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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안성(長安城)이여!
(사족: 이번 여행기의 주된 흐름이 ‘초본아타’에 있기에, 중간 경유지에 대해서는 이미 탈고된 졸저의 원고를 부분적으로 인용할 예정임을 미리 밝혀둔다.)
* 출국
우리 <천산횡단원정대>는 2012년 3월 7일 김포공항에서 베이징으로 날라 가서, 기차표를 부탁해둔 ‘맑은 향기님’을 만나 저녁을 같이 하고, 당일 바로 베이징 서역에서 저녁 기차로 우리들의 일차 목적지인 둔황으로 출발하는 일정으로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둔황으로 가기위해서는 신강위구르자치의 우루무치로 가는 특급열차를 타고 유원(柳園)이란 곳에서 내려서 다시 버스로 타고 반나절을 달려 둔황으로 들어 가야했지만, 요즘은 둔황에 새로 철로가 깔린 탓으로, 우리일행은 서안에서 내려서 기차를 바꿔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4시간이었기에, 우리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대절하여 현장법사의 혼이 서려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으로 달려갔다. 왜냐하면, 이번 답사여행의 또 하나의 목적이 현장법사의 행로를 따라가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대안탑은 장안의 명물답게 아직도 안개비 속에서 우뚝 서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흔히 중원 땅이라 불렀던 중국서부의 요충지인 옛 장안은 현재는 시안[西安]으로 부르며 산시성[陜西省]의 성도로 비약적인 도약을 거듭하고 있는 도시이다. 시안으로 가는 교통편은 더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리라. 중국을 보려거든 시안을 가고 시안을 보려거든 동서남북을 돌아보라는 말처럼 시안의 사방은 의미 있는 유적지가 즐비하기에 하루에 한 방향씩 정해서 차분하게 보는 것이 좋다.
<대자은사와 현장법사상>
현장법사를 비롯하여 혜초화상 그리고 의정법사 등등의 체취가 묻어 있는 천복사와 대흥선사는 시내 중심이니 지도 한 장이면 별도의 계획이 필요 없지만, 다만, 혜초가 기우제를 지낸 선유사(仙游寺)는 주지현(周至縣)에 있으니 버스를 이용해야 된다. 그러나 현재 선유사는 수몰로 자리를 옮겨 새로 건축한 새 건물이고 옥녀담 거북바위는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정도는 알고 가야 실망이 크지 않을 것이다.
* 세계 최대의 도시, 장안성(長安城)
혜초사문은 약 5년간의 오천축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728년 봄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제2의 고향 장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물론 704년 출생설이 유효하다면 말이다.
좁은 나라에 한 귀퉁이에서 태어난 젊은 혜초에게 세상 밖은 온통 미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문을 박차고 떠났고 그리고 직접 두 눈으로 온 세계를 확인하고 마침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그 때의, 그 젊은 혜초의 가슴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세계정신을 탐험한 선구자로서의 뿌듯한 긍지가 가슴 가득했을 것이리라…….
우리가 ‘혜초’란 한 젊은이를 위대하다고 추켜세워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담보로 잡혀놓고 영원한 진리를 찾기 위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이룩한 행위자체가 위대하다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리라…….
혜초의 장안으로의 개선광경은 아마도 현장법사의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하고 초라했을 것이다. 광주만(廣州灣)에서 떠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돌아올 때도 그를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장안에 도착한 이후 혜초사문은 만년에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많은 활약을 하게 된다. 그의 장안 체류기간은 무려 50여 년이란 긴 세월이었다. 그러니까 장안성 곳곳에는 혜초사문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혜초는 궁중의 원찰(願刹)인 내도량에서 중책을 맡아서 황실의 안녕을 빌거나 황제의 명에 의해 나라의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등 밀교승으로서의 역할을 단단히 하기도 했으니 그의 위상은 외국인으로서는 대단히 격이 높았으리라고 보여 진다. 또한 그의 3권짜리 천축순례기인『왕오천축국전』에서 쓰인 단어들이 후에 혜림에 의해『일체경음의』란 일종의 자전에 수록되었을 정도로, 그 방면에서도 인정받는, 말하자면 인기작가로서의 대접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장안성의 남쪽 성벽>
여기서 혜초의 50년간의 행동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의 장안성이 어떠했는지를 그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옛 장안성은 현재 시안[西安]이라 부른다. 산시성[陝西省]의 성도로써 인구 300만 정도의 대도시이지만 당나라 때의 인구가 150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줄어든 감이 없지 않다. 시안은 이른바 베이징[北京]·난징[南京]·뤄양[洛陽]과 함께 ‘4대 고도(古都)’로 꼽히지만 어찌 보면 기타도시들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단연 중국 아니, 세계 제1의 고도로 손꼽힌다. 아득한 옛날 신화시대에 가까운 서주(西周)의 도읍지로부터 시작하여 진(秦)·전한(前漢)·전조(前趙)·전진(前秦)·후진(後秦)·서위(西魏)·북주(北周)·수(隋)·당(唐)나라 등 11개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고도 중의 고도이다. 그 중에서 당나라 시대의 장안이 가장 화려하게 만개하였는데, 당시에는 동도(東都)인 뤄양[洛陽]에 대비하여 서도(西都) 또는 상도(上都)라고 불리며,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국제적인 번영을 누렸다.
현 시안에 도읍을 한 역대 11개 왕조의 궁성이 모두 현재의 시안에 정확히 겹쳐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시황제의 아방궁(阿房宮)이 30분 떨어진 함양(咸陽)에 있는 식으로, 대개 조금씩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역대 왕조는 전 왕조를 무너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새로 도읍하기보다는 조금 옆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중원(中原)’이란 바로 세상, 그 자체를 의미했기 때문에 중원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장안 근처가 가장 최적의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장안은 서북지방의 관중평야(關中) 중앙에 있는데, 주위에 태백산(太白山), 옥산(玉山), 취화산(翠華山), 종남산(終南山), 남오대산(南五台山), 여산(驪山), 규봉산(圭峰山) 등의 명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그 사이로 황하(黃河)의 많은 지류들이 퇴적토를 알맞게 쌓아놓아 기름진 옥토가 드넓게 펼쳐지는 곡창지대를 만들어 주어 이상적인 도읍지로서의 여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영웅들이 그 중원 땅에 군림하고자 수없이 명멸하였다.
현재의 장안성의 모양은 한나라 무제(武帝) 때 설계도가 완성된 것인데, 12개 성문이 나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안에는 장락궁(長樂宮)과 미앙궁(未央宮) 등의 궁전이 조성되어 있었고 시가지와 거주지역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한대 도성은 왕망(王莽)의 농민반란으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그 뒤로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및 북조(北朝)시대의 여러 왕조들이 모두 같은 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러다가 582년 수(隋)나라가 건국되면서 문제(文帝)는 옛 한나라 장안성의 남동쪽에 있는 용수원(龍首原) 들판에 신도시를 조성하여 대흥성(大興城)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의욕적인 사업을 착수하기 시작하였지만, 무리한 대운하(大運河)공사와 수차에 걸친 고구려(高句麗) 원정의 실패의 여파로 수나라는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고 고스란히 나라전체를 승계 받은 당나라는 이 잘 계획된 신도시인 대흥성을 장안성이라 이름만 바꿔 대제국의 수도로 키워나갔다.
장안성은 동서 10㎞, 남북 8㎞의 거의 직사각형으로서 북동쪽에는 태종(太宗)과 고종(高宗)이 대명궁(大明宮)을, 현종(玄宗)이 경흥궁(慶興宮)을 지었다.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너비 150m라는, 거의 운동장만 한 대로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도로를 연결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109개의 방(坊)으로 구획을 지었다. 장안에는 이런 방이란 주택가 외에도 세계최대의 개방된 국제도시에 걸맞게 각종 종교들의 사원- 불교를 위시하여, 도교, 마니교, 회교, 경교, 배화교 등이-자리 잡고 있었다. 시장은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로 나누어 상점·여관·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어 장안성의 주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모여든 대상들로써 항상 법석을 이루었다. 이 당시의 장안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과의 교류 중심지였기 때문에 특히 서역풍이 완연한 서쪽 지역은 수만 명에 이르는 귀화(歸化) 중국인들이 모여들어 장안 천지가 호풍(胡風)일색이었다. 풍류시인 이백(李白)도 그런 이국풍에 대해 한 수 읊었다.
「장안의 젊은이들 금시(金市)의 동쪽으로 은안백마를 타고 춘풍을 뚫고 가네.낙화 짓밟으며 어느 곳에 가서 놀려는가, 웃으며 들어오는 호희(胡姬)가 있는 술집으로.」
이렇듯 혜초가 있었을 당시의 장안성은 요란하고 번화한 국제적인 도시였다.
* 불경 번역의 산실, 천복사(薦福寺)
자, 각설하고 그러면 혜초사문은 ‘서역에서 돌아와 어디에 여장을 풀었을까?’로 관심을 돌려보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첫째로는 마땅히 혜초는 그가 서역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인연을 맺은 금강지삼장을 찾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역경인력이 부족했던 스승은 이미 범어 실력이 많이 향상된 혜초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다시 사제의 인연을 이어나갔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혜초가 인도에서 돌아온 후 6년 뒤인 733년부터 천복사에서 금강지를 모시고 8년 동안 불경을 번역했다는 자신의 기록에서도 보이고 있는 사실이다.
다음으로는 두 사람이 인도를 가기 전에 만나서 사제의 인연을 맺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보아도 그리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분투명한 혜초의 초기행장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사제의 인연은 장안에 다시 돌아온 후에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하더라도 혜초는 인도로 떠나기 전부터나 혹은 순례 중에 들었던 풍문의 의해 당대 최고의 인도 밀교승의 이름만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인도통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무리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천축에서 돌아온 혜초는 집도 절도 없는 처지이고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방인이었으니까…….
당시 장안성 남동쪽 교외 자은사(慈恩寺) 안에는 현장법사가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태종의 후원으로 652년 세워진 7층 전탑(塼塔)인 대안탑(大雁塔)이 장안의 상징처럼 유명하였지만, 밀교승이었던 혜초가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혜초의 발길은 당연히 서역 밀교승들이 주석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당시 중국밀교의 태두인 두 인도승인 금강지(金剛智, Vajrabohdi, 671-741)와 불공금강(不空三藏, Amoghavajrag..705-774)은 천복사(薦福寺)와 대흥선사(大興善寺)를 무대로 머물러 있었다.
당시 이 사원들은 중국밀교의 일번지였다. 밀교는 7세기 전후로 인도사회에서 기존의 대승불교가 이론적 논리에 빠져서 민중을 도외시한데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 일어난 것으로 이론보다는 의궤(儀軌)란 형식을 중요시한 신사조였다. 인간의 신구의(身口意)를 통해 붓다의 세계로 바로 들어가자는 운동이었다. 말하자면 인간을 중시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기존의 현학적인 대승불교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다.
그 바람은 전통적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의 시장이었던 중국으로 불기마련이었고, 그리고 바람을 몰고 온 인물들이 바로 태장계의 선무외(善無畏)와 금강계를 정립한 금강지였고 그 새바람의 진원지가 두 사원이었다.
나는 중국을 갈 때마다 웬만하면 시안(西安)에 들리는 버릇이 있다. 물론 현 시안의 고풍스런 분위가 마음에 드는 이유도 있겠지만, 혹 어느 고서가게나 시골장터에서 귀중한 물건을 만날 기연(奇緣)을 은근히 기대하는 엉큼한 속셈도 있기 때문이었다. 혹 누가 알 것인가? 『왕오천축국전』의 파편이라도 눈에 띄게 될지…….
각설하고 하여간 장안에 도착하면 나는 뒷골목의 고서가게를 훑어보고 그 다음으로는 천복사로 발걸음을 향하기 마련이다. 걸어서 갈만한 거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혜초사문이 장안에서의 50여 년 세월 중에서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에 어느 곳보다도 님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천복사는 시내 어디에서도 잘 보이는 소안탑이 있기에 찾기가 아주 쉽다.
<천복사 경내와 소안탑>
천복사 경내는 소안탑이 너무 웅장한 탓인지 별도로 눈여겨 볼 것이 없지만,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큰 사내[大雄]’가 앉아있어야 할 대웅보전이 기념품 가게로 쓰이고 있다는 점과 한참을 둘러보아도 스님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유물론자들의 나라로 변했다지만, 너무 심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천복사는 혜초 스님이 인도에서 돌아와 오대산에서 입적하기 전까지 수십 년 간이나 머물며 밀교의 경전번역에 몰두했던 곳이 아닌가 말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오갈 뿐인 천복사 경내는 목탁소리가 없는 탓인지 무념에 들어있는 듯 적적요요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천복사는 이미 과거 한 때, 위로는 황제를 비롯하여 아래로는 수억의 중생들이 거국적으로 믿었던 부처님 말씀이 원어(原語)로 전파되던 곳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였다. 불법(佛法)이 불법(不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저 관관용품을 파는 공원이나 오래된 유물일 뿐이었다.
천복사 경내에 있는 소안탑은 자은사의 대안탑에 비해서 좀 작기 때문에 소안탑(小雁塔)이라고 불리지만, 현장과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순례승 의정(義淨)이 뱃길로 돌아오며 많은 경전을 가져오자 황제가 천복사 경내에 서역식 탑을 조성하여 보관케 하였다는 유래를 갖고 있고, 몇 차례 지진에 상륜부가 좀 무너지긴 했지만, 아직도 보면 볼수록 웅장하고 단아하다. 두 차례에 걸쳐 25년간이나 천축에 들락거렸던 의정사문은 천축행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진(晋)나라 이후 당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장안을 떠났네.
간 사람은 백 명이 넘지만, 돌아온 이는 열 명도 안 되었으니
후인들이 어찌 선인들의 어려움을 알 수 있으리.
길은 멀어 푸른 하늘마저 얼어붙고 사막의 모래는 햇볕을 가려 기력마저 다했네.
뒷날 현자라도 그 뜻을 알지 못할까하여 불경을 가져 보기에 쉽게 하기 위함이니.」
당시 중국 밀교는 선무외(善無畏)<11>와 금강지로 대표되는 두 종파의 개화기였는데, 선무외가『대일경(大日經)』등을 번역한 데 반하여 금강지는『금강정경(金剛頂經)』을 번역하였다. 먼저 혜초의 스승인 금강지(金剛智)의 행적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범어 명 바즈라 보디(Vajrabodhi, 671-741)는 선무외와 더불어 중국 밀교(密敎)의 개조(開祖)로 꼽힌다. 10살 때 나란다 대학으로 출가하여 20세에 비구계를 받고서 6년 동안 경율론(經律論) 삼장과 유식학(唯識學)을 공부하고 그 뒤 남인도의 용지(龍智)에게 가서 7년 동안 밀교(密敎)를 터득하여 5부의 관정(灌頂)을 받았다. 720년 배를 타고 중원으로 들어와서는 이르는 곳마다 단을 쌓고 관정의식을 베풀었다. 그는 황제의 칙명으로 천복사에 머물며『금강정경(金剛頂經)』등 8부 11권의 밀교경전(密敎經典)을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자연히 기존불교인 현교(顯敎)는 대안탑이 있는 자은사를 중심으로, 신사조인 밀교는 소안탑이 있는 천복사에 역경소를 설치하여 번역사업을 펴나갔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혜초사문도 장안에서의 긴 세월을 천복사에서 시작하여 금강지가 입적한 후에는 불공삼장의 주석처인 대흥선사를 거점으로 활동을 하게 되다.
금강지가 의정(義淨)이 주석하던 천복사(薦福寺)에 머물며 번역을 할 당시 우리의 혜초가 장안에서는 처음으로 약칭『대교왕경서[大乘瑜伽千鉢大敎王經序]』를 통해 개원21년(733)이란 기년(紀年)을 적은 글을 직접 저술한다. 그가 천축에서 돌아온 지 6년 만에 일이고 그의 나이 30살(?) 되던 해이다. 혜초는 그 글 속에서 그가 천복사에서 금강지를 모시고 밀교의 교법을 전수받고는 8년 동안 금강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740년 4월15일 현종(玄宗)이 천복사를 직접 행차하였을 때 역경 건을 상주하여 5월5일 윤허를 받아 그날 새벽부터 향을 사르고 번역에 착수하였다. 이 긴 이름의 밀교경전을 금강지가 구술하면 혜초가 받아 적는 식이었는데, 그 해 12월 15일에야 번역을 마쳤다고 한다. 말하자면 둘의 합작번역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금강지의 죽음과 이어서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不空金剛, Amogha-vajra, 705-774)<12>마저 천축으로 가버리자 번역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 불공삼장의 사리탑이 있는 대흥선사(大興善寺)
천복사를 나와 시내 반대편으로 두 불럭을 가면 현재 중국밀교의 본산인 대흥선사가 나타난다. 역시 문화혁명 때 큰 피해를 입었으나, 나그네가 3년 만에 3번째로 그곳을 찾았을 때는 계속된 발굴과 중건으로 거의 옛 모양을 찾아가는 중이었고 수행하는 스님들도 많이 눈에 띠어서 천복사의 실정과 대비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대흥선사의 건립은 수(隋)나라 때 이루어졌다. 문제(文帝)에 이어 양제(煬帝)도 불교를 적극 장려하여 수도인 대흥성(大興城), 즉 장안성 안에 대흥선사(大興善寺)를 지어 전국 불교의 본거지로 삼았다. 양제는 ‘번경원(飜經院)’이란 불경번역전문기관을 세워 천축불교의 중원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번역소는 당시 낙양의 상림원(上林院)과 나란히 역경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수나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당나라에 들어와서도 대흥선사는 국사(國寺)로서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해지는 시문들에서 당시의 대흥선사는 수목이 울창했던 한적한 곳이었다고 묘사되고 있지만, 현재의 모습에서 고찰의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다. 하기야 천년의 세월에, 돌덩이 거북도 저렇게 이빨이 빠져버렸는데, 무엇을 제대로 남겨두겠는가 마는, 웅장하고 화려했다던 문수각도, 수많은 서역승들이 들끓던 번경원도 모두 자취가 없는데, 그래도 불공의 사리탑비만은 그런대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나그네를 반기고 있었다.
경내에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달려간 나그네는 불공삼장의 사리탑 앞에서 분향을 하면서 금강지와 불공삼장 그리고 우리의 혜초사문으로 이루어진 세 사람의 스승과 제자의 인연담을 떠올려 보았다.
금강지가 입적하자, 스리랑카 출신으로 15세 때부터 중원 땅으로 와 금강지를 만나 스승의 인연을 맺은 불공삼장이 스승을 도와 불경 번역에 종사하다가 스승이 입적하자 스승의 유촉대로 사자국(獅子國)으로 건너가 많은 밀교경전을 구해가지고 5년 뒤에 돌아오자 경전번역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이에 혜초사문은 대흥선사를 무대로 이번에는 불공삼장을 모시고 다시 역경에 몰두하게 된다. 그 뒤 불공은 궁중에 법단(法壇)을 세우고 관정(灌頂)의식을 베풀며 기우제를 지내는 등<13> 제사(帝師)로서의 활동을 하면서 현종(玄宗) ·숙종(肅宗) ·대종(代宗) 3대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중국밀교의 뿌리를 내리는 데 일생을 바쳤다.
당시 안사(安史)의 난(755년), 토번(吐蕃)의 침입(765년) 같은 변란으로 장안이 자주 유린되었던 시기였기에 호국불교란 이름 하에 밀교의 주술적인 신통력에 매달렸던 황제들은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흥선사사지(寺誌)』를<14> 보면 승려들에 대한 벼슬과 시주물품의 하사기록이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도 이런 배경을 뒷받침할 수 있다.
또한 오대산에 금각사란 문수보살의 기도도량을 지은 불공은 772년에는 대흥선사 안에 대성문수진국지각(大聖文殊鎭國之閣) 약칭 문수각이란 이름의 거창한 누각을 지었는데, 이 때 각주(閣主)는 황제 자신이 되고 왕비와 공주 및 중요한 대신들도 이에 동참하여 재물을 보시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가 변란이 잦은 시기였음으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불교 차원의 국가결집용의 상징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오대산의 금각사와 한 쌍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불공삼장과 대흥선사 그리고 오대산은 중국밀교의 진원지였다. 불공이 이렇게 제사(帝師)로서의 눈부신 활약을 하였기에 대종황제는 숙국공(肅國公)이란 높은 벼슬과 식읍(食邑) 3천 호까지 내렸으나 불공이 끝내 사양하고 70세의 일기로 입적하자 황제는 크게 슬퍼하고 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大辨正廣智不空三藏和上)이란 최고의 시호를 내리고 3일간 국상(國喪)에 준하는 추모기간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날의 광경을 기록하고 있는 불공의 비석은, 마치 종교적 신념을 위해 타향만리에서 뭇 중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한 인간의 초상이 이러하다라는 것을 나그네들에게 일깨워주려는 것처럼 지금도 대흥선사 경내에 쓸쓸히 서 있다. 불공의 유업인 역경불사는 회창법난 전까지도 계속되었는데, 이는 한 세기 뒤에 역시 대흥선사에 머물며 금강계 밀교를 배워 돌아가 일본의 밀교를 정착시킨 엔닌[圓仁, 794-864]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도 잘 나타난다.
「840년 10월 29일. 우리는 대흥선사로 가서 번경원(翻經院)에 들어가 금강계의 대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황제가 설치한 관정도량에도 들어가 여러 만다라(曼茶羅)에 참배하였다. 변경당에 금강지화상과 불공삼장의 초상을 그렸다. 변경당의 남쪽에는 대변정광지장(大辨正廣智藏) 불공화상의 사리탑이 있다. 두 화상은 일찍이 이곳에서 불경을 번역하였다.」
내가 이 자료를 주시하는 이유는 혜초사문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는 오대산과 대흥선사, 천복사에 대한 기록이 소상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옌닌의 기록에 의하면 대흥선사나 천복사에는 번경원이라는 번역전문기관이 있어서 밀교와 만다라 등을 연구할 수 있고, 황실의 내도량이 설치되어 있고, 또한 금강지와 불공의 위상이 한 세기 후에도 대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혜초사문의 위상도 그만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는 뜻과 같다. 혜초와 불공의 연보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동년배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원으로 들어왔고 또한 각기 천축을 순례한 처지였고 그리고 둘 다 장수하여 거의 수십 년간을<17> 대흥선사에서 함께 살았던 사이였다. 비록 스승 금강지와의 인연과 밀교의 전통 때문에 불공을 스승으로 대접은 했겠지만, 아마도 사석에서는 친한 도반처럼, 사형제 지간처럼 지내기도 했었을 것이리라…….
불공삼장이 입적하기 전에 발표한 유서(774년 5월7일)에는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밀교의 비법을 전수한 지 30여 년에 문하에 들러온 제자가 자못 많아서 오부의 율법을 닦은 제자들이 여덟 파를 성립시켰으나 차례로 없어지고 이제 여섯 명이 남았을 뿐이다. 그들은 바로 (중략) 이다. 그러하니 후학 중에서 수행 중에 의혹이 들거든 서로 일깨워주어서 정법의 등불이 끊이지 않도록 해서 나의 은혜를 갚도록 하라.」는 구절은 2천 명에 달하는 불공의 문하생 중에서 수제자급에 속하는- ‘6대 제자’를 선정한 대목이다. 이들이 바로 함광, 혜랑, 혜초, 혜과, 원교, 각초사문들인데, 이 중에 우리의 혜초가 당당히 순서로 세 번째 제자로 꼽혀 있다.
그 명단의 첫째는 불공이 천축까지 데리고 다닌 심복제자 함광(含光)이었고 두 번째가 제자들 중 제일 나이 많은 연장자로서 불공의 법통을 이어 대흥선사의 주지를 맡아 황실과의 가교를 이은 혜랑(慧朗)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신라혜초(新羅慧超)’였고 네 번째가 청룡사의 혜과(慧果)라는<18> 청출어람의 인재였다.
위 구절에서 ‘신라혜초’란 네 글자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혜초가 신라인이란 것을 객관적인 자료에서 고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구절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혜초가 중국의 어떤 승려인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기에……. 또한 이 사실을 일깨워준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사실도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당시 혜초의 위치가 얼마나 당당하였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그 외에도 당시 대흥선사나 천복사에는 신라의 사문들이 여러 명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오랜 장안에서의 세월 중에서 혜초사문의 주된 관심사는 물론 스승의 유촉을 받은 밀교경전의 역경사업이었지만, 그의 위치가 올라감에 따라 내도량(內道場)의 핵심 지송승(持誦僧)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내도량이란 황실의 안녕을 축원하는 궁중내의 불당을 말하는데, 당시는 대명궁(大明宮)의 장생전(長生殿)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대 황제들의 신임을 받은 불공삼장이 나라의 스승으로서의 제사(帝師)를 겸하고 있었기에 그가 주석하고 있는 대흥선사에 내불당을 설치하고는 그곳의 소임을 맡을 7명의 밀교승을 선발하였다. 혜초사문은 당연히 상석을 차지하였다. 그들의 소임 중에는 가물이 들 때면 황제 대신에 기우제를 주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공이 생존했을 때 나라의 중대한 기우제는 불공자신이 지냈지만, 그가 병이 들자 그 역할이 마침내 혜초사문에게 돌아왔다.
겨울가뭄이 심하던, 774년 1월 혜초사문은 대종(代宗)황제의 칙명으로 선유사(仙遊寺) 옥녀담(玉女潭)에서 7일간 밀교의 술법으로 기우제를 지내고 그 결과를 바로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그 표문에 의하면, 혜초가 옥녀담에서 밀교의 법식대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쌓고서 향을 피우고 비밀스런 밀주(密呪)를 외우자 이에 산천이 감응하여 계곡에서 소리가 나는 지라 사리를 강물 속으로 던졌더니 곧 하늘에서 비단 같은 보슬비가 흡족하게 내렸다고 적혀 있다. 이어서 혜초는 그것이 모두 자기 정성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 황제의 성은에 감동했기 때문이라며 황제에게로 그 덕을 회향(廻向)하고 있다.
첫댓글 _()_
수리님의 수고로움 덕분에 좋은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감사드립니다_()()()_
그간 제 컴이 바이러스가 감염되었는지....사진이 잘 붙지를 않네요...올릴 사진이 많은데...SOS ㅡMay day....
사진이 없을 때는 읽기가 지루했는데
이제 다시 사진과 함께보니 현장감이 느껴져 재미있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