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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 [☆고택의 門을 열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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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청풍 연재 고택을 찾아서
[고택의 門을 열다]
송은애 글씀 / / 도서출판 모두의 책(2016.11.04) / 값 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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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잘 어울리는
추사고택을 둘러보다
-- 조선시대 상징 대표 건축물
추석명절이 유난히도 길었던 지난 9월 연휴 중에 가을을 만끽하기위해 길을 나섰다. 햇살은 지난여름처럼 뜨거웠지만 간혹 붉게 물들어가는 가로수를 보며 계절의 흐름을 순리대로 받아들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추사 고택은 충남 예산시 신암면 추사고택로 249번지(용궁리 324-17)에 자리하고 있다.
추사기념관과 함께 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가을 나들이로 적합한 곳이었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 추사 김정희(1786년-1856년)의 옛집이다.
원래는 서울 장동에 위치하여 있었으나 집이 너무 크다며 영조께 상소하자 영조의 사위이자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 김한신이 지금의 자리를 하사받아 지금의 추사고택이 되었다.
추사고택은 조선시대 건축물을 상징 할 정도로 볼거리가 많은 고택이다.
그 당시 세도가들의 대갓집 형식인 고택은 원래 99칸 집이었다고 하나 문헌을 찾아보면 53칸의 집으로 그 역사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은 265㎡가량이며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다.
추사 집안이 예산으로 내려올 당시 예산은 53개 고을로 편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영조대왕의 하사로 각 고을마다 한칸씩 수렴하여 53칸의 고택이 마련하게 되었다는데, 남쪽에 사랑채 한칸 동쪽에 안채 두칸이 온돌방으로 지어졌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조성 되어있다. 또 다른 동쪽에는 사랑채, 서쪽에는 안채를 배치하되 대청의 방향이 다른 고택과 달리 동쪽을 향하고 있다.
지붕은 긴 홑처마에 팔각지붕으로 지형에 따라 기단의 높낮이가 다르고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사랑채의 합실부분에도 맞배지붕에 이어 붙이는 지붕을 기능적으로 처리한 것을 보면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다. 높낮이가 틀리므로 오를 때마다 보여 지는 풍경이 틀리고 내려올 때의 그 느낌이 남다르다.
실학자의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며 문설주, 기둥 등에 추사체의 글들이 새겨져 있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기둥마저 전각되어 있는 글을 읽으며 고택을 다녀간 사람들은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참을 기둥 앞에서 출사표를 던지며 넓은 마당을 거닐며 젊은 날을 보냈을 추사(秋史)를 떠올리며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했다.
사랑채 댓돌에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였다곤 한다. 그 시절 해시계로 추정되며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고 한다.
특히 추사고택은 ㅁ 자형의 가옥으로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 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의 형식으로 웅장함까지 엿보인다.
추사고택은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43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수선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문화재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에 매수하였으며 집안에 있는 김정희의 영정과 도장, 염주, 붓과 벼루 등은 일괄 보물 제547호로 지정되어 보관하고 있다.
고택은 영조대왕의 부마이며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건립한 18세기 중엽의 건축물로 당시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임을 그냥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왕대밭에서 왕대가 난다’는 옛말을 떠 올리며 추사 김정희의 서예에 대한 애정을 고택에서 느끼며 한번쯤은 방문해 건축물과 조상의 슬기를 느껴본다면 미래가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그 고택이 영원히 보존되어 완전한 우리의 것이 가슴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며 고택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사가살불가욕士可殺不可辱
선비정신을 실천한 수당 이남규 고택을 찾다
--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 보일 수는 없다
예산 수당고택(修堂古宅)은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손자 한림공(翰林公) 이구(李久, 1586-1609)의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 1588-1668)가 아계(鵝溪)의 묘소 근처인 현재의 곳에 조선(朝鮮) 인조(仁祖)15년(1637)에 창건하였으며, 헌종 12년(1846)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인 전주이씨가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어 여성의 손길인 섬세하고 자연미가 흐르는 고택이다. 대문을 보면 나무 그대로의 형태인 곡선미를 살렸다. 그 시대의 곡선미나 자연미를 살리는 건축물은 주로 부엌입구나 여인들이 드나드는 곳을 표시하기위해 목재로 사용했다고 하니 특이하게 대문을 곡선미와 자연밀르 살려 지었기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고택의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는 평면구성으로 되어 있고 안채는 다소곳하게 숨어 있듯 구조가 세밀하며 사랑채는 완전 독립되어 자유로움을 구성하였다. 이 지역 반가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고택의 사랑채는 정면6칸 측면 2칸에 툇마루가 있고, 안채는 건넌방, 마루방, 툇마루 등이 있다. 구조(構造)는 모두 5량(樑)의 굴도리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안채와 좌측 끝은 맞배지붕이나 대청(大廳) 전면(前面)만은 부연(浮椽)이 있는 겹처마로 되어 있어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당(修堂) 이남규 선생 등 4대 충절인물 배출한 고택은 건축적, 역사적 가치 또한 크다.
17세기이후 생성된 다량의 고문서와 집안 유물들은 수당가의 변화와 조선후기 사회경제상황의 실제를 잘 보여주는 등 사회문화적․ 학술적 가치도 높다. 이렇듯 수당 고택은 구한말 항일 운동가인 수당 이남규 선생의 생가로 1637년에 최초 건립되었지만 보존 관리가 잘되어 ‘-’자형 사랑채와 ‘ㅁ ’자형 안채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수당 선생의 후손인 이문원 전 독립기념관장이 살고 있다. 담을 두지 않고 주변경관과 어울리게 한 호서지방 반가의 특징이 그대로 녹아있어 고택은 사료적 가치와 건축사 및 주거사 등 종가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 분명하다.
고택은 고택관련 문헌, 고증자료 등을 확보하고 전문가 자문을 통해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로 승격 지정되는 절차를 밟았다.
또 소장문서 및 유물은 17세기 이후 수당가의 변화와 조선후기 사회경제 상황의 실제를 잘 보여주는 등 문화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 40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탱자나무가 하얀꽃을 활짝 피우며 고택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듯하다. 구한말 의병활동을 이끈 우국지사인 이남규(1代)와 그의 아들 이충구(2代)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손자 이승복(3代) 그리고 이장원(4代) 충절인물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지난해 국가지정문화재(충남도 유형문화재 제68호)승격지정에 다라 문화재청 및 예산군의 체계적인 보존관리로 그 가치를 알릴 수 있고 문화재인 만큼 그 모두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수당 선생은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이를 규탄하는 ‘청절왜소’, 을사늑약 때는 ‘청토적소’등의 상소문을 써 일제의 만행을 온 나라에 알리기도 했다.
구한말 홍주 의병장인 민종식 장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일본 헌병에 압송당하던 중 일제가 회유하지 “죽으면 죽을 것이지 내가 굽힐 것 같으냐, 선비는 죽일 수 있되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不可辱)”고 호통 친 일화가 전해진다.
고택 옆 수남기념관은 이남규 선생이 민종식과 함께 의병으로 1906년 홍주성 전투에 참여한 자료 및 공주감옥에서 투옥 후 일제에 의해 서울로 압송도중 아들과 함께 피살된 한말 우국지사이며 항일의병의 흔적을 관리하고 있다.
이남규(李南圭, 1855-1907)선생은 어려서부터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집안은 고려시대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조선시대 이산해(李山海)와 이경전(李慶全)등 이름 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유가(儒家)의 명문으로 학문의 전통이 매우 깊었다. 그리하여 선생 또한 후손들에게 문장에 대한 연원을 다른 곳에서 구할 것 없이 가학(家學)에서 구하여야 한다.“고 할 정도로 가전(家傳)학문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 가학을 익히면서 선생은 7세 때부터 당시 기호유림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의 기를 느끼고
문헌서원文獻書院에서
-- 홍살문 뒤에 있는 비석군과 함께 어우러지는 연못과 경현루(景賢樓)는 주변 경관을 아름답게 한다
충남 서천군 ‘문헌서원’은 고려말 대학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선생을 모시기 위해서 1575년에 한산군수 이성중과 지방 유림에 의해 처음 효정사(孝靖祠)로 세워졌다. 효정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나 1610년 한산 고촌으로 옮겨 문헌서원을 세웠고 이듬해 ‘文獻’이란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문헌’은 글 잘하는 선비들의 고향이라는 이항복의 ‘文獻之鄕(문헌지향)’에서 유래한다.
1871년(고종 8)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 되었으나, 그 후에도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壇)을 만들고 분향해 오다가 1969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고 2010년에는 ‘역사마을가꾸기’ 사업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총8분의 위패를 모시고 3월과 9월(음력)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가정 이곡(稼亭 李穀, 1298-1351)과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학문과 덕행이 후세에 길이 보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곡은 고려 후기 학자로서 이색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았고, 문명을 떨쳤다. 이색은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원․ 명교체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문헌서원’입구 홍살문은 지조와 절개를 말해주는지 홍살문 뒤로 문헌서원이 잘 정비되어 있다. 홍살문 뒤에 있는 비석군과 함께 어우러지는 연못과 경현루(景賢樓)는 주변 경관을 아름답게 한다. 문헌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수문을 바라보며 오른쪽에는 교육영역인 강륜당이 보인다.
과거 원생들이 공부하는 건물로 학업에 정진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곳이지만 지금은 그 역사만 흐르고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진수당은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포나 장식을 피하고 간소한 양식으로 지었다.
서원은 보통 사당, 강당, 재로 구성되는데 사당(祠堂)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고 강당(講堂)은 원생들이 공부하는 장소이며 재(齋)는 원생들이 숙식하는 장소로 쓰였다.
진수당 옆에 세워져 있는 한산문헌(韓山文獻)이라 새겨진 한산문헌서원비기(韓山 文獻書院碑記)중심으로 석척재와 존양재가 세워져 있다.
서재(書齋)인 석척재(夕惕齋)는 주역(周易)의 건건석척(乾乾夕惕)에서 유래한 말로 ‘군자가 종일 조심하고 조심하여 저녁에 드리운 듯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는 뜻이다.
석척재는 해가 저물면 사당에 모신 유현들이 걱정된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동재인 존양재(存養齋)는 맹자의 존양성찰(存養省察)에서 유래한 말로 원생들이 마음의 본성을 지켜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문헌서원의 사액(賜額) 현판은 만력(萬曆,명나라 연호)39년(1611년)이다.
경현문(景賢門)은 효정사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효정사(孝靖祠)는 이곡의 시호 문효공(文孝公)과 이색의 시호(文靖公)에서 ‘孝’와 ‘靖’자를 따서 지었다. 가정목은선생문집판(稼亭牧隱先生文集板,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7호)은 현재 문헌서원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성리학자로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가 망할 때 태조 이성계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이색 신도비(李穡神道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는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비석에 기록되어 있으며, 묘 남동쪽에 세우는 것으로 목은(牧隱)이색 선생을 뜻을 기리고 있다.
이색 선생 묘 일원(李穡先生 墓 一圓,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은 문헌서원의 좌측 기린산(麒麟山) 중턱에 있는데, 묫자리는 무학대사가 정한 것이라 한다.
묘 앞에는 11대손이 1694년(숙종20)에 세운 여러 석물이 있다.
비는 단순한 형태이며 앞면에 ‘목은선생 이색지묘(牧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말 중부지방 대표적 전통농가인
이하복 가옥에서 첫 눈 만나다
-- 연일 내린 가을비는 겨울을 재촉하고 초가지붕은 가을빛을 담다가 담다가 첫눈을 맞이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충남도 서천군 기산면 신막로57번길 32-3에 위치한 서천 이하복 가옥은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통농가(큰집)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초가집이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 197호로 지정되었다.
연일 내린 가을비는 겨울을 재촉하고 초가지붕은 가을빛을 담다가 담다가 첫눈을 맞이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 예술적인 풍경에서 풍요롭게 살아온 우리의 대중적 역사를 볼 수 있었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라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가옥은 한산이씨 중시조인 목은 이색선생(고려 말의 학자로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문하에 권근, 변계량 등 많은 학자를 길러내어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 학자의 18대 손인 이병식(중추원의관)씨가 조선말엽에 안채 3칸을 짓고 그 후 아들이 20세기 초에 사랑채, 아래채, 위채 등을 새로 지으면서 안채도 크게 증축했다.
이 가옥은 멀리 진산(鎭山)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이룬 명형국지(名形局地)에 자리 잡고서 국(局)이 열리는 수구(水口)를 향하여 남서향을 하고 있다. 또한 안마당을 중심으로 연못도 있었으나 지금은 메워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앞쪽에 대문간이 있는 -자형의 사랑채와 뒤쪽에 O형을 이룬 안채와 광채가 튼 ㅁ 자형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의 우측에는 -자형의 아래채가 2칸 정도 떨어져 자리 잡고 있다.
안방과 윗방 앞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두 방 사이에는 네짝이서기문을 달아 방을 구분하였다. 대청은 윗방과 아랫방에서 드나들 수 있는 개구부를 내지 않고 전면에만 유일하게 출입문인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고 있다.
이러한 간살잡이는 충남지방에서 가끔 보이는 형식으로 마루방이 일반대청으로서의 기능보다 수납공간으로의 쓰임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사랑채는 좌측에서부터 대문간 1칸, 부엌 1칸, 사랑방 2칸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장대석 외벌대 토단 위에 자연석 덤벙 초석을 놓고 모두 방주를 세웠으며, 주상(柱上)의 도리는 모를 굴린 납도리를 사용한 민도리집이다.
상부 가구는 전면의 지붕을 후면보다 길게 하기 위한 2고주4량가(二高柱四樑架:半五樑架)이며 지붕은 우진각 초가지붕이다. 사랑채는 1고주5주량가로 안채의 구조기법과 유사하다. 다만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으로 안채보다 축대를 높게 한 것이 다를 뿐이다.
특히 사랑채의 우측에 아래채를 따로하여 며느리에게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는데, 이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내외관습을 지키려는 것으로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덕목을 보다 더 잘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또, 1천여 평의 대지 위에 안채, 사랑채, 아래채 등으로 구성된 가옥은 옛 선조들이 불문율로 지켜왔던 풍수지리상으로 형성된 자리라는 점을 뒷받침하듯 멀리 화양산을 바라보면서 트인 곳을 향해 나란히 배열해 있다. 수구가 조금 벌어진 것을 막아주기 위해 향나무, 벽오동 사철나무 등을 가지런히 심어 영역감을 한층 강화한 느낌마저 준다.
가옥은 전통민가의 마지막 시기인 조선시대에 충청, 전라지역 등지에서 널리 이용되던 -자형 ‘외통형식’으로 솟을동자(방문, 대청문중방밑에 모양을 더해주기 위해 치장한 부분)와 같은 필요이상의 재료나 멋을 전혀 부리지 않아 전형적인 민간기법을 사용, 매우 검소하고 소박하게 지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첫눈이 흠뻑 내려 포근하면서도 아름다운 절경을 만들어준 가옥을 바라보며 잠시 초가지붕 위 흰 눈 덕분에 과거로 돌아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를 화톳불에 고구마 구어 먹으며 듣고 싶었다. 애잔했던 마음속에 쏙 들어온 서천 이하복 가옥은 서민들의 대표적 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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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의 말
≪고택의 문을 열다≫를 합본하며
저자 송은애
4년전 일이었습니다.
현재 아산 국회의원 이명수의원이 어떤 모임에서 청풍에 대해 이야기하다 “청풍은 다 좋은데 뭔가 특색있는 기사가 없다”며 내게 한번 곰곰이 살펴보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했습니다.
무엇을 특색있게 써 볼까 궁리 끝에 문화재를 알리는 글을 써볼까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대전무형문화재를 연재하던 중 이었는데 갑자기 고택은 어떨까? 하는 반짝이는 불빛이 스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아름다운 공간’이라 하여 예쁘고 스토리가 있는 주택을 연재하였는데 50호로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고택을 찾아서는’ 제1호 남간정사를 시작하여 대전 충남 그리고 충북을 돌며 순차적으로 쓰기로 계획하고 취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연재를 하다 보니 대전충청권에서는 우암 송시열선생 이야기를 빼면 더 이상 쓸 스토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떤 고택도 우암 송시열선생과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어 재미를 잃어가고 있었다가 불현듯 충청권만 고집할 게 아니라 전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생각했습니다.
마침 남편과 밀양 갈 기회가 생겨 인터넷을 열어보니 국내 유일의 고택 ‘김씨고택’이 보였습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내시의 고택이라 나오는데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호기심이 강원도 뿐 아니라 전국을 돌아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달에 한번 소풍가듯 남편과 함께 했습니다.
나중에는 남편이 먼저 어디를 간다하면 고택을 찾아주기도 했습니다. 때론 주소를 들고 찾아가니 정말 고택이 되어 잡초만 가득한곳도 있었고 굳게 문이 닫혀있어 담을 넘어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3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가족이 추진했던 나의 회갑행사와 맞아 떨어져 합본을 하게 되었지만 월간지란 청풍의 연재 코너가 없었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40호를 다 다니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차곡차곡 모으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청풍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고택을 연재하는데 고마운 사람은 한두명이 아닙니다. 시름에 빠져있을 때 용기를 준 명인회 회장님, 자료가 부족하다면 사진과 자료를 아끼지 않고 전해준 대전시청 문화재종무과 윤환 연구관님, 자료 조사를 아낌없이 해준 서천의 문철수 시인과 (사)백제문화원 식구들, 또한 합본을 위해 재편집과 더불어 책자를 만들어준 모두의 책 대표 및 임직원여러분께 지면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 소풍가듯 나와 함께해준 남편에게 감사함을 표합니다.
그래서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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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송은애∥
∙ 월간 시사저널 ≪청풍≫에서 취재하며 10년간 글을 써온 송은애부장은 등단 20년차 시인이다.
∙ 취재를 하면서 주로 연재 형태의 글을 써왔는데 연속적인 느낌을 주어 좋은 반응을 주었다.
∙ 고택을 찾아서, 청풍응접실, 여성시대, 공연 및 전시, 그리고 영화를 연재하면서 문학적인 정서를 가미했다. ‘고택을 찾아서’를 연재하기 전 아름다운 공간을 50호까지 써 스토리 있는 집 예쁜 집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 문단 활동도 왕성하여 10번째 시집 『새 꽃을 혁신하다』를『고택의 門을 열다』와 동반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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