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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품은 시인들, 고향에 잠긴 시인들
박윤배 (시인)
1.들어가며
꿈과 현실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슬쩍 돌아보는 자리에는 ‘나’라는 존재가 궁금한 의문형의 詩가 거기 있었다. 그러니까 시는 고향 같은 것이어서, 갈 길을 잃었거나 막막함의 끄트머리에서도 새로운 삶의 원동력 되어주기도 한다. 과거 한국문학에 있어 크게 무수히 다루어지던 고향이라는 주제는 많은 작가들이 이미 다양한 작품을 남겼기에 그 신선함이 유지되지 않은 주제로 전락한 바가 없지 않다. 백과사전적 의미를 빌리면 고향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혹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장소이다. 나의 과거가 거기엔 있고 일정한 형태로 내가 형성된 어쩌면 근원 같은 하나의 세계이다. 이처럼 시간·공간·마음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말이 고향이다. 산천이라는 자연을 포함해서 ‘고향산천’이라고도 하며, 생물학적 탄생과 일치시켜 어머니와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한다. 다정함·그리움 안타까움 등의 정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타향살이·귀향·낙향·실향·향수 등 고향과 관련한 많은 말들은 사소하지만 서로 다른 복합적인 심성을 고향은 담고 있다.”의 요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향은 특히나 농경사회를 살아온 사람들이 창작활동을 하면서 가장 먼저 다루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눈 안에 들어온 풍광들과 의식이 때가 묻지 않은 상태에서 만났던 순수한 감정들은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어서도 늘 그리워하는 문학적 대상이 되고 있다.
<문학 수> 2025년 겨울호 (제32호)에 실린 11분 시인들의 신작詩들을 읽다가 하고많은 시 주제들을 두고 언뜻언뜻 보이는 ‘고향’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시 속에 고향의 정서를 담아낸 시편들이 여럿 있어서 고향=과거를 펼쳐놓은 두레상에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대 다른 식구들이 속이 다른 재료로 빚어놓은 설날의 만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이지만, 모양은 각각 다른 지문이 찍혀있는 만두를 살펴보는 것도,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든 것인데, 그러한 과거(꿈의 잔해들)와 현재라는 차갑고 반들거리는 거울에 비친, 시인 각자의 견해들이 어떤 만두피 같은 언어를 만나서 어떤 크기와 모양의 시로 빚어지는지를 한 번 보기로 한다
2. 고향 정서를 품은 시들
분홍꽃 치마 곱게 싸서 세월 수없이 가도 변치 않으리라고
속가슴 깊이 간직하던 아내의 꽃 마음이, 노을빛 그리움으로
다시 곱게 피어나기를 바라며 기원하는 날이 늘어날수록
늦여름 노을빛 닮은 배롱나무꽃 그릴 때가 오겠지
노을 내리고 질 때마다 피고지던 꽃잎들 보고 싶어지겠지
가을바람 불어올 때마다 분홍빛 한없이 만나고 싶겠지
-김성부 「배롱나무꽃 이별 노래」 부분
제목에서 이미 암시하는바, 아내의 꽃 마음이 다시 피어나기를 바라는 어떤 간절한 목백일홍꽃을 데려와 노을과 배치함으로써 일정 부분 객관적 상관성을 획득하고 있다. 2연에 고향에 뼈에 해당하는 부문을 남기고 1연과 3연을 산문화시키면 “배롱나무꽃 노을 같은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깊은 밤 하현 달빛 안고 세월을 헤아리고 있다. 무더위 한세월, 진분홍 그리움 한가득 새기느라 꽃 가슴 빨갛게 타들어 가도 떠났다가 언젠가 다시 돌아 올 날 남기고 갈 길 챙기며 달빛 따라 서녘 하늘로 이별할 시간 기다린다. 달빛 바람에 떠나가야 할 꽃잎이 배롱나무 꽃잎뿐이더냐. 세월 바람에 정 하나 남기고 소리 없이 이별하는 꽃잎이 헤어지는 아픔에 겨운 배롱나무 꽃잎뿐이더냐. 오고 가며 꽃잎 바라고 꽃 깊은 정 어루만지며, 그리움과 기다림에 젖어가던 한세월을 꽃잎은 결코 잊지 않으리라.”인데 시인은 이별을 경험했거나, 이별을 앞둔 어떤 상황에서의 심정을 한 편의 그리움의 정한이 가득한 한편 시로 빚어놓고 있다. 앞서 말한 고향의 정서는 결국 어머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로 보아 한 남자의 고향은, 오래 함께 살며 정이 든 아내의 품도 고향과 같은 것이어서, 헤어져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느끼는 비애는, 어머니의 품인 고향과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밭두렁마다 우거진
콩 넝쿨이 불러들인
노루 고라니가 친숙했던 고향
옛 모습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지
낯선 도시의 삶에 찌들어도
꿈자리에 그려놓고 다녀오면
거뜬하게 일으켜주는 내 고향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 간다
- 김인숙 「꿈꾸는 고향」 부분
이 시는 고향은 떠나온 자의 과거와 현실을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위에 옮겨놓은 부분은 현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앞에 생략된 부분은 기억 속의 고향 결국 밭두렁 콩 넝쿨이 불러들인 노루나 고라니가 되어, 고향산천을 달려가고 있는 시인의 심정을 이어가고자 함인데 더욱 그 고향이 간절한 것은 “낯선 도시의 삶에 찌들어도” 때문이다. 고향은 꿈자리로도 존재하고 있어, 시인이 달려가면 거뜬하게 일으켜주는 그런 고향을 시인은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있다. 아버지가 거기 있든 없는,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가는 고향은 이렇듯 생생하게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유명산 자락 개구리가 노래 부르고/가재가 꿈틀대던 고향/고사리 곰취 산나물 향취에/계곡물은 더욱 맑게 흘렀다// 딸 부잣집은 나물 팔아 혼사 밑천 삼고/머루와 다래는 천상의 진미/소꼴 베는 걸음 즐거웠다//보릿고개는 산의 정기로 씻어내고/ 물통을 채워주는 앞산 고로쇠/씨알 굵은 감자가 풍성//가마솥 가득 배고픔을 잊었다”는 시인에 고향의 기억으로 결국 도시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아프면 찾는 정신적인 약 창고로도 보인다.
검게 그을린 초록 숲속
조선을 창조한 태조 이성계가
묻혀있는 동구릉
천하를 호령하던 임금은
천국에 가서도 바쁜지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따금 작은 생명
풀벌레의 울부짖는 목소리
까마귀가 까악까악 내는 소리가
조용한 수풀을 깨운다
지나간 600년 세월
조선 창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왕비도 없이 낯선 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억새 울음소리만
구슬프게 들려온다
-김한진 「구슬픈 억새 울음소리」 전문
이성계가 묻혀있는 동구릉의 이야기다. 또한 살아있을 적과 죽고 난 다음 세계를 연결하는 억새를 통해 살았을 적의 어떤 영화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의 허무를 땅이 피워올린 억새 그리고 그 억새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그리워하는 그곳도 고향임을 넌지시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다. 이따금 작은 생명 풀벌레가 앉아서 울다가 때가 되면 포대기처럼 다음 생을 돌돌 말아서 이어주는 억새, 까마귀가 까악까악 내는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제 방향으로 흔들리는 억새, 억새는 결국 그리움을 품은 고향의 등가물로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긋고 있다는 걸, 시인은 허무주의적 감정과 잘 버무려 울음의 또 다른 방점을 징검다리처럼 펼쳐놓고 있다.
빗발치게 넘나드는 송추길
바람은 언제나 신선한데
화약 내음 배어있는 그 길을
지치지 않을 만큼 좋다
의정부에서 연신내까지
북한산 둘레길 눈 맞춤하며
융단처럼 즐비한 정원수 길까지
四季를 나는 사랑했다
맛집은 사이사이 터를 잡고
허기진 한낮을 유혹한다
베이커리 카페에서 손짓하는
헤즐럿 커피 향을 나는 좋아했다
기다림은 산 능선을 따라 흐르고
철통같은 비무장지대를 뚫고
널 만나러 가는 길을
천년만년 되풀이하고 있다
-석기영 「송추 연정」 전문
고향을 이야기하자면 마음의 고향이 있는가 하면 지리적인 고향이 있을 수도 있다. 각박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왠지 어릴 적 환경과 익숙하거나 지형이 주는 나만의 어떤 편안함이, 늘 나를 반기는 그런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그 경우 유달리 그곳을 자주 찾게 되는데, 이 시 「송추 연정」을 쓴 석기영 시인도 바람은 언제나 신선한데 화약 내음 배어있는 그 송추길이 좋다고, 지치지 않을 만큼 좋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기다림은 산 능선을 따라 흐르고/ 철통같은 비무장지대를 뚫고/널 만나러 가는 길을/천년만년 되풀이하고 있다” 그곳은 비무장지대를 뚫고 가야 한다. 또한 천년만년이 주는 어떤 울림이 분단된 현실의 또 다른 어떤 불편한 심사까지도 시인은 연정으로 품으려 하고 있다.
남쪽 끝 반도에 터 잡은 초가
가족 오금이라도 펼 수 있는 곳
키만큼 쌓아 올린 영역의 경계엔
오두막을 안은 아버지 모습이 서있다
리어카도 귀하던 시절
지게에 찌든 아버지의 지친 땀 냄새
차진 흙, 돌 하나에 한 뼘씩 솟아오른
ㄷ자 담벼락에 고스란히 스몄다
마흔다섯에 가신 초록 아버지
홀어머니마저 떠난 빈집을 지키며
오랜 세월 바람을 막아선 담벼락
이젠 바닥에 누워 속살을 드러낸다
밀치고 넘어선 태풍은
아버지 크나큰 한숨 같아 목이 메고
무너진 돌더미 틈새로 흘러든 빗물은
아버지 눈물이라서 더욱 슬프다
생각날 때마다 바라보던 분신
다시 일으켜 세워 본 아버지 울타리
영혼 없는 허상일 뿐
아버지 참모습은 무너지고 없다
-이정갑 시 「아버지 울타리」 전문
실체인 울타리와 아버지가 대비를 통해 시인은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다. 키만큼 쌓아 올린 경계에서 오두막을 안은 아버지 모습 보고 있다. 돌 위에 차진 흙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돌을 올려 쌓은 담에서 시인이 만나는 것은 뭉클한 아버지가 전부가 아닌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낸 자기 자신에 성장기의 고통 또한 흙과 돌로 쌓인 경계를 통해 보고 있는 것이다. “마흔다섯에 가신 초록 아버지/홀어머니마저 떠난 빈집을 지키며/오랜 세월 바람을 막아선 담벼락/이젠 바닥에 누워 속살을 드러낸다” 과거의 아버지(고향)를 끌고 와서 현재에 세워 두는..., 그러나 울타리는 결국 막을 수 없는 세월처럼 아버지처럼 자신이 되쌓고 보수를 한다 해도, 다시 일으켜 세워 본 아버지 울타리는 영혼 없는 허상일 뿐이라고 푸념 섞인 토로를 들려주고 있다. 시인은 결국 고향이라는 말은 시안에 버무려 넣고 있진 않지만, 고향을 울타리로 울타리를 다시 과거와 현재의 주체로 두면서 묘사와 진술로 울타리를 투사投射해 내고 있다. 외부의 적이나 짐승 혹은 바람 추위 등등으로부터 집을 지켜내는 역할로의 아버지는 즉 울타리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물 흐르는 듯한 진술로 구체화하고 있다.
한밤중 달맞이꽃 보면 그 샛노란 꽃술 속에서 금홍이 피어나네 용산 외딴 골목 국밥집이었던가 적산가옥 이층 구석 다다미방에서 밤 깊어가는줄 모르고 노래를 팔던 열아홉 살 금홍이 마주 보면 달맞이꽃 같다가 박꽃처럼 눈부시기도 하고 달아오른 뺨이 사과 같아서 술잔 부딪고 젓가락 두드리며 엇박자를 놓아도 하나 이상하지 않던 금홍이 어쩌자고 나를 옆방에 손님처럼 모셔놓고 속내 모두 털어놓으며 그렁그렁 울부짖던 내 친구 날개는커녕 하루살이 같던 금홍이 아무리 뜯어봐도 李箱스럽지도 않고 미운털 하나 박히지 않는 그해 여름이여!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지금도 달빛 내리는 밤길 걸으면 내 마음에 금홍이가 샛노랗게 꽃 피네
-이현실 시「금홍이」 전문
실제 인물이기도 했던 李箱의 소설 「봉명기」 속 금홍이를 시인은 슬쩍 자신의 시 속으로 공간 이동을 시켜 데려온 것이다. 시의 첫 문장에는 금홍이를 떠올리게 하는 “한밤중 달맞이꽃 보면 그 샛노란 꽃술 속에서 금홍이 피어나네”라고 배치하고 있으며 마지막 문장으로는 “지금도 달빛 내리는 밤길 걸으면 내 마음에 금홍이가 샛노랗게 꽃 피네”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가장 핵심 문장으로는 “기다리다 꽃이 됐나”일 것이고, 읽어본 소설의 금홍이를 또 다른 의미와 이미지에 옷을 입힌 이 시는 한때 지식인으로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온 이상이라는 인물과 함께, 주색과 난봉의 시대에 나 또한 태어났다면 금홍이 같은 여인을 만나 발로 차이고 꼬집히고 얻어맞았다 한들 잠시나마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남성적 호기심을 슬쩍 건드리고 있다.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겠지만, 밤이면 환한 웃음으로 피어나는 야화 즉 달맞이꽃을 통해, 이미 누군가 붙여준 “꽃말”의 의미를 넘어, 달맞이꽃에 새로운 상징이 생겨나고 있다.
울음도 웃음도 버릴 것 없다
엄마 무릎의 둥개둥개 시절도
밟힌 은행알도 풀섶에 떨어진 밤도
갈잎 속 늙은 호박 꼭지 비틀어져도
가을걷이는 알곡도 쭉정이도 다 귀하듯
감나무 홍시 철푸덕 앉아 요래 허전했을까
대추 털어 간 가지 멍뿐인데
빈 밤송이 섧다 그 추억이라도 귀하듯
막차를 겨우 탄 것처럼 잠깐 안도하는 시간
살면서 꺼내는 고향 추억이 그렇다
- 임하초 시 「둥개둥개 시절」 전문
시인이 “막차를 겨우 탄 것처럼 잠깐 안도하는 시간/살면서 꺼내는 고향 추억이 그렇다” 꺼내는 추억의 실체들은 모두 정갈하고 따듯하다. 고향이 품고 있는 엄마의 무릎이 둥개둥개 태워주는 어름처럼 웃음도 울음도 버릴 것 없다는 시인의 정한에는 때 묻지 않은 원초적 사랑이 잔뜩 묻어있기 때문이다. 고향이 보여주는 고향에 관한 진술들은 은행알, 알밤, 늙은호박, 알곡, 쭉정이 등등 모두가 여름의 과정을 지닌 일종의 추수기의 풍요로움과 맞닿아 있다. 추억을 붙잡고 막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시인의 심정을 달래주는 것들은 모두 고향의 향기를 지녔다. 감나무 홍시 오래 철퍼덕 앉아, 그 동작으로 앉아 있는 시인의 눈에는 슬픔과 함께 다 ‘털림’ 또는 내어줌에서 허탈 혹은 허전의 자리를, 고향의 추억으로 채워 넣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다. 대추 털어 간 가지의 멍도 그렇고 알맹이 잃어버린 밤송이의 텅 빈 설움의 공간에도, 추억은 막차는 뭉클하게 달리고 있다는 진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웃이 건네준 토실한 밤을 먹으니
뒷동산에 알밤을 줍던
어린 시절이 달려 나온다
아버지가 깎아 주시던
달콤한 맛
산등성으로 날아가는 산새처럼
아득한 전설이 되었다
새 이엉 엮어 올린 지붕에
가을바람 잎 떨구고
빨갛게 매달린 홍시
저녁연기 풀풀 날리던
고향 마을
고추잠자리 떼로 날고
가을 들판에 고개 숙인 벼 이삭
산기슭 서걱거리는 갈대의 속삭임
석양에 끼룩거리던 갈매기 떼
벼 줄기에 톡톡거리며
뛰놀던 메뚜기들
행길가 하늘거리던 코스모스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진
추억이 촉촉이 배어나온다
-전경옥 시 「알밤 따라오는 세월의 오솔길」 전문
시인은 1연과 마지막 연을 현재로 설정하고 중간 부분에는 과거 고향마을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수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시는 제목이 암시하는바 “알밤 따라 오는 세월의 오솔길”이 주는 어떤 길 위의 여정을 인생의 길과 연결하면서 이웃이 건네주는 밤을 먹으면서 과거를 소환하고 있다. 아버지가 깎아 주시던 밤과 새 이엉 올린 지붕 위로 감잎 떨어지고 나서도 매달리던 홍시며, 무럭무럭 피어오르던 저녁연기까지 길이 주는 선線의 구도와 연기의 길, 오솔길, 벼 이삭, 갈대, 석양 속의 기러기 떼, 메뚜기 코스모스 등등 식물과 곤충 조류가 모두 세월의 뒤안길에 묻힌 추억이 된다. 시각, 청각, 촉각을 건너 밟으며 세월이 남긴 그 공감각적인 오솔길을 한 폭 그림 속으로 데려다 놓고 있다.
식탁 옆 뚱뚱한 남자 하마보다
큰 철덩이 몸 무엇이든 통째로 삼킨다
열이 나고 크르륵 차르륵 과욕으로
탈이나 하얗게 질린 얼굴 몸을 열어젖히고
대수술에 들어간다
특이한 몸 구조 형체를 알 수 없게
꽁꽁 얼어있는 날것들 캔 음료
과일 익힌 음식 잘게 썬 야채 여름을
통째로 삼켰구나 몽땅 끄집어내어 소독하고
소화제를 처방 시원하게 장을 비워준다
무절제가 부른 소화불량 욕심을 버리고 나니
몸이 편하고 가벼운지 맑은 표정으로 서있다
-심수현 시「냉장고」 전문
심수현 시 「냉장고」는 현재를 중심에 두고 쓴 시로 읽힌다. 과거와의 거리는 앞 계절인 여름의 잔해들 정도이다. 과일 익힌 음식 잘게 썬 야채의 이름이 등장하고 무절제가 부른 소화불량 욕심이 그들인 것을 이야기하는 정도로 읽히며, 현재 행위를 시인은 열거하고 있다. 냉장고는 실재하는 냉장고 인지? 아니면 한 남자인지 “식탁 옆 뚱뚱한 남자 하마보다/큰 철덩이 몸 무엇이든 통째로 삼킨다”로 보면 남자도 그렇고 냉장고도 그렇다는 것인데, 아무튼 그런 냉장고를 청소하는 과정을 ‘대수술’로 보고 있다는 점은 색다른 시각임엔 틀림이 없다. 여자 없이 혼자 사는 남자의 비만한 냉장고를 청소해 주는 시인의 모습이 얼핏 연상되기도 하는데 “열이 나고 크르륵 차르륵 과욕으로/탈이나 하얗게 질린 얼굴 몸을 열어 젖히고”는 연식이 좀 되었고 너무 많이 내용물을 눌러 담은 그런 냉장고로 보인다. 청소의 목적은 “몽땅 끄집어내어 소독하고/소화제를 처방 시원하게 장을 비워준다”이다. 이 시는 고향의 정서와는 상관이 없지만 얼핏 생각해 보면 고향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허기가 채워넣기에 급급이던 냉장고를 제 2의 고향쯤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지? 하마가 물을 잊어버리고 살면서 몸 안에 더 많은 물을 가두는 것처럼, 헛헛함을 메꾸려는 현대인 중에는 고향의 향수를 간직하고 궁핍해도 여유를 누리는 사람과 더 많이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스스로 보상받으려는,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어울려 세상을 다양하게 이루고 있음은 또 다른 현대의 특징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3. 나가는 말
과거 시인들의 전유물처럼 다루어진 고향에 대한 좋은 시들은 정지용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김소월 등등 이미 헤아릴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2025년도 <문학수> 겨울호에 시의 테마로 설정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고향”을 다룬 시가 이리도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요즘 시대가 인공지능을 장착한 AI의 시대라서 아마도 AI는 이해하기 힘든 인간들만의 정서를 가진 “고향”이라는 주제를 다들 시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도 기존의 좋은 고향 주제의 시들을 색다르게 해석하거나 능가하거나 낯설게 하는, 그런 도저한 발상과 발랄한 상상력은 크게 엿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수필의 형식을 취하게나 산문의 한 토막을 시로 전환 시킨 일종의 푸념 넋두리로 읽히는 건 왜일까? 성인들에게 오래 시를 지도하다 보면 대게 농경사회를 거쳐 성장하였거나, 대가족의 일환으로 유년 시절을 보냈거나, 도시의 변방에서 살았거나, 머릿속에 오래 각인된 시공의 정서들이 뒤늦게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한동안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되도록 빨리 그러한 기억의 잔해들을 털어내는 자만이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시를 쓰게 된다. 그렇다고 과거를 다 지우라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일종의 시간 예술인 관계로 ‘기억에의 반추’의 산물이 시인 것은 무시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뭉뚱그린 과거의 향수가 아닌 구체적인 체험을 생생한 현실에 접목할 때 그 과거의 시간은 우주의 시간을 뚫고 신비의 싹을 밀어 올리게 될 것이다. 어느 시인에게는 출산으로 튼 아내의 아랫배가 고향 바다의 잔잔한 물결일 수도 있고, 도시에 버려진 비쩍 마른 고양이의 털빛에서도 고향의 정서를 읽을 수도 있다. 기행문처럼 순차적인 형식을 버리고 상상의 진폭을 넓혀서 고향이 AI가 이해 못 할 인간만의 교신 기지국이 되기를 꿈꾸어 본다. 오래된 냉장고를 코끼리라 해도 좋다. 냉장고 속 간고등어 입장에서 고향인 바다를 그리워해도 좋다. 본질 너머의 또 다른 본질을 두고 고민해 볼 때, 고향은 진부함을 벗고 신선한 충격의 보물창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박윤배 약력
1989년 매일 신춘문예에 시 <겨울판화> 당선되어 등단. 시집 『쑥의 비밀』(도서출판 전망),『얼룩』(문학과 경계사),『붉은도마』(북랜드), 『연애』(책나무),『알약』(시와표현),『오목눈이 집증후군 』(북랜드, 2018), 『화살물고기』(잉어등 2025)이 있음 대구시인협회상. 금복문화상 수상. 현재; 대구경북예술가곡회 사무국장, 대구디카시인협회대표 . 경주문예대교수. 시창작원 <형상시학>대표. 현재: 대구신문 <좋은 시를 찾아서>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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