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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사단 청성 전우회 휴계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주(84.07.11~86.10.16)
제6사단 | ||||||||||||||||||||||||||||||||||||||||||||||||||||||||||||||||||
1948년4월 29일 서울에서 창설된 제4여단(대령 채병덕 : 제7, 8, 10 연대)이 동년 11월 20일 충북 청주에서 제6여단으로 개칭된 후, 1949년 5월 12일에 제6사단으로 승격. 사단사령부는 충주에서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고, 춘천과 홍천 정면의 38도선 경비임무 수행(초대 사단장 대령 유재흥 : 제 2, 7, 9 연대 예속) 전쟁 당시는 춘천에 제7연대, 홍천에 제2연대, 예비인 제19연대가 사단사령부와 같이 원주에 위치하였음. 제2연대는 옹진의 은파산 전투('49.8.13 ~ 11.15)를 끝마치고 서울로 복귀하여 '50년 6월 20일 홍천으로 이동하여 사단에 예속됨. 제19연대는 남원지구공비격멸전으로 전전하다가 '50년 5월 1일 원주로 이동. 【보충1】전쟁발발 직전 사단 상황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지휘소를 원주에 두고 우익은 789고지를 경계호 하여 제8사단(장, 이정일 대령)과 그리고 좌익은 적목리를 사이에 두고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과 각각 연계하고 있었다. 이때 사단의 우일선인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는 지휘소를 홍천에 두고 그 예하의 제3대대는 연대의 우 제1선으로 △873 - 계명산 동측간을 각각 방수하고 있었으며 제2대대는 연대 예비로써 당포리에 배치하였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는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제2대대는 제2연대 제1대대와 연계하여 양통리까지, 그리고 제3대대는 이에이어 적목리까지 각각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중 제11 및 12 양중대는 연대의 예비인 제1대대와 함께 춘천에 있었다. 한편 제19연대(장 민병권 중령)는 사단의 예비로써 원주에서 교육훈련과 부대정비중에 있었다. 이러한 사단의 예하 연대들은 창설 당시부터 편성상의 건제부대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타사단의 연대와 수시로 교체하여 편성한 까닭으로 일률적으로 그 전투력을 평가할 수 없었다. 즉 제19연대는 남원지구공비격멸전으로 전전하다가 1950년 5월 1일에 원주로 진입하고, 제2연대는 옹진 은파산 전투(49. 8. 13 ~ 11. 15)를 끝마치고 서울로 복귀하여 이해 6월 20일에 홍천으로 이동하여 사단에 예속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양연대는 당면한 전투정면의 지형은 고사하고 짐도 풀지 못한채 적의 남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7연대는 그 전해인 1949년 2월 20일에 사단으로 예속되어 청주로부터 원주로 이동하여 2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다음, 이해 5월 3일에는 현진지(춘천)로 진입하여 제8연대(장, 서종철 중령)로부터 인수받고 3개월 뒤인 8월 6일에는 신남으로 침투한 1개 대대 규모의 적을 포착 섬멸하는 경험을 쌓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3개월간에 걸친 방어준비로 해지역의 지형을 숙지하게되고 또한 군관민의 유대관계가 어느곳보다도 공고하였다. 당시에 사단의 병력은 T/O에 93%(9,300명)였으며, 장비는 105mm 야포 15문(이중 2문은 고장으로 후송)과 57mm 대전차포 12문, 그리고 2.36" Rocket포 276문을 장비하고 있었다. 사단의 교육 훈련실태는 제2 및 제19 양연대는 창설과 동시에 전전한 관계로 체계있는 교육이 곤란하였으며 기회교육을 중점으로 실시하였는데 중대전투훈련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제19연대는 대전차무기가 전연없음을 감안하여 과거 대전차공격에 경험이 있는 연대수색대장 박준수중위를 비롯한 장교 및 하사관을 교관으로 하여 육박공격요령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7연대는 대대전투훈련을 마쳤으며 우수한 장교의 피교육차출을 기피하는 당시의 풍조를 깨고 대부분의 장교들을 해당하교에 파견하여 보수과정을 마치도록 하였다. 한편 제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은 포병학교 OAC를 마치고 돌아오자 즉각 3개 포대장을 입교시킨 다음, 대대 장병으로부터 훈련이 너무 가혹하다는 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주야간 훈련을 강행하였는데 심지어는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였고, 3개 포대장이 모두 교육에 파견되어 공석중이었음에도 결전에 있어서의 전투력 발휘에는 지장이 없었다. 진지공사에 있어서는 춘천장면은 제7연대가 진입하자마자 전선으로부터 시내가 불과 1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음을 파악하고 공사를 서둘렀는데 육군본부에서는 예산상 공사를 지원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자 자체 인력만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사단으로부터 공병 1개 중대를 지원받아 춘천시민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9개소의 유개 콘크리트와 그리고 중대마다 2~3개소의 통나무로 만든 유개호를 마련하고 호간에는 연락호로 연결하였으며, 진전에는 지붕형 철조망을 쌍선으로 치고 그 중간에는 대인지뢰를 묻었다. 그러나 제2연대 정면은 콘크리트진지가 없고 통나무로 쌓은 유개호를 제8연대로부터 인수받아 보강하였는데 이곳은 철조망이나 대인지뢰가 없었고, 그렇다고 이를 새로이 가설할 시간의 여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38교(홍천으로 이르는 첫 길목) 남쪽은 연대장 함병선 대령이 오전에 있었던 신남사건을 교훈삼아 기존진지에다 몇갑절의 통나무를 쌓고 그위에 흙을 단단히 다져 놓게 함으로써 결전 3시간을 지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적에게 전차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거부할 대전차지뢰는 사단내에 한 개도 없었다. 보급은 원주에 본창을 두고 홍천과 춘천에 각각 지창을 설치하여 지원하였다. 1950년 3월 31일 현재 육군본부에 보고한 사단 비상용군수품보유 실태를 보면 백미 및 정맥은 없었고, 건빵이 657상자(1일분), 휴발유가 소요 800D/M에 보유 359D/M 뿐이었다. 탄약은 충분한 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 통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전투간 일부 고립된 소부대를 제외하고 식량이나 탄약의 부족으로 전투에 지장을 준 바는 없었으며, 제19연대의 경우에는 북진할 때 사용하여야 한다는 연대장 민병권 중령의 지시로 휴발유 500D/M을 지하에 비축하였는데 철수할 때에는 차량관계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보충2】사단의 주요작전 및 전투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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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사단 청성 전우회 휴계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주(84.07.11~8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