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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 '51'호에 발표- 2017년 12월 20일
<스토리텔링>
홀로와 더불어
이 무 열
적전강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환희와 수난의 두 얼굴로 다가왔다. 신생 조국의 원산여자사범학교 국어 교사이자 교원직업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공산당 치하 원산문학가동맹으로부터 광복 1주년 기념시집 발간을 위한 원고청탁을 받고, 동인지 응향(𤁒香)에 실은 ‘길’‘여명도’‘밤’ 세 작품이 문제였다.
동이 트는 하늘에/까마귀 날아//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골목……
-「여명도(黎明圖)」 중에서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며 강토는 반 토막이 나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정국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에게는 진작 ‘반동 인텔리겐치아’ 낙인이 찍혀 두문불출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1947년 10월의 어느 날. 북조선 문화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에서 시집을 규탄하는 결정서가 발표되고 대대적인 검열사업이 시작되었다. 좌익평론가들은 북한을 까마귀 나는 불길한 아침에 비유한 그의 시를 두고 악마주의적이요, 퇴폐적이요, 부르조아적이요....라며 일곱 가지 죄목을 얹어 비판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단죄를 받고 도저히 자아비판을 견딜 재간이 없던 그는 칠순의 노모와 신혼의 아내와 신부 형님을 두고 남몰래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동트기 직전의 새벽. 차마 떨치고 일어설수록 자꾸 눈에 밟히던 원산거리 골목골목마다 유년과 청소년의 추억과 그리움이 덕지덕지 껴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19년 탯줄을 묻은 곳은 비록 서울이지만 네 살 때 원산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옮긴 것은 아버지가 독일계 신부들이 개설한 교구의 교육사업을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신부를 꿈꾸며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포기하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중풍 걸린 아버지를 돌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실은 신(神)에 대한 끝없는 의문과 일제와 기존 제도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다.
전학간 일반 중학교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문학을 한답시고 불령선인(不逞鮮人)들과 어울리다 퇴학당하고 유치장 신세를 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결국 야학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서는 다시 성냥공장과 연필공장을 거쳐 선배의 권유로 일본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비로소 불교와 기독교와 카톨릭 등 여러 종교의 철학적 뿌리를 탐색하면서 자신의 정신적 근거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동경 유학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으로 3개월 빨리 졸업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죽음과 형님이 흥남천주교회에 부임하게 된 집안의 사정은 귀국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귀국 후 한동안 두문불출한 채 책을 읽으며 시쓰기에만 매달렸다. 동네 사람들은‘서울집 도련님이 주의(主義)를 하다가 정신이상이 되었다’고 쑥덕거리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닌 생래의 저항기질은 일본 유학시절 다분히 사회주의에 빠지게 했으며, 반상의 차별을 경멸하고, 반가(班家)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스스로를 소농(小農) 출신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주변에서는 그를 폐인취급하고 설상가상으로 폐병에 걸렸음에도 전쟁 말기의 일제는 젊은이들을 징집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는 아픈 몸을 추스르고 징집을 피하기 위해 친일 한국인이 경영하는‘북선매일’의 기자가 되었다. 참으로 부끄럽게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구실과 펜을 잡는다는 유혹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공출 독려문과 성전송(聖戰頌)을 써댔던 것이다. 그러나 피 끓는 젊음이 허락하지 않는 그 일을 자책과 번민 속에서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자를 그만두고 교회에 속한 학원 일을 하던 중 맞은 해방은, 진정 나라 잃은 설움과 쓰라림을 아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격이요 환희였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공산당을 피해 밤도와 남으로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나고 자란 덕원마을 앞 풍경은 평생을 두고 눈앞에 아슴거렸다. 절이 있는 마식령 골짝 너머 철도 건널목 뒤로는 조 수수밭이 널려있고, 산을 뚫은 신작로가 베폭처럼 깔려있는 콩밭 옆 용소를 지나면 적전강이 펼쳐지고, 가톨릭 수도원 종각 발치로는 동해가 있고, 성황당 고개가 보이는 어구 돌아 뒷산 아래 상여막이 있던 곳.
아아, 신과 인간에 대한 숱한 회의와 질문을 품고 산보하곤 했던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적전강 송도원 모래사장이라니…….
낙동강
대구 달성공원에서 해방을 이태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를 만났다. 문총회장인 소설가 박종화를 대리하여 조선청년문학가협회 대표 자격으로 헌사를 하게 한 것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예정된 인연 때문이었을까. 해방된 이 땅에서 일제치하 민족적 비애와 저항의식을 기조로 한 시를 쓴 상화시비를 처음 세운다는 것은 그 얼마나 가슴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이었던가. 수필가 김소운이 발의하고‘죽순’동인들의 뜻을 모아 거행된 제막식(1948년 3월 14일)은 온몸 가려 두르는 뿌듯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지난 해 북한에서 넘어온 서울 문단의 신출내기였지만 대구는 무연하게 스쳐 지나가는 도시가 아니라, 운명의 부름인 듯 제 2의 고향처럼 한달음에 다가왔다.
그날 해방 전부터 문명을 익힌 김달진·박목월 씨를 만난 것도 큰 기쁨이었지만, 시계포 명금당을 운영하며‘죽순’이란 시전문지를 펴내는 이윤수 시인과 죽순동인들의 따뜻한 환대는 일순간에 친근감을 갖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후‘죽순’과의 인연은 간단없이 이어졌는데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이호우 시조시인이 남로당 경북지구 재건책으로 몰리어 사형집행 직전의 상황으로 까지 내몰리게 된 까닭이다. 1949년 초 이호우가 사귄 여성은 전여맹원(前女盟員)이었는데 연적이었던 남성의 무고로 어마어마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판이었다. 문총(文總)의 이호우 구출을 위한 진상조사단, 소위 반공의 선봉장인 조지훈·이한직·조영암·구상 등은 대구역 부근 일본식 전일여관에 머물며 각계에 구명의 손길을 뻗어 마침내‘개화’와‘달밤’의 시조시인 이호우를 살려내었다. 당시 진상조사단은 진상청취라는 구실로 죽순 동인들과 잦은 술판을 벌이는 사이 허물없는 친구들이 되고 말았다.
이런 인연은 시작에 불과했고 6.25동란으로 인해 대구로 피난 가서는 고향 맞잡이로 인간관계가 맺어졌고, 이윤수 시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인들과 거의 동기간의 사이가 되었다.
당시 그는 1949년 초 연합신문 문화부장을 거쳐 국방부 기관지인‘승리일보’의 주간이었다. 육군 종군작가단(단장 최독견)의 부단장을 겸하고 있었기에 군인들과의 교섭은 온통 그의 차지였다. 귀공자풍의 사심 없고 정이 넘치는 까닭에 직정적인 성격의 군 장성친구들이 많았고, 주변에는 늘 춥고 배고픈 예술인들이 서성거리곤 했다. 그는 수시로 예술인들의 뒷바라지에 나섰으며 각종 출판기념회 사회는 묻지 않아도 늘 그의 몫이었다. 특히 시인 오상순·화가 이중섭·소설가 최태응과의 인간적인 교류와 우정은 지금도 전설처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이다.
승리일보를 만들며 종군한 그는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전세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승리일보가 폐간되자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된다. 당시 머문 숙소는 향촌동‘화월호텔’이었는데 숙소는 물론 영남일보 편집국장실은 늘 피난 온 문화인들의 거점이자 연락처였다. 영남일보 건너편 골목 안창집 ‘감나무집’은 피난살이의 애환을 달래던 아지트였으며 웬만한 술값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한국동란 때 대구에서 그와 인연을 맺은 문화인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오상순, 김팔봉, 마해송, 최정희, 장만영, 김이석, 정비석, 양명문, 유주현, 성기원, 방기환, 최독견, 전숙희, 박두진, 최인욱, 김윤성, 이상로, 이덕진, 김동진...
이들은 향촌동의‘살어리’‘르네상스’다방에 앉아 죽치다가 동성로 3가의‘석류나무집’이나 향교 건너편‘말대가리집’그도 아니면 영남일보 건너편‘감나무집’에서 통음을 하며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전쟁의 시름을 달래곤 했다.
1950년대 대구 모나미 다방에서-사회를 보는 구상 시인
당시 피아간의 공방전 끝에 다리 하나를 잃고 전장에서 돌아온 그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딴에는 친구의 회포를 풀어주려고 호기롭게 사창가 아가씨를 찾았다. 하지만 목발 짚은 허술한 몰골에 기급하며 아무 아가씨도 친구를 상대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마침내 낯익은 창녀가 앞으로 나섰다.
“친구 분을 모두 외면하니 선생님만 허락하시면 제가 모셔도 될까요?”
“그래, 그래...”
눈물이 핑 돌았다. 칠흑 어둠이 덮인 창공 속에서도 비록 광채는 없으나 별과 시가 깃들어 있음이 따뜻하게 여겨졌다.
또 한번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 종군했다가 대구의 단골술집에 들렀다.
“나라야 망하든지 말든지 구선생님이 얼른 대구로 돌아오면 좋겠다!”
옥이라는 이름의 순정녀 앞에서 그 누가 무너지지 않고 온전히 배길 수 있으랴.
동정으로 결혼하여 아내밖에 몰랐던 그였다. 그날 밤‘앞가슴에 찼던 성심 패마저 몰래 자리 밑에 넣어 놓고 천치 같은 소리를 지껄인 그를 품었다. 스스로도 놀랄 색정이었다.’
전선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연신 사람이 죽어 나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승리일보주간이라는 것은‘브래지어를 차고 여장을 한 것보다/정보수가 된 나의 꼴이 더 우습다’고 자평한 극단적인 반공임무의 선봉장이었던 것을.
낙동강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낙동강전투는 가장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걸고 방어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일대 반격작전이었다. 당시 문인들은 종군작가가 되어 전선을 누비며 글을 썼다. 조지훈의 ‘다부원(多富院)에서’나 유치환의 ‘보병과 더불어’라는 시편들이 그것인데, 그는 초토의 시 15편의 연작시를 남겼다.
구상 시집 ‘초토의 시’
초토의 시 8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 막히고,/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지만/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구름은 무심히도/북으로
흘러가고//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목 놓아 버린다.
한강
파란 많은 인생을 두고 세간 평가에 따르면 그는 의지를 굽혀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1952년 영남일보 기자시절에 펴낸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은 발간과 동시에 판매금지 되고 말았다. 암울하고 절박한 시대의 난맥상을 시인의 눈으로 고발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눈 밖에 난 이상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자유당 말기의 정치적 상황은 끝내 그를 영오의 몸으로 만들고 말았다.
사건은 단순했다.
당시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문화부장 염상섭과 함께 종종 정치집회 연사로 나서기도 했는데, 남대문에서 미제 진공관을 사서 일본을 통해 이북으로 보내려 했다는‘이적 병기 북괴 밀송’이란 죄목이었다. 이른바 ‘레이다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조국을 배반했다는 죄목을 덮어 쓰고 사느니 구차한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사형을 시키라는 법정진술을 하였다. 결과는 무죄였다. 당시 시인 고은에게 보낸 편지에‘그동안 천지분간도 못하며 지내온 삶을 돌아보니, 세상 아슬아슬한 고비를 용케도 넘겨온 것이 수치스럽다.’고 고백한다.
1950년대 해공 신익희 선생은 그에게 민국당 선전부장으로 일해 달라고 한다. 그것을 거절하고 나자 이번에는 민주당 장면 총리의 부름이었다. 그는 민주당 경북 칠곡군 민의원 후보공천을 거절하려고 강원도로 피신해 후보등록 마감일까지 숨어 지내게 된다. 다시 참의원 선거 출마를 권유받자 이번에는 승려로 있다 환속한 시인 고은과 제주도로 달아난다. 그곳에서 둘은 저녁마다 낄낄거리며 비바리 술집에서 통음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정치적 현실에 대한 신문기자적 관찰과 비판은 유지하되 절대 정치와 타협하거나 그 속에 함몰되는 잘못은 끝내 거부했던 일생이었다. 그는 후배 기자들에게‘붓에 순사(殉死)할 수 있는 한국의 언론인만이 민족의 정기와 공론을 수호해 가는 것’이라며 이땅 언론인들에게 직필을 생명으로 삼으라고 일갈하곤 했다. 그러했기에 신문사 자체가 사회적 비판을 꺼릴 때 고현잡화(考現雜話)라는 제목의 개인 칼럼을 통해 기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했다.
당신 자신의 이런 용력이랄까 강단은‘오직 하나인 신부 형을 공산당이 납치해간 것과 홀어머니의 생사불명이’유지시켰다고 했다.
세간에 잘 알려진 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우정과 일정한 거리두기는 유명하다. 인간 박정희를‘박첨지’라고 불렀던 그를 5.16 군사혁명 사흘 뒤에 만나게 되었다.
“구상 형, 날 위해 미국에 좀 다녀와 주셔야 겠습니다.”
“난 영어도 모르는데요.”
“통역을 시키면 될 것 아닙니까.”
“테이블 매너도 모릅니다. 백면서생으로 살도록 놓아 두십시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亡種)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인간 박정희가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내정해 놓았으나 끝내 경향신문 일본 특파원을 자청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물론 평생을 앓아온 폐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현실정치에 발 담그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때문이었다.
또 한 가지. 1974년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김우종 및 소설가 이호철 등을 엮어‘문인간첩단’사건으로 족쇄를 채워 법정에 세운 사건이 있었다. 현대사의 암흑기이자 숨통 막히던 시절이었다. 문단에서는 박정희와 친구인 그가 증언을 해주리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당국의 눈을 피해 들어선 재판정에서 이들의 무죄를 설득력 있게 증언했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나 대학 총장과 예술원원장 자리도 한사코 마다하면서 중앙대학교나 하와이대학교 객원교수가 되는 등 오로지 선생이나 시인으로서 자족하며 시에 복무하는 삶을 살아왔다.
한강을 내려다보며 30년을 산 17평 낡은 아파트에는 관수재(觀水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존경하는 선배 진주의 파성 설창수 시인이 썼는데, 관수세심(觀水洗心)의 뜻으로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는 자세로 시 쓰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엿보이는 현판이다.
무릇 구상이란 시인이 마음을 닦는 자세와 방법이란 그러한 것인가. 세간에 너무나 잘 알려진 화가 이중섭과의 인연의 산물인 ‘k시인의 가족’이라는 그림은 1억 원에 팔려 베네딕도 수도원의 사제 양성기금으로 쓰였다. 평생을 아끼고 검소하게 살며 모은 2억 원은 장애우 문학지인‘솟대문학’을 위해 쾌척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의 한 방법이었다.
이중섭이 그린 ‘k시인의 가족’
평생 그가 머물거나 걸어온 길은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꽃자리가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앉은 그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꽃자리」 전문(全文)
그리스도 폴의 강
시쳇말로 깡패의 방종한 삶을 살다가 말년을 어느 강가에서 어깨에 사람을 업어 건네는 것을 일과로 삼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마침내 그토록 오랜 염원처럼 예수를 만난 분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폴이 바로 그 사람이다.
구상 시인, 그는 1953년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는 왜관으로 내려가 1974년 까지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다. 평생 폐결핵을 달고 산 그를 위해 아내 서영옥 여사가 수호천사가 되어 순심의원이라는 조그만 병원을 열어 정양처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그곳,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구상길 19번지에는 2002년 10월 구상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왜관 순심의원 앞에서 구상시인, 딸 ,아내
유달리 강을 좋아했던 시인. 겸허하고 인정이 넘치는 숱한 일화를 남긴 시인. 불의에 항거하고, 철저한 속인이거나 성자의 반열에 오름직한 평가를 받은 시인. 그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의 원산 덕원마을 적전강의 모습을 본 것일까, 유난히 강에 대한 상념을 즐겨 당신 시의 소재로 삼고는 했다.
그는 평생 주변인을 위해 살아왔지만 두 아들과 아내를 일찍 가슴에 묻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큰아들 홍이는 1997년 폐렴으로, 둘째 아들 성이는 1987년 폐결핵으로, 1993년 아내 또한 지병으로 먼저 보내고 말았다. 가족이라고는 소설을 쓰는 딸 자명씨와 사위와 작은 아들이 남긴 유일한 혈육인 손녀가 전부였다.
돌아보면 박삼중 스님과 사형수 구명 운동에 나서 사형수에서 7년 만에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15년 만에 석방된 양아들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구상 시인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많은 제자들과 후배들을 어찌 다 일일이 거론하랴.
노벨상 본선에도 두 차례나 올랐으며, 프랑스 문인협회 선정 세계 200대 문인중의 한 분으로 선정된 시인. 우리나라를 넘어 프랑스·독일·이탈리어·스웨덴·일본·영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그의 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널리 읽히고 있다. 삶을 노래하는 구도 시인으로 평가받은 탓인지 1997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출판부에서 펴낸「신성한 영감-예수의 삶을 그린 세계의 시」에 그의 신앙시 4편이 실리기도 하였다.
문단에서 대표적인 가톨릭 시인이라고 알려진 그는 평생 달고 산 폐질환 악화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2004년 5월 11일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어쩌면 오늘도 그는 허공에서 왔다 허공으로 사라진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 피난민에게 대포 쏘기를 마다하고 남문시장에서 배추 사려! 외쳐 된 포대령, 왕년에 주먹세계를 주릅 잡던 깡패시인 박용주, 32세의 독신자 삶을 홀연히 끊어버린 조각가 차근호, 술자리를 영혼의 놀이터라던 야인 김익진, 유치찬란 삶의 허덕허덕 마루턱에서 느닷없이 만난 은총이라던 걸레스님 중광, 스스로 화가이기 부끄러워 무연고 시신으로 별똥별처럼 스러져간 이중섭……그네들과 만나 낄낄거리며 술잔을 돌리고 있을까.
그는 말년에,
나는 나의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 왔다/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그 카렐레온과 같은 위장술에/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기어 (奇語)조작에만 몰두 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 왔달까?
......
라며‘임종고백’이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1년 만에 나온 추모문집「홀로와 더불어」에는 허무에서 긍정으로, 홀로이지만 더불어서, 유한을 아는 데서 초월을 배워 우리도 시방 영원을 사는 길을 따라 나서야겠다는 102 명 추모의 글이 실려 있다. 이 땅의 큰 시인, 위대한 휴머니스트, 참다운 자유인, 영원한 구도자였던 그가 언제까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구상 시인. 그가 평생 머물렀던‘꽃자리’도 결국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영원히 함께 살며 가는 길을 보여주고자 한 또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리스도 폴!
나도 당신처럼 강을
회심(回心)의 일터로 삼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처럼
사람들을 등에 업어서
물을 건네주기는커녕
나룻배를 만들어 저을
힘도 재주도 없고
당신처럼 그렇듯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위하여 시중을 들
지향(志向)도 정침(定針)도 못 가졌습니다.
또한 나는 강에 나가서도
당신처럼 세상 일체를 끊어버리기는커녕
속정의 밧줄에 칭칭 휘감겨 있어
꼭두각시 모양 줄이 잡아당기는 대로
쪼르르, 쪼르르 되돌아서곤 합니다.
그리스도 폴!
이런 내가 당신을 따라
강에 나아 갑니다.
당신의 그 단순하고 소박한
수행(修行)을 흉내라도 내 가노라면
당신이 그 어느 날 지친 끝에
고대하던 사랑의 화신을 만나듯
나의 시도 구원의 빛을 보리라는
그런 바람과 믿음 속에서
당신을 따라 강에 나아갑니다.
-그리스도 폴의 江 「프롤로그」전문
-끝-
추모문집 ‘홀로와 더불어’ 행사장에서-김수환 추기경
*<홀로와 더불어>는 시인 겸 언론인 구상의 이야기이다.
본명이 구상준(具常俊)인 구상은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의 동인지 「응향」 필화사건으로 남하하여 평생을 기독교적 존재론에 기반한 미의식을 추구한 작품을 쓴 바 있다.
본 글에서는 시인 구상의 인간적인 체취를 따라가 보았다. 구상은 특히 6.25 전쟁 시 승리일보의 주간과 종군작가단 부단장을 하면서 대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시인이다. 당시 대구를 거쳐 간 수많은 문화예술인들과의 인간적인 사연과 사건들은 지금도 가슴 뭉클한 전설처럼 남아있을 정도이다.
적천강, 낙동강, 한강, 그리스도 폴의 강이라는 네 단락으로 나눠 본 인간 구상의 면면을 통해, 참다운 자유인이자 영원한 구도자적 시인의 민낯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주일아침, 소설 같은 문학사 필력에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