 너의 힘으로 한남(汗南)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땅을 마련해 보아야 한다. 그러니 너는 지금 신라로 가서 그 땅을 약속받고 오라고 하였다. 탈해의 제안은 지극히 당연한 제안이었다. 이삿짐을 싼 사람이 새로 이사 갈 집도 마련하지 않고 나온 셈이었다.
수로가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 재사공주가 다루에게 연유를 물었다. 연유를 다 듣고 난 재사공주가 자신과 신라왕의 부친이 되는 사람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한편, 신라에서도 고구려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6부의 신하들과 제후들이 모여 상의하였으나 예전과 같이 낙랑군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본대가 함께 온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도절태자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고구려에 볼모로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러나 왕의 아버지가 볼모로 간다면 백성들이 왕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또한 재사공주의 신하라는 자가 와서 우리는 신라에게 투항하러 온 것이니, 우리가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를 몰라 애타 하고 있는데, 고구려 정벌군으로부터 사신이 왔다.
신라에서 적국으로부터 사신이 와서 맞이하여 보니 서로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재사공주와 다루에게서 그 간의 사정을 듣고 난 도절태자와 혁거세와 선도성모는 눈물을 흘렸다. 재사공주는 추모의 유복자이고, 도절은 유리왕의 아들로써 서로 나이가 같고 재사공주는 유복자로 태어나 유리왕의 딸처럼 살아왔다. 그러니 재사공주와 도절은 한 동기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재사공주가 너희들이 지금 우리의 살 곳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우리 모자는 여기에서 죽음과 같지 않다고 눈물로 호소하니, 신라의 군신(群臣)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자 신라는 서쪽에 변한이 있는데 살기가 좋은 좋고, 나라를 세워볼 만 하다하였다. 그러나 바깥에 있는 낙랑의 도적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물었다.
그러자 재사공주의 일행에 숨어 있던 낙랑 탈해의 신하 하나가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타내며 말하기를,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하기를 다파라국에서 탈해를 흠모하여 따라 온 호공(瓠公)이라 밝히며, 자신들도 이곳에서 와서 보니 들판에 볏단을 쌓아놓고 가져가지 않으니, 넉넉하여 살기 좋은 곳임을 알겠습니다. 우리에게도 땅과 능력에 맞는 직책을 내려주신다면 설득하겠다고 하였다. 신라왕이 그를 살펴보고 그 의지와 기개가 씩씩함을 알고 허락하였다.
수로와 탈해의 일행이 신라의 인도로 다투지 않고 변한에 도착하자 변한의 군신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곧 수로에게 투항해 버렸다. 탈해는 자신이 내기에서 지면 수로를 따르겠다는 약속을 한 터라 순순히 따르기는 하였으나, 일이 이렇게 될지는 몰랐다. 자신이 수로와의 내기에서 패배하였음을 시인한 것이다.
그러나 수로와 자신의 처지는 서로 달랐다. 수로는 자신의 가족들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온 터이지만, 자신은 군대만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만약에 자신이 수로에게 투항한 것을 알면 낙랑이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았고, 군사들도 그런 걱정이 그치질 않았다.
탈해가 자신의 수하들을 모아 의견을 물으니 그중에는 이곳에 남고 싶다는 이도 있었으나(이들 대부분은 다파라계), 대부분은 부모와 처자식을 두고 온 터라 죽더라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거나, 아예 수로를 죽이고 이 땅을 차지하여 고구려왕에게 바치자는 의견도 있었다. 수로와 탈해군 간에 불신이 조장되어 내란이 있었다.
수로가 신라에게 칭신하며, 도와주기를 청하자 탈해는 가야에서 함께 살 수 없고, 신라로 도망쳐서 항복하였다. 만약 신라가 자신을 받아주면 낙랑에서 많은 유민들이 탈출해 올 것이며, 저를 장수로 삼아 신라를 지키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졸지에 왕을 잃은 낙랑은 새로운 왕을 새우고 고구려에 내속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한번 고구려에게 잃은 신뢰를 되찾기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새로 등극한 최리는 고구려를 대신하여 후한과 손을 잡게 되고, 한편으로는 대무신왕은 마루의 백제를 내속하게 하였다. 마루의 백제는 대부분이 본래 마한의 세력이어서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융화되지 않는 상황이고 마한이 이번 기회를 통해 독립하고자 하므로, 마루의 백제가 죄를 청하였던 것이다.
낙랑은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을 사위로 맞이하며, 고구려의 칼끝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끝나고, 동부여의 멸망으로 기댈 곳이 없어진 최리의 낙랑도 함께 멸망을 당하였다. 낙랑이 망하자 탈해의 쫓아 낙랑의 유민들이 대거 신라로 몰려들고 신라는 이제 작은 나라가 아니라, 주변의 작은 나라가 찾아들고 백성들이 찾아드는 큰 나라가 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혁거세는 탈해와 호공의 공을 기려 그들의 자손들로 하여금 왕후가 될 수 있도록 하라 후손들에게 명하였다. 앞서 말한 탈해는 다파라국의 왕자의 신분으로 다파라국의 왕이 서거함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였고, 다파라왕자와 신라의 공주사이에서 태어난 탈해가 신라의 4대왕 탈해이사금으로 등극하였다. 호공은 이후에 신라의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며, 운제의 어머니와 사이에 알지신군을 낳았다. 알지의 자손 중에 뛰어난 자가 있어 왕위에 오르니 모두 혁거세의 유언대로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탈해이사금와 알지신군은 모두 외부에서 온 세력이 신라의 공주와 결혼하여 낳은 외척(外戚)이다.
|
첫댓글 맥(貊)에 대해서 살펴보려면 삼국유사 마한조의 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씌었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었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또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貊國)이다.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밭을 갈다? 밭田= 사냥하다의 의미가 있으므로.. 왜인들이 예국을 침략해서, 함락시킨 의미로 들리는군요. AD79년도에는 예국이 멸망의 위기에 쳐했다는 의미입니다.
소문국= 예국이라면, 이때 남하했을 수가 있죠.
옛날 책에는 맥(貊, 북방종족의 이름, 맹수의 이름)대신에 맥(麥, 보리)라는 이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사람들은 주식이 보리였음을 보여주는 기사다.
맞는 말입니다. 고구려사초에도 나오죠. 보리 파종 기사.
그러나 대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백제계로서는 마음이 불안하기만 하여 B.C.6년 도절이 동부여로 보내지자, 외할머니인 소서노가 미추홀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배웅을 나간다. 소서노의 불안감은 다른 데에서 터지는데, 미추홀이 호랑이의 습격을 받게 된다. 젊은 병사가 없는 미추홀은 호랑이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고, 소서노가 이 일로 병이 들어 사망하게 된다.
아닙니다. 소서노는 외손자가 볼모로 간느 것에 적극 반대햇다고 봅니다. 그 결과 나타난 기사가 " 할멈이 남자로 변햇다"입니다. 나이든 소서노가 발언권을 행사햇을 것입니다. 호랑이는 사람잡아 먹는 동물입니다. 호랑이 5마리가 궁궐에 들어왔다는 것은 "자객 5명이 소서노를 살해하려고 들어 온 것입니다" 소서노는 유리왕에 의해 살해당햇다고 봅니다. 외손자가 볼모로 가는 것을 환영할 할머니는 없죠. 외손자가 볼모로 가는 마당에 다 반대하죠. 님들도 외손자가 잡혀가는데 다 환영하나요?
할멈이 남자로 변했다는 말중에 할멈은 소서노를 말하는 것이고, 남자로 변했다는 말은 스스로 장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도절이 동부여로 볼모로 가는 길을 무력을 동원하여 막아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미추홀에 들어온 호랑이는 의인화된것이 아니라 실제의 호랑이입니다. 즉, 백제는 늙은 할머니가 장수가 되니, 신이 노해서 호랑이를 보냈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을 자책하는 기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미추홀로 침노한 기사를 고구려와 동부여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결국 인내심이 부족한 대소가 10개월의 침묵을 깨고 고구려로 쳐들어 옵니다.
소서노의 죽음 기사를 백제는 왜 숨겨 놓았을까요? 제 명에 못 살았으니까..숨겨 놓은거죠. 병으로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다고 적혀 있을겁니다. 밣히기 어려우니까..숨긴 것입니다.
기사가 은유되어있죠. 부여+고구려제국의 연합을 꿈꾸던 대소와 소서노는 유리에게 배신당했죠. 그래서 분노했어요. 그래서 대소가 도절만이라도 데려오려고 해서 부여에서 왕위를 잇게 하려고 했는데, 소서노는 그 일을 반대했어요. 소서노는 오해한거죠. 도절이 고구려에서 이어야하는데, 대소가 유리랑 짝짝꿍한 줄 알고.. 그러다보니 유리나 대소는 소서노를 곤란하게여겼고, 제거한거죠.
도절의 전철은 과거 주몽과 유리명왕이 밟았던 것입니다. 주몽이 동부여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 유화와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 있었기 때문이고, 당시 금와가 죽고 아들 대소가 새로 섰습니다. 금와에게 유리왕은 외손자가 되고, 태후인 예씨는 딸입니다. 대소가 즉위하자 고구려를 못믿게 되니 도절을 볼모로 보내달라는 것이고, 자신의 딸과 사이에 아들을 낳는다면, 외손자가 볼모가 되므로 도절은 돌려줘도 되는 것이죠. 대소의 뜻은 순수?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소서노가 발끈한 것이죠.
발끈한 소서노를 동부여가 추모의 시절을 이야기하며 설득합니다. 소서노는 힘들지만 어려운 결정을 합니다. 소서노가 돌아와 보니 호랑이가 미추홀을 덮쳐 호환이 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서 늙은 할멈이 장수가 되어 호랑이신이 노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원래 소문이란 걷잡을 수가 없는 것이라 이일로 소서노가 병이 들어 죽게되는 것입니다.
대소는 고구려가 더 커지는 것을 두려워 하여.. 차기 왕으로 제일 똑똑한 도절을 요구햇던 것이죠. 부여에서 왕위를 이를 사람은 대소의 아들들이 많으니..도절은 단순한 볼모입니다.
소서노계와 유리왕계의 대립이에요. 유리왕은 소서노 세력을 약화시킬려고 했고.. 도절이 차기 왕위를 이으면 소서노의 세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럼 면에서..유리왕은 후궁들의 아들들에게 태자의 권한을 줄려고 햇을 것입니다. 후궁들의 아들은 소서노 세력과는 출신이 다르기에.. 유리의 핏줄로 승계되는거죠.
도절이 볼모로 가게 되면 후궁의 아들들이 태자로서 물망에 오릅니다. 송씨가 제일 주도적인 인물이지요. 소서노 vs 유리왕의 대립이 아니다면, 소서노 vs 송씨의 대결구도입니다.
그런데 호랑이 사건이 이번에는 고구려와 동부여를 덮칩니다. 미추홀은 고구려와 동부여의 경계에 있었으니까요. 고구려는 소서노가 도절을 보내려 하지 않으니 보복으로 호랑이를 미추홀에다 풀었다고 소문이 난 것입니다. 사실 소문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죠. 이 문제는 국제적인 문제라 백제가 상당히 풀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 문제만 보려면 풀리지 않고, 도절이 돌아와서 비류가 죽은 기사도 함께 풀어야 답이 나옵니다.
도절은 소서노가 있는 곳으로 갈려고 햇을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의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죠. 유리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볼모로 보내지 않으면 대소의 군대의 쳐들어 온다는데 유리왕의 입장에서도 도절을 쉽게 포기하겟나요?
siraki님 윗글의 펌글은 저의 글입니다. 오해하시는 바가 있어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