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48
2월26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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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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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15j1LGorVI (임시백 치백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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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시금 어린이의 순수성을 회복할 때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올 한 해 동안 ‘하느님의 연인’ ‘상처 입은 치유자’, ‘지난 세기 대 영성가’로 불리는 헨리 나웬(1932~1996) 신부님의 생애와 영성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웬의 일생을 종합하면서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영원한 소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연세가 꽤 들었을 때도 삶의 모습이 소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60세 생일 파티 때 어릿광대로 분장하고 나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꽃을 선물하기를 좋아했기에 꽃값 지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헨리 나웬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 어린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직 살아있었을 때였습니다. 고국 네델란드의 위르옌 뵈머라는 목사님이 그에 대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제목이 ‘헨리 나웬, 하느님에 대한 쉼없는 추구’였습니다.
책이 발간되자 저자는 그 책을 헨리 나웬에게 소포로 보내드렸는데, 책을 받아든 그는 세상을 다 얻은 듯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엄청 기뻐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제가 쓴 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저에 대해서 쓴 책이 처음 나왔습니다!”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헨리 나웬은 연세 드셨어도 스케이트 보드 타는 것이나 사탕 드시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좋아했던 것이 서커스 구경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공중그네를 그렇게 좋아했었는데...공연이 끝나고 너무나 그게 한번 타고 싶었던 가 봅니다. 그는 서커스 단장을 찾아가서, 유명인 찬스를 씁니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혹시 헨리 나웬이라고 아십니까?” “네 잘 알다마다요. 저도 그 신부님 책 많이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존경합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아, 네. 제가 바로 그 헨리 나웬입니다.” “정말 그분이시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죄송하지만 공중그네가 너무 타고 싶어서요.” “그러시군요. 그럼 좋습니다. 위험하니 안전장치를 해드린 후 태워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꿈을 이뤘습니다. 공중그네의 짜릿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걸 또 장문의 글로 표현했습니다.
헨리 나웬도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어르신, 할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그렇게 충격을 받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어린이 같은 순수성, 한결같은 소녀 감성, 충만한 단순성이 그를 깊이 있는 영적 생활로 이끌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제자들은 거듭되는 사목활동에 녹초가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드리는 마음에 그들을 물리치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크게 언짢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코 복음 10장 14절)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 영적 생활이 제자리걸음인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민해봅니다. 너무 힘을 많이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너무 큰 사람이 되어버린 탓이 아닐까요? 너무 높이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시금 어린이의 순수성을 회복할 때입니다. 어린이의 천진난만함, 어린이의 단순성을 복구시킬 때입니다. 어깨에 가득 들어있는 힘을 뺄 때입니다. 다시 한번 아래로 내려설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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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JwW43nGrG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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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하느님 나라는 부모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어쩌면 이 말씀이 마르코 복음의 핵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 나라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주제가 핵심입니다.
먼저 마르코가 설명하려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지금 마르코는 예수님의 두 번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유에 대해 풀어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사람을 악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창조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웃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이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8세기 당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살던 북게르만족은 인구가 큰 폭으로 상승하자 그 척박한 땅에서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육로로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박기술이 발달하자 바이킹은 잉글랜드 서쪽 지역을 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커다란 덩치에 무식한 도끼를 들고 싸우는 바이킹을 당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이킹은 오딘이란 신을 섬겼는데 싸우다 목숨을 잃으면 오딘의 나라인 발할라로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투 민족답게 방패 처녀라고 불리는 여성 전사가 전쟁에 다수 참여했고 고위직에 올라간 여전사가 존재했을 정도로 여성의 인권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전사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약탈하기 위해 오랫동안 집을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먹을 걱정이 없다면 목숨을 건 약탈은 왜 하겠습니까? 모든 약탈이 일어나는 이유는 생존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약탈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린이들이 부모의 돈을 훔친다거나 다른 아이들의 것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생존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EBS 부모 – 저, 혼나러 나왔어요’에서는 4학년 남자아이를 호랑이보다 무섭게 체벌하는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2021년부터 법적으로 아이에게 체벌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맞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신은 매 맞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어머니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지갑에 손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친구를 사귀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아이가 왜 약탈자가 되어가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먼저 아이에게 충분히 좋은 환경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환경입니다. 바이킹이 살던 땅처럼 척박한 부모는 바이킹처럼 약탈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환경에서 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체벌은 약탈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약탈자로 만듭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환경입니다. 부모가 생계 걱정을 하고 있다면 자녀는 어떨까요? 당연히 약탈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 되어주기 위해 제가 항상 추천하는 것이 ‘십일조’를 온전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있다면 자녀도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아이가 약탈자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디팩 초프라의 훈육법을 배우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먹고사는 건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너희가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찾고 이웃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만 생각하며 살아라.”
아들 둘은 에덴동산에서 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것입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었고 동생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형은 인도에서 커다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동생은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신이 언제까지 좋은 환경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을 찾고 그 신이 창조한 이유를 찾으라고 합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사업가로 혹은 교수로 하느님이 부르셨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삶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어 부모가 더는 아이의 환경이 되어주지 못해도 아이들은 신의 섭리 안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삶은 ‘경쟁’을 시키는 것입니다. 경쟁이란 환경은 지옥입니다. 지옥에서는 약탈자들이 생겨납니다. 약탈자들이 사는 세상은 또 지옥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를 낳을 부모는 없습니다. 약탈자를 낳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아는 자신이 자기 주인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뱀은 진정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땅에 살고 싶으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자아를 환경으로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약탈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자아가 만들어낸 척박한 이집트와 같은 환경에서 종살이하고 있나요, 아니면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나요? 어린이처럼 부모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를 부모로 믿습니다. 이는 증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양식을 주는 부모를 찾지 않으면 지옥의 삶을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며 자아가 강해지면 자아는 그런 환경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창조자가 있다면 증거를 찾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기가 부모를 찾는 것은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믿는 것은 선택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창조자로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분이 창조자이심을 믿기 위해 십일조도 내야 하지만 내가 에덴동산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자녀들도 또 다른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어린이처럼 그리스도를 하느님 나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뱀의 나라를 선택하든,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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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13-16: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놓고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자세를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조건은 아무 것도 없다. 단순히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15절). 어린이들이 부모를 바라보듯이 제자들도 하느님을 그렇게 바라보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받아들이고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스승이 제자나 어린이를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아이들이 축복을 받도록 예수님께 데려왔던 것 같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 때문에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짢아하시면서 어린이들을 맞아주시고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14절) 그 어린이는 하느님을 거슬러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일 수도 있고, 갓 태어난 아이나,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수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로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세례를 받는 은총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온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린이는 벌어먹지 않고 부모가 주는 대로 받는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든지 또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벌어들인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과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자세이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에 걸려 넘어진다.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 선물을 어떻게 샤용 하느냐가 문제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세상의 지혜와 명예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 있음을 우리도 알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지 묵상하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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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슴하셨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우리의 관심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의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루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려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세계 챔피온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그것만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과연 나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가지 달려왔고 또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가?
목표없는 인생은 불행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먼저 목표를 분명히 세워 놓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따라서 성공하는 인생을 살려면 먼저 목표를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반드시 실천하고자 하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계획을 세우는데 실패한다는 것은 실패하기를 계획하는 것이다."라고 어떤 학자는 말했다. 산다는 것은 먼저 계획하는 것이요, 계획한다는 것은 목표와 방향을 세우는 것이요, 그 목표와 방향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명확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계획없는 생활은 실패를 가져온다.
한문에 始終如一(시종여일)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과 끝, 시작과 마지막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무슨 일이나 한결같아야 한다. 한결같다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한결같다는 것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 것이다. 꾸준하고 끈기가 있고 일관성이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결같다는 것은 작심삼일 하지 않는 것이다. 쉬지 않고 꾸준히 전진하는 사람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쉬임 없이 흘러가는 강물만이 망망대해에 도달한다.
과연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나는 한번뿐인 내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무엇를 위해서 죽어야 하는가? 내 인생 목표를 잘못 세우면 일회성인 내 인생이 실패로 끝날 수 있다. 인생은 반복이 없고 연습이 아닌 실전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은 진지한 것이고 엄숙한 것이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목적지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듯이 내 인생 목표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한다.
옳은 길을 찾아가는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 한다. 바른 길을 찾고자 하는 이를 구도자(求道者)라고 한다.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것을 도통(道通)한다고 한다.
산다는 것은 옳은 길을 찾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이의 과정이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공자는 갈파했다. 이 말은 공자가 얼마나 인생의 옳은 길을 갈구하였는가를 잘 나타낸 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보여 주신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선포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목표가 무엇이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즉 인간의 삶의 목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회개하기가 어렵고 복음을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이다. 사람 숫자를 계산 할 때에도 넣지 않을 만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어린이를 막은 것은 이런 하찮은 사람을 자기 스승님께 데려 온다는 것이 기분이 상한 것이다. 데려올 가치도 없는 어린이를 왜 데리고 오느냐 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다. 즉 그들의 무지함 또는 그들의 경거망동한 행동, 예의 없는 행동에 대한 질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 어린이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행동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당시 당연시해온 사회적인 분위기였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화를 내셨을까?
예수님의 화는 제자들에 대한 화였다. 즉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오셨고 누구나 다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잘못된 가치관 사회적인 관습을 깨트리려 오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교육시켜 오셨다.
그런데 아직까지 제자들의 인식과 사고는 조금도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함에 대한 화이다. 안타까움이다. 보고 보아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화이셨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이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밥을 먹고 싶어도 엄마가 해주지 않으면 먹지 못하고 어디를 가고 싶어도 데려다 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어린이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의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그 공로에 의한 어떤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로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마치 자기가 받은 물건이 자기의 힘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 하느님의 선물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다. 따라서 복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이와 같이 순순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이들! 그들이 땅을 차지하리니.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이들! 그들이 하느님을 뵈오리니."(마태 5,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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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원정학 바오로 신부님]
<회개의 삶?>
요즘에는 건강을 위해서 일부러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웰빙 바람이 불어서 인지 늦은 저녁 바닷가에도 전에는 끼리끼리 모여 노는 모습보다는 둘 셋씩 짝지어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습니다.
저도 가끔씩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목적지까지 걷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몹시 지치고 피곤해서 걷는 것이 싫을 때가 있었습니다.
짧은 거리라 택시를 타기도 뭐해서 그냥 참고 걸었는데, 문득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걷던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저를 데리고 다니셨는데 저는 다리만 아프면 곧장 투정을 부리며 아버지 등에 업히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피곤하고 다리 아플 때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분명 피곤하니까 좀 같이 걸으면 않되겠니? 하는 표현도 했을 텐데. 왜 저는 그때 내가 다리가 아프니까 당연히 업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때 아버지는 전혀 피곤함을 모르는 분이라고 여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연로해서 혼자 걸으시는 모습조차도 애처로운데, 왜 그때 그랬을까 하고 후회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이 생각이 드는 것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라는 구절 때문인가 봅니다.
물론 복음의 본래 의미는 이것저것 따지고,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어른들에게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인 다는 것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나 혼자만의 삶도 때로는 지치고 힘이 드는데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도 철부지 어린이를 말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경험도 없고, 눈치도 없고, 실수투성이며, 하고 싶은 데로 하고 말해도 못 알아듣는데, 이 어린이를 받아들이라니. 하지만 나의 부모는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쭉 나를 받아들이고 업고, 실수나 잘못을 같이 받아 삼키며 살아오셨습니다.
덥다고 벗어던진 옷이나 이불을 다시 입혀주시고, 야단을 치면서도 늘 품에 안으시는 부모님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이방인이지만 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식탁에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핥으려는 개라도 되겠다고 매달리는 어머니의 간절한 모습에 예수님은 그를 칭찬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삶을 통해 자신이 얻어 누리는 ‘회개의 삶’이 아닐까요?
이제는 내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고통을 짊어지고 언젠가 그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알게 해 줄 참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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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그 손,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 손,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지 않고 땅에 무엇인가를 쓰던 그 손,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일으키던 그 손을 우리 모두 만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성가시게 나서서 예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복음 선포에 지장을 줄까 봐 제자들은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구약에서도 어머니들은 예언자들에게 아이들을 데려가서 축복해 줄 것을 청하곤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어머니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분께 축복을 청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께 다가갔습니다. 아이들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신뢰하고 예수님께 다가가 축복을 받고자 했습니다. “곡예사의 도약은 오로지 상대편이 자신의 손을 잡아 주리라는 전적인 신뢰에 의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전적인 신뢰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비결이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맑은 믿음을 우리 모두 가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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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9장)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이’는 사회에서 스스로 살 수 있는 힘이 없는 무력하고 무능한 이,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또한 율법을 모르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함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율법을 잘 지켜온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10,23)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0,27)
오늘, 우리는 우리의 처신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약하고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는지, 그들이 예수님께 다가가고 축복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지, 그들이 성당에 오는 것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꺼리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그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 되게 하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종께서는 가난한 이들과의 유대와 연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넘어서 가난한 교회가 되라고 하십니다. 마태오의 병행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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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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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린이와 하느님의 나라>
2022. 02. 26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마르코 10,13-16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린이와 하느님의 나라>
어린이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는
하느님의 나라의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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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린이와 같은 사람>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회복하여 거듭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빈구석이 있는, 그러나 전적으로 의지하는 단순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유대사회에서는 12세 이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잠시 딴짓을 하다가도 부모가 안 보이면 놀라고 겁을 내어 다시 부모의 품을 찾게 됩니다. 또한, 정직합니다. 잘못을 꾸짖으면 금방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라 했더니 ‘식사전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후딱 외워 내려갔습니다.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늘 부모와 함께 기도를 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가정에는 18개월이 된 아이였습니다. 어른들이 기도를 하는 중에는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며 안수를 해 드렸는데 어린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기 할머니에게 가서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그래서 제가 그를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칭찬하고 왔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되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눈이 맑아지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하면 주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분명히 얻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린이들의 축복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아세례’, ‘첫영성체’에 무관심한 분이 계십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무지한 부모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종교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문제를 놓고 “나중에 커서 스스로 공부하게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아라.”하십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며 신앙의 근본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의 기도와 가르침이 큰 역사를 이룹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협력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입시나 먼 길을 떠날 때, 군대 갈 때, 결혼을 할 때....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주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마라” 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사회는 가부장적이고 아이는 보잘 것 없는이로 뒤로 밀쳐져 있고 폭력의 희생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아이를 품어주고 동등한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주시고 연대하십니다.
제자들은 편협하고 배타적이라면 예수님은 수용적이고 개방적입니다. 어린이의 속성이 아니라 받아들임을 생각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을 해서 그 대가나 보상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아무 자격없는 이에게 거져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아이들을 껴안아 주시며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는 행동을 우리도 해야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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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여러분은 ‘나’ 아닌 ‘남’을 위해서도 자주 기도를 바치십니까? 주변에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스치듯 인사하기는 쉬워도, 나와 별 인연이 없는 누군가를 특별히 기억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할 시간도 부족한데 남까지 신경 쓸 여유는 더더욱 없다.’라며 속으로 단념해 버리곤 하지요.
오늘 제1독서는 기도에 관한 여러 권고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특별히 ‘남’을 위한 기도가 큰 힘을 발휘한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교회 원로들이 병자를 찾아가 기도해 주면 그 믿음의 기도가 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확대해서 이제 신앙인 모두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할 때 발휘되는 효력이 이토록 큰 것이라면, 그런 놀라운 힘을 그냥 묵혀 두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에 기도가 필요한 이웃들을 하나둘 떠올려 보고, 시간을 내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 봅시다.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섣부르게 예단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합시다. 주님께서는 ‘남’을 위하여 바치는 우리의 정성을 꼭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분명 누군가에게 실현되는 구원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이 어떤 이에게는 육체 또는 마음이 겪는 고통에서의 해방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회개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우리의 작은 기도가 주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놀라운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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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10,14)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
오늘 복음(마르10,13-16)은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10,14-15)
'어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일까?'
'어린이'에 대해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단순하다'였습니다. '꾸밈과 거짓이 없는 단순성!' 나이가 어린 아이일수록 더 그러합니다.
'꾸밈과 거짓이 없는 단순성을 간직한 사람들'이 바로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묵상했습니다.
오늘 독서(야고5,13-20)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5,16)
단순하게 기도하는 사람!
꾸밈과 거짓 없는 마음, 지금 있는 그대로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하는 사람!
서로가 자신의 죄를 먼저 고백하면서, 서로가 너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이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너무 이것저것 따지지만 말고, 너의 허물만 바라보면서 너를 판단하거나 단죄하지만 말고, 단순하게 믿고, 믿는 것을 단순하게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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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외출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시계를 차려고 하는데 시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래 시계를 풀어 놓는 곳이 있는데 그 자리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두었나 싶어 이곳저곳을 찾았지만, 도대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전된 것입니다. 전기가 나가서 실내등이 모두 꺼져서 암흑이 되었습니다. 시계를 찾아야 하는데, 빛까지 없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곧바로 시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어디선가 ‘째각째각’ 시계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계는 책상 위의 책 아래에 있었습니다. 곧바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방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옴과 동시에 많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소리와 함께 살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소음들 사이에서 들어야 할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모두 반드시 들어야 할 소리이지만 다른 소리에 가려서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전되어 시계를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내 주변의 소리를 잠시 끌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와 묵상의 시간입니다. 진짜 들어야 할 소리, 진짜 봐야 할 것을 듣고 볼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인, 병사, 세리, 과부 또 여자들도 대접보다는 차별받는 계층입니다. 여기에 또 한 계층이 바로 어린이였습니다.
구약성경에 어린이는 방자하고 이해력이 부족하여 엄한 훈육이 필요한 아이로 취급되었습니다. 또 풋내기이며 철부지로 불리었고, 생각 없고 철없는 아이이기에 부모가 길을 잘 들이고 엄격히 단련 받아야 할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는 율법을 깨닫지 못하기에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집회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족한 존재여도 부모에게는 특별한 존재였기에, 예수님께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병자가 예수님의 안수로 온전하게 치유되는 것처럼, 아이들도 온전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의 생각을 제자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는 주님을 번거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따라서 소외되고 아파하는 계층의 소리를 듣고 그들 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소외되고 힘들어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들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와 묵상은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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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
- 어린이와 같이 되십시오 -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2018.1.16
언제나 즐겨 외우는 자작 애송시를 쓴 지 4년째 이지만, 외울 때 마다 늘 새롭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젠가 어디엔가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할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입니다. 주님은 진리 이전에 이미 기쁨으로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화두이자 꿈이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꿈꾸며 꿈꾸는 사람이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꿈중의 참꿈이, 희망중의 참희망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인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닮을수록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으며 우리 영적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전혀 나이에 상관없습니다. 나이 들어 세월 흘러 몸은 노쇠해도 마음은 여전히 동심의 어린이되어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산책때 마다 나이 칠십을 넘어 부르는 동요童謠가 요즘처럼 깊이 마음에 와닿기는 처음입니다. 얼마전 유투브 동영상에서 서울 대교구 4분의 주교님들이 “꽃밭에서” 동요를 부르던 천진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새삼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의 순수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어린이의 동심을 그대로 지녔던 참 단순히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했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성가 435장 2절은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아버지 믿는 어린이처럼, 어디를 가든 두려움 없이
눈비가 내린 궂은 날에도, 기쁨속에 살리라
하느님 보소서 천진한 어린이처럼
티없이 기쁘게 주님께 왔나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을 반겨 사랑하시는 예수님 모습은 그대로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 모습을 반영합니다.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 모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는 영원한 순수의 어린이들인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런 어린이와 같은 자세로 미사에 참석하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미사은총이 우리의 동심을 회복하여 순응과 순종, 신뢰와 사랑의 어린이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하느님의 나라요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은 순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음 활짝 열고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의 나라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의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 깨끗한 순수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아니 마음 깨끗한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어떻게 늘 마음 깨끗한 신뢰와 사랑의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사랑과 기도입니다. 사랑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주님과 사랑과 생명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영혼의 숨쉬가 호흡과 같은 사랑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면 기도할 수 뿐이 없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본능입니다. 기도해야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마라.”
바로 베네딕도 규칙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 기도를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가 오늘로써 끝나는데 야고보 사도 역시 오늘 제1독서에서 특히 기도를 강조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노래를 부르십시오.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십시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사랑할 때 기도합니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찬양과 감사의 노래 기도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할 때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의 회복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한결같이 기도할 때 저절로 회개가 뒤따르고 마음은 더욱 순수해져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끊임없은 기도에,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의 순수입니다.
이래서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누구나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면 좋을 영적 주식主食과도 같은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가정공동체든 수도공동체든 끊임없이 기도를 바칠 때, 저절로 뒤따르는 끊임없는 회개요 어린이같은 마음의 순수입니다.
우리 구원의 여정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닌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천국입장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라 합니다. 그러니 혼자기도와 반드시 병행해야할 더불어의 공동기도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중 이상적인 형제적 공동체를 위한 헌장과 같은 72장 마지막 대목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베규72,11-12)
바로 ‘우리를 다 함께’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천국입장은 단체입장임을 입증하는 구절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젠가 어디서 살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끊임없는 사랑의 기도와 회개가 순수한 어린이와 같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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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내가 고통스러울 때 기도하게 하소서
내가 즐거울 때 찬양 노래 부르게 하소서
내가 아플 때 기도를 부탁하게 하소서
나의 주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게 하소서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나의 하느님!
나를 위한 기도보다 남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소서
내가 나를 위해 바치는 기도보다
남이 나를 위해 바치는 기도가
더 큰 효험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특히 어린이 같은 순수한 영혼들의 기도가
하느님 어전에 훨씬 더 잘 가납됨을 알게 하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기억하소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벗들을 기억하소서
병으로 고통받는 벗들을 꼬옥 기억해주소서
임종하는 이들과 유가족들의 슬픔을 기억하소서
좋은 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벗들을 축복해 주소서
오! 자비의 하느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
생각으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소서
말로 나에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소서
행동으로 나를 모욕한 사람을 용서하소서
"서로 용서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날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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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s7QDkWUS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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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 14)
어린이도
어른도
모두 다
똑같은
사람들이다.
덜 소중하고
더 소중한 것이
아니다.
높이와
소유의
나라가
아니라
비어있음과
받아들임의
나라이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매순간
놓칠 수밖에 없다.
너무
우리 것으로
가득차 있다.
겨자씨와 같이
어린이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도
어린이도
작고
순수하기에
하느님의
나라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자기 것이
없어져야
하느님의 것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이제 곧
비어있는
앙상한 가지에서
봄꽃이 피고
봄 새순이 가득
돋을 것이다.
작아지고
낮아지고
비워진
자연의
순수한
모습이다.
어린이들과 같이
욕망을
소유하지 않는
행복이
진짜 행복이다.
욕심이 작아져야
제자들처럼
자리싸움을
하지 않는다.
욕심과
걱정으로
가득차 있는
우리 마음을
다시금
반성하는
시간이다.
어린이는
어른을
비추어주는
하느님 나라의
비어있는 맑은
거울이다.
거울은 맑아야
거짓을 정화한다.
맑고
비어 있어야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다.
이와같이
어린이와
어른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존재들이다.
판단하지 않는
비어있음이
참사랑이다.
욕심으로
탐하지 않기에
하느님의 나라를
오늘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비워내는 것이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비워냄과
받아들임 사이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나약함과
부족함을
숨기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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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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