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양후(梁侯, 양찬(梁瓚))이 먼저 그 선발에 들어, 깊은 바다를 마치 평탄한 길을 가듯이 건너가며 조금도 집을 걱정하거나 연연해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양후는 훌륭한 인재로다. 관청에 도착해서는 부지런히 성상의 덕을 펴고 백성의 고충을 보살피는 일로 급선무를 삼으니, 다스린 지 3년 만에 사람들이 대화합을 이루었다.
이에 그 지방 호족 고윤(高潤) 등 수십 인이 청하기를,
“관덕정은 실로 제주 고을 사람들이 활쏘기를 익히는 곳입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부서져 활쏘기를 익힐 곳이 없으니, 우리 고을의 큰 흠입니다.”
하니, 양후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통판 하공 주(河公澍)와 상의해 목재를 모으고 공인을 모아, 공사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완성하였다. 이에 활쏘기를 익힐 장소가 있게 되어 무비가 더욱 엄해졌으니, 양공(梁公)은 일의 우선순위를 잘 아는 자라 하겠다....
지금부터 제주 고을 사람들이 날마다 여기에서 활쏘기를 익힐 것인데, 그냥 과녁을 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며 쏘는 것도 익힐 것이고, 말을 타고 쏘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투의 진법(陣法)도 익힐 것이다...
제주(濟州)의 관덕정(觀德亭)을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
위 내용은 15세기의 문인이자 관료였던 서거정이 역시 15세기에 활동했던 양성지로 부터의 요청을 받아 제주도 관덕정(觀德亭)을 중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중수기(重修記)입니다.
관덕정은 원래 1448년 제주목사였던 신숙청이 세웠는데, 1480년에 이르러 양찬이 다시 중수한 것입니다.
그런데 위 글에서 보면 제주목사 양찬이 중수한 관덕정에서는 단순히 활쏘기만이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기마술 및 진법을 훈련도 행해졌다는 것도 잘 알수 있죠.
관덕정에서 기사(騎射) 훈련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른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준조에서 차분하게 오병 놓고 강론하여 / 樽俎從容講五兵
그 자리서 외방 백성 모두 복종하게 하네 / 坐令殊俗盡輸情
원문(군문) 위로 해가 뜨자 깃발들은 따스하고 / 轅門日上旌旗暖
연막(군막) 속에 바람 일자 웃음소리 해맑구나 / 蓮幕風生笑語淸
칠찰 능히 꿰뚫으니 누가 용맹 뽐낼 거며 / 七札能穿誰賈勇
쌍건 차고 활을 쏘니 시위 소리 울리누나 / 雙鞬馳射【奮】蜚聲
정자 앞의 만 마리 말 구름 비단 같거니와 / 亭前萬馬如雲錦
춘풍 속에 흩어지자 온 십 리가 평평하네 / 散入春風十里平
차운하여 제주의 관덕정에 부쳐 제하다〔次韻寄題濟州觀德亭〕
위 시는 역시 15세기에 활동한 관료 이승소가 저술한 삼탄집에 수록된 관덕정과 관련된 시입니다. 시의 내용에 보면 단순히 활쏘기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마(萬馬)와 같은 말에 대한 표현이 있는 것을 통해서 서거정의 중수기에서 기록된 것처럼 기사(騎射) 훈련이 이루어졌음도 짐작할 수 있겠죠.
원나라가 제주도에 말을 번식시킨 이래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제주도는 말의 산지였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기준 제주읍성이 있는 제주목에는 3천 300필의 말이 있었으며, 8백여명의 기마대가 있었습니다(정의현에는 376명 대정현에는 202명). 이 제주목에 속한 기마병들의 기마술 훈련이 관덕정에서 이루어졌던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관덕정에서의 평소 훈련 결과는 16세기에 이르러 빛을 발하게 됩니다. 바로 1555년에 발생한 "을묘왜변 제주대첩"에서 말이죠.
1555년 6월 제주도 화북포에 상륙한 1000여명의 왜구가 제주읍성을 포위하여 치열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제주도를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는데 결정적인 활약을 한 사람들이 바로 제주도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였습니다.
6월 27일, 무려 1천여 인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步)의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퇴병(退兵)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馳馬突擊)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홍모두구(紅毛頭具) 【투구이다.】 를 쓴 한 왜장(倭將)이 자신의 활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자 곧 쓰러졌습니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으므로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ASTqqhDkis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70명의 효용군과 치마돌격을 한 4명의 모습을 통해서 결코 제주대첩이 요행으로 얻어걸린 승리가 아니라, 꾸준한 훈련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을겁니다. 즉 1448년에 세워지고 1480년에 중수된 관덕정에서의 훈련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위에서 소개한 서거정의 관덕정 중수기에서는 아래와 같이 마치 제주대첩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는 듯한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서거정의 기록대로라면 평소 제주도 기마병들이 훈련한 관덕정이야 말로 제주대첩을 만들어 낸 공간이라 평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왜적의 침범이 있을 때에는 세 고을의 군대를 출동시켜 상산(常山)의 형세를 만들고, 바다와 육지에서 보병과 기병이 각각 출병하여 힘을 다해 싸워서 다투어 적의 목을 베어, 이로써 부모와 처자를 구원하고 이로써 한 고을을 보전하고 이로써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어 역사에 공명을 기록하게 될 것이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랴."
첫댓글 헛 제주에 기마돌격의 전통이었다니 ㅎㄷㄷ 잘 읽었습니다.
제주목호로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전통이죠 ㅋㅋㅋㅋ
잘 보고 갑니다
옙 감사합니다 ~
꾸준한 훈련은 중요하죠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 ㅎ
1000명 상대로 4명이 기마돌격 ;;;;
예비군 훈련장가면 항상 듣는 평소 훈련의 중요성이랄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