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문 기사를 보니 전남 해남에선 조생종 벼를 오늘 수확하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보통 모내기는 6월초에 하니까 한 달 남짓 지났는데 벌써 수확한다니 깜짝 놀랐다. 수확이 끝난 다음 다시 벼를 심으면 가을에 수확이 가능한 이모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식량이 절대 부족했던 옛날에도 이모작이 가능했더라면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을텐데 에전에는 이모작은 고사하고 대부분 천수답이었으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가 가뭄이 들어 모내기도 못하는 해에는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알제가 수탈목적으로 철도도 개설하고 저수지도 만들고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큰 들판에 물을 댈 저수지를 만들었지만 나머지 골짜기 논들은 천수답으로 남아 있었다. 날이 가물면 웅덩이에서 물을 새드레로 퍼 올려 모를 심고 장마가 지속될때까지 논에 물을 대야 했다. 이모작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봄에 씨나락을 물에 담궈 싹을 틔워 못자리에 뿌려 놓으면 날이 따듯해야 못자리에 뿌리를 내린 모가 쑥쑥 자랄텐데 날이 추우면 도로 얼어 죽어버린다. 요즘이야 지구온난화로 이른봄에도 기온이 따뜻하지만 옛날에는 추웠다. 또 비닐도 없었으므로 비닐하우스로 미리 모를 키울 수도 없었다.
내 어릴 때 까막골 동네에는 다로로 영감이 있었는데 그집에서 조생종 벼를 심었다.
다른 논에 심은 벼보다도 빨리 자라서 추석이전에 누렇게 익어서 수확을 할 수 있었고 수확한 새 쌀로 추석제사를 지냈다.
다로로 영감이란 별호는 우리가 지어 붙였는데, 재작이 많은 아이들이 그 집 밭에 심어 놓은 농작물에 손을 댔다간 먼데서 보고는 쏜살같이 달려오면서 '이 너무 손들 잡히기만 하면 다리를 때려 부숴놓겠다'고 고함을 쳤다. 아이들이 영감에게 붙잡힐리는 없었다. 누구집 자손인지는 한 동네에 사니까 다 알지만 그 순간만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보니 들판에서는 한쪽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다른 한쪽에는 다시 벼를 심고 있었다. 열대지방이라 사시사철 더우니까 농사철이 따로 없었다. 수시로 심고 익으면 베고 연속이었다. 필리핀 농촌에서는 벼를 수확하는 데 벼 모가지만 똑똑 따서 훌치로로 타작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6.25사변전에 하던 방식을 거기서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홀개라고 해서 발로 발판을 밟으면 기어장치에 의해 ㄱ자 모양의 철심이 박힌 로터가 회전하면서 나락 낱알을 떨어지게 했다. 지금은 그것도 고물이 되고 콤바인인지 뭔지 자동화 기계로 논에서 바로 수확하여 푸대에 담겨져 나온다고 한다. 농사도 기계화가 다 됐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농사는 자연의 힘을 거를 수는 없다. 적당한 시기에 비가 와야 하고 햇볕도 쨍쨍 내리쬐어야 한다. 자연과 과학의 힘이 모두 필요하다 하겠다. 지금은 쌀만 생각하면 충분히 이모작은 가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