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개도 웃고 소도 웃는다
1. 성경의 비유는 세상 저술가의 비유가 아니다
세상의 훌륭한 저술가는 요술 주머니에서 금실을 뽑아내 듯 글을 쓴다.
독자들에게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상상력을 고취시켜주고 말의 묘미를
더해주는 등, 작품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곧잘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경을 어떻게 집필하셨는가? 물론 비유를 사용하셨다..
아니 성경이야말로 온통 비유로 기록되었으니 비유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세상 저술가의 비유법과 하나님 성경의 비유법은
그 본질과 목적이 판이하게 다르다.
저술가의 비유는 단순히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이요,
하나님은 그 반대로 오히려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말씀의 참 뜻을
비유속에 꼭꼭 숨겨놓기 위한 고도의 전술전략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비유는 향기 그윽한 정원으로의 초대권이라면, 후자의 비유는
심판권자에 의해 두루 도는 화염검이 내리치는 금단의 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심혈을 기울여서 깊이 파고판다 해도
이천년 동안 아무도 풀지 못하고, 결국은 오로지 오늘의 재림 예수님
한 분만 그것을 해독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비책으로 하나님은
성경을 비유로 기록케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전략적으로 사용하신 비유법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이 성경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인간들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쉽도록 사용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즉 성경의 비유를 세상 저술가의 비유법과
동일시 하는데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러나 이는 개도 웃고 소도 웃을 일이다.
하나님은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자비와 사랑으로
비유를 사용하신 게 절대로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오지 못하는 죄가 있음을 명백히 물증으로
증명해 보이시려고 엄한 심판관의 법정에서 말씀을 수수께끼로 내주신
것이 비유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말씀을 비유가 아닌, 혹은 수수께끼가
아닌 직설법으로 주셨다면 삼척동자라도 단박에 알아듣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비유로 주신 이유는 아무나 깨닫지 못하도록 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을 확실한 죄인 만드는 데 그 절대적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감추신 성경을 어불성설로 억지로 자의적으로 풀어서
자칭 하나님 노릇하려는 사람들을 사탄마귀로 생포하기 위해
성경을 비유로 기록케 했던 것이다.
세상의 훌륭한 저술가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지만,
위대한 하나님은 그 반대로 사람들의 이해를 방해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저술과 하나님의 저술에서의 비유법을 동일한 관점에서
논하지 말라. 아무 해법도 대안도 찾지 못한채 얼렁뚱땅
성경의 비유문자 앞에 하나님의 사랑 운운하며 쉬이 감동하지 말라.
터무니 없는 값싼 감동에 지나가는 개도 웃고 소도 웃는다.
최소한 성경의 비유문자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함에 가슴이라도
쳐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비유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정직하지 못한 처사에 하늘의 하나님이 비웃으심이여!
하나님이 아시고 천하만물도 다 아는 일에, 사람만 알지 못하니
과연 부패한 것이 사람이어라!
2. 성경의 비유를 재림주 아닌 사람이 풀 수 있는가?
성경은 오로지 오늘의 재림주 한분만이 풀도록 예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 그 당시 사도바울이 이미
성경을 풀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역시 개도 웃고 소도 웃을 일이다.
성경을 풀기는 커녕, 후세 사람들에게 성경이 더욱 난해하도록 혼란을
가중시킨 장본인이 바로 사도바울이기 때문이다.
어찌 그의 오류를 필설로 다 말하랴. 간략히 두 세가지만 지적해 본다.
창세기 1,2,3장은 성경 전체를 푸는 키워드이다.
그런데 바울은 성경에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전혀 모르면서, 단순히 당시대적 인간의 사적 감정으로 창세기의 본질적
아담과 하와의 위상에 대해, 즉 본질적 남자와 여자의 위상에 대해
존귀와 비천, 이렇게 극과 극으로 잘못 가르침으로써 성경을 깨닫지
못하도록 싹부터 잘라서 원천봉쇄 해버렸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인간역사에도 엄청난 오점과 비극을 안겨주었다. 중세의
마녀사냥만 하더라도 바울의 극단적 여성비하가 그 빌미를 제공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에스겔을 통해
유전죄는 없으며 각자의 행한 바에 따라 죄의 유무를 묻고 상벌 또한
그리하시겠다고 밝히 천명하셨었다(겔18장전체).
그럼에도 바울은 에스겔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의 의를 세워서
창세기의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죄와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들어왔다는
유전죄를 가르치는 것부터 성경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오류였다.
아담은 인간조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최초의 신자이다.
그런데 아담 한 사람으로 죄와 사망이 들어왔다는 유전죄를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유전죄의 오류도 문제이거니와 무엇보다 아담이 불시에
인간조상이 된다는 잘못된 논리를 심어주는 결과가 되었으니,
그것이 원천적으로 성경을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암초였다.
그리고 성경은 어디를 읽어보아도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지상천국임을
기록하고 있다. 지상천국이기 때문에 오늘의 재림 예수님도 초림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역사하시게 되며, 그 점이 구약성경에 이미
수없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기록들을 모두 무시하고 자기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
성도가 재림 예수님을 난데없이 공중에서 맞이하여 하늘로 올라간다는
휴거론으로 재림의 상황을 유포시킴으로써, 지구촌을 휴거열풍에
휩싸이게 했으니,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할
오늘의 지식사회의 사람들까지 가장 무식하고 천박하고 몰지각한
마술적 광신자들로 추락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우리 인간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구약성경의
기록에 의한 말씀만 전해야 한다. 그게 복음전파이다.
그러나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그리하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전파를
빙자하여 자신의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그 어느 것보다 신약성경에 편입된 바울서신을 최고로 신봉함으로써
성경은 만신창이가 되고 사람들은 소경이 소경의 인도를 받아 무간지옥에
빠져 있다. 누가 이에서 건져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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