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성희롱 사건과 관련한 법원의 기존 판단 기준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내용의 판결을 내려 눈길을 끈다. 대법원 제2부(재판장 고영한)는 지난 4월 12일, 모 대학의 교수 장씨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교원소청심사위원회결정취소’의 소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서울고등법원판결을 파기하고 원심으로 돌려보냈다.
■사실관계
한 공과대학의 컴퓨터계열 교수 장씨는 소속 학과의 A씨와 B씨를 상대로 2015년 경 수차례 성희롱과 성추행을 했다.
장씨는 제자인 A씨에 대해서는 ①A씨가 친구들과 함께 장씨에게 봉사활동 추천서를 받으러 오자 “뽀뽀해 주면 추천서를 만들어주겠다”고 했고 ②수업 중 질문을 하면 뒤에서 안는 듯한 포즈로 지도했고 ③A씨가 장씨의 연구실을 찾아가면 “남자친구와 왜 사귀나, 나랑 사귀자, 데이트 가자, 엄마를 소개시켜 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른 제자인 B씨에 대해서는 ①역시 뒤에서 안거나 한 의자에서 앉는 식으로 지도하고 신체적 접촉을 불필요하게 많이 했고 ②복도에서 마주치면 얼굴에 손을 대거나 어깨동무, 허리에 손을 두르거나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치기도 했으며 ③단 둘이 있을 때는 팔을 벌려 안기도 했고 ④엠티에 가서 아침에 자고 있는 B씨에게 뽀뽀를 두차례 했고 ⑤장애인 교육 신청서를 제출하러 오자 “뽀뽀를 하면 받아주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뽀뽀를 하게 하기도 했다.
■원심의 판단
하지만 A씨는 익명 강의평가에서 장씨의 수업을 높게 평가했고, A씨와 B씨 모두 사건이 발생한 후에도 장씨의 수업을 계속 수강했다. 특히 B씨는 자신이 피해자인 사건에 대해서는 진술을 거부하고 A씨가 피해자인 사건에 대해서만 증인으로 진술을 한다든지, 사건이 발생한 이후 장씨와 ‘서로’ 형사고소를 하지 않기로 하는 약속을 서면으로 하고 공증을 받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B씨의 신고도 1년여가 지나서야 A씨의 적극적인 권유로 이뤄진 사실도 밝혀졌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원심인 서울고등법원은 “장 씨의 행위가 학생들과 친밀하게 지내던 중 고의 없이 이뤄진 일이라 발생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며 “그럼에도 3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 지난 후에 신고하게 된 것을 보면 발생 경위나 피해 정도에 비춰 해임처분은 지나치게 무겁다”며 징계가 위법하다고 판단.
■대법원, 원심 판시 조목조목 반박하며 “성인지 감수성” 기준 제시
대법원은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 문화로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돼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이 과정에서 판결문에 ‘기존 가해자 중심적 문화로 사건을 바라본’ 원심의 판단을 그대로 싣고 반박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 눈에 띈다.
재판부는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며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 것을 강조했다.
대법원은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 두려움으로 피해 이후에도 가해자와 종전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피해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 다른 피해자 등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신고를 권유한 것을 계기로 비로소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며 “성희롱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기준을 제시했다.
■‘성인지 감수성’ 기준에 따른 원심, 대법원 판결 비교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을 기준으로 성적 굴욕감 판단해야
대법원 관계자는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고,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하며,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성희롱 소송의 심리 및 증거판단에 대한 법리를 제시한 첫 판결”이라고 밝혔다. 이어 “어떤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우리 사회 ‘전체’의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라,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을 기준으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심리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성명서를 통해 “대법원의 판결은 향후 성희롱 관련 소송에서의 심리와 판단이 남성 중심의 성(性)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양성평등의 시각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획기적인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라며 “앞으로 성폭력피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가해자 중심의 인식에서 비롯되는 부당한 피해에서 벗어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