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영남의 출신학교로도 유명한 용문고로 진학하자 둘째 매형이 중고서 낡은 고물기타를 입학기념 선물로 건넸다. 공부는 완전 뒷전으로 물러났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며 음악에 심취했다.
고교를 졸업하면서 대학진학도 하지않고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빈둥거리게 되자 소외감이 밀려왔다.
어느날 교회친구가 클래식 기타를 들고 놀러와 번안곡 ‘사랑의 기쁨’을 들려주었다.
단순하고 어설픈 아르페지오주법의 나일론 기타줄 소리는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노래가 하고 싶어졌다. 동네 레코드가게에서 사이몬 & 가펑클, 닐 영,
닐 다이아몬드, CCR의 해적판을 구입해 즐겨 들었다.
음악은 이제까지 매사에 소심했던 가슴속에 무언가 꿈틀거리게 했다.
일탈적인 새로운 삶이 느껴졌다. 이때부터 6년간을 매일같이 기타만 끼고 살았다.
뜨거운 젊은 청춘이었건만
여자친구도 한명 없을 만큼 음악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작곡을 하지도 않았다.
음악다방 DJ를 잠시 하다 쫓겨나는 별볼일 없는 음악 생활일 뿐이었다.
1977년 어느날 명동 카톨릭회관 여학생관에서 촛불을 세 개만 켜고
노래하는 노래동아리의 공연을 보았다.
사회자가 ‘노래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하자
촛불 속에서 들은 우리가락에 정신을 잃은 곽성삼은
자신도 모르게 무대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로평론가 이백천이 주도했던 노래동아리 ‘참새를 태운 잠수함’.
트로트 가요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방하며 영가나 토속적인 민속분위기의 노래세상을 꿈꾸는 젊은 열기가 탱천했던 노래 모임이었다.
초기의 멤버들은 김민기, 김태곤, 정태춘 등
쟁쟁했던 포크 가수들. 당시는 군사정권시절, 수상쩍은 노래말로 노래하는
포크 가수들은 예외 없이 요주의 인물리스트에 올랐다. 곽성삼도 그랬다.
그러나 76년부터 ‘성현’이란 예명을 본명과 동시에 사용하며 내 멋에 취해
노래를 불렀을 뿐 운동권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기에
직접 운동을 했던 분들에게 미안함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구자형, 한돌, 유한그루, 명혜원, 안혜경 등은 함께 노래를 불렀던 동료들.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한적이 없는 곽성삼은 ‘모임에 참여하면서
기타를 잡고 눈을 감으면 노래가 떠올랐다.
악보를 쓸 수가 없어 녹음해 발췌를 하면서 곡을 만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물레’ ‘나그네’ ‘귀향’등 3집 이전의 모든 발표곡들은 이 당시에 만들어졌다.
멤버들은 첫 음반작업에 들떴다.
곽성삼은 어느덧 음악적 리더 역할을 맡으며 6개월간의 앨범작업을 주도해
데뷔 앨범인 ‘참새를 태운 잠수함123-서라벌.SR0145,1979년3월’을 발표했다.
이때 음악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독한 열병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으로 경험한 이성에 대한 사랑이 찾아왔다.
상대는 노래운동을 함께한 이화여대 정외과 출신의 동료였다.
지금도 독신으로 살아가는 곽성삼에게 그녀는 삶과 음악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애틋한 대상이자 영원한 연인으로 지금도 꿈속에 나타난다.
젊은 시절 그의 모든 노래는 그녀를 위한 사랑의 연가였다.
‘내겐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기에 비참한 꼴을 보이기 싫어 의도적으로 웃지도 않고
말도 없는 진중한 모습으로 내 자신을 꾸몄다’고 고백하는 곽성삼.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창작의 봇물을 터지게 했다.
자기와의 처절한 싸움, 그리고 음악적 환희
첫사랑과의 꿈같은 작업으로 탄생시킨 첫 독집앨범
<성현-이몸사랑 받아주오,서라벌SR0177,79년11월>, <물레>의 아름다운 자켓 이미지속에는
<작은소망><사랑의 늪>등 11곡의 직설적인 사랑의 세레나데가 담겨있다.
곽성삼은 ‘성현이란 예명도 별 뜻 없이 붙였고 사랑과 욕망의 감정만이 뒤범벅된 음반이었다.
포크가수로서는 무책임한 행동이었다’며 자신의 음악으로 인정하기조차 거부한다.
2집 앨범 <길-오아시스,OL2399,81년2월>은 비로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켰던
실질적 1집 음반. 삶의 회귀를 노래했기에 장엄하면서도
슬픔을 자아내는 석양의 이미지를 앨범 자켓에 담고 싶었다.
백방으로 찾아본 자켓 그림은 한 전문대생이
쓰레기통에 버린 그림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찾아냈다.
기쁨도 잠깐, 자켓과 노래에 ‘'반항적 요소가 강하게 느껴진다’는
주위의 걱정은 방송 금지곡 철퇴로 이어졌다. 활동을 지속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편안함을 안겨주는 <귀향> 등 수록곡들은 입소문을 타고 번져 나갔다.
홍보조차 변변히 못한 앨범은 재판이 발행되고 비싼값을 내고도 찾는 이들이 급증했다.
삶의 기로에 선 어느 중환자는 ‘<귀향><소생>을 듣고 마음의 희망을 얻었다’고
감사의 연락을 해왔다. 가슴이 뻐근했다. 포크가수가 뭘 노래해야 하는 지
느낌이 오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대중들은 느낌만 보고 <암울한 시기에 만든 명곡들>
이라는 의미를 붙여준다. 시기적으로 그랬을 뿐 그런 의식없이 만든 곡들이다.
진지한 메시지를 담으려 했지만 추상적 상상력으로 만든
사지가 절단된 병신음반’임을 고백한다.
사회현실을 경험하지않고 즉흥적 감성에만 의존한 음악에 염증이 느껴졌다.
30살이 넘어 기초 화성학 공부를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한동안 유한그루, 서유석, 강은철, 손경희,
풀님 별님등에게 곡을 써주며 세월을 허비했다.
배고픈 생활은 고생도 아니었다.
누가 노래를 하라하면 음악적 열등감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이후 종적이 묘연했던 것은 자기 음악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2000년 가을, 곽성삼은 20년 만에 세 번째 독집<장돌뱅이>을 들고 부활했다.
행색은 남루했지만 눈빛만은 살아 이글거리는 모습이었다.
잠적의 시간은 장돌뱅이 같은 방랑의 세월이었다. 아파트 경비원, 주유소 주유원,
외판원, 보일러기관실 엔지니어의 밑바닥 삶을 자청해 경험했다.
쓰러져 고통 받는 자들의 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착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으로 경험한 봉급생활자의 성실한 삶은 그토록 그리던 피아노 건반을
자신의 힘으로 마련하게 해주었다.
피아노 없이 배운 화성학이 20년 만에 완성되는 감격도 맛보았다.
질그릇처럼 투박한 삶의 정서가 배여 있는 한결 맛깔 나는 노래 가락은
이때의 소중한 경험으로 얻어졌다.
음반발표 후 만세를 불렀을 만큼 음악적인 만족감이 온몸을 떨게 했다.
3집 <장돌뱅이>의 노래 가락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삶의 향기가 배어있다.
그러나 세션의 구성과 편곡의 산만함은 생명력이 담겨있는 맛깔 난 노래
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약점을 일부 드러내는 아쉬움을 남겼다.
최근 가요사상 최초로 3장의 음반을 동시에 발표하려는 음악적 야심을 불태우는 곽성삼.
상상을 뛰어넘는 70인조의 웅장한 사운드로 클래식, 록과 어우러져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품격 있는 우리가락을 꿈꾼다.
그래서 2집 <길>을 편곡한 연석원과의 작업을 갈망한다.
4집의 컨셉은 씨랜드,군산 윤락가,인천 호프집
화재로 하늘과 땅 사이를 떠도는 어리고 불쌍한 영혼들을 달래기 위한 씻김굿이다.
또한 일찍 세상을 등진 여동생과 화해의 연결고리를 잇기 위한
영적인 음악 작업임을 조심스레 밝힌다.
5집에선 판소리적 일수도 있지만 형식을
무시한 자유로운 음악의 날개 짓으로
질펀한 삶과 인간의 군상을 다루려 한다.
6집은 최근 자신의 영혼을 의기 탱천하게 해준 <한단고기>의 춤에 대한
역동적인 노래 가락을 빚을 예정이다. 작곡은 이미 끝났다.
곽성삼의 음악은 이제 시작이다.
고단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어느덧 호기심 가득한 26세의 청년처럼 해맑다.
평생을 꿈꿔온 우리가락의 활짝 핀 꽃봉오리를 위해
달콤한 칭찬보다 냉혹한 비판에 귀를 쫑끗 세운다.
‘창작은 노동임을 느낀다’는
그의 독백처럼 곡마다 혼신의 힘을 쏟으며 힘겨워 하는 곽성삼.
그의 순수한 노래가 거짓과 탐욕 속에 물들어 사는 대중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어떻게 어루만지는 씻김굿으로 탄생될 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