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민정음해례본 전래 ]
선대의 인류가 후대에 남긴 물건은 때에 따라 한 국가가 뒤흔들리기도 할 만큼 그 영향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세계 유산을 지정하는 전문 기구가 존재하는 것이고 각 나라마다 문화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국가유산청'이라는 게 있는 것이죠.
그런데 70년 전 어느 한국인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유물의 정체가 공개되자, 중국이 발칵 뒤집혔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중국은 난리가 난 것일까요? 자세한 내용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은 현대에 들어 한국 문화의 중국 예속화를 시도하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한복 • 한식 등 한국 문화를 뭐든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고 있고, 그 추악함은 하늘을 찔러 한국에서 반중 감정이 반일 감정을 넘어섰을 정도이죠.
특히 중국은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것에도 손을 댔는데요, 바로 한글입니다. 한글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으로, 인류가 사용하는 전 세계 7,000여 개의 문자 중에서 유일하게 창제 연도(음력 1443년 12월)와 창제자가 명백히 밝혀진 위대한 유산이죠.
우리 민족의 언어인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자긍심, 그 자체로 성역과도 같은 부분이지만, 중국은 전 세계가 칭송하는 위대한 한글을 가만히 둘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중국어의 발음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은 옛 한자를 베껴서 만들어졌다' 등의 소리를 하며 빼앗으려 했죠.
하지만 위대한 세종대왕은 후대 중국이 몹쓸 행보를 벌일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한글이 빼앗기지 않도록 미리 경계를 쳐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글의 창제 과정이 들어가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이었죠.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여러 가지 구구한 추측이 난무했지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해례본이 발견된 시기는 1940년으로 당시 일본은 한국의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즉 한글의 창제 원리가 들어가 있는 해례본 역시 그 존재가 들키면 일본에 빼앗길 것이 분명했죠. 하지만 목숨을 걸고 해례본을 지킨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가 바로 문화 지킴이라고 알려져 있는 ‘간송 전형필’입니다. 전형필은 문화 지킴이이라는 칭호 그대로 24살 때, 오세창(일제강점기 조선 시대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예가 겸 서화가)은 당시 전형필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이 말에 감명받은 전형필은 마음을 굳게 먹고,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 도자기 • 불상 • 석조물 • 서적 등을 닥치는 대로 수집해서 자기 땅에 남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형필은 어떻게 훈민정음해례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일까요? 사실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을 발견한 사람은 국문학 김태준의 제자였던 ‘이용준’으로 자신의 처가인 광산 김 씨 종택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제일 먼저 발견했습니다.
이용준은 이 사실을 즉시 김태준에게 이야기했고,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해례본을 직접 확인한 김태준은 경악을 금치 못했죠. 그들은 이 위대한 유산을 잘 보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물색했고,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전형필을 떠올렸습니다.
전형필은 김태준에게서 해례본 이야기를 듣자마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즉시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 1천 원을 찾아와서, 1천 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 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렀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죠. 당시 전형필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입니다. 전형필은 이것을 사들이고 나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이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습니다.
한국 문화를 철저히 말살시키려고 한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글 창제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이 책이 드러났다면 좋지 못한 꼴을 당할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죠. 이후 전형필은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피난 갈 때 이 책을 먼저 챙겼고, 베개 밑에 두고 잠을 잘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보존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해례본이 이어져 내려온 것은 그런 전형필의 노력 덕이며, 1956년에는 이 소장본을 바탕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만든 영인본이 제작되었습니다. 전형필은 영인본 제작을 위해 이 소장본을 흔쾌히 내놓았고, 그뿐만 아니라 책을 한 장 한 장 해체하는 것까지 직접 했다고 하죠.
이후 해례본은 간송 미술관에 보관됐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에서는 정부 인사를 파견까지 했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정세를 살폈다고 하는데요.
현재도 중국은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을 쉽게 표기함으로써 자음을 정립하여 중국어를 통일하는 것이 목적이다” 등의 헛소리를 해도, 해례본이 국보 70호로 지정되고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이상, 국제사회는 한국과 함께 중국의 추악함을 규탄할 뿐일 것입니다.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기 위해 절대 더 이상 한국의 문화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전쟁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훈민정음해례본을 지켰던 간송 전형필 선생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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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례본과 언해본의 차이 ]
해례본과 언해본은 세종과 훈민정음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진 책이지만, 매우 다른 측면도 있고 그러면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의 책이다.
가장 큰 차이는 해례본은 한문으로 된 책이고 언해본은 고등학교 때 반드시 배우는 ‘나랏말싸미’로 널리 알려진 한글(언문)로 쓴 책이다. 둘 다 세종이 대표 저자로 펴냈지만, 해례본은 공동 저자 8인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언해본은 공동 저자가 드러나 있지 않다. 아마도 해례본 공저자들이 다 함께 참여했을 확률이 높다.
해례본은 국보 70호이고 세계기록유산이지만 언해본은 단행본 형태로 발견된 적이 없어 그 자체로는 그 어떤 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이 더 중요한 책이냐는 이분법이 성립되지 않는다. 해례본은 언해본이 있어 그 가치가 더 빛나고 언해본은 해례본으로 인해 그 가치가 더 빛나기 때문이다.
해례본과 언해본 탄생 자체가 흥미롭고 경이롭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단독으로 연구한 끝에 1443년 음력 12월에 창제를 마무리하고 신하들에게 알렸다. 당연히 창제자로서 언어정책 책임자로서 얼른 보급하기 위해 실무 관리들을 가르치고 한자 발음도 적어보고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자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 7명(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의 강력 반대 상소에 부딪친다. 이들의 생각은 이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의 양반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반영한 무시무시한 반대였다.
그래서 나온 책이 해례본이다. 세종은 잠시 보급을 중단하고 양반사대부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리고 백성들한테 제대로 새 문자 취지를 비롯하여 제자 원리 등을 알리기 위해 훈민정음에 대한 체계적인 해설과 의미를 담은 책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나온 해례본인 것이다.
원래 책 제목은 “훈민정음”이지만 문자 이름과 같다 보니 책 가운데 제자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정음해례’ 부분의 ‘해례’를 따서 해례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용준 선생에 의해 1940년에 초간본이 발견되어 간송 전형필 선생이 거금을 주고 구입하여 소장하게 되어 이를 간송본이 부르고 이 책이 2015년에 1차 복간, 2023년에 2차 복간이 이루어졌다.
한문본 해례본은 33장 66쪽으로 앞의 7쪽까지를 세종이 직접 저술했고 이 부분을 언문(훈민정음)으로 번역하고 풀이하여 30쪽 분량으로 펴낸 책이 언해본이다. 지금 전하는 것은 1459년(세조 5년)에 월인석보 앞에 실어 펴낸 책이지만 실제 간행은 세종 당시에 펴냈다는 것이 전문학자들의 중론이다.
<출처 : 김슬옹의 한글사랑 / 우리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