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몇 살인지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
유연히 TV에서 방영하는 흑백 영화한 편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외계에서 날아 온 아주 희한하게 생긴 꽃씨가 발아하며 어느 마을 주민들을 한 명 한명 씩 잡아먹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냥 잡아먹은 삶과 똑같은 복제인간은 만들어내어 결국 마을 전체를 장악해버리는
줄거리의 SF 영화였다.
주민들이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챈 주인공이 이웃 도시로 탈출하기 위해 고속도로에 난입하고 달리는 차들을 향해
'다음은 당신들 차례야!'라고 처절하게 경고하는 장면은 그 당시 어린 내게 꾀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강렬함 덕분에 약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이 영화가 바로 잭 피니(Jack Finney)의 소설을 돈 시겔(Don Siegel) 감독이 스크린 올린 SF 고전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 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이다.
한동안 내게 SF는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 느겼던 충격과 공포, 혼란을의미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사람들은 SF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고 감정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문학을 연구하는 내가 가장 먼저 살펴본 사람은 당연 SF 문학작가와 영화감독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가와 감독마다 SF 상상하고 그 상상을 독자와 공유하는 방식과 이유는 천차만별이었다.
더 많은 작가와 감독을 조사하고, 더 많은 작픔을 접한 후에 비로소 내 안에서 오랫동안 케케묵었던
SF 단상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낡은 오해와 편견을 뒤로 하니, SF를 읽는 새로운 독법이 가능해졌다.
SF는 그저 시청각적으로 화려하지만 한스페같클의 세계가 아니다.
그보다 현실과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꿈꾸고 추동함으로써 현싱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이 글을은 올해 용인시 수지도서관에서 진행한 연속 강의 (SF가 보내는 위로:외로운 인간을 달래는 상상력)의 주요 내용을 담고
비주류에서 주류 장르로 부상하다
SF는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비교적 역사가 짧은 장르이다.
최초의 SF 소설로 거론되며 메리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us)(1818)을 기점으로 본다면, SF 문학의 태동과 성숙, 변주의 역사는 2세기에 불과하다.
요컨대 SF에는 주류 문학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문학성과 미학성이 없다는 오해, 그리고 그 오해로부터 비롯된 경시와
조롱이 늘 뒤따랐다.
실제로 20세기 초까지 SF는 '시간 메우기'룔 다임 소설(dime novel) 혹은 '싸구려 잡지소설'이라는 펄프 픽션(pulp fiction)의
아류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뉴 유ㅔ이브(New Wavw)와 1980년대의 사이버펑크(Ctherpunk)를 거치며 ,
SF는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더욱이 2000년대 이후 과학기술 발전이 가속화되자 SF에 대한 관심과 비평은 자연스레 더욱 커져갔고,
2010년대 이후 SF의 인기는 가히 '열풍'이었다.
이러한 동향을 인식하며,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출간하는 전문잡지 ' 기획회의'(2019년 가을호)는
'2019년 출판계 키워드 30'의 첫 번째 키워드로 '주류가 된 장르'를 선정했다.
오늘날 SF는 더 이상 하위문화, 청년문화, B급문화가 아니다.
명실상부 주류에 진입한 SF의 인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SF, 실험장이자 놀이터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강타한 SF 열풍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대사회가 이룬 과락기술의 진보가 SF의 인기를 제고했다고 생각해야 할까?
일부는 맞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
혁신적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SF를 향한 흥미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나 SF는 과학기술의 이론과 법칙을 그대로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두 영역은 결코 일대일 대응 고나계가 아니다.
오히려 SF는 과학기술로 인해 새로운 방식으로 촉발되는 당대의 사회.문화.정치.윤리 미학적 문제를 다양한 양해로
그러나 사고 실험의 장에 가깝다.
바로 여기에 SF 인기의 비밀이 숨겨 있다.
SF는 고학기술을 경유하여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일종의 실험장이다.
다시 말해, SF는 매우 익숙하기 떄문에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모든 사회적 규범과 조건에 의문을 던지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비판적 거리를 ㅈ공한다.
예컨대 인간은 지구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면, 인간은 달에 갈 수도 있고 화성을 탐사할 수도 있다.
최초의 SF 영화인 조르주 멜리아스(Georges Melies) 감독의 '달나라 여행(A Trip to rhe Moon)(1902)은 바로 이런 상상력을 담고
있다.
영화 속 과학자들은 포탄으로 유인 우주선을 만들어 달에 발사하고, '즐겁게' 달을 탐사한 후 지구로 다시 돌아온다.
1902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1969년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로 발에 착륙했던 시기보다 무려 67만이나 앞서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하필 포탄 우주선이었을까?
이 영화는 프랑스 작가 줠 베른(Jules Verne)의 1865년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From the Earth to the Moon)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데, 소설에서 사람들은 남북전쟁(1861~1865) 이후 재고로 쌓인 폭탄을 처리하기 위해 포탄 우주선을 만들어 달에 보낸다.
정확히는 지구의 쓰레기로 골칫덩어리가 된 포탄을 달에 쏘아 차리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달나라 여행'은 그저 '유쾌하기만' 한 작품은이 아니라 관객에세게 현실의 문제인 전쟁과 환경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우주여행만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로봇과 복제인간, AI의 등장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불임판정을 여성 혹은 남성이 임신할 수 있다면 '정상가족'의 모습은 어떻게 바뀔까?
만약 인간이 다른 존재(동물, 식물, 외계인 등)와 대화할 수 있다면 인간은 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단순 소통을 넘어 공존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치부되었던 일들이 SF 세계에서는 가능해진다.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되, 익숙한 규범과 조건에서 벗어나 상상해보는 것.
바로 이것이 SF가 갖는 힘이자 인기 비결이다.
괗가비평가 조예나 러스(Joanna Russ)는 이 비결에 주목하여 SF를 놀이터라고 규정한 바 있다. 김지은 글
김지은 :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을 종ㄹ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취득 후,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여성, 자연, SF에 관심을 갖고 관련 글을 쓰며 강의한다.
번역서 '식물의 사유', '악어의 눈', '영화와 문화냉전', '일본군 위안부', (2024년 1월 예정)를 출간했고, 대중서 '도례할 유토피아들',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가', '위기의 시대, 인문학이 답이다' 등에 글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