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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서 3:8~12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이방인을 위한 복음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갈 3:8).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방이 곧 아브라함을 뜻하며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뜻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전파되었으며 그 복음을 전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은 참되고 유일한 복음인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였던 복음도 같은 복음이며 우리가 가진 복음 또한 아브라함이 가진 복음과 똑같은 복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신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베드로나 바울의 시대에도 전혀 새로운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 백성을 이방인 중에서 취하여 내셨으며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 었습니다(행 15:14~18; 롬 11:25,26 참조).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이방인 중에서 한 백성을 구원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불변의 증거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러한 뜻을 성취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어떠한 이방인도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복음이 아니고는 달리 구원 받기를 바랄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2,33).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행 3:25,26)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의의 축복을 뜻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죄의 용서는 동시에 의의 축복을 가져다 준다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
누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합니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여 보십시요. 성경은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119:1),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 KJV)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라는 말씀이 명백히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속한 자들은 믿음으로 계명을 행하며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을 함께 받는 자들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본성과는 정반대이므로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는 것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의를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행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의로부터 더 멀리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벧후 1:4)을 믿으면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벧후 1:4)며 모든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주는 율법에 기록된 모든 일을 계속 행하지 않는 데에 달려 있으며 축복은 율법을 완전히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되게 믿는다면 정죄를 받지 않고 오직 믿음이 율법에 일치되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그러면 성경이 선한 일을 무시한다고 가르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선한 일을 높이 삽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또한 불신하는 자들을 책망하여 말씀하기를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고 하였으며 디모데에게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고 권면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골 1:10)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예비하시고 이루셨으며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쌓아 두셨습니다(시편 31:19 참조).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이와 같이 선한 일은 행하여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행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오직 선하신 분만이 실행할 수 있으며 그분은 곧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어떤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 큰 은혜인 것입니다(히 13:20,21 참조).
그러면 누가 의인이며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믿음을 통해서 바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요일 5:17) 또한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그러므로 모든 불의는 불법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모든 의는 율법에 순종하는 것임을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의는 우리가 얻어야 할 목적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그 의의 표준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있게 될까요? 그 답으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고 행위로는 전혀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롬 10:10)기에 여하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의인에 대한 이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예외는 있을 수 없으며 중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다른 의인은 믿음과 행위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지고 지탱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보다 위대한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기에 그러합니다(롬 7:12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주 예수를 영접하면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면서 완전히 율법을 이루어 주십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책에 쓰여져 있건 돌비에 새겨져 있건 간에 글자로 쓰여진 율법이며 이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단순히 “이것을 행하라” 또는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이 말씀은 글자로 쓰여진 율법이 생명을 제시하는 조건이며 율법은 행위, 오직 행위만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은 제시된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살펴본바 지금까지 율법의 요구를 이룬 사람은 전혀 없으며 율법을 행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의 생애에 완전한 순종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생명은 움직이는 행위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
그러나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허물과 죄로 죽(엡 2:1)”은 사람은 의를 행할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그리스도만이 그 안에 생명을 지닌 유일한 분이시며 그분만이 의를 행하였고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을 시인하고 영접할 때, 그때는 더 이상 우리가 산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만듭니다. 이러한 우리의 믿음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기에 우리의 믿음이 의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바치며, 살아 계신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게 되면 그 마음은 하나님의 보좌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살아 있는 율법이 우리의 생명이 되며 이 생명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폐지되었다 혹은 변경되었다, 효력이 줄었다라고 주장하는 단 한 절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어떻게 율법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 것인가(칭의)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거룩한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에 대해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가르치기를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된다는 거짓 가르침은 죄인에게 더욱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저없이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한 참된 의로 제시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기초이며 주제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자랑하였지만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랑으로 삼았으며 그가 이와 같이 가르친 율법의 의로 하나님의 이름이 바울을 통해서 영광을 받게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갈라디아서의 연구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이해가 분명히 마음에 새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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