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板門店) 이야기/ ilman의 판문접 견학(3)
*, 판문점(板門店)의 유래
-널문리의 판문점/ 최초의 회담 장소 개성 내봉장 1965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무방비 상태에 있던 대한민국을 '남한 민족 해방'이란 명목 하에 남침한 북한군은 6월 27일사흘만에 대한민국의 수도서울을 단번에 함락시키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
이에 참전한 UN군은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한편에는 1951년 10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휴전 회담을 열고 있었다.
회의 장소는 처음에는 북한군이 점령한 개성 내봉장에서 열렸으나 개성은 적 치하이고 근처의 잦은 전투로 위험한 데다가 북한군은 UN군이 개성으로 협상하러 올 때 집차에 백기를 꽂고 오게 하는 모욕적 요구를 강요하였다. 그래서 1951년 9월 옮긴 곳이 도로변 초가집 네 체가 있는 판문점이었다.
-원래 판문점(板門店)의 자리는 도로 변의 초개집 4체가 있는 '널문리'라는 작고 고요한 마을이었다.
UN측과 북한측은 그 앞에 천막을 치고 휴전회담을 하였다. 그때 중공군의 대표들에게 회담장을 쉽게 찾게 하기 위해서 '板門店'(판문점)이란 한자 간판을 걸어 두었다. '板'은 널판지로 널문리의' 널'을, '店'은 주막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조인될 무렵 판문점이 세계인이 주목하는 장소가 되자 그 마을 근처에 '평화의 전당'이란 목조건물을 짓고 휴전 협정을 맺은 다음 다시 세 번째로 옮긴 곳이 지금의 판문점(板門店)이다.
1953년 7월 10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판문점에다가 쌍방 장성급 5명의 장교로 구성된 군사휴전 위원회와 중립국감독 위원회을 두었다.
지금 이 판문점은 이런 군사 목적 이외에도 남북 간을 접촉하는 창구로, 남북을 대화로 연결하기 위해서 유일의 직통전화를 놓고, 남북 왕래의 관문(關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주영의 소도 이곳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갔다.
판문점 지역은 처음에는 적대 세력 쌍방의 공점공유(共占共有)의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콘크리트로 지은 남의 '자유의 집'과 북의 '판문각'에서 서로 마주 보며 맹수 같이 으르렁거리는 분단의 장벽이 되고 말았다.
판문점 견학에는 지켜야 할 일이 많았다.
주민등록을 지참하여야 하고, 반바지나 청바지보다는 가급적 단정한 복장을 해야 하고, 판문각이나 인민군을 향하여 손짓을 말아야 하고, 뛰지 말고, 금연은 물론 카메라 촬영은 지정된 곳에서만 해야 했다.
이는 우리 견학자들의 안전한 보호와 북한군에게 우리측의 품위를 보여 주기 위함 때문이었다.
단체 사진도 외부에서는 북의 '판문각'이 보이는 곳 노란 라인 안쪽에서 북의 판문각 쪽으로만 촬영이 가능했다.
회담 장소인 파란 콘센트 건물 내부에는 책상 양쪽으로 남북 대표가 각각 앉는 의자들이 있고 책상 위에는 고정된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다.
그 양쪽에는 중립국감시 요원을 위한 통역관실도 준비되어 있다.
이 판문점은 정전협정 이후 UN군과 북한군의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으로 지정되어 피아(彼我) 구별없이 쌍방의 행정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도끼 만행 사건 이후 이 판문점도 건물 밖에는 충돌 방지를 위해 군사분계선을 표시하여 놓고 경비병을 포함한 모든 군인 민간인들이 함부로 넘어다닐 수 없는 구역이 되고 말았다.
판문점을 견학한 후 우리는 버스를 탄 채로 먼저 도끼만행사건의 현장 모습을 둘러본다.
도끼만행 사건이란 무엇인가.
1976년 8월 18일10시경이었다.
UN군 3초소에서 북한 초소를 향한 곳에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한 구루가 있었다.
미국 장교 2명과 사병 4명과 한국 장교 1명 등 총 11명이 전지작업(剪枝作業)을 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의 장교 2명이 나타나 이를 만류하였다. 그래도 이를 강행하자 북한군이 구원병를 불러 트럭을 타고 떼로 몰려와 미군 장교 2명을 잡아 수풀 속에서 도끼로 찍어 죽이고 9명을 중상 시킨체 도주한 사건이다.
이에 분노한 미군은 본토에서는 핵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기, 괌에서는 B-52 폭격기 3기,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 발진한 F4 전투기 24기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7함대 소속 항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로 북상하여 왔다.
이는 만약 적의 애응네 의한 확전을 위한 것이어서 북한이 겁을 먹고 반응이 없자 미 작전은 허무하게도 미루나무 한 그루를 잘라버리고, 김일성의 유감 성명을 든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은 확전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그게 어찌나 허무하던지-,
그러나 판문점에 있던 한국군 공수부대원 64명이 중화기(m16,크레모어 수류탄등)로 무장하고 북한군 초소를 공격 파괴하였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얼마나 속이 후련했던지모른다.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박 정희 대통령의 그 한을 풀어 드리는 공격이었다 , 그러나 미군이 놀란 것은 판문점은 중무장을 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30 년 전 갔을 때는 잘려진 미루나무 가 있더니 요번에 갔더니 그 자리에 석물 표석으로 서 있는데 누구인가 넋을 기리기 위해 꽃다발을 바쳤다.
우리나라는 비명에 간 두 미군장교의 죽음을 애통하여 표창장으로 애표를 표하기도 하였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는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을 가로지르는 사천(砂川)을 건너는 다리로 옛날에는 '널문다리'라고 하였다.
6.25 무렵 포로교환 때 전생 포로들이 이 다리를 일단 넘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 해서 생긴 이름이다.
당시 인기 있던 마리린 몬로 주연의 '돌아오지 않는 강'이란 영화와 그 주제 음악에서 유래된 이름 같다.
포로교환 시 이 다리를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북한군은 1,800명, 한국으로 돌아온 아군의 포로는 8,200명이었다.
휴전협정이 되었을 때가 1953년 7월 10일이었으니 금년 2013년 7월 10일이 되면 휴전 60주년이 되는 회갑날이다.
이 휴전의 날을 북한에서는 우리와 달리 '전승기념일'로 국가적으로 성대히 그 기념행사를 치르는 모양이다.
귀가 하는 길에 우리나라에서는 최북단 대성동 '자유의마을'을 지나다 보니 높이가 100m 국기대에 가로가 18m에 세로가 12m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거기서 1.8km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북한에서 최남단이라는 기정동(機井洞) '평화의 마을'의 160m나 되는 국기대에서는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다.
자유의 마을의 이 깃발은 너무나 커서 바람을 견디지 못하는 바람에 파주시에선 몇 개월마다 갈아 주는데 그 비용이 자그만치 200만원도 부족한 모양이니 북한 쪽은 오죽하랴.
이런 자존심의 경쟁을 잘사는 나라, 부강한 나라, 행복한 국민이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경쟁으로 남북이 생각을 바꿨으면 얼마나 좋으랴.
지금은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는 하세' 하며 노래하는 시대가 아니다. 세계가 다민족 국가로 함께 살아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는 침략으로 영토확장하려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 그런 침략자가 있으면 세계가 힘을 모아 응징하는 시대다.
역사를 돌아보라. 일본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영국에서는 문화를 미국에서는 문물을, 독일에서는 군사를 배우고 있던 대원군 시절 우리는 무엇하고 있었는가. 통상하러 온 미상선을 대포로 물리치고, 사학(西學)이라고 천주교인을 학살하고, 당파 싸움만 일삼다가 결국에는 일제 36년간의 강점기로 값비싼 댓가를 자초하지 않았던가.
배움에도 시기가 있듯이 나라 발전에도 시기(時期)가 있고 시운(時運)이 있는 법이다.
박정희는 독제자였지만 우리 전국민에게 추앙 받고 있는 것은 그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공헌과 그 노력 때문이다.
나는 그보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장 적당한 시기에 다른 나라보다 먼저 경제발전을 꿈꾸었다는 것이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나라발전할 그 중요한 때를 엉뚱한 일로 그런 시기를 자꾸 잃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기네스 북에 올랐다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인공기(人共旗)를 바라 보며 지금이라도 꿈을 깨고 북한의 국력도 우리가 부러워 할 만큼 저렇게 높아 가기를 빌어 본다. 옛날 북한은 대한민국보다 더 잘 살던 나라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현재 북한에게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자꾸 느끼게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