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부산
한반도 남녘 부산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들었다. 연중 유독 짧은 2월도 달랑 나흘 남았다. 지구촌에서 가장 큰 노래방이란 평가를 받는 사직야구장 모퉁이를 뚜벅뚜벅 걷다가 발견한 새빨간 동백꽃은 단박에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꽃의 자태에 홀려 걸음을 멈춘채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목적지인 종친회 사무실이 인근인데다 회합시각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다. 먼 길 떠날 날도 머지 않은 노인네가 꽃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 게 길을 지나는 중장년들은 뜨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그들을 개의치 않고 촬영에 매달렸다.
동백꽃은 초겨울부터 봄까지 거의 반년이나 연달아 꽃을 피운다. 옛 사람들은 몸서리치는 세한의 설중동백에서 고통을 견디는 지혜를 배운다고 했었다. 내 짧은 소견에 겨울 동백은 씨를 맺자고 그렇게 붉은 피를 흘리는 것 같다. 동백꽃이 동박새와 공생관계라는 것은 새가 꽃가루를 옮기는 것을 이른다. 그러니 새가 없으면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동백꽃은 진한 향기를 갖지 못한 대신 달콤한 꿀을 가졌다. 그래서 동박새는 먹이가 귀한 겨울철에 동백꽃에서 얻는 꿀로서 생명을 지탱한다.
동백꽃을 대하면 먼저 애잔함이 묻어난다. 꽃잎이 여느 꽃들처럼 한 잎 두 잎 바람에 흩날리면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아예 꽃송이가 쑥 빠지면서 툭 낙화한다. 그렇게도 싱싱하던 꽃잎이 어느 순간 바람도 없는데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통째로 떨어지기 때문에 예로부터 동백꽃을 불길함의 상징으로 보았다. 제주도에선 아예 집 안에 심지 않았고 일본에서는 떨어지는 모양이 마치 사무라이의 목이 잘려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하여 동백나무를 꺼렸다. 그래서 춘수락椿首落이라고까지 했다.
그렇게도 싱싱하던 동백꽃이 소리를 내면서 툭 떨어져 썩고 마는 것을 연상하면 그것이 춘사라는 말의 뿌리일 것 같다. 동백나무에는 나쁜 병을 일으키는 역신이 꽃송이에 숨어 있다가 꽃이 떨어지는 순간에 함께 떨어져서 죽거나 달아난다고 여겼다. 즉 동백꽃에 깃들고 있던 영혼은 꽃이 떨어지면서 영육이 분리되어 영혼은 떠나고 육신인 꽃잎은 썩게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동백을 전혀 다른 식물로 보았다. 대춘大椿이란 나무는 8천 년을 봄으로 살고 다시 8천 년을 가을로 살았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춘수椿壽는 장수長壽를 뜻하고 상대를 대접하여 그의 아버지를 춘당椿堂 또는 춘부장椿府丈으로 정중하게 말했던 것이다. 다만 애기동백꽃은 여느 꽃들처럼 꽃잎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동백의 본고장은 동양이지만 <동백아가씨>는 서양에서 먼저 탄생했다. 프랑스의 뒤마가 1848년 쓴 <동백아가씨> 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변형하여 오페라로 만든 것이 그 유명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다. <동백아가씨>가 영화와 노래로 만들어져 한국에 얼굴을 내민 것은 이보다 무려 116년 뒤인 1964년이었다.
난 영화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어떤 연유론지 <동백아가씨> 영화가 나온 해에 보게 되었다. 당시 몸담았던 도시 대전에서였고 영화에서 감동을 받은 기억은 별로 없다. 영화는 당시 유행하던 신파적 미혼모를 그렸기에 진부함을 느꼈던 것 같다. 동아방송 전파를 탔던 라디오 드라마 <동백아가씨>가 1년 뒤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주제가도 함께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엔 영화에 주제가가 붙는 게 대유행이었다. 작곡가 백영호는 영화 <동백아가씨>의 줄거리가 녹아있는 노래가사를 넘겨받았다.
그러곤 몇 차례 기타를 퉁겨보면서 거침없이 악보를 써내려갔다. 작곡에 걸린 시간은 단 2시간. 작곡가가 취입할 가수를 찾다보니 이미자의 애조 띤 음색에 잘 맞을 것 같았다. 당시 이미자는 만삭의 몸이었고 녹음실은 냉방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데도 영화 개봉일자가 다급하여 녹음을 미룰 수 없는 형편이었다. 스카라극장 근처의 목욕탕 건물 허럼한 창고 2층을 빌려 계란포장박스를 벽에다 붙여서 방음공사를 했다. 배가 남산만한 이미자를 불러들여 악보를 건네면서 발을 얼음물에 담그게 했다.
악단반주에 맞추어 녹음을 시작했다. 이미자는 비지땀을 흘려가며 숨차게 동백아가씨를 불렀고 작곡가는 오히려 그 가쁜 숨소리가 애절한 곡조에 감정을 더한다고 여기면서 그대로 오케이 사인을 했다. 그랬지만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를 하게 된다. 하지만 뜻밖에도 영화주제가가 뜨면서 을지극장이 재개봉에 들어갔고 영화는 매진행진을 이어갔다. 당시 이 노래를 보급한 레코드사 앞에서 이틀을 기다려야만 레코드판을 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주제가가 영화를 살렸던 것이다.
레코드사 대표는 당시의 음반 10만장 판매는 1990년대 수립한 역대 최고의 음반판매량 2백만 장과 맞먹는 기록이라 분석했다. 열아홉 살에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이미자를 엘레지의 여왕 자리에 올려놓은 노래가 바로 <동백아가씨>였다. 196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친숙한 <동백아가씨>가 아닐 수 없으리라. 당시의 트로트를 이끈 대표곡이 <동백아가씨>였기에 노래를 부른 가수 본인도 가장 애착이 가는 곡으로 지금도 꼽고 있다. 이미자는 이 노래로 가요계에 혜성처럼 나타날 수 있었으니 왜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그의 노래에선 가련함이 느껴지고 애절함이 있어 사람들은 열광했을 것이다. <동백아가씨>가 탄생한 해에 난 대전을 떠나 부산에 발을 디뎠다. 항도 부산에선 시도 때도 없이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왔다. 남포동 극장가나 술집골목은 말할 것도 없고 하숙집으로 오르는 골목어귀 레코드점 스피커에서도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이 무시로 흘러나왔다. <동백아가씨>는 부산 사람들이 만든 노래였다. 노랫말을 지은 한산도는 부평동에서 났고, 곡을 만든 백영호는 서대신동에서 났다.
그런데다 영화의 첫 장면을 다대포에서 촬영했으니 부산은 온 도시가 <동백아가씨> 열풍에 휩싸일 만도 했다. 자신이 30년 넘게 살아온 부산의 정서를 <동백아가씨> 노래 선율에 녹여냈다던 생전의 작곡가가 말없이 조용히 미소짓던 모습도 떠오른다. 무심한 세월 속에 남은 그리운 얼굴이 아닐 수 없다. 카톡 교유하는 분들 중엔 백수를 바라보는 시인으로부터 사반세기 전 옛 직장 원로 선배도 있다. 부산이 낳은 <동백아가씨>에 깃든 사연을 소개하면서 그분들도 부디 만수무강하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