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자전거를 타고 수영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원동IC를 지나 반여동 농산물 시장 부근으로 가는 길에 구서IC에서 내려오는 도시고속도로에서 해운대로 빠지는 도로의 교각들이 하상 위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드리 교각들이 열 마춰 서 있는 데 해가 서산으로 늬엿늬엿 질 때는 환한 햇빛이 교각들 사이로 비추면 무슨 열병식 보는 것처럼 기하학적인 아름다움도 느낀다.
고수부지엔 간이 골프장도 만들어 놓고 족구장도 만들어 놓았다. 나는 지역구출신 국회의원이 내려왔을 때 남아 있는 빈터에 테니스장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건의를 했으나 함흥차사가 돼 버렸다. 그런데 구청에서 교각 하나하나에 천자문 네글자를 써서
붙여 놓았다. 자전거만 아니었으면 산보하면서 눈여겨 볼 터인데 고개를 돌리고 오래 쳐다 볼 수는 없었다. 산보를 하면서도 한자 공부도 하고 그 뜻을 한 번 더 되새겨 보라는 의미로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내 어릴 적에는 뭣도 모르고 다른 아이들이 외우는 천자문을 흉내내어 "하늘천 따지, 가마솥에 누룬밥 딸딸 긁어서 네 한그릇 먹고 내 한 그릇...." 라고 노래를 불렀었다.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과 같이 당시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한 것을 보면 조기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나는 서당에 가서 훈장한테 천자문을 배우지는 않았으나 아버지로부터 국문과 한자 쓰는 법을 익혔고 주판을 배웠다. 그 덕분에 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를 잘 한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다.
도쿄올림픽 경기도 거의 종반에 접어들었다. 육상 달리기나 수영경기에서 우승하려면 출발이 빨라야 한다. 그렇다고 출발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튀어나가는 것은 규칙위반이다. 배우는데는 출발신호가 없다. 먼저 출발하면 되는 것이다. 먼저 출발했다고 해서 꼭 우승한다는 보장은 없다. 토끼와 거북의 우화도 있지 않은가. 어릴 때 책을 많이 읽고 사고를 많이 하게 되면 뇌의 발달도 빠르고 오래 가게 돼 있다. 어릴 때 배운 구구단이나 천자문이 평생가는 것은 그와 같은 이치다. 중학교1학년때 영어 선생님이 'once upon a time'이 숙어니까 문장을 외우라고 하여 외운 것이 지금까지도 머리속에 남아 있다.'Once upon a time there lived a rich king whoes name was Midas'
교각에 붙여져 있는 천자문을 힐끗 힐끗 보면서 나도 모르는 한자가 제법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적어도 삼천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 데 천자에 속하는 글자도 제데로 알고 있지 못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자를 익혔지만 자주 쓰지 않으니 자연히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설기관에서 한자급수 시험을 봐서 인정서를 발급하고 있지만 구태여 급수까지 딸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당시를 이해하려면 한자를 모르고선 불가능하므로 스스로 공부를 하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천자문은 어디서 왔는가?
중국 남조(南朝) 양(梁)의 주흥사(周興嗣:470?∼521)가 글을 짓고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중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아 만들었다고 하며 사언고시(四言古詩) 250구(句), 합해서 1,000자가 각각 다른 글자로 되어 있다.
내용은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언재호야(焉哉乎也)’로 끝난다. 글자 한자 한자 뿐만 아니라 두글자 또는 네글자가 합쳐져서 나타내는 뜻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속에 철학적인 의미까지도 숨어 있으므로 단지 글자만 익혀서는 안된다. 천자라 하지 않고 천자문이라고 한 것은 단지 글자로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후 급격히 보급되어 많은 서가(書家)에 의하여 쓰여졌으며 그 중에서도 습자교본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왕희지의 7대손 지영(智永)이 진서(眞書:楷書)와 초서(草書)의 두 체로 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본으로 1109년에 새긴 석각(石刻)이 전하고 있다.
천자문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백제 때 왕인(王仁)이 《논어(論語)》 10권과 함께 이 책 1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한문의 입문서로서 초보자에게는 필수의 교과서로 중용(重用)되었으며 선조 때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석봉천자문》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