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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후3:10-17/ 내 발의 등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주의 말씀은 인생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 발에 등이 되고 우리 길에 빛이 되는 것입니다.[빛은 어두움에 싸여 밝음을 [선, 바름,지혜을 밝힌다]
시편 19편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사실 자연계를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이 자기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합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일반적으로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그 뜻을 나타내십니다. 혹은 세계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나타내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에게 그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이삭에게도 그러했습니다. 야곱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모세를 특별히 불러서 그에게 그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그의 고의를 나타내시고, 사랑을 나타내시고, 그의 성품을 더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그 아들을 통하여 친히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은 여러 시대, 여러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대한 우리 인류에게 주실 말씀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속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선과 악을 분별케 해주시고 선을 행할 때에 격려하여 주시고,
악을 행할 때에 경고하여 주시고 책망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 속에서 주의 말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귀가 있어서 들을 만한 자는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행5;32‘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성령의 역사는 순종과 밀접한 관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계와 인간 속에 주의 말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타락된 이후에는 이 음성을 바로 듣지 못합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양심도 부패하여 화인을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 왜? 하나님은 나만 그렇게 하는냐? ...순종의 과정에서,,,” 과연 하나님의 성령의 말인가, 나의 생각일까 , 긴가 민가 상황이 생긴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있어서...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아예 듣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런 태도는 결국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듣게 된다.
결국 영적 곤고한 생태에 시간이 흐른후,,,하나님과 대면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 하나님의 말씀 하시는데 네가 잘못 알아들어놓고 ”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안듣겠어“ 하는건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을 믿었지만 99세까지 23년간은 슬쩍슬쩍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내는 사라입니다.
하갈은 하나님께서 허락한 아내가 아니었는데, 아내 사라가 함께 자라고 하니 못 이기는 척하면서 하갈을 품고 잤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흠이 많았습니다.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창세기 17장에 나와 있습니다.“아브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 앞에 있으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이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욕심]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순종에는 엄청난 자기 부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순종은 최고의 순종이라고 인정 받을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 점을 인정 하십니다.
[창22; 12]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34장을 보면, 야곱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야곱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 디나가 세겜 성의 추장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화가 난 디나의 오빠들이 묘한 작전을 씁니다. 칼을 품고 들어가서 세겜 성의 남자들을 다 쳐죽입니다. 그 일로 그 고을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야곱의 집을 쓸어버리려고 복수의 칼을 갑니다.
“들어온 사람이 동네를 팔아 먹는다더니,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야곱이 이 성을 이렇게 쓸어버리다니!”
야곱이 그 정보를 알고는 벼랑 끝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아, 하나님, 어쩌다가 이렇게 끝나게 되었습니까?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몰살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어쩌다가 내 딸이 강간을 당하고, 내 아들들이 칼부림을 하고,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까?’
벼랑 끝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야곱, 벧엘로 올라가라.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 너를 만났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라. 벧엘에 가서 제단을 쌓아라.”
그가 깨닫습니다.
‘아, 세겜 성에서 사업이 잘되고 재산이 불어나는 것 때문에 내가 예배에 게을렀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약속한 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했구나. 벧엘을 잊고 살았구나.’ 여러분, 정신을 차리고 들으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해 살지만 우리의 얼굴, 우리의 머리 모양, 우리의 의상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옷만 보아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구나.’라고 할 수 있도록 구별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야곱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방 신상을 다 버려라. 의복을 바꾸어라. 몸을 정결케 하라. 내 환난 날에 나를 도와 주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벧엘로 올라간다.”
그때 아들들이 반대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지금 주위의 모든 고을 사람들이 칼을 갈고 있는데 우리가 움직이면 칼에 맞습니다. 저 사람들의 노가 식을 때까지 기다립시다.”
그러나 야곱은 “가자. 지금 가야 된다.”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떤 일,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가족과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나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잘살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하나님께 돌아 온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사람은 하나님이 기빠 하시는 삶의 열매을 맺지만 . 마귀는 말을 부정적이고, 사람의 관계을 파괴한다.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은 “ 친구을 통해 성공의 길에 서는 결우가 많다. [대인관계, 하나님의 관계 ]
주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히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신구약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우리 인간에게 등이 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인간에게 어떠한 빛을 주시는가?
첫째는 요한 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신명기 30장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 것입니다
생명의 길이 어떠한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 문이 넓고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험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이가 적으니라.』
그것이 생명의 문이니 생명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생명의 길을 분명히 알게 하여 줍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는 것이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신구약 성경은 죽을 인간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줍니다.
살고, 죽지 않고, 잘 살고, 옳게 살고, 풍성히 살고, 더욱기 영원히 살기 위하여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 방면에 더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옳게 찾아서 걸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로 이 주님의 말씀은, 성경을 읽는 이는 빛과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나시니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아버지께서 그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에 여러 가지 계명이 많지마는 제일 큰 계명은 한 마디로 사랑인 것입니다. 두 마디로 말한다면『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생의 근본 원리입니다.『형제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워 줍니다.『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한 말씀 가운데는 인간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 가운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리라.』
사랑은 생의 원리입니다. 인간이 사랑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지금은 과학이 극도로 발달된 시대입니다.
즉 과학의 시대요, 과학 혁명 시대요, 과학이 극도로 발달된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대에 왜 러시아는 전쟁을 통해 사람이 사람을 대량으로 피차에 죽이려고 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생의 근본원리인 사랑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냉혹한 물질을 중심 한 사상이 공포의 세기로 화하게 된 근본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인류는 잔존합니다.
서울 주변을 보면 주택을 아름답게 짓는 이가 많이 있습니다. 아주 현대식으로 매우 아담하게 그리고 그 내부 장식도 보면, 매우 호화롭고 찬란한 아름다움 주택을 짓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주택을 지었다고 아름다운 가정이 됩니까?
아무리 집은 아름답게 지어 놓았지마는 그런 집 가운데서 부부가 눈을 흘기고 싸움하고 마지막에는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하는 일이 왜 일어납니까? 집은 잘 지었지마는 사랑이 없습니다.
어떤 집에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썩어져 가는데 어찌하여 이 사회에 굶주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이 부족합니다.
성경에 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빛을 비추어 줍니다. 사랑이 생의 중심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아니 전 인류가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의 빛이 이 세기에 필요합니다.
셋째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소망의 빛을 비추어 줍니다.
생활은 향상되고 문명은 증진되지마는 우리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어느 나라에 가 보든지, 상심하고 낙심하여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소망을 잃은 까닭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어 줍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돋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리려 찬송하리로다.』소망의 빛을 비추어 줍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 시요. 나의 구원이 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하나님께 소망을 품은 사람은 요동치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4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우리에게 기록하여 주신 것입니다.
소망을 잃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그리하여 타락합니다. 그리해서 자포 자기 합니다. 그리해서 흉악한 범죄에 빠집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습니다. 절망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절망의 시대에 이 말씀만이 영원한 소망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줍니다.
인생의 가는 길이 다 어둡지마는 어떤 때는 특별히 더 어두운 때가 있습니다.
환난의 밤이 있습니다. 질고의 밤이 있습니다. 실패의 검은 밤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독의 밤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무서운 유혹의 밤도 있습니다. 슬픔의 밤도 있습니다. 죽음의 밤도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이는 어떤 밤을 지내든지 생명의 빛과 사랑의 빛과 소망의 빛을 풍성히 받아서 어떤 밤이라도 넘어지지 않고 담대히 밟고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에 독일의 나치스 지도자들이 전쟁 범죄자로 물려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감방에 있을 동안, 그들의 대부분이 무슨 책을 찾았는고 하니 성경책을 찾았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좀 들여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지었지마는 성경을 읽는 이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재생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령한 눈을 들어 잠깐 주의를 살펴보세요.
여러분의 주변에 인생행로에서 쓰러지고 거꾸러지고 썩고 해골이 된 불쌍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 가를 보세요.
특별히 50이나 60세쯤 되신 분은 여러분의 동창들 가운데, 여러분의 친구들 가운데 살펴보세요. 인생행로를 걷다가 쓰러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 가를 보세요. 쓰러진 정치가도 많습니다 쓰러진 실업가도 많습니다. 거꾸러진 지성인도 많습니다. 장년들도 부지기수입니다. 학생들도 많습니다. 남자도 많고 여자도 많습니다.
왜? 발에 등이 없이 어두운 밤을 걸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길에 빛도 없이 어두운 밤을 걸어갑니다. 아닐세라 넘어지지요. 밤에는 반드시 등이 있어야 합니다.
전도서 10;15 우매한 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 그들은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우매한자 ; 하나님의 존재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자, 하나님의 법을 떠나 불신 대적, 교만- 멸망을 자초해서 “ 자기일에 지쳐서 자기동네을 찾지 못하는 허둥대는 모습을 말한다.
여러분, 각각 자신을 살펴보세요. 이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었습니까? 내 길이 새로워집니까?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여러분이 성경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 놓았다고 여러분의 발을 비추어 줄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밝은 빛을 말 아래 두지 맙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어떠한 시대인가?
바울은 디모데 후서 3장 에 이런 말로 경고를 하였습니다.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그리고 얼마나 죄악이 관영한 시대가 오겠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예고하였습니다. 얼마나 죄악이 관영한 시대가 오겠다고 하는 것을 경고하면서, 우리에게 부탁하는 말씀이
『너희들은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고, 이 시대가 이와 같이 최악의 시대가 올 터인 까닭으로 너희들은 마음을 지키고 확실히 믿음 우에 거해 최선의 생활을 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앙생활이란 별것이 아닙니다.
최악의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최선의 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올시다. 최선의 생활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죄악이 관영(貫盈)한 이 세상에 살지라도 물들지 아니하는 성결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만 위해 살지 아니하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고 사는 새 생활이올시다.
최악의 시대에 최선의 생활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성경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에 이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고 내 길에 빛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