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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개혁하라
누가복음 18:9~14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창조절 아홉 번째 주일이며, 종교개혁 502주년 기념주일이다. 10월 31일 종교개혁일은 전 세계 개신교회의 생일이다. 낡은 교회를 재건하고 개혁하려는 선각자들의 희생을 통해 교회는 새롭게 탄생하였다.
마틴 루터, 장 칼뱅, 울리히 쯔빙글리를 비롯해 존 웨슬리에 이르기까지 개혁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바로 세우려고 하였는데, 그 첫 번째 과제가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었다.
해마다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세계교회의 전통을 배우고, 교제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우물 안에 갇힌 교회는 반드시 도태되게 마련이다. 종교개혁은 단지 제도개혁에 그쳐서는 안 된다. 처음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재발견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힘썼다. 이제 새로운 종교개혁은 인간의 재발견이란 말을 한다. 제도이전에 사람의 변화이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늘 영적으로 도전받게 마련이다. 세상의 변화는 항상 위기를 부르기 마련이다. 행여 나의 영적 에너지는 고갈상태에 있지 않은가? 내 믿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 든든히 결합하고 있는가? 내 기도의 내용을 말씀에 비추어보자.
1)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오늘 예수님의 기도 비유는 특별한 교육적 목적이 있다. 지난주에 이어서 기도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9).
예수님은 기도 비유에서 자기 스스로 의롭고, 남을 무시하는 이른바 신앙적 의인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신다. 이를 위해 두 사람을 대조적으로 비교하신다. 바리새인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세리는 아무나 인정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의인과 죄인을 대표하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두 사람은 한날, 한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갔다. 바리새인과 세리, 정반대의 신분을 지닌 두 사람이 성전이란 거룩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참 낯선 모습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의 태도와 간구의 내용, 진정성을 비교하면서 과연 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냐고 물으신다. 예수님은 두 인물의 기도를 비교하신다.
- 바리새인의 기도는 길고, 세리의 기도는 짧았다.
-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자신의 신앙공적에 대한 자랑으로 가득하고, 세리의 기도 내용은 자신이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수평적’인데 관심을 기울였으나, 세리는 하나님께만 향하는 ‘수직적’인데 관심을 집중하였다.
- 결론적으로 바리새인에게 기도의 주제는 자기 자신 곧 ‘나’이고, 세리에게 기도의 주제는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이었다.
바리새인을 보라. 그가 기도하는 태도와 내용, 진정성을 보면 그의 기도는 실제로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 그는 성전 뜰 앞에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
바리새인이 따로 기도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철저하게 구분하려는 의도이다.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이다. 기도하는 자세부터 남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은 그의 기도가 지극히 형식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불순해 보인다.
게다가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자랑으로 가득하다.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인데, 오히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과시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고마워한다.
바리새인은 실제로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가를 보고하러 갔을 뿐이다. 아마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와 공적으로 판단하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바리새인뿐이다. 그렇지 않다. 이런 태도는 기도일 수 없다. 참된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요, 오직 하나님께만 올려 드린다.
그렇다면 세리는 어떤가? 그는 성전 뜰 멀리 서서 하나님을 향하였다. 그는 눈을 들어 감히 하나님은커녕 하늘을 향하지도 못하였다.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그는 기도할 때에 입술로 그 흔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영어성경 킹 제임스 역은 그의 겸손함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그가 하나님께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할 때에 단순한 ‘한 죄인’(a sinner)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죄인’(the sinner)임을 고백하고 있다.
세리는 신분 상 자신을 드러내 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겉으로도 죄인이지만, 속으로도 절절히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한다. 그는 하늘 아래 자신을 낮추고, 다만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기소서”(13)를 반복함으로써 눈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2)
처음부터 바리새인이 그런 오만한 종교귀족은 아니었다. 본래 바리새인은 유대인의 신앙운동에서 모범적인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벌인 하시딤 운동은 유대교를 개혁하고, 인간도 개혁하여 생활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강력한 신앙의 실천운동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려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으며, 나름대로 의롭게 살려고 힘썼다. 역사가들은 독일 나치시대에 유대인들이 그 엄청난 박해, 억압, 가스실, 추방 등에서 견디고 생존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하시딤의 신앙운동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새인은 그때마다 시대정신을 지닌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실한 사람들의 그룹조차 세월이 지나면서 특권화 되어 변질된 것이다.
어느 사회나 종교는 보수적인 자리에 위치한다. 보수의 가치는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고, 오랜 믿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한다. 아무리 진보적인 인물도 종교의 보수성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보수주의를 가장한 요즘 극우적 행태와는 전혀 다르다.
진정한 보수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보수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은 경건이고, 선함이다. 한마디로 품격이 있는 보수성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눅 6:45).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자기 가치에 맞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작가 에이모 토울스는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보수의 품격을 세밀하게 추적하였다. 볼셰비키 혁명기에 모스크바의 귀족은 대부분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주인공 레스토프 백작은 혁명 정부에 체포되고서도 목숨을 건졌는데, 혁명 정부의 젊은 장교 중에는 그를 존경하는 이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진정한 보수였기 때문이다. 레스토프 백작은 죽는 날까지 보수의 세 가지 가치를 지켰다. 첫째, 민족에 대한 사랑이다. 적이 조국을 침략했을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 싸웠다. 그러나 동족은 적대적인 입장이라도 결코 해치지 않았다. 둘째, 역사에 대한 믿음이다. 자신은 보수주의자이지만 변화의 시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도도한 역사의 강물을 거역하지 않았다. 셋째, 이념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원칙이다. 백작은 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을 강요하기보다, 묵묵히 돕고 사랑하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신앙의 품격과 보수의 품격은 다르지 않다. 품격이 없는 신앙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벗어나면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즉 하나님 말씀에 담긴 가치를 섬기고 실현해야 한다. 그 가치는 바로 사랑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바리새인은 마치 엉덩이에 뿔난 존재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비난하는 이중인격자였다. 남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자기자랑으로 채워진 기도, ‘자기 의’를 증명하려는 것으로는 결코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마음과 생활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옳다고 인정을 받고 집으로 간 사람은 세리였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회개한 바로 그 세리였다. 하나님 나라의 문은 지극히 낮아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시대에도 바리새인의 교회와 세리의 교회가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당시 바리새인의 오만한 교회, 특권화 된 교회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자각한 것이다. 교회가 스스로 개혁하지 못할 때 커다란 위기에 직면한다.
3)
어제 오전에 강남 선릉역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토요일 오전이고, 꼭 가봐야 할 의무도 없을 것 같아 망설여졌다. ‘갈까, 말까’하는데, 아내가 “갈까 말까 할 때는 가야지”하였다. 그래서 결혼식에 갔다.
혼주와 인사를 한 후 그곳에서 점심을 ‘먹을까, 말까’를 망설였다.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일렀다. 오후에 또 지방 교역자 자녀 결혼식이 있으니 그곳에서도 뷔페 음식을 먹을 것이다. 그래서 ‘먹을까, 말까’할 때는 먹지 않는 것이 정답 같아서 그냥 돌아왔다. 내 판단이 명쾌하지 않는가?
늘 이렇게 명쾌하게 행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경우 결과를 두고 후회할 때가 많다. 작은 일은 후회할 일을 해도 인생에 크게 악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커다란 일일수록 악영향은 파괴적이다. 끝없이 경건과 분별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갑작스레 일어난 것이 아니다. 루터의 자잘한 근심과 두려움, 소소한 의문과 깨어남이 그의 믿음에 강력한 불을 붙였다. 그 역시 평생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위해 씨름한 당사자였다.
루터의 모토는 ‘세 가지 Alone’으로 요약된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그는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다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루터가 재발견한 하나님은 엄격하고 심판하는 중세기의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려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과 관계가 달라지면 역사관도 바뀌고, 역사전체는 하나님의 구속사임을 깨닫게 된다. 믿음의 재발견, 은총의 재발견에서 개인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게 되었다.
위대한 교회는 겉으로 힘의 과시와 규모 때문이 아니다. 바리새인 같은 자기 의로움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믿음과 겸손히 세상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주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가능하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에게서 완결된 과업이 아니다. 만약 교회가 신앙개혁과 자기희생에 지불해야 할 아픔을 조금조금 꺼리다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말 것이다. 내 믿음의 개혁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할 신앙운동이다.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진 기도가 세리의 기도였다는 것은 어쩌다 생긴 결과가 아니다. 세리의 기도는 가장 위대한 기도의 유산이 되었다. 예수님은 가슴을 치고, 스스로 낮추어 자신을 겸비하게 드리는 기도를 받아주신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바리새인의 교회로 가득하다. 이제 우리의 교만함을 돌이켜 세리의 교회로 고쳐나가야 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교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유럽 공항에는 어디든 여행자들을 위한 기도 공간이 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채플을 찾아가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요즘 유럽 공항의 채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리스도교의 성물들은 저 만치 밀려나있고 모슬렘의 기도용 양탄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둔 경건의 공간을 점점 모슬렘들이 차지한다. 왜 그럴까?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슬렘은 형식적이든, 진심이든 적어도 기도의 의무를 하는 사람들이어서, 여행 중이라도 조용한 공간을 찾았다. 내가 기도하지 않은 그 자리는 다른 목적을 가진 무엇이 대체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릴 것인가? 반드시 내가 기도한 대로 산다. 그러기에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세리의 기도로 기도의 개혁이 급선무이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교회가 될 것인가? 세리의 교회를 따를 것인가? 결국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
하나님의 은혜가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는 남은 무리와 기도를 개혁함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익명의 세리들 위에 함께 하시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인도네시아 아체의 이스람 대학 에카교수를 만나 한강에 산책을 갔다.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시간이 되니 바닥에 머리를 붙이고 기도를 했다. " 에카선생님, 당신은 속으로 기도하지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이 모두 알아보도록 티를 내면서 기도를 하나요?" 뭐 이런 유치한 질문도 할수 있는 사이다. 에카교수는 " 내가 바닥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는 이유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신앞에 고백하는 것이다. 내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도 신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 겸손한 자만이 신의 음성을 듣고, 그의 피조물의 믐성도 들으며 평화의 중재자가 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