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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 보령 탐방
일시:2014년 10월 22일 수요일
장소:미산면 봉성리 국제펜헌장비제막식, 이문희 문학비, 이문구 관촌수필 마을, 토정이지함 묘소, 오천항, 갈매못성지
* 국제펜헌장비 제막식
오늘 내 고향 보령에 국제펜 한장비가 세워진다. 보령시 미산면 산자락 아래에 세웠다. 미산면에 거주하는 문인 개인의 기부로 이루어진 행사다. 서울에서 버스 2대로 80여 명이 참가했다. 어제까지 비가 내려 궂은 날씨였는데 오늘은 쾌청하여 좋은 날씨다.
국제PEN 헌장
국제PEN은 국제PEN대회 결의에 따라 다음과 같이 헌장을 선포한다.
1. 문학은 각 민족과 국가 단위로 이루어지나, 그 자체는 국경을 초월하여 그 어떤 상황 변화 속에서도 국가 간의 상호 교류를 유지해야 한다.
2. 예술 작품은 인간의 보편성에 바탕을 두고 길이 전승되는 재산이므로 국가적 또는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
3. 국제PEN은 인류 공영을 위해 최대한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며 종족, 계급 그리고 민족 간의 갈등을 타파하는 동시에 전 세계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 갈 수 있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4. 국제PEN은 한 국가 안에서나 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상의 교류가 상호 방해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준수하며, PEN 회원들은 각자 국가나 지역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반대할 것을 선언한다. 또한 PEN은 출판 및 언론의 자유를 주창하며 평화시의 부당한 검열을 거부한다. 아울러 PEN은 정치와 경제의 올바른 질서를 지향하기 위해 정부, 행정기관, 제도권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필수적이고 긴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와 함께 PEN 회원들은 출판 및 언론 자유의 오용을 배격하며, 특정 정치 세력이나 개인의 부당한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언론 자유의 해악을 경계한다.
이러한 목적에 동의하는 모든 자격 있는 작가들, 편집자들, 번역가들은 그들의 국적, 언어, 종족, 피부색깔 또는 종교에 관계없이 어느 누구라도 PEN 회원이 될 수 있다.
국제펜 제막행사를 마치고 충남문인 대표들과 서울에서 내려간 국제펜 문인들과 정감어린 인사를 나누며 미산면 마을회관에서 베풍어주는 중식을 막걸리로 건배하며 맛있게 먹었다.
* 이문희 문학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마을회관 앞에 그의 문학비가 오롯하게 세워져 있다. 충남보령 출생의 이문희李文熙(1933년~1990년)소설가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이름이다. 나 역시 고향이 보령인데도 그동안 잘 몰랐던 문인이다. 한산韓山 이씨로 이문구와 같으며 나의 어머니와도 본관이 같은 분이다. 오늘 미산면에서 그의 문학비를 보니 훌륭한 소설가인데 57세로 일찍 세상을 떠나 잘 몰랐던 것 같다. 고려대학교 경제과 졸업했다. 1957년 현대문학에 소설 '우기雨期의 시詩'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의 소설 중에서 가운데 '흑맥(黑麥)'이라는 작품은 1965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화려하고 유창한 문장과 어휘 그리고 풍부한 대화법 등은 그의 소설의 전형성을 형성하고 있다. 또 다양한 청춘상을 묘사하였으며 제재와 작품의 시점을 자유자재로 바꾸어 체취있는 문학을 확립하였다. 가령 작품의 제재는 술집이나 학교, 빈민굴, 다리밑, 깡패소굴 등 변화무쌍하면서 재미있고 신선한 공감과 박진력을 준다.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적인 냄새를 풍겨주고 있으며 주제의 설정이나 구성이 현대소설의 전형성을 실험하고 제시해 주고 있다. 우기의 시, 하아모니카의 계절, 장편 흑맥 같은 대표작을 발표하여 제11회 현대문학사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장편소설 흑맥은 1963년 현대문학12월호부터 1년간 연재되었다. 깜부기병에 걸린 보리처럼 사회의 밑바닥에서 버림받고 그들의 특수세계에서 어두운 생활을 하는 탕자의 단면을 부각시킨 문제작이다. 전쟁으로 버림받은 인간들의 어두운 생활은 그들 자신들의 소치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사회 때문에 전락의 신세가 된, 한 타락자의 행장과 그가 인간의 본능으로 되돌아가려는 인생의 기록인 것이다. 6.25 동란 후 서울역 주변의 뒷골목을 무대로 깡패, 양아치들의 폭력, 절도, 술, 매음이 등장한다. 이 독초들의 왕초는 목사인 아버지를 잃고 단신 월남하여 똘마니로서 악명 높은 왕초를 이겨 그들의 두목이 된 독수리다. 그는 외팔이와 키다리를 부왕초로 삼고 구두닦기, 껌장수, 펨프 등 많은 양아치, 똘마니를 움직여 날치기, 절도, 강도를 시킨다. 한편 다른 왕초를 견제하고 지하왕국을 지배한다. 독수리, 외팔이, 키다리, 송충이, 함지박 등은 이 지하왕국의 군림자요 상징이다. 독수리는 미순이와 사랑을 한다. 그리고 그 왕국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사랑과 신에 대한 갈구로서 인간에의 회귀를 시도한다. 독수리가 점차 신을 각성하고 인간회복을 하려는 기록인 것이다. 아담한 산골 마을, 이곳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서 태어나신 내 고향 선배 되시는 문인을 알게 되어 기쁘다. 나도 문인의 길에서 더욱 충실하여 고형 문단 발전에 기여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후일 내가 죽어 가고 없을 때,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745번지 출생의 김윤자 시인이라는 아름답게 기록되길 소망한다. 가을 햇살이 여물어서 감나무마다 풍작으로 불타듯 감이 매달렸다. 고운 풍경과 함께 보람된 보령 문학기행이다.
* 이문구 관촌수필 마을
이문구(1941년~2003년) 소설가는 그 당시의 행정구역으로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관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먼저 그의 생가지를 찾아갔다. 현재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서 쉽게 문 열어주지 않는 집인데, 오늘은 국제펜 문인들에게 친절히도 문을 열어준다. 정원에는 꽃이 피어 생시의 모습인양 화사하고 집은 잘 고쳐져 아름다운데 이문구 선생님은 간 곳 없으니 안타깝다. 집을 나와 뒷동산 솔밭으로 갔다. 이곳 주변은 모두 관촌수필의 배경이 된 곳이다. 가을 배추와 무가 싱싱하게 자라는 산자락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올랐다. 2003년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난 이문구 소설가의 유해가 이곳 관촌마을에 수목장으로 모셔졌다. 그날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2월의 마지막에 황석영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 가족들이 하얀 그의 유해를 이곳 동산에 한줌씩 흩뿌렸다. 나도 보령문협 출향문인으로 남편과 함께 참가했다. 국제펜 사무총장은 내게 마이크를 건네주며 그날을 말해주라고 한다. 내 고향 보령에 온 국제펜 회원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보령 소개와 함께 생생한 그날의 기억을 전했다. 하얀 장갑을 끼고 이문구 선생님이 유년시절 뛰어 놀던 이곳 관촌마을 뒷동산 솔밭에 한줌 재가 되어 돌아온 그 분의 영혼을 생시 유언대로 조촐하게 고이 모셨다. 내가 생시의 이문구 선생님과 마지막 통화한 것은 2002년이다. 그 전해인 2001년에 나의 첫시집이 출간되어 드리고 싶어 전화하니 위가 많이 아프고, 경기대학 출강도 힘들다하시며 시집을 집으로 부쳐 달라고 하셨다. 나의 첫시집 <별 하나 꽃불 피우다>를 그날 바로 이문구 선생님 댁으로 보내드렸다. 그리고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나는 고향 보령의 큰 별이 지신 아픔을 '별은 지고-이문구 선생님 추모시'를 써서 2003년 한내문학에 발표했다.
별은 지고
-이문구 선생님 추모시
김윤자
보령의 큰 별은 지고
우리는 문학의 아버지를 여의고
이별의 길목에서 끝내 붙들지 못한 채
스러져 가시는 예순 둘 고갯마루
칸나 빛 붓끝으로 일어서시어
어두운 땅에 글 불을 지피시고
은 나래 부서지는 하얀 언어로
솔수펑이 마른 솔잎 사이 영면하시는데
순수의 빛으로 님을 기리는
은관 문화 훈장은
짙푸른 숨결로 노래하시는 님의 영정 앞에
파르르 시린 눈으로 떨고
매서운 세월 큰 행보로 걸어오신 님
빈 손 아린 미소로 따나시는 길에
이승에서 드리는 마지막 선물
흰 국화꽃 한 송이로 님의 명복을 빕니다.
별은 지고 - [한내문학] 2003년 13집
그리고 '2월의 이별 노래'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서 2003년 같은 해 보령문단 창간호에 발표했다. 참으로 훌륭하신 고향 아버지 같은 문인이신데, 우리 어머니의 한산 이씨 같은 본관의 어른이신데, 어머니가 '이옥구'이시니 아마도 같은 '구'자 돌림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62세의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하셨으니 참으로 비통한 마음이다.
2월의 이별 노래
-이문구 선생님을 여의옵고
김윤자
보령 고향 마을 어구
[관촌마을]이라는 한내문학비는
거룩한 다리로 꼿꼿이 서서
성큼 달려오실 님을 기다리는데
유년의 꿈 고이 깔아 놓으신
집 뒤 소나무 숲에는
문인들 하나로 동그라니 모여
환한 웃음으로 오실 님을 기다리는데
해는 동녘에서 길을 잃고
구름 사이 방황하고
하늘은 사람보다 더 먼저
슬픔을 한가득 머금고
우울한 2월의 이별 노래를
목놓아 부르다가
싸늘한 바람으로 산을 휘돌아나가는
대천 바다의 큰 휘파람 소리
2월의 이별 노래-[보령문단] 2003년 창간호
이문구 소설가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 서정주에게서 문학을 공부했다. 김동리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는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애환과 시대적 모순을 충청도 특유의 토속어로 농촌문제를 작품화했다. 소설의 주제와 문체까지도 농민의 어투로 농민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작가다. 주요 작품으로는 '관촌수필', '이 풍진 세상을, 해벽', '엉겅퀴 잎새', '으악새 우는 사연', '우리동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와 장편소설 '장한몽', '산너머 남촌', '매월당 김시습' 등이 있다. 그의 대표작 관촌수필은 농촌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연작소설로 1950년~1970년대 산업화시기의 농촌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작품이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서 소외된 농촌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많은 농촌 사람들이 집과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나와 도시빈민 계층이 되어 상실감에 젖었다. 관촌수필은 그런 아픈 농촌 사람들의 마음을 담았다.
이문구는 대천리 관촌마을의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서기와 등기소 서기를 지내고 향리에서 사법서사였다. 그는 엄격한 유교교육을 받으며 비교적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열 살 때 터진 한국전쟁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남로당 보령군 총책이었던 아버지가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예비 검속되고 인민군에 밀려 철수하던 향읍 치안기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육사 2기로 들어가 위장병을 얻어 자퇴하고 집에서 요양하고 있던 둘째 형도 오랏줄에 묶인 채 죽음을 맞고, 농업중학을 다니고 있다가 자퇴했던 셋째 형도 부친에 대한 연루 혐의로 대천 앞바다에 산 채로 수장되었다. 1956년에 어머니마저 잃게 된 그는 넷째로 태어났는데도 졸지에 소년가장이 되었다. 1959년에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굶주리며 농사를 짓던 그는 좌익의 혈육이라는 고향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건어물 행상이며 도로 공사장 잡역부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던 그는 1961년에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당시 서라벌예대에는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조연현, 김구용 등 당대 일급 문사들이 강의를 맡고, 한승원 등이 한 강의실에서 창작수업을 받았다. 서라벌예대를 졸업할 즈음 그는 해인사에 있는 한 암자에서 하숙을 하며 단편을 습작하며 작가의 집념을 갖었다. 그해 9월 현대문학에 단편 '다갈라 불망비'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실렸다. 1963년 대학을 졸업했지만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그는 도로포장, 건축, 공동묘지 이장 공사장 등을 떠돌며 잡역부 일을 했다. 연희동 외국인공동묘지 이장 공사판에서 임자 없는 유골 2천여를 떡 주무르듯 하는 별스런 일부터 각종 험한 일을 다 했다. 이런 힘든 삶 속에서도 습작을 계속하던 그는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이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올랐다. 고생이 되긴 했지만 두루 거친 밑바닥 직업 체험은 이문구 소설의 소재를 다채롭게 하고 큰 밑 바탕이 되었다. 1968년에 한국문인협회에서 신문학 6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월간문학>을 창간하자 업무직원이 되어 제작, 배본, 수금, 광고 업무를 맡았다. 이 시기에 내놓은 '암소'는 사투리로 걸쭉하게 반죽된 문장 속에 한 머슴의 얘기를 담고 있다. '암소'는 소설가 이문구의 이름을 평론가들의 기억 속에 뚜렷하게 새기는 계기가 되었던 작품이다. 채만식, 김유정에서 발원한 평민문학을 바탕으로 하는 풍자와 해학의 문체를 이어 받아 1970년대를 대표하는 농촌작가로 우뚝 서게 된다. 박태순과 함께 유신시절의 강력한 저항 문인 조직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이끌면서 한국문학 편집의 책임에서 영업까지 도맡아 해결했다. 1976년 현대문학에 '관촌수필'을 발표했다. 1977년에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감사에 피선되며, 한진출판사의 편집고문을 지낸다. 이 해에 주거지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로 옮겼다. 이 무렵의 생활로 당시 상업주의와 소비문화에 잠식당하는 농촌현실을 생생하게 보고 겪는데, 이것이 나중에 '우리 동네' 연작의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여덟 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관촌수필' 연작은 작가의 과거 유소년기의 고향 체험에서 길어낸 소설이다. 양반토호의 가문과 유림 같은 봉건적 신분 질서의 문화적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고, 부락공동체의 풍습과 인정이 살아있는 근대문명에 잠식되기 이전의 고향을 복원해낸다. 관촌수필의 정서는 상실감이다. 농촌공동체는 전쟁과 이념의 대립과 충돌로 엄청난 충격과 균열을 겪고, 뒤 이은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 자본주의 문명에 의해 잠식되며 고향은 다른 사회로 해체, 변모되어 간다. 전근대적 농촌사회가 지녔던 공동체적 속성과 농토라는 물적 터전을 근본으로 그 위에 자신의 삶을 세웠던 농민들의 순박함과 인정, 전통적 질서와 윤리는 서서히 멸실되어 가고 있었다. 그 점을 아쉬워하며 애틋한 마음으로 그것을 감싸려고 했던 것이다. 고향은 더 이상 전통적이고 재래적인 풍습과 인정이 넘치는 그런 곳이 아니다. 농촌은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으되 여전히 잠재적 빈곤의식에 허덕이고, 텔레비전 등 상업주의 매스컴의 영향과 독점자본의 소비문화에 휩쓸려 갔다. 각박해진 농민들의 심성, 멸실되어 가는 풍속과 유대감, 날로 피폐해지는 농촌 해체의 실상을 작가 특유의 풍자적 문체로 완성했다. 그러면서도 타락하고 부정적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기대와 희망적 가능성으로 농민의 건강한 생명력과 윤리의식을 제시한다. 1980년에 생활난 때문에 다시 서울로 이사했다. 많은 작품활동으로 제1회 ‘신동엽창작기금’ 수혜자로 선정된다. 1984년에는 문단의 선배들과 동료들의 권유로 실천문학사의 발행인으로 취임한다. 농민신문에 장편 '산 너머 남촌'을 연재했다. 그러다가 가족을 서울에 남겨둔 채, 충청남도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로 내려가 요양과 집필을 겸하며, 1989년 서울신문에 장편 '토정 이지함 1부'를 연재했다. 이 무렵 '우리 동네'가 KBS 제1TV를 통해 극화되어 방영되고, 또 '암소'가 대한민국연극제에 올려졌다. 제1회 ‘춘강문예창작기금’ 수령자로 선정된 것도 이 즈음이다. 1990년 여름, 김동리가 병으로 쓰러지자, 상경해 석 달 동안 간병하기도 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장편 '산너머 남촌'을 간행하며, 제7회 ‘요산문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에는 단편 '장곡리 고욤나무'로 제9회 ‘흙의 문예상’을, '산너머 남촌'으로 제15회 ‘펜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다. 이 무렵에 중국을 경유해 백두산을 여행하고 돌아온 뒤, 1992년에 장편소설 '매월당 김시습'을 펴내어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 무렵 '관촌수필'이 SBS TV ‘창사 2주년 기념작품’으로 선정, 30부작으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또 러시아의 모스크바, 페테르브르크 등지를 여행했다. 1993년에'우리 동네'가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이라는 제목으로 극화되어 SBS TV에서 50부작으로 방영되고, 인도를 여행했다. 1994년에는 단편 '장척리 으름나무'를 발표하고,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여행했다. 1995년에는 단편 '장동리 싸리나무' 등을 발표하고, 1996년에는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 겸 계간 한국소설 편집위원장과, ‘문학의 해’ 집행위원회 홍보·출판분과위원장 등을 동시에 맡으며 '나는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오는 중이다'를 펴내고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어느 때보다 문학 활동이 왕성하던 무렵 느닷없이 그에게 위암이 발병했다. 결국 2003년 위암이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 중 세상을 떠났다. 고향 대천 한내문학회를 맨처음 만들어 함께 활동하던 후배 문인들에게 큰 충격이고,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오늘 국제펜 문인들은 이곳 관촌마을 생가지와 영혼이 잠든 뒷동산을 둘러보고 이문구 소설가의 족적을 더듬으며 잠시나마 그의 문학세계를 조명해 보았다.
* 토정 이지함 묘소
토정 이지함(1517년~1578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토정비결의 저자이고, 기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본관은 한산 이씨다. 나는 한산 이씨인 어머니로부터 토정 이지함 자손이라는 말을 종종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오늘 이곳 토정 이지함 묘소에 온 것은 나의 어머니 조상 묘소에 온 것이기에 참으로 흐뭇하고 감격스런 일이다. 묘소는 아주 크고 우람하게 잘 조성되어 있다. 한산 이씨 소유의 영토에 어느 왕족의 무덤처럼 본인과 부모 자손들의 묘소가 보령시 주교면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명당자리에 들어서 있다. 관리도 잘 되어 한치의 허술한 점 없이 정숙한 분위기다. 토정이라는 호는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어서 붙은 것이다.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숙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 의학, 수학, 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 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하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 보은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가 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석양에 묘소 잔디밭에 앉아 토정 이지함에 대하여 배웠다. 자랑스런 내 고향에서 훌륭한 분의 묘소를 찾은 것은 뜻깊은 행사로 오래도록 기억될 일이다.
* 오천항
오천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이다. 유년시절 아버지를 따라 큰 아버지댁에 오면, 나는 이곳 오천항의 바다에 왔었다. 오천항은 예전부터 보령 북부권의 삶과 생활의 중심지였다. 보령 북부권의 모든 길들은 오천과 통한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천항에 어선과 여러 배들이 떠 있다. 예전에는 허술한 오천항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세련된 오천항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어선을 여러 척이나 운영하셨다. 나는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배에 타 보기도 하고, 선원들이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들을 어선에서 받아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큰 어머니가 넉넉하게 주시는 생선들을 가지고 집으로 와서 오래도록 맛있는 반찬으로 먹었다. 또한 할아버지는 보령군 오천면 면장과 오천초등학교 교장이셨다. 나의 아버지는 부잣집의 아주 귀한 자손으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는 보령군의 군수 자리에 오르시기 직전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항상 할아버지의 훌륭하신 업적을 들려주셨다. 나는 대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이곳 오천 바다를 홀로 거닐곤 했다. 지금 바라보이는 저 산모롱이를 돌아 해변을 걷노라면 낯선 시골 남자의 걸음에 놀라기도 했다. 보령군 청라면 장현리 우리 집과는 먼 곳이지만 당시에는 산 능선을 타고 걸어 다녔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뒤를 따라 먼 길을 걸어서 왕래했다. 어머니 친정인 오천 외가에는 큰 외숙부 내외가 살고 있었다. 나를 매우 예뻐하셨다. 오천초등학교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셨는데 그 가게에 가면 외숙모는 내게 사탕과 과자를 주셨다. 추억이 어린 오천에 온 것이 꿈결 같다. 지금 나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 이곳 오천항에서 가까운 선산에 누워 계신다.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머니는 지금 서울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신다. 내 나이 63세, 환갑을 넘은 나이인 것을, 가는 세월을 어찌 이기겠는가. 아버지는 86세의 일기로 떠나시고, 어머니는 금년 85세 노환으로 기동을 못 하신다. 내 아버지, 어머니의 족적이 서린 오천항을 두 눈에 꼬옥꼭 담아 저장했다. 이 가을 오천 땅, 오천 바다, 오천항에 온 것은 참으로 보람되고 뜻깊은 문학 나들이다.
* 갈매못 성지
* 오천 시내
국제펜 보령 탐방 일정을 다 마치고 상경 중에 오천 시내를 지나서 간다. 오천항 동문낚시라는 가게 앞에서 버스가 잠시 정차한다. 나의 어버지, 어머니가 이곳 오천 시내에서 장을 보시며 유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생활 터전이었던 곳이다. 결혼을 하시면서 둘째 아들인 아버지는 보령군 청라면 장현리로 분가하셨다. 부잣집 귀한 아들로 유산을 많이 받으셔서 대천 읍내에 '새나라 서점'을 차리셨다. 그러나 6.25 전쟁 때 폭탄을 맞아 다 사리지고 흔적이라고는 검은 옹기솥 하나였단다. 나의 아버지는 그때부터 고단한 삶을 사셨다. 훌륭하신 할아버지의 훈육 아래 서당에서 한학도 배우시고 학식도 풍부한 분이신데 맞지 않는 농부의 옷을 입고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도 우리 5남매 낳아 모두 사회에서 제 몫에 충실하도록 잘 길러 놓으셨다. 나의 시 '아버지', '겨울산', '사랑 1-아버지', '뜨거운 목숨' 등에 아버지의 값진 삶을 노래했다. 또한 나의 시 '능소화', '가을산', '사랑 2-어머니', '들꽃' 등에서는 어머니의 자식사랑에 대한 삶을 노래했다. 오천 시내를 떠나며 훌륭하신 나의 아버지, 어머니께 깊은 감사와 함께 시인의 길에서 더욱 사명에 충실하겠노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