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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9. 사순절 첫째주일
예배 시편 / 시편 22편 24-25절
찬송 / 487장 ·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성서 / 스가랴 3장 1-10, 히브리서 2장 10-18
말씀 / 몸소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신 주님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스가랴 3장 10절)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7-18절)
Ⅰ
스위스에선 랍스터를 살아있는 채로 찌는 것이 불법이라고 합니다. 랍스터를 요리하기 전에 반드시 전기충격기를 사용하거나 망치를 사용해서 기절시켜야 한다고 하지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랍스터가 고등신경계를 가지고 있어서 고통을 잘 느낀다는 최근의 연구 때문이랍니다. 그동안 척추가 없는 동물은 대부분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이해해 왔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고통을 잘 느끼는 랍스터가 고통과 위험에 반드시 노출되어야만 하는 때가 있답니다. 바로 단단한 껍질 안에 있던 몸이 자라서 그 껍질을 벗어 버려야 하는 때입니다. 제아무리 단단하고 안전한 껍질이라고 해도, 내면이 저라고 성장할수록 그 껍질은 갑갑해지기 마련이겠지요. 그러니 그 껍질을 버리고 새 껍질을 입어야만 합니다. 하얗고 말랑말랑한 몸이 고통과 위험에 노출되지만, 그때에야말로 랍스터가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때랍니다.
흔히 우리 사람도 고통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성장기의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성장통’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살면서 누구나 아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데 그 고통 후엔 꼭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고통이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건 극히 드문 일이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게 하나 있답니다. 그건 바로 소유가 아니라 관계이고, 내가 아니라 우리의 성장입니다.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고통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을 때,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마주했을 때, 그때 그 고통을 누군가 함께한다면, 바로 ‘우리’가 성장한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요. 사춘기 아이들의 우정이 서로에게 각별한 것도, 군인들의 전우애가 남다르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의 양육이 전우애에 비교되는 것도 모두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하는 가운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어려움 속에서도 깊어지고 성장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위태롭고 불안한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 애가 타고, 갑갑하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갑갑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병이 들었는 데도 아프지 않다면, 어떻게 치료를 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이토록 진통하는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새로운 희망이 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성장했다는 의미이고, 이제는 낡은 껍질을 벗어버리기 위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뿐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 개인도 살아가면서 여러 어려움을 마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한 내면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에게 우리와 함께 그 아픔을 나누는 이들이 있음을,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선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우리의 아픔과 고통에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고난을, 하나님의 고통을, 하나님의 아픔을 묵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이 땅의, 우리의 고통을 모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친히 이 세상의 고통을 보시고, 직접 겪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처럼 피곤함을 느꼈고, 슬픔을 겪으셨고, 두려움도 경험했으며, 고통과 죽음도 비껴가지 않으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할 정도로 가난을 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이 땅의 고통을 몸소 겪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새로운 관계를 ‘화해’라고 표현합니다(롬 5:11; 11:15; 고후 5:18, 19).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 속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 땅과 이 세상, 우리의 사소한 고통마저도 모두 외면하신다고 생각했던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아픔으로 이 땅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떤 시인은 우리 몸의 중심이 심장이 아니라, 아픈 곳이 중심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가족의 중심도 아빠가 아니라 아픈 사람이라고 했지요. 시인은 이 세계의 중심도 ‘총구 앞에서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이 중심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내는 동안 우리 몸의 중심을, 우리 가족의 중심을, 우리 교회와 이 세계의 중심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함께 고난을 묵상할 때, 아픔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껍질을 벗어나 새로이 성장하는 생명처럼 우리도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Ⅱ
오늘 우리는 구약 말씀으로 스가랴서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스가랴의 시대는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보호 장치도 없던 때였습니다. 국가는 멸망했고,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까지 모두 파괴되었던 때입니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로 살아야 했지요. 바로 이러한 때, 그동안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던 예언자들과 달리 스가랴는 고통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백성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전하는 예언자로 등장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현실에도, 스가랴에겐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하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원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그 마음을, 그 믿음을,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가랴서에는 유독 그의 꿈과도 같은 그의 환상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어떤 꿈일까요? 그의 첫 환상에는 말을 탄 기수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찾아와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지으라”고 합니다(슥 1:16). 70년 간의 고통의 시절이 이제는 끝났다는 선언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위로의 소식이요, 기쁨의 소식입니다. 이어서 스가랴는 어떤 이가 측량줄을 잡고 예루살렘을 측량을 하는 환상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성벽이 없는 그곳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벽이 되어주신다고, 불로 둘러싼 든든한 성벽이 되어주시겠다는 위로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벅차오르는 희망이요,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말씀에 스가랴서의 중심이 되는 환상이 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선 장면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포로로 끌려가게 된 제사장의 후예이지요.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말씀에서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곁에는 천사들이 둘러있고, 거기에는 사탄도 있습니다. 여기서 사탄이란 히브리어는 ‘고발자 혹은 기소자’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 서 있고, 그곳에서 천사들이 그를 변호하고, 사탄이 검사가 되어 그를 고발하는 듯한 장면입니다. 여호수아에 대한 사탄의 고발 내용은 나타나 있진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없는데, 이미 무너졌는데, 대제사장이라고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조소입니다. 아니면, 그가 “이방 땅에 끌려갔다 왔으니 불결하고 대제사장직을 감당하기엔 부족하다”라는 고발이었겠지요. 그런 그가 어떻게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겠냐는 고발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고발하는 사탄을 엄히 꾸짖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가랴서 3장 2절입니다. "사탄아,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다."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 그것이 여호수아의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포로로 끌려가 포로지에서 살해당했고, 아버지는 포로지에서 살다가 포로로 죽었으니, 여호수아 역시 포로지에서 죽을 운명이었지요. 대제사장 여호수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들을 타다 남은 나무조각처럼 불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스가랴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구원이지요. 타다 남은 나무조각이란 지난한 포로생활을 통해, 그 고통스럽고 험난한 시절을 지나며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몸과 마음에 지니게 된 아픔과 상처를 나타내는 말일 겁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그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입고 있던 냄새나고 더러운 옷을 하나님께서 벗겨 주십니다. 그에게 깨끗한 관을 씌워 주시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십니다. 이제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제사장의 임무를 감당하도록 위임하시는 것이지요. 대제사장이 하는 역할은 무엇보다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지요.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자신이 타다 남은 나무조각과 같았기에,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셨기에,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 임무를 감당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임무를 주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하시며, 그러면 너희 가운데 새싹이 돋아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비록, 타다 건져냄을 받은 나무조각과도 같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새싹을 나게 하시리라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선 여호수아에게 한 돌을 보여주십니다. 그 돌에는 일곱 개의 눈이 있다는 아리송한 말씀을 주시지요. 일곱 개의 눈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눈으로 지켜보신다는 뜻 아닐까요? 많은 눈으로 백성들을 지켜볼 수 있게 인도하신다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여기서 눈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에나임’은 눈으로만 번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샘’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일곱 샘물, 일곱 원천입니다. 끝없이 나오는 샘물이요,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새싹이 돋게 하시고, 한없는 생명의 원천이 너희에게 흐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서 3장은 마지막 10절에서 마침내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와 같이 자라서 자기 나무 아래 서로를 초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꿈꿉니다. 타다 남은 나무 조각에서 싹이 나고, 다시 자라 장차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와 같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는 꿈입니다. 함께 아픔과 어려움을 겪은 이들이 이제는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우리’로 성장하여, 자신의 나무 아래로 서로를 초대하는 꿈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자기 나무 아래로 서로를 초대하는 모습! 소박하지만, 포로지로 끌려가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냄을 받은 이들, 함께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살아남은 그들에겐, 하나님의 참된 생명과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진 이상이요, 하나님 백성의 꿈입니다.
Ⅲ
오늘 우리가 신약 말씀으로 받아 읽은 히브리서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받던 시절을 배경으로 합니다(히 10:32).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혹독한 박해와 고통을 견뎌내야 했지요. 히브리서는 혹독한 박해의 시대에,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시대에,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더 단단해졌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들이 그 고난과 박해를 믿음 속에서 함께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그 혹독한 박해와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고난을 주님께서 모르시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신약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키시는 분,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께서, 고난으로 구원의 창시자를 완전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몸소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시고자, 피와 살을 가진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몸소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심으로 죽음과 악의 권세를 멸하셨고, 우리와 같이 형제자매라고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몸소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우리를 당신의 형제자매로 삼아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몸소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와 같은 약함을 겪으셨고,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받으신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의 약함과 잘못을 책임지고 감당하지요. 대제사장과 같은 사제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지만,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드리셨지요. 백성들은 자신의 잘못과 고통을 제물로 삼은 짐승에게 돌렸지만, 예수께선 형제자매라 부르시는 우리의 잘못과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렇게 이 땅의 고통을 몸소 겪으심으로, 이 땅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스가랴의 시대에, 타다 남은 나무 조각과도 같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새싹을 약속해 주셨지요. 그들에게 샘물을 약속해 주셔서, 그 싹이 자라 나무가 되고, 사람들을 각자 나무로 초대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울도 그의 편지 갈라디아서를 마무리 하며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닌다”고 말했습니다(갈 6:17).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고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가 박해자요, 핍박자였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박해자와 핍박자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고난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몸에 지닌 상처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지요. 비로소 그가 함께 아파함으로,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내는 동안 우리의 아픔을, 우리 가족의 아픔을, 우리 교회와 이 세계의 아픔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에 함께할 때, 바로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함께 고난을 묵상할 때, 껍질을 벗어나 새로이 성장하는 생명처럼 우리도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