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 羅雲奎 (1902 ~ 1937)】 "광복단 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영화 제작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회령면(會寧面) 이동(二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금성(錦城), 호는 춘사(春史)이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무관 출신인 나형권(羅亨權)이고, 6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형은 나민규(羅玟奎)·나시규(羅始奎)이고, 여동생은 나사규(羅四奎)·나오규(羅五奎)·나필규(羅畢奎)이다. 1917년 조정옥(曺貞玉)과 결혼하여 나종익(羅鍾益)·나신자(羅辛子)·나봉한(羅奉漢) 3남매를 두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 후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국내에 돌아와서도 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지속하였다.
학창 시절 작은 체구에 집중력이 뛰어났으며 독서를 즐겼고 평소 장난이 심했다고 한다. 연극을 좋아하여 극단 회청동정우(會青同情友)를 만들어 공연하였고, 극단 예림회(藝林會)에 입단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8년 회령공립보통학교(會寧公立普通學校) 4년을 수료하고, 사립 보흥학교(普興學校)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간도(間島)로 이동하여 명동중학(明東中學)에 입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회령으로 돌아와 만세시위에 참여한 다음,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건너갔다.
1920년 1월 광복단(光復團)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1월 8일 최이붕(崔二鵬)·한순범(韓舜範)·한용호(韓用鎬) 등과 훈춘(琿春)에서 청회선[(淸會線) ; 청진(淸津)-회령 간 철도] 파괴와 전선 절단을 계획하였다. 회령 삼흥화점(三興靴店) 권학종(權學鐘)의 집에서 정희호(鄭凞鎬)·이범래(李範來)·윤봉춘(尹逢春)·이동윤(李東潤)·엄일선(嚴逸善) 등과 협의하고, 폭탄과 철도 파괴에 필요한 장비를 간도에서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후 서울로 와서 중동학교(中東學校) 고등 예비과에 진학하였다. 1920년 12월 22일 함북독판부(咸北督辦部)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던 김희균(金熙均)이 일제 관공서 파괴, 일제 관헌 처단을 계획하던 중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회령경찰서로 압송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이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되어 1921년 1월 6일 죽첨정(竹添町, 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정목(2丁目) 7번지에서 서대문경찰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21년 3월 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소위 보안법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 을 받았다.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고, 1923년 3월 5일 만기 출옥하였다.
이후 영화배우, 감독, 제작자로서 대표작인 ‘아리랑’을 비롯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영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1937년 8월 9일 오전 1시 20분 서울 관동정(舘洞町, 현 서울 서대문구 영천동) 자택에서 폐 질환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