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저희 겨레아동문학회(gyure.org) 게시판에 소개한 걸
여기 자료실에 옮기려 했더니
정회원 아니고는 자료실에 글 올릴 수 없게 되어있기에
하는 수 없이 '우째 삽니까'에 올립니다.
꽤 긴 분량의 중편 소설이지만,
요즘 뭐 읽어볼 만한 소설 있나요.
아래 작품은 한나절 읽어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왜 보리 고등학생산문집에 보면
<고흐와 고갱>을 쓴 아이 있잖아요?
그 아이가 바로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작가 김중미 씨가 운영하는
인천 기찻길옆 공부방 출신이에요.
지금 거기 도우미로 일하고 있고요.
참 어제 천안갔다가 고속터미널에서 강릉가는 마지막 차를 놓쳐서
속초엘 못갔어요. 잉잉.
17시를 오후 7시로 알고 갔으니까...
거기서 택시를 잡았더니 30만원 달라고 해서
깩! 하고 그냥 집으로 왔지요.
26일엔 홍경남 샘도 함께
부산 바닷바람을 쐬면 쇠주를 홀짝거리고 있겠구만요.
보리식구 인천(강화) 방문은 29일로 옮겼다니까
부산 바람 쐬는 마음 한결 가비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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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말아이들>의 작가 김중미 씨의 소설을 한 편 소개할 께요.
민족문제가 두 겹으로 겹친 이 시대의 해법를 찾아 어두운 미로를 힘겹게 더듬는 우리들 자신의 초상화인 데다가, 작가 김중미 씨를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는 가슴이 싸해지는 감동의 드라마에요.
이 작품은 인천작가회의 기관지 <작가들> 5호(2001, 겨울)에 막 발표된 것입니다.
아동문학은 아닙니다. 일반 소설가들이 때로 아동문학으로 넘나들듯, 아동문학하는 이들도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일반 소설을 넘나드는 것은, 같은 문학의 자리에서 볼 때 기뻐할 일입니다. 무슨 허명(虛名)에 갇힌 일이 아니라면 말이죠.
중편 분량의 긴 작품이지만, 암울한 터널의 끝을 찾아 헤짚고 나가듯, 천천히 읽었봤으면 좋겠어요.
1.
내가 정아를 만난 것은 1987년 여름이었다.
그 해 봄. 인천의 빈민지역을 조사하던 일을 하던 나는 우연히 만석동까지 오게 되었다. 난생처음 발을 디딘 만석동은 크고 작은 공장들 사이에 틀어박힌 언덕의 긴등을 따라 생선뼈처럼 뻗어나간 실골목을 사이에 두고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촌이었다. 미로처럼 엉켜있는 골목을 헤매다 겨우 빠져 나와보니 공장과 공장 사이를 오가는 기찻길이 나왔다. 그 기찻길은 기름때와 쓰레기가 뒤범벅된 갯벌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그 철길을 따라 판잣집과 움막들이 북성포구 뒤까지 이어졌다. 잿빛 하늘과 빛 바랜 슬레이트 지붕, 추저분한 시멘트 벽돌과 검은 때가 낀 판잣집들. 80년대 말의 만석동은 70년대의 어느 시점에 멈춰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만석동은 처음 와 본 것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낯설지 않기만 한 게 아니라 만석동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골목들은 어떤 알지 못하는 힘으로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중화장실 앞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화투장을 두드리는 사내들과 골목 여기저기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꾀죄죄한 아이들. 굴 까는 여자들의 억척스러움, 왁자한 사람들의 웃음 밑바닥에 깔린 무기력,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나를 휘감아 들였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나는 그날로 철길 바로 옆에 있는 단칸방을 월세로 얻었다. 공장과 공장사이를 오가는 화물기차가 지날 때마다 벽이 흔들거려 마치 요람에 누워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낡은 판잣집이었다. 단칸방을 혼자서 대충 도배를 하고 누운 첫날밤, 나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낡아빠진 슬레이트가 바람에 들썩이는 소리 때문도, 손가락 만한 바퀴벌레가 석석 소리를 내며 기어다닌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집이 낯설어서도, 앞으로 내가 부닥쳐야 할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레임이나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까닭을 알 수 없는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 집, 그 골목을 찾아 헤맨 끝에 몸을 누인 나그네처럼 가슴이 뜨거웠다.
그러나 막상 만석동에 들어와 보니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막막했다. 선배들은 무턱대고 만석동으로 들어가 둥지를 튼 내 고집을 비난하며 어서 서울로 올라오기를 재촉했다. 서울에서는 날마다 포크레인을 동원한 강제철거로 도시빈민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었고, 명동, 광화문, 시청 앞에선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날마다 있었다. 만석동을 조금만 벗어난 공단지역의 노동자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던 때, 무작정 만석동으로 내려 온 나를 선배들은 낭만적이고 개량적이라고 비판했다. 선배들의 따끔한 충고와 비판이 끊이지 않는데도 만석동을 뜰 수 없었다. 날마다 서너 시간씩 잠을 자며 선배들이 요구하는, 아니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일들을 해내면서도 나는 만석동을 떠나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잡아끌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채 나는 만석동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찾은 일이 신문배달이었다. 동네도 좀 더 샅샅이 알고, 사람들과 안면도 틀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바로 그 무렵, 정아를 만났다.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신문을 돌리느라 몹시 지쳐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철길 앞에서 비를 흠뻑 맞고 선 세 모녀와 맞닥뜨렸다. 맨발로 비를 맞고 서 있는 아이들은 입술까지 파랗게 되어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언뜻 눈이 마주친 여자의 눈두덩이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나는 물텀벙이가 되어 있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여자를 억지로 달래 자취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자는 처음엔 손사래를 쳤지만 아이들 때문인지 못이기는 척하고 따라 들어왔다. 우선 젖은 옷을 갈아입고 몸을 닦아야 되겠기에 두 자매의 옷을 벗기다가 깜짝 놀랐다. 아이들의 몸이 온통 멍투성이였다. 서둘러 옷을 다 벗기고 나니 퍼런 멍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부터 불긋불긋 새로 생긴 것까지 셀 수가 없었다. 큰 아이의 등에는 여기저기에 담뱃불로 덴 상처까지 있었다. 덴 곳을 치료조차 하지 않아 덧났던 상처가 화산 분화구처럼 남아 있었다. 아이들을 보고 넋이 나가있는 나를 보더니 여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말없이 방바닥에 벗어 던진 젖은 옷을 주섬주섬 주워 한 쪽에 놓고 방바닥에 내려놓았던 내 옷을 입혔다. 그리고 잠시 머뭇대다가 자신도 뒤를 돌아 옷을 갈아입었다. 그 여자의 몸에는 칼처럼 날카로운 것에 찔리고 긁힌 상처가 문신마냥 새겨져 있었다. 꽤 깊이 찔렸을 것 같은 상처는 벌어진 채 굳어져, 마치 땅을 파고 나서 덮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방금 생긴 것 같은 멍자국이 뱀이 지나가는 것처럼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태연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무섭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그래서 그 여자에게 말했다. 사진을 찍겠다고. 당신 남편을 고발하겠다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아이들을 위해 남편에게 가지 말라고. 그러나 그 여자는 도리질을 쳤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 여자는 말했다. 아이들을 위해 들어가야 한다고.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만들 수 없다고. 그리고 여자는 그 날밤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허청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아이들 몸의 그 상처들은 내게 잊혀졌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비오는 날 시궁창에 쓰러져 있던 여자와 갈색 머리의 아이. 온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쓰러져 있던 여자의 몸을 뒤덮고 있던 피멍들, 그 위로 내리지르던 백인의 군홧발, 그리고 짧은 비명. 나는 그 날밤, 꿈에서 그 여자와 갈색 머리의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양키의 부릅뜬 눈과 두려움에 떨던 기지촌 여자와 아이의 모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겨우 가위눌림에서 벗어난 뒤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비를 맞으며 돌아가던 세 모녀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교 갈 시간이 되었을 무렵 창문을 열고 아이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아이들은 여덟 시가 넘어서야 가방을 메고 나왔다. 눈이 마주쳤지만 아이들은 무심코 내 앞을 지나쳤다. 다만 아이들의 뒤를 따라 나온 여자가 흘낏 쳐다보면서 조개를 캐러 간다고 말했다. 나는 배낭을 메고 부둣가로 나가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저녁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신문을 돌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집 앞에서 자전거 핸들에 보약 봉투를 매달고 지나가는 그 여자의 남편과 마주쳤다. 그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그 여자와 아이들의 몸에 있던 상처가 아주 오래된 기억이 꿈에 되살아났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이틀 뒤 새벽 여자는 머리까지 잘린 채 아이들을 끌고 내 방으로 뛰어 들었다. 그 뒤로도 여자는 새벽이건, 한 밤중이건 가리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내 자취방으로 뛰어 들었다.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처음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 그리고 다음 날이면 그 여자의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는 보약 봉투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정아와 나는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정아와 닮은 또다른 정아를 만나고, 또다른 정아 엄마를 만나 그들과 이웃이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이들의 상처에 마데카솔을 발라주고 하룻밤 또는 며칠 밤을 재워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 자신에게 화만 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매를 맞으면서도 자랐다. 정아도 키가 크고 가슴에 멍울도 생기고 엉덩이도 커졌다. 점점 여자가 되어갔다. 그리고 정아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도 점점 자랐다. 사춘기를 지나는 정아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정아는 가끔 우울증에 빠지고 가끔은 멋진 남학생들에게 한눈을 팔기도 했다. 그러나 외줄에서 떨어지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정아는 무사히 사춘기를 건너왔다. 고등학교를 마치자 정아는 검단에 있는 포장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출근길에 이따금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정아와 마주치곤 했는데 정아는 종종 먼눈팔기를 하느라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때면 나도 정아를 모른 척하고 슬그머니 뒤로 가 숨었다. 정아의 눈은 늘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도 그렇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의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들은 언제나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정아가 그곳으로 달아나 주길 바랬다. 정아의 눈동자가 향하고 있는 그 곳, 아주 먼 곳으로. 그래서 다시는 이 만석동으로 되돌아오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밤 아홉 시가 넘으면 정아는 어김없이 버스에서 내려 비칠비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정아의 얼굴에 그늘이 조금씩 사라지고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올 여름부터였다. 나는 그냥 막연히 정아가 연애를 시작했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우연히 목욕탕에서 정아와 마주치고 나서야 정아의 변화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두 달 사이 정아의 옷차림이 바뀐 것이 계절 탓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정작 바뀐 것은 정아의 몸매였다.
2.
"어떤 사람이야."
"……."
목욕탕에서 돌아온 나는, 정아를 불러 놓고 다짜고짜로 어떤 사람인지부터 물었다.
"어떤 사람이냐구. 너 나한테도 말 안 할 작정이었니? 병원에는 가 봤어?"
정아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큰 눈에 눈물만 가득 담고는 내 눈만 뚫어져라 봤다. 나는 순간 화가 났다. 정아는 언제나 나를, 세상을 그렇게 지치고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아는 아버지에게 너무 심하게 맞아 학교를 가지 못한 날도 내 방에 숨어 하루종일 그렇게 앉아 있다가 돌아갔었다.
"제발,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말로 해. 정아야."
정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어깨가 들먹이기 시작했다.
"이모, 나 그 사람 사랑해요. 그냥 사고친 거 아니에요."
"사랑한다구? 사고친 게 아니라구? 어떤 사람인지 그것부터 말 해."
정아 앞에서 냉정한 척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나이는?"
"스물 일곱 살이에요."
"무슨 일을 하는데"
"인쇄요."
"집은 어디야?"
"집이요?"
"그래, 어디서 사냐구."
"공장이요."
"공장? 니네 회사에 기숙사 같은 것도 없잖아."
"네, 그냥 공장에서 자요. 공장바닥에서."
"뭐라구? 스물 일곱 살이나 됐다면서 월셋방 하나 없이 공장에서 산단 말야?"
"……."
"원래 집은 어딘데"
"……."
"원래 집은 어디냐구?"
"고향 말하시는 거에요?"
"그래."
"네팔이요."
"뭐라구?"
"네팔이요."
"정아야. 너 지금……."
"네, 네팔이라구 했어요. 그 사람 외국인 노동자에요. 불법체류자구요. 그렇지만 이모, 저 그 사람 정말 사랑해요."
말문이 막혔다. 정아는 지금 정아의 배에서 자라고 있을 아기가 외국인 노동자의 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아가 고 3 되던 해. 선배가 일하는 외국인 노동상담소에 정아를 데리고 갔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정아는 네팔인, 방글라데쉬인, 필리핀 노동자이던 그들과 쉽게 어울렸고 그들의 처지를 금세 이해했다. 그리고 정아는 자기도 내 선배처럼, 그리고 나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 때 나는 그런 정아가 대견했다. .
그런데 정아가 지금 그 외국인노동자와 연애를 하고 아이까지 가졌다고 말하자 나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 혼란스러웠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사는 것은 대견한 일이고 외국인 노동자와 사랑을 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에 화가 났다.
"이모! 이모가 저 고3 때 외국인노동자상담소에서 일하는 수녀님한테 데리고 가셨죠? 그때 거기에 있었던 사람 중에 하나예요. 이모 혹시 기억해요? 머리 짧고 키 작은 사람이요. 이모가 꼭 우리 나라 사람 같다고 했잖아요."
"의정부에 있는 넥타이 공장에 다닌다던 사람?"
"네, 이모.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 그 동안 모았던 돈은 아이엠에프 때 사장한테 빌려줬다가 다 떼이고 우리 공장으로 왔어요. 그리고 우리 회사로 오자마자 오른 쪽 손가락이 두 개나 잘렸어요."
정아는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게 반가웠던지 얼굴이 잠시 밝아졌다. 나는 얼른 할말을 찾지 못했다. 무슨 말로 지금 이 아이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깨닫게 할 수 있을지 머리만 어수선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깬 것은 정아였다.
"저 아기 낳을 거예요"
"뭐? 니가 지금 몇 살인 줄 아니? 너 스물 하나야. 니네 엄마가 니네 아빠와 살림을 차렸던 그 나이야. 너 죽어도 너네 엄마처럼 안 산다고 했으면서 이런 일을 저지르면……."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아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전 엄마랑 달라요."
"뭐가 달라. 니네 엄마가 너를 가지게 된 것도 처음엔 동정 때문이었어."
"동정이라구요?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요. 그 사람 여기 와서 모든 걸 잃은 사람이에요. 이 잘난 나라에 와서 자존심도, 친구들도 잃고, 가족에게조차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요. 처음 그를 봤을 땐 동정을 느꼈어요. 그렇지만 이젠 아니에요."
"뭐가 아니라는 거니."
"동정을 받은 건 오히려 저였어요. 그 사람은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가르쳐 준 첫 번째 사람이에요……. 학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이 그랬어요.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알 수 있다구요. 그런데 내 어릴 적 첫 기억이 뭔지 아세요? 엄마랑 제가 방에 갇혀 아빠에게 허리띠로 맞는 거예요……. 아버지에게 맞을 때마다, 아버지의 폭력에 쓰러지는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늘 내 자신을 경멸하고 증오했어요. 난 그냥 그렇게 맞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았어요……. 그 사람들은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짐승처럼 부부관계를 했어요. 나는 엄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나와 내 동생을 낳을 수밖에 없었는지 묻고 싶었어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내 자신에게 어떤 가치도 부여할 수 없었어요……. 나는 태어나는 순간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아빠와 함께 잠자리를 하고 나오면 잠든 나와 내 동생을 깨워 부엌바닥에서 몸을 씻겼어요. 엄마는 내 사타구니를 비누거품을 잔뜩 묻힌 이태리 타올로 빡빡 닦았죠. 그때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사춘기가 되면서 젖망울이 생기고 생리를 하게 되면서 내가 더 싫었어요. 내가 엄마와 똑같은 여자가 되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모가 첫 생리 축하한다고 제게 속옷을 선물했을 때, 이모가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난 이 세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 앞에서 그 맹세가 무너졌어요.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흉터투성이인 이 몸뚱이까지두요. 그 사람이 내 흉터를 처음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울면서 내 흉터 위에다 입맞춤을 해줬어요. 내 흉터 위로 그의 숨결이 지나갈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 사람은, 진심으로.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으로 제 상처를 어루만져줬어요. 난 느낄 수 있어요. 정말 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요. 엄마도 내 상처 위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고 바셀린 거즈를 사다가 붙여주기도 했어요. 그러나 엄마는 다시 내 등에 상처가 생기는 걸 막아주지는 못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절 지켜줄 거예요. 난 그걸 믿어요……. 이모, 난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게 됐어요."
정아의 입에서 사랑이란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정아는 정말로 사랑에 빠져있었다. 정아를 만난 뒤 처음으로 살아있는 정아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정아의 사랑을 인정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들이 사랑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두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모는 일이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 사랑을 인정한다는 건 무책임한 짓인 것만 같았다.
"그래. 그래. 이해할 수 있어. 그것이 사랑이라고 지금은 생각할 수 있어. 아니 사랑일거야. 그렇지만 정아야. 넌 앞으로 더 많은 걸 경험하고 깊은 사랑을 체험할 수도 있어. 사랑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이 다음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어. 정아야. 넌 지금 미래를 포기하려고 하는 거야. 이 땅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같이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넌 그 아이를 낳는 순간 이 땅에서 그들과 똑같이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거야. 당장 네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사생아야. 학교도 보낼 수 없어."
"알아요. 그래도 전 아이를 낳을 거예요. 난 지금 외국인 노동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 아픔과 과거를 모두 감싸 줄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뿐이에요. 그 사람이 날 사랑하는 것도 나 못지 않게 힘든 선택이에요. 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사람은 네팔에 있는 부모와 친척들을 배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은 그들의 희망이었어요. 애 아빠가 되면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해요. 나만 힘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도 포기해야 할 게 많아요. 그 사람이 언젠가 말했어요. 내가 자기의 자존심을 찾아줬다구요. 난 그 사람과 우리 두 사람의 자존심을 찾고 말 거에요."
"정아야, 무엇보다 너희들마저 너무 힘들어 서로를 포기하게 될지도 몰라."
"……."
정아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더 이상 어떤 이야기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아기까지 가진 정아의 사랑이 그저 불장난이라고, 왜 하필 외국인 노동자하고 연애를 시작했냐고,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3.
정아와 마주 앉아 밤을 샜다. 정아도 나도 잠깐씩 깜박 잠을 잤을 뿐이다. 나는 그 깜박 잠을 사는 사이 또 꿈을 꾸었다. 보산리 기지촌 골목을 헤매는 꿈을. 미로에 갇히는 꿈을.
날이 밝자 정아는 출근을 해야한다고 집을 나갔다. 정아가 나간 뒤 우두커니 방구석에 앉아 눈물만 흘리다가 차 열쇠를 꺼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무심코 행주대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동두천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빠져 나오지 못하는 미로를 헤매고 싶지 않았다. 나쁜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그 골목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다.
24년 만이다. 강산이 두 번 변했다. 송추 유원지를 지나 의정부시에 들어서자 미군부대와 낯익은 산들이 보였다. 많이 변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릴 적 경원선 열차를 타고 지나던 풍경과 거의 변한 게 없었다. 간혹 산허리까지 지어진 아파트들이 눈에 띄는 것을 제외하곤 같은 산, 같은 들이 이어졌다. 가슴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의정부와 동두천의 경계에 아직도 해태상이 서 있었다. 24년 전 용달차를 타고 이 길을 나오며 나는 다시는 동두천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춘기를 지나고 어느 때부턴가 꿈만 꾸면 무시로 보산리에 가 있었다. 꿈 속의 골목에는 미군들과 양색시들이 어울려 휘청거리고, 개기름이 번질번질 흐르는 살찐 펨푸들이 얼굴이 누렇게 뜬 양색시들의 머리채를 뒤흔들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해자가 양키에게 쫓기고 있거나 침대에 누운 윤희 언니의 자궁에서는 계속 흑인아기가 나왔다. 악몽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왜 자꾸 꿈을 꾸는지, 꿈에서 기지촌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동두천을 떠난 뒤 고향을 떠올리며 그리워했던 고향의 모습은 기지촌 골목이 아니었다. 동두천은 소담스러운 소읍의 풍경들과 농촌 풍경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겨울에 스케이트를 타고 여름이면 송사리를 잡으며 빨래를 하던 큰 개울 신천. 까마중을 따먹던 논. 개나리 담장과 뒷산의 진달래가 어지럽던 밤골. 아까시 내음에 취해 자전거 페달을 밟아 가던 소요산 계곡과 사기, 상패리의 돌배밭과 코스모스가 춤을 추던 평화로. 멱 감으러 한 시간씩 걸어갔던 모래내 개울과 봄나물을 캐러 다니던 방죽골의 산수유나무. 해질녘 학교 뒷산에 앉으면 남산모루로 넘어가던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던 신천. 짝궁 영미가 돌배를 따 가지고 오리 길을 걸어 돌아오던 상패리의 황금벌판. 잊지 앉으려고 눈에 담아두었던 산과 들과 개울. 내가 현실에서 그리워하는 동두천의 모습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꿈만 꾸면 현실에서는 꿈결처럼 그리운 그 풍경들은 다 사라져 버렸다. 기지촌의 삭막한 풍경은 낮에는 내 의식 아래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가 밤만 되면 나를 끌어내렸다.
프라이드가 기차역을 지났다.
어수동이라고 하던 작은 간이역은 이제 동두천역이 되었다. 어딘가에 있을 어수동 우물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프라이드는 동두천에서 가장 큰 번화가인 중앙로를 지나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난 뒤라 좁은 1차선 도로는 빛이 바래기도 전에 떨어져 내린 은행잎들과 여기저기 주차해 놓은 차로 어수선했다. 한적한 소읍의 풍경은 하나도 남지 않았지만 중앙시장도, 버스터미널도 모두 그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중앙로 주변의 건물들의 높이가 높아졌다는 것 말고는 서울병원도, 성모병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서울병원 뒤로 나 있던 주택지가 헐리고 중앙로와 이어지는 큰길이 뚫려 우리 집이 없어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윤철이네 집이 헐리고 없었다. 꼭 옛집을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막상 집이 헐리고 없어진 걸 알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꼭 누구를 보고 싶었던 것도, 꼭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수첩을 꺼내 윤희언니의 전화번화를 확인해보고는 다시 가방에 넣어버렸다. 잠시 갈팡질팡하다가 서울 병원 뒤에다 차를 세우고 어릴 때 학교에 다니던 길을 되짚어갔다. 어느 날인가 메리포핀스를 조조할인부터 마지막회까지 다섯 편이나 보았던 문화극장을 지나고, 싱아를 씹으며 걷던 좁은 골목을 지나고, 철길을 건넜다. 뽑기 장수가 있던 갈림목을 지나고 나서 학교 앞 2차선 국도 앞에 섰다. 초등학교 처음 입학하고 선생님을 따라 학교 앞 건널목을 건널 때는 그렇게 넓어 보였던 학교 앞 평화로가 겨우 2차선 국도였다니.
몇 학년 때쯤일까? 박정희 대통령이 미2사단을 사찰한다며 지나가던 날, 우리는 오전 수업도 제치고 이 길에 나와 서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었다.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대통령 행렬을 기다리느라 지친 아이들은 선생님 눈을 피해 학교 앞 문방구로, 아이스케키 집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학교 앞 문방구 한 구석엔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걸레빵이 있었다. 10원이면 라면 봉투에 가득 담아주던 걸레빵은 미군부대 식당에서 빼돌린 찌끄러기 빵이었다. 운 좋으면 부드러운 케잌 부스러기도 걸려들고 짭짜름한 모닝빵도 통째로 걸렸다. 그렇지만 난 그 걸레빵을 사먹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양키들 먹던 쓰레기를 돈주고 사먹으면 그 날로 넌 내 딸이 아니라고 으름장을 놨기 때문이다. 자식들한테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 법이 없던 아버지가 절대 허락하지 않은 것은 걸레빵이었다. 그런 만큼 나는 더 게걸스럽게 그 걸레빵이 먹고 싶었다. 아버지 말대로 그 빵이 쓰레기통에서 골라낸 것이라 할지라도 꼭 한번만 먹고 싶었다. 호주머니에서 십 원 짜리가 짤랑거리는 날엔 더욱 더 안달이 났다.
마침 그 날. 내 주머니에 동전이 있었고 태극기를 들고 대통령을 기다리는 건 너무 지루하고 짜증났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 틈에 끼어 그 가게에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종아리를 맞았다. 주인집 셋째 딸인 동갑내기 윤미가 엄마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말했었다. 미군들 밑에서 종노릇을 하는 것은 애비 하나로 족하다고, 너희들까지 거지 노릇을 해야겠냐고. 나는 아버지가 왜 그토록 화를 내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다시는 걸레빵을 사먹지 않았다.
4.
24년만에 지나가는 미 2사단 앞 길. 여전히 퀸스타, 챰피온 숍, 굳 숍, 영스타 따위의 영어간판을 달고 화려한 빛깔의 티셔츠나 트레이닝복들을 파는 옷가게, 크리스탈이나 돌, 나무 따위로 만든 조잡한 기념품들을 진열해 놓은 상점들이 문을 열고 있었다. 물론 United States Army. Camp CASEY 정문 역시 24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했다. 그 때보다 주둔병력이 훨씬 줄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400만평이나 되는 그 넓은 땅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뉴욕의 무역센터 테러 사건 때문에 검문검색이 강화된 탓인지 미군부대 앞은 정문으로 들어가려는 차들로 밀려있을 뿐 아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미 2사단 정문은 1년에 한번 미군들의 카니발이 열리는 날 주민들에게 개방이 되었다. 카니발이 열리는 미 2사단 영내는 별천지였다. 지금도 놀이공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놀잇감들이 들어서고 우리가 접해보지 않은 여러 가지 볼거리들이 풍성했다. 그래서 동두천 사람들은 카니발에 들어갈 수 있는 쿠폰을 구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동전 하나로 음악을 듣는 주크박스와 재즈나 록음악을 연주하는 무대, 초콜릿이 듬뿍 든 아이스크림과 긴 빵에 커다란 소세지가 들어있던 미국식 핫도그, 피자, 바비큐, 어디서나 키스를 해대는 여자들과 미군들의 모습까지 카니발이 열리는 미 2사단은 1970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맛보곤 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한 달 내내 아버지를 조른 끝에 나도 카니발에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미 2사단 어귀에서 미니기차를 타고 들어 간 축제장은 딴 세상이었다. 분명히 한국 땅, 동두천의 한 귀퉁이였건만 그곳에선 야릇한 냄새가 났다. 양키들이나 흑인들에게서 나는 누린내와 향수 냄새가 뒤섞인 냄새에 어지러워진데다가 낯선 축제의 분위기에 질려 그 곳에 오래 있지 못했다. 나는 그저 초콜릿이 듬뿍 든 아이스크림을 한 컵 먹어 본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다시 미니기차를 타고 나오다가 정문 가까이 있던 작은 야외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국 여자아이를 봤다. 그 아이는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를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혼잣말로,
"조그만 게 되바라지긴."
하고 혀를 찼지만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검고 숱 많은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던, 그 아이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 아이가 6학년 때 우리 반이 되자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새 학기 첫 오락시간에 그 아이는 가장 먼저 노래를 불렀다.
'모래성이 차례로 허물어지면 아이들도 하나 둘 집으로 가고......"
그 아이의 목소리는 금세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흐린 날의 구름빛깔이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축축했다. 나는 단박에 그 아이한테 반해버렸다. 며칠 뒤 짝짓기를 할 때 그 아이는 내 짝이 되었다. 그 아이와 짝이 되기 위해 까치발까지 해야 했지만, 사실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와 짝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아이를 공주병에 걸린 '또라이'라고 수근수근 댔다.
'임경숙'
누가 뭐라 하든 난 그 아이와 꼭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 아이와 친구가 되어 날마다 그 아이가 부르는 그 노래를 듣고 싶었다.
"우리집에 갈래?"
경숙이는 봄이 다 지날 무렵에야 그렇게 말했다. 집에 가자고 하는 말은 그제야 날 친구로 인정해 준다는 뜻이었다. 나는 경숙이 손을 잡고 학교 앞 큰길에서 미군부대 앞까지 철길을 따라 걸었다. 경숙이 노래를 들으며 걷던 그 철길가에는 시멘트 블럭과 판자로 지은 집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철둑 위에서 건너다 보이는 판잣집 지붕에는 비 새는 것을 막느라 덧씌워놓은 천막쪼가리나 루핑 따위가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연탄재나, 함지박, 깨진 시멘트 블록들이 얹혀 있었다. 경숙이는 양팔을 벌리고 철로 위를 걷다가 말했다.
"난 이 길이 지겨워. 구질구질해."
경숙이네 집은 주한미군 2사단 군인교회 뒤쪽의 산동네였다. 경숙이가 구질구질하다고 말하던 철길옆 판잣집들보다 더 귀꿈스러웠다. 낮은 시멘트 블록에다가 슬레이트만 대강 얹은 경숙이네 집은 방으로 통하는 부엌으로 들어갈 때도 허리를 굽혀야만 했다. 부엌을 통해 들어간 안방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마저 살림살이로 가려져 어두컴컴했다.
"들어와."
경숙이가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자 어둠에 깔렸던 방이 갑자기 환히 드러났다. 벽에 걸린 시커먼 작업복들. 겉가죽이 찢어져 굳이 자크를 열고 닫을 필요도 없어 보이는 비키니 옷장. 그리고 모서리가 닳고닳아 뭉툭해진 서랍장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이불. 아랫목에 깔려 있는 땟국 절은 나일론 이불까지. 경숙이네 살림살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경숙이는 두리번거리고 있는 내 팔짱을 끼더니 안방과 이어진 다른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기 이 방에서 잠깐만 기다려. 내가 코코아 타다 줄게."
경숙이가 바깥으로 나간 동안 방안을 휘 둘러 보았다. 낡은 앉은뱅이 책상에는 초·중·고의 교과서들이 쌓여 있고 찢어진 데 없이 온전한 비키니장도 하나 있었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화장대도 있고, 그 화장대에는 온갖 외제 화장품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한쪽에는 앙증맞은 향수병들이 줄맞춰 서 있었다.
"저 향수병들 참 예쁘지? 우리 대디가 울 엄마한테 선물한 거야. 울 엄마가 향수 뿌릴 일도 없는데. 우리 언니들만 좋은 거지 뭐."
"대디?"
"응. 미국 사람들은 아빠를 그렇게 불러. 내 동생 입양해갈 미군 소대장 아저씬데 나도 그렇게 불러."
"왜?"
"어쩌면 나도 입양될 지 모르거든. 사실은 우리 대디는 내 동생보다 나를 더 입양하고 싶어해."
입양. 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동두천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입양이라는 말은 아주 은밀하고 슬픈 낱말이었다. 그런데 경숙이는 그 입양이란 말에 힘을 주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 입양 가고 싶어?"
"그럼."
"미국 가면 너네 엄마랑 헤어지는 거잖아."
"그 대신 새 엄마가 생기잖아. 우리 대디나 맘 얼마나 멋있는데"
"우리 대디? 맘?"
이미 경숙이에게 미군 소대장이 아빠, 엄마가 된 것처럼 보였다.
"야, 구질구질한 우리 엄마보다 새엄마가 훨씬 낫지."
뭐가 낫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경숙이 말에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갑자기 어색해져 멀뚱멀뚱 앉아 있는 내게 경숙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정원이 너, 비밀 잘 지키냐?"
"비밀?"
"응, 내가 말하는 거 죽을 때까지 다른 애들한테 말하지 않을 거라구 맹세할 수 있어?"
"그럼."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경숙이의 비밀을 들었지만 경숙이의 비밀을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경숙이네집 이야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만큼 복잡하고 어려웠다. 가슴 한쪽이 무겁고 짠해 오던 그 이야기들을 엄마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던 나는 경숙이와 친구가 된 뒤 내내 우울했다.
경숙이는 일곱 자매 가운데 여섯 번째 딸이었다. 경숙이네는 상이용사인 아버지가 시장에서 고무줄장수를 해서 버는 돈과 어머니가 보산리 양색시들의 빨래를 해주며 버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막내를 입양해 갈 '대디'는 보산리에서 백인과 함께 살고 있는 큰언니가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경숙이네 둘째 언니는 막내를 입양 보내려는 부모와 싸우고 집을 나갔고, 셋째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양복점에서 일하다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언니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흑인일지 백인일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경숙이는 꼭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미 2사단 소대장인 동생의 양아버지는 경숙이를 더 좋아한다고. 자기가 생각하기엔 그 소대장은 경숙이의 동생보다는 자신을 입양하는 편이 훨씬 좋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소대장은 미국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현명한 판단을 할 것이므로 자기가 동생 대신 미국에 가게 될 거라고. 경숙이와 더 친해질수록 다른 친구들이 경숙이를 멀리하던 까닭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경숙이를 따돌릴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백인의 양녀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경숙이와, 경숙이를 그렇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그 가족들이 불쌍했다. 경숙이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아니면, 그 아이의 노래에 반했기 때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6학년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경숙이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서 나 역시 경숙이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경숙이는 입양을 가기 위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경숙이가 집으로 찾아왔다.
"정원아, 나 내일 미국 간다."
경숙이는 선물이라며 노란색 미제 연필 한 다스를 주었다. 원하던 대로 입양을 가게 된 경숙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나 슬픔 따위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하룻밤만 자면 비행기를 탄다고 들떠서 자랑하는 경숙이에게 어떤 식으로 작별인사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리는 서로 어색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경숙이를 보내고 집으로 들어와서야 경숙이랑 그냥 그렇게 헤어지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일 다시 만날 친구들처럼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6학년 가을 경숙이와 학교 뒤 통일동산에서 따 말려 놓았던 코스모스와 쑥부쟁이 꽃으로 꾸민 편지를 가지고 경숙이네 집에 갔을 때, 경숙이는 이미 큰언니와 함께 김포공항으로 간 뒤였다. 아직 정오가 되지도 않은 시간이었건만 팔이 하나 없던 경숙이 아버지는 술에 취해 판잣집 앞 평상 위에 널부러져 있었고, 경숙이 엄마는 그 날도 산더미 같은 양색시들의 빨래를 하고 있었다. 경숙이 엄마는 빨래를 하다가 퉁퉁 부은 얼굴을 들고 내게 말했다.
"고것이 너한테도 안 알리고 갔냐? 독한 것."
경숙이 엄마 앞에 쌓인 빨래는 하루종일 해도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경숙이네 집에서 돌아오면서 더 이상 경숙이네 부모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미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경숙이를 비난하지도 못했다. 나는 어쩌면 그때 이미 애어른이 다 되어있었는지 모른다. 동두천은 어린아이들을 그저 어린아이들로 남게 하지 못할 무엇이 있었다.
5.
미군부대 앞에서 길을 건넜다. 보산리로 들어가는 샛길을 찾아 들어갔다. 큰길에서 보산리 기지촌으로 들어가는 길은 약간 경사진 언덕길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언덕만 넘으면 보산리 기지촌이 그대로 보일 것이다. 철길이 있는 언덕빼기에 올라섰다. 녹슨 차단기도, 노랗고 까만 멈춤 표시도 그대로 있었다. 철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기지촌도 여전히 그 곳에 있었다. 경원선 철길과 신천 둑 사이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판잣집들이 헐려나가고 3-4층짜리 건물들이 새로 들어섰지만 건물 사이의 어두컴컴한 골목들과 그 골목에 난 작은 철문들은 옛 기지촌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는 기지촌이 아주 넓었다. 아니 동두천의 전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꿈속에서 아무리 헤매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골목으로 얽히고 얽힌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기지촌은 미군클럽과 상점이 몰려 있는 작은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신천과 경원선 철길 사이에 끼어 있는 보산리 기지촌은 마치 영화 세트장 같았다.
아직 때가 이른 탓인지 클럽이나 바를 비롯한 대부분의 가게의 셔터가 내려있고 문을 연 가게들은 평상복을 파는 옷가게와 구둣가게, 세탁소와 환전소들뿐이었다. 기지촌의 풍경은 참 소박했다. 소박하다 못해 쇠잔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 막 문을 연 가게에선 상품을 정리하느라 바쁠 뿐 가게 앞에 나와 앉은 어른들도, 아이들도 그저 평범하게 보였다. 하지만 곧 낯선 풍경과 맞닥뜨렸다. 바로 거리를 오가는 기지촌 여성들이었다. 24년 전 이 골목에서 쇳소리 섞인 비음으로 미군들을 부르던 기지촌 여자들은 거의 다 비슷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분통을 통째로 뒤집어 쓴 듯한 하얀 얼굴에, 새빨간 입술, 마스카라가 뭉치도록 쓸어 올린 가짜 눈썹과 귓불이 늘어지도록 매달린 화려한 귀걸이. 그리고 서커스단의 어릿광대들이나 신을 법한 높은 통굽 구두를 신고, 전기에 감전 된 듯이 한 올 한 올 부풀어 오른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기지촌 골목을 오가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검은머리를 억지로 붉고, 노랗게 물들인 한국여자가 아니라, 진짜 빨간 머리카락이나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양키보다 더 하얀 피부의 러시아 여자들이었다. 가끔 한국여자들보다 더 작고, 더 마르고, 더 슬픈 눈을 가진 동남아시아 여자들도 보였지만 기지촌 거리를 활보하는 러시아 여자들은 어릴 때 이 골목에서 만났던 여자들과 달랐다. 그들의 얼굴엔 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거칫하게 누렇게 뜬 얼굴을 감추려고 짙은 화장을 하던 여자들과 달리 그들은 맨 얼굴로 당당하게 거리를 걸었다.
그제야 환전소 앞에 써 붙인 글자가 눈에 들어 왔다.
"러시아, 네팔, 파키스탄, 필리핀 돈 달러나 한화로 환전해 줌."
낯선 여자들 틈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부라보홀을 떠올렸다. 부라보홀 앞에 있던 해자네 집이 아직 있는지 보고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 부라보홀로 갈라지는 샛길을 찾아 골목 어귀에 섰다. 혹시라도 그 곳에 나를 알아보는 친구들이, 혹은 이웃이 살고 있지는 않을까, 혹시 저 골목에서 해자가, 윤희 언니가 걸어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골목으로 들어갔다. 부라보홀은 여관이 되어 있었다. 부라보홀 앞에서 실골목으로 이어지던 둑방 동네가 없어져 부라보홀 맞은 편은 낮은 지붕을 한 상가들이 죽 이어져 있다. 예전보다 깔끔한 모습으로 단장을 한 상가였지만 내 기억 속의 기찻집처럼 쓸쓸하고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해자네 집 앞에는 언제나 해자네 아버지가 목발을 나무의자에 기대어 놓고 앉아 담배를 팔고 있었다. 해자네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가 날아갔다고 했다. 노동력을 잃은 해자 아버지는 집 한 구석에 1평 남짓한 가게를 내고 담배를 팔았다. 그러나 그 골목은 국산담배보다는 양담배가 암암리에 판치는 곳이라 담배장사가 될 턱이 없었다. 오히려 펨푸 노릇을 하며 양색시들이 미군들을 꼬드겨 얻어낸 양담배를 갈취해 파는 해자 엄마의 벌이가 더 쏠쏠했다. 그래서 해자 아버지는 언제나 해자네 집을 드나드는 여자들의 미니스커트 아래를 곁눈질하거나 막걸리를 마시는 것으로 소일을 하곤 했다. 해자네 집은 보산리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으로 축대를 끼고 있는 판잣집들 가운데 하나였다. 보산리는 지대가 낮아 여름이 되면 물난리가 나기 일쑤였다. 비가 많이 오고 난 뒤 해자네 집 뒤 둑방에 올라서면 발 바로 아래로 붉덩물이 넘실대는 것이 보였다. 개울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퀴퀴한 냄새와 모기가 득시글대고, 겨울에는 황소바람이 좁은 마당 한가운데 움크리고 있다가 방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면 한꺼번에 몰려들어오는 한뎃집이었다. 그래도 나는 해자네 집에 자주 갔다. 단칸방인 우리 집에 비해 해자네는 언니들이 외박을 나간 날이면 비는 방이 종종 생겼기 때문이다. 해자랑 나는 양키와 양색시들이 뒹굴었을 침대에 앉아 수학문제를 풀고, 국사 공부를 했다. 공부하다가 출출하면 방 한가운데 있던 연탄난로에다 라면도 끓여 먹고, 가끔은 화장대에서 언니들의 속옷이나 콘돔 따위를 꺼내 가지고 놀았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보던 그 날도 해자네 집 문간방에서 교과서를 펴놓은 채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양키가 얼굴을 삐죽이 내밀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 앉았다. 그러나 해자는 태연하게 냄비에 라면 스프를 털어 넣더니 손짓을 해가며 말했다.
"미자. 노. 미자 노. 미자 고우 클럽."
양키는 해자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신발을 벗더니 마루로 올라왔다. 찬바람과 함께 술냄새가 확 끼쳤다. 나는 너무 무서워 아예 침대 위에서 일어나 버렸고, 해자도 조금 겁이 났는지 난로 뒤로 뒷걸음질을 치며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미자 없어. 노. 노."
그래도 양키는 비척거리며 계속 방으로 들어왔다.
"베이비, 캄 온. 캄 온."
그러면서 그는 가죽점퍼 안에서 초콜릿을 커냈다. 은박지로 싼 납작하고 동그란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양키는 초콜릿을 해자 앞으로 내밀며 손가락을 앞뒤로 까딱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해자가 침대 바로 앞까지 왔을 때 양키의 우악스러운 손이 해자의 허리를 잡았다. 양키가 해자를 들어 올려 침대에 앉혔을 때 방주인인 여자가 마루로 뛰어 올라왔다.
"야, 너희들 거기 서. 뭐해!"
여자는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을 집어던지고 양키 곁으로 가서 말했다.
"허니! 스탑. 스탑."
양키가 해자에게서 손을 떼고 돌아보자 여자는 얼른 양키에게 다가가 목을 감싸쥐고 입을 맞추더니 양키 귀에다가 무슨 말인가를 쏘삭였다. 그리고 양키에게서 초콜릿을 받아 해자 손에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년아, 빨리 나가. 죽으려고 환장했니? 다시 여기 들어오면 너 죽고 나 죽어."
나는 부리나케 교과서를 대충 챙겨 마당으로 뛰어내려왔지만 해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고 쉐타 소매를 늘어뜨려 라면냄비까지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갓 땜."
나는 다시 양키가 튀어나올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닫힌 방문에서 들린 것은 여자 목소리 뿐이었다.
"이 쌍년아, 빨리 가. 겁도 없이."
해자가 라면냄비를 건넌방 마루에 놓더니 갑자기 방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더니 방안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캄캄한 방에서 해자 엄마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년이 안 자고 왜 지랄이여."
"그래, 자라 자. 딸이 죽건 말건. 자라. 자다가 죽어 버려라. 나두 개울에 콱 빠져 죽어 버릴거니까."
"저 년이 뒤질라고 환장을 혔나. 왜 그래 문 닫어!"
해자는 방문을 쾅 닫고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해자를 따라 둑방으로 나가 섰다.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넓은 개울을 타고 불어와 금세 뺨이 얼얼해졌다. 바람은 우리를 지나 둑방집들의 판자와 슬레이트 지붕을 흔들어 댔다. 해자는 판자 벽에 기대 허공을 바라보았다. 개울 건너 축대를 따라 미군부대 가로등이 반짝거리고 그 뒤로 남산모루의 산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해자야, 너 괜찮아?"
"뭐가?"
"아까, 나 너무 무서웠어."
"뭐가 무섭냐. 하루 이틀 당하는 것도 아닌데 뭐. 자 이거나 먹자."
해자는 주머니에서 아까 미군한테 받은 초콜릿을 내밀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양키의 능글능글한 눈빛이 생각나 그 초콜릿을 먹으면 다 토해 버릴 것 같았다. 가슴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보니 둑방에 나와 앉은 사람들은 우리들뿐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이 있었다. 둑을 따라 빨간 담뱃불이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날, 깜박거리는 담뱃불도 그렇게 슬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여자들의 삶도 손끝의 담뱃불처럼 곧 꺼지고 버려져 짓밟힐 것처럼 느껴졌다. 해자가 말했다.
"정원아, 너 담배 피워 봤니?"
"아니."
"난 말야. 담배 같은 거 안 피울 거야. 난 언니들이 담배를 피우는 걸 보면 괜히 궁상맞아보여서 싫어."
나는 해자가 걱정스러웠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초콜릿을 구겨 넣는 해자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통행금지 되기 전에 니네 집에 가. 미안해."
해자는 무서워서 집에 가지 못하겠다는 나를 데리고 부라보홀을 지나 남산목욕탕 앞까지 나와 주었다. 그리고 해자는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갔다. 클럽의 불빛이 화려하게 빛나고 술취한 양키들과 양색시들이 휘청거리는 그 곳으로.
그 날 이후로 밤마다 가위에 눌리는 바람에 나는 한약까지 먹어야 했지만 그 가위눌림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스무 살 때, 우연히 청량리역 앞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해자 소식을 물었다. 그 친구가 말했다.
"해자. 걔 고등학교 때 학교 그만 뒀어. 너 동두천 소식 하나도 모르는구나. 걔 미군한테 당하고 나서 정신이 이상해져서 전곡에 있는 무슨 기도원인가 갔다고 들었거든. 그 뒤로 나도 소식 몰라."
6.
조금씩 철이 들고, 세상에 대해 눈을 뜰 때마다 동두천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 넓어져 갔다. 이미 기억 속에서만 남은 사람들이지만 기지촌 여자들에게도, 미군부대 식당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양키물건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어른들에게도 경멸보다는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힘없이 무너져 가는 사람들에게 대해 무관심했던, 눈에 훤히 보이는 불의에도 저항하지 않던 어른들에 대한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스무 살 시절 이 사회의 또 다른 불의와 맞닥뜨리자마자 거리로 뛰쳐나갔던 것은 기지촌에서 만났던 어른들의 비겁함에 대한 반동이었다. 나는 어른들처럼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세상에 항복하지 않겠다는.
문득 정아가, 그리고 정아가 사랑한다는 그 네팔 청년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혹시 그 시대의 어른들과 똑같은 비겁함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두천을 그냥 그 시대의 그림자로 묻어두고 잊고 싶어했던 사람들처럼, 그들의 현실 또한 그림자로 묻어두고 싶어하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불현듯 어서 정아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서울병원 뒤로 가서 차에 올라탔다.
곧바로 평화로로 빠지려다가 다시 한번 미군부대 앞으로 갔다. 아까보다 문을 연 가게들이 많았다. 천천히 차를 몰면서 오른쪽 상점들의 간판을 하나하나 읽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낯익은 간판을 찾아냈다. 프린스테일러. 윤희 언니가 다니던 양복점이었다. 흑인들을 상대로 트레이닝복이나 양복을 만들어 팔던 양복점이 아직도 그 곳에 있었다. 차를 세워 두고 보도로 올라가 양복점 앞에 섰다. 방금 문을 연 듯 주인의 손놀림이 부산하다. 벽에 걸린 옷가지들이 예전만큼 화려하지도 가짓수가 많지도 않았다. 쇼윈도우에 이마를 바싹대고 주인을 살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었다. 다시 차에 돌아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윤희 언니 이름을 찾았다. 한참동안 시동도 걸지 않고 망설였다. 지금 당장 전화를 걸면 어쩌면 윤희 언니가 전화를 받을지 몰랐다. 그리고 금세 언니와 마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휴대폰을 접었다.
주인집 큰딸이었던 윤희 언니는 참 예쁘고 조신한 처녀였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교지 편집 일을 하던 언니와 나는 마음이 잘 맞아 친자매처럼 지냈다.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느라 대학을 포기한 언니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했다.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졸라 미군부대 사무보조로 취직을 했다. 언니는 딱 2년만 돈을 벌어 대학에 가겠다고 했다. 내게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예쁘고 야무졌던 윤희 언니는 금세 사무실의 꽃이 되었다. 언니는 날마다 미군들이 가져다주는 향수며 초콜릿을 싸들고 와서 우리들에게 나눠주었다. 윤희 언니가 친부모 이상으로 따르던 아버지와 엄마는 그런 윤희 언니를 불안하게 지켜봤지만 나는 언니가 사들이는 문학전집이며 시집들을 빌려다 보는 재미에 빠져 언니가 오랫동안 미군부대를 다녀주길 바랬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 불안한 느낌은 언젠가 크림빵을 준다기에 따라갔던 학교 뒤 교회의 목사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목사는 여자들의 입술이 피로 물들고 머리가 사자머리가 될 때가 말세라고 침을 튀기면서 설교를 했었는데 바로 윤희 언니의 립스틱이 짙어지고 흑단같이 까맸던 머리가 갈색에서 노란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목사는 동두천이 바로 저주를 받은 땅이라며 바로 여기에 교회를 개척해서 신도들을 천국으로 들게 하겠다고 설교했다. 목사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교회에 모인 신도들은 그 목사를 따라 울며불며 주를 찾기 시작했고 나는 그 통성기도에 질려 크림빵마저 포기하고 도망쳐 나왔다. 그 뒤 나는 다시 교회 앞에도 얼씬하지 않았지만 윤희 언니를 볼 때마다 목사의 그 저주 섞인 말이 생각나 섬뜩해지곤 했다.
아버지는 몇 달 뒤 윤희 언니를 미군부대에서 그만 두게 했다. 아버지는 언니에게 말했다.
"네 자신은 네가 지켜야 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언니를 의정부에 있는 작은 회사에 취직을 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 윤희 언니는 그 회사를 나와 미군부대 앞에 있는 양복점에 취직을 했다. 양복점에 나가면서 언니는 더 빨리 변했다. 화장이 더 진해지고 치마 길이도 더 짧아졌다. 점점 주인집 마당에서 언니를 볼 수 있는 날이 드물어졌다. 언니는 더 이상 소설책도, 시집도 사들이지 않았다. 윤희 언니와 함께 엎드려 수다를 떨던 주인집 부엌 위의 다락방 창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며칠씩 언니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땐 해자를 핑계로 보산리에 갔다. 그리고 언니가 일하는 양복점에 들려 카운터에 앉아 있거나 흑인들의 몸을 재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훔쳐봤다. 친자매나 다름없이 한 집에서 함께 자란 언니가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의 사춘기는 더 우울해지고 세상에 대한 의문만 더 깊어졌다.
어느 날 아버지는 무작정 동두천을 떠야겠다고 하셨다. 전학을 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나와 내 동생들을 두고 엄마가 말했다.
"아버지는 너네들마저 윤희 언니처럼 될까봐 두려우신 거야."
전학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날. 해자를 만나러 자전거를 타고 보산리 골목을 지나다가 우연히 흑인병사와 팔짱을 끼고 있는 만삭의 윤희 언니를 만났다. 나는 언니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자전거 핸들을 꺾다가 시궁창으로 틀어박혔고 그 모습을 본 언니와 그 흑인병사가 달려와 나를 꺼내 주었다. 윤희 언니의 시선을 애써 피한 나는 자전거를 집어타고 서둘러 보산리를 빠져 나왔다. 뺨 위로 영문도 알 수 없는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이사 오기 전날. 엄마는 주인집 몰래 부엌에서 미역 봉투를 들고 나왔다. 엄마가 간 곳은 동광극장 옆 골목에 있는 한옥집이었다. 그 곳이 산파집이라는 것은 방에 누운 윤희 언니를 보고서야 알았다. 윤희 언니는 아랫목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니의 새하얀 얼굴과 하나도 닮지 않은 까만 살갗의 아기가 누워 있었다.
"아줌마!"
언니는 엄마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고생했지?"
언니의 하얀 얼굴은 아예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눈은 퉁퉁 부어 쌍꺼풀마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땀으로 젖은 언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언니도 엄마도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둘 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닦고 엄마는 언니 옆에 누워있던 아기를 포대기로 감싸 안아 올렸다. 나도 얼른 엄마 옆으로 가서 아기를 들여다 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까만 얼굴을 한 아기가 분홍색 입술을 오물대고 있었다. 엄마는 포대기 속으로 손을 넣고 아기의 손을 꺼냈다. 까만 손등과 하얀 손바닥이 앙증맞았다.
"참 예쁘다."
"정원아, 정말 예뻐?"
언니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응."
"다행이다."
언니는 아기가 예쁘다는 말에 또 다시 울먹였고 엄마는 아기 엄마가 자꾸 울면 안 된다고 언니를 달랬다.
"엄마 오셨었니?"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는요?"
"먼저 인천에 올라갔지."
"아저씨가 저한테 많이 실망하셨죠?"
"실망은, 그런 생각하지 말구 몸조리나 잘해. 여기서 나가면 어디 갈 거니? 애 아빠 미국으로 갔다며."
"보산리에 방 얻어 놨어요. 글루 가야죠."
"몸조리도 못할텐데……."
언니가 보산리로 간다고 했다.
윤희 언니가 보산리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 때부터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산파집을 나오자마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윤희 언니도 보산리 여자가 되는 거야?"
동두천을 떠나 인천 생활에 익숙해 질 무렵 윤희 언니가 인천에 왔었다. 언니의 등에는 아기가 업혀있었다. 검은 얼굴 탓인지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흰자위와 새까만 눈동자가 맑게 빛나는 아기였다.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는 쌍꺼풀이 짙게 진 눈과 방실방실 웃는 모습이 언니를 꼭 닮아 낯설지 않았다. 아기의 이름은 '챨스'였다. 미국에 있는 아기의 아빠가 그렇게 지어보냈다고 했다. 나는 아기에게 언니와 내 이름의 끝자를 따서 희원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챨스를 희원이라고 부를 때 언니가 웃었다. 윤희 언니와 나는 이름짓기를 좋아했다. 다락방 창문 옆에 알을 깐 제비새끼들에게, 한꺼번에 열 마리 이상을 낳던 '메리'의 새끼들에게, 꽃밭의 백일홍, 채송화에게, 그리고 여름 밤 하늘의 이름 없는 별자리에게도 이름을 지어주며 놀았다. 언니도 그 기억을 떠올렸던 걸까. 아주 오랜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니의 맑은 웃음을 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끝내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윤희 언니는 저녁때까지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집을 나서면서 아버지에게 전해 달라며 쪽지 하나를 맡겼다.
"아저씨! 저 다음 달에 미국 가요.
얘네 아빠가 비행기표 보냈어요.
저 잘 살 거예요.
이 지긋지긋한 나라로 절대 다시 안 올 거예요."
윤희 언니는 그렇게 스무 해가 넘도록 자랐던 우리 땅을 떠나갔다. 윤희 언니가 다녀간 뒤, 우리는 동두천과 맺고 있던 끈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버렸다.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던 편지를 주고받던 친구들과도 연락이 시들해졌고 점점 동두천의 기억들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2년 전, 우연히 동두천에서 기지촌 여성들과 함께 일하는 후배가 보여준 바자회 사진 한 장에서 윤희 언니를 보았다. 사진 속의 윤희 언니는 40대 초반의 중년여자였지만 갸름한 얼굴과 큰 눈망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후배에게 전화를 해서 윤희 언니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윤희 언니는 아직도 동두천에서 기지촌 여자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는 두 아이의 엄마였다. 청년이 되었다는 흑인 혼혈아. 그리고 한국아이라는 초등학생. 후배는 두 아이의 이름도 알려 주었다. '희원'이와 '혜원'. 언니는 두 아이를 키우며 혼자 살고 있었다. 언니 곁에는 언니를 미국으로 데려갔던 흑인도 그리고 막내의 아버지일 한국 남자도 없었다. 친정에 가서 조심스럽게 윤희 언니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는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그것들 하나 안 버리고 다 데리고 살아 준 게. 죽기 전에 한 번 봤으면 좋으련만. 니가 연락 좀 해 봐라."
그러나 나는 언니에게 전화를 하지 못했다. 동두천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신문기사를 보면 윤희 언니가 아닐까해서 마음을 졸이면서도 나는 언니에게 전화하는 것을 미루고 또 미뤘다. 겁이 났다. 아직도 기지촌여성으로 살고 있다는 언니를 보면 어떤 심정이 될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윤희 언니와 만나고, 언니와 다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동안 잊으려고 다시는 맞닥뜨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동두천의 그림자와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동안 언니를 만나는 것도 동두천을 찾는 것도 꺼려왔다. 단지 꿈에 지나지 않던 지나간 기억들이 또 다른 현실로 내 앞에 드러날 테고, 그 현실에 또 휘말려 들어갈까 봐서 두려웠다. 그러나 내가 잊고 살아왔다고 해서 동두천이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악몽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동두천은, 보산리 기지촌은 그대로 있었고, 이 곳에서 고달픈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 또한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내가 이곳을 떠난 뒤 20년이 넘도록 동두천은 변치 않는 이 땅의 그림자로 존재했다. 그리고 윤희 언니 역시 이 도시 한 구석에서 여전히 생계를 위해 자신의 몸을 팔고 있었다.
수첩을 꺼내고 휴대폰을 들었다. 정아를 만나기 전에 윤희 언니와 통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가 멈추고 자동응답기 녹음이 들려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차를 돌려 미군부대를 지난 뒤 한국 민속화가 그려져 있는 미군부대 높은 담장 아래 섰다. 후배에게 얼핏 들은 바로는 언니가 미군부대 골프장 건너편에 있는 주택가에 산다고 했었다. 차에서 내려 건너편 길을 보다가 숨이 멎을 뻔했다. 평화로를 따라 줄지어선 집들, 자동차 매연으로 시커멓게 색바랜 벽돌과 여트막한 지붕, 녹슨 샤시문, 8절지 도화지만한 작은 창문, 깨져나간 곳을 청테이프로 대충 막아놓은 유리창. 그리고 문마다 매달려 있는 자물쇠들. 순간 만석동 어귀에 서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7.
나는 보산리 기지촌이 만석동을 꼭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또렷이 알게 되었다. 내가 왜 14년 전, 만석동의 그 판자 골목으로 단번에 휘감겨들어 갔는지. 똥바다 철길 위에서 왜 그렇게 가슴이 설레였는지, 만석동에서 지낸 첫날밤, 왜 그렇게 눈물이 솟았는지를. 나는 만석동에서 동두천을 만났던 것이다.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동두천은 그림자로서 현실의 나를 지배해왔다. 그 그림자는 70년대의 동두천이었고, 미군부대에 빌붙어 먹고살던 내 부모, 내 이웃이었고, 나와 내 친구들의 어둠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80년대를 뒤엎었던 시대의 어둠과 만나 스무 살 내 젊음을 구로동으로, 가리봉동으로 끌어 내렸고 마침내 만석동으로 내려오게 했던 것이다. 나는 그저 기억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것으로, 마주 하기 싫은 그림자를 내 의식 아래로 숨기는 것으로 동두천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었지만 이미 나는 오래 전에 동두천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정아와 정아엄마를 만나고, 그들보다 더 무기력하고 약한 사람들과 뒤엉켜 살면서 나는 해자를, 경숙이를, 그리고 윤희 언니를. 어릴 적 내 이웃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 밝은 세상을 꿈꾸던 그 때, 명동에서, 시청 앞 광장에서 또는 부평사거리에서 청천동에서 가투를 벌이다가 지친 몸으로 만석동으로 돌아와 최루탄 냄새를 털어 내면 어느새 새벽이었다. 잠시라도 눈을 붙여보려고 이부자리에 누우면 철길 옆으로 난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푸른빛이 스며들었다. 그러면 나는 푸른빛에 마음을 빼앗겨 그 푸른빛이 눈부신 하얀빛으로 바뀔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 내가 꿈꾸는 새 하늘, 새 땅도 그렇게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이부자리에 누워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이웃들은 부둣가로, 공사판으로, 마찌꼬바로 단지 먹고살기 위해 일을 나갔다. 그리고 부모들이 일나간 아침 댓바람부터 만석동 골목은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하고 골목으로 나와 그 아이들과 동네를 누비며 놀다가 점심때가 되면 언덕을 가로질러 신문보급소로 나갔다. 신문을 받아들면 맨 먼저 화수 성당 아래 작은 골목 끝으로 달려갔다. 골목 맨 끄트머리 집에 서면 자물쇠가 달린 방문 안쪽에서 아이 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예요?"
그러면 나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헉헉거리며 대답을 했다.
"나야. 신문 언니."
그러면 아이가 다시 물었다.
"언니, 밤 되려면 아직 멀었어?"
잠시 말동무가 되는 내가 그 골목을 떠나고 나면 아이는 엄마가 돌아 올 밤 10시까지 갇혀 있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뒷집에 살던 여자는 네 살 짜리 백인 혼혈아를 방에 혼자 놔둔 채 자물쇠를 잠그고 밤일을 나갔다. 때때로 아이는 무서운 꿈을 꾼 듯 한밤중에 울음을 터뜨렸지만 아무도 그 아이를 달래줄 수 없었다. 아이가 심하게 우는 날이면 나는 커다란 열쇠를 가지고 가 그 아이 방문을 열어 주는 꿈을 꿨다. 하지만 나는 열쇠를 찾지 못했고, 아이의 방문을 열어주지 못했다.
다시 만석동에서 똑같이 방에 갇힌 아이를 만났고, 그때 나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지만 그 아이의 방문을 열어주지 못했다. 내가 신문배달을 그만 둘 즈음. 방문은 열렸지만 아이와 그 아이를 가두고 벌이를 나가야 했을 엄마는 이사간 뒤였다.
나는 정아만이라도 방에서 나와 더 넓은 세상으로, 편안하고,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랬다.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랬다. 어젯밤 나는 정아가 그 꿈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속해있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14년 전 나를 만석동으로 끌어내렸던 것은 동두천이었다. 스무 살 내 젊음을 거리로, 공장으로, 빈민촌으로 끌어들였던 것은 사회과학공부나 80년 광주의 충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동두천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어지럽던 시청 앞보다 앞서서, 광주보다 앞서서, 새 세상을 꿈꾸게 하는 사건이었다. 살아서 꿈틀대는, 누르고 눌러도 끝내 비집고 고개를 드는, 살아서 움직이는 사건이었다. 내 의식 밑바닥에서 그림자로 살면서 끊임없이 현실과 맞서게 했던 동두천. 동두천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갈팡질팡할 때마다 내 의식보다 앞서서 내 삶을 결정하게 하는 동기였다.
내가 원했던 세상은 누군가가 빛에 서기 위해 그늘에 남겨지는 일이 없는, 누구도 그늘에 혼자 버려지는 일이 없는 세상이었다. 내가 사람들한테 원했던 것은 아무런 힘이 없던 우리들을 타오르던 힘센 어둠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었다. 그 갈망의 시작이 동두천이었다. 나는 정아가 지금 자신이 속해있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바라고 바라던 대로 지금 정아는 비로소 빛으로 나아가기 위한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었다. 내가 동두천을 떠난 뒤 다시 내가 원하는 세상, 새 하늘, 새 땅을 위해 만석동에 둥지를 틀었던 것처럼.
행주대교를 건너 인천 쪽으로 들어서고 나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거기 일진 포장이죠? 경리과 김정아씨 부탁합니다."
잠시 뒤 가라앉은 정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모세요."
"너 내일 조퇴할 수 있니?"
"왜요?"
"내일 병원 가게."
"싫어요. 전 병원 안 가요."
"뭐가 싫어, 애가 정확하게 몇 주 됐는지 알아봐야지. 초음파도 해보고, 기형아 검사도 해보고……. "
"……."
"대답해 나올 수 있어. 없어."
"이모."
"너 그 동안 병원에 가보기나 했니?"
"아뇨."
"그러니까 더 미루지 말고 가자. 너 배 보니까 벌써 오 개월은 되어 보이던데."
"이모."
정아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니 남자친구는 못 나오겠지. 원래 첫 진찰 때 아빠가 같이 가 줘야 하는데."
"그 사람 아무 때나 밖에 나오지 못해요."
"그래. 그렇겠지. 그럼 너 낮에 병원 갔다 오고 나서 그 사람 데리고 오자. 내일 저녁이나 같이 먹자. 그 사람 뭐 좋아하니?"
"이모……."
"뭐 좋아하냐니까? 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넌 입덧도 안 하냐?"
"잡채요. 이모, 잡채가 먹구 싶었어요."
"그래 알았어. 언제 퇴근하니? 나 검단 쪽으로 가고 있는데 데리러 갈까?"
"네, 이모. 저 그 동안 할 말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 알았어. 내가 그 쪽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퇴근하는 대로 나와."
땅거미가 지고 있다. 검단의 낮은 공장 지붕 너머로 보랏빛 노을의 흔적이 보인다. 공단 앞에서 차를 세우고 다시 윤희 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신호가 끊어지고 자동응답기가 돌아간다. 잠시 망설이다가 녹음을 했다.
"저, 언니, 나, 정원이야. 정원이. 기억나지? 언니 보고 싶어요. 이 녹음 듣거들랑 전화해 줘요. 내 전화 번호는 ***-***-****"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져 내린 빛바랜 은행잎이 길가에 쌓인 쓰레기와 뒤엉켜 가을저녁의 공단거리를 더 스산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겨울이 오기 전에 정아에게 면사포를 쓰게 해야겠다. 월세방도 마련해야 할 테고, 살림살이도 얻어야 한다. 서둘러 준비를 해야 춥기 전에 끝날 것 같다. 아무래도 오늘밤도 정아와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다.
정아가 나올 때까지 눈을 붙여야겠다. 인천을 떠났던 시간이 9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주 긴 여행에서 돌아 온 것처럼 온 몸과 마음이 눅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