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박경리가 자신 투영한 인물 상징으로 쓴 꽃은?
<190회>
김민철 논설위원
조선일보 2023.07.25. 15:23
대하소설 ‘토지’는 600여명의 인물이 차례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그 인물 중에는 작가 박경리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 있다. 바로 홍이의 장녀, 그러니까 이용의 손녀 상의(尙義)다.
‘토지’ 후반부인 4~5부에 본격 등장하는 상의는 홍이와 김훈장의 외손녀 허보연 사이에서 태어났다. 만주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다 부모와 함께 통영으로 돌아온 다음 일제 말의 친일적 교육을 받으며 갈등을 겪는 것이 소설에서 상의의 주요 모습이다. 소설엔 상의를 중심으로 여고생들의 기숙사 생활, 교실 풍경, 일본인 교사와 대립, 신사참배, 군사훈련, 근로봉사 등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우선 작가는 1926년생인데 상의 정도의 나이다. 다닌 학교도 같다. 소설엔 상의가 진주 ES여고 3~4학년 다닐 때 얘기가 주로 나오는데, 작가의 여고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 같다. 작가가 다닌 진주여고의 옛 이름은 일신여고보였다. ES 는 ‘일신’에서 따온 것 같다.
상의는 창씨개명을 해야 했고 학교에서 한복을 입을 수도 없었고 조선말을 쓸 수도 없었다. 결혼을 염두에 두어야할 다 큰 아가씨들인만큼 언뜻언뜻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도 나오고 있다.
상의는 독립운동을 돕는 아버지 홍이 영향에다 충무공과 연관있는 통영 출신이라는 점에서 민족 의식이 유달리 강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상의가 이런 의식을 갖고 있는데, 상의의 자존심을 건드는 일까지 생긴다. 4학년으로 진급해 기숙사를 옮길 때 사카모토 선생이 방 배정을 악의적으로 한 것이다.
마침내 상의의 감정이 폭발했다. 토요일 오후 학생들이 한방에 모여 한복을 입고 화장도 하고 조선말로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사카모토 선생이 나타났다. 사카모토 선생이 꾸짖자 상의는 “선생님이 취하는 태도는 떳떳한 거냐”고 정면으로 맞선다. 당시 조선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조선말을 하는 것은 물론 교사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퇴학을 당할 수 있는 언행이었다. 그만큼 상의는 자신의 자존심이 짓밟힌 데 분노한 것이다.
다행히 다른 선생이 중재해 상의를 포함한 학생들이 사카모토에게 사죄하는 선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다음은 상의를 포함해 학생들이 사죄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무궁화가 나오고 있다.
<2료 패거리들은 이방 저방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나왔다. 그리고 사감실 앞 복도에 모였다. 모두 끊어앉는다.
“선생님.”
경순이가 허두를 끊었다.
“저희들은 모여서 깊이 반성하고 선생님께 용서를 빌러 왔습니다.” (중략)
종을 치고 난 요장이 이들이 복도에 무리지어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들을 보고 씩 웃는다. 앞마당에는 톱니 같은 모양의 무궁화 잎새가 환한 달빛 아래 꺼무꺼무해 보였고 그것은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곤 했다.> (20권 340~342쪽)
무궁화.
상의가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의 폭압에 시달렸고, 민족의식에 눈을 뜬 상태였기 때문에 무궁화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상의가 3학년일 때도 무궁화가 나오고 있다. 상의가 꾀병을 부르며 등교하지 않고 기숙사에서 책을 읽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대목이다.
<그때는 1료에 있을 때였다. 현관에서 마지막 떠나는 아이들 기척이 사라지고 사방이 고요해지면 상의는 마치 자유의 천지로 나온 것처럼 마음이 기뻤다. 장방형의 기숙사 건물에는 건물 내부에 장방형 잔디밭이 있었다. 그리고 세면실 앞에는 무궁화 한 그루가 있어서 보랏빛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상의는 혼자 잔디밭에서 뒹굴다가 방마다 돌아다니며 소설책을 집어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탐독했다. 지금은 그 잔디밭에 고구마를 심었고 무궁화도 베어져서 없었다. 상의의 꾀병은 정확하게 짜여진 시간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어느 한순간도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나타나는 일종의 우울증에 대한 치유법이었다.> (19권 168쪽)
무궁화.
작가와 상의가 닮은점은 나이와 다닌 학교만이 아니다. 작가도 어린 시절 상의처럼 책읽기를 좋아했다. ‘문학 소녀’의 면모를 보인 것이다. 다음은 ‘여성동아’ 2004년 10월호에 있는 작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다.
“서점에서 쫓겨날 때까지 서서 책을 읽었어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죄와 벌’이 읽고 싶어서 배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학교까지 결석했어요. 어떤 날은 책 세 권을 딱 하루만 빌렸는데 밤을 새워 읽고 나니 눈빛이 피빛이더라고요. 그런 게 모여 작가가 된 것 같아요.”
작가의 이런 체험은 ‘토지’에 상의의 일화로 녹아 있다. 작가가 본인을 상의에 대입시키면서 아버지를 상의의 아버지 홍이에 대입시킨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소설 속 홍이가 화물차 차부를 운영한 것처럼 작가의 아버지도 차부를 운영했다. 작가가 진주여고를 다닐 때 학비를 주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가 따지다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뺨을 맞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궁화(無窮花)는 끝이 없이 피는 꽃이라는 뜻이다. 무궁화가 계속 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른 꽃이 연이어 피기 때문이다. 아침에 꽃을 피워 저녁에는 꽃잎을 말아 닫아 져버리고 다음 날 아침에 다른 꽃송이가 피고 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는 것이다. 마침 요즘 무궁화가 한창이다.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이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무궁화 자생지를 찾지 못했다. 반면 황근은 제주도와 남해안에서 자생하는 우리 꽃이다. 이름 그대로 노란 무궁화라고 할 수 있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자생 여부가 확실치 않은 반면 황근은 확실하게 우리나라(제주도)에서 자생하는 나무다. 그나마 황근이 우리나라에서 예쁘게 피어 무궁화가 국화인 나라의 체면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제주도에서 만난 황근.
또 하나, 작가 박경리는 자신이 ‘토지’ 등장인물 중 누구와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답은 최참판댁의 당주이자 서희의 아버지인 최치수다. 작가는 1994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토지’의) 숱한 등장인물 중 작가 자신은 누구와 닮았을까”라고 묻자 최치수라고 답했다. “자기 존엄성에 상처를 받으면 광적으로 못 견디며 결코 잊지 않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했다.
원본 링크 [김민철의 꽃이야기] 박경리가 자신 투영한 인물 상징으로 쓴 꽃은?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