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말 타는 솜씨가 좋아야 격구를 잘 할 수 있으므로 격구를 무예 연마에 매우 적절하고 효과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여, 1425년 무과시험 과목으로 채택해 군사들에게 보급시켰다.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격구와 관련된 항목이 있다. 막대에 붙은 숟가락 길이는 27㎝(9치), 너비 9㎝(3치), 자루길이 105㎝(3자 5치), 공 둘레 39㎝(1자 3치), 출마표(시작 위치)와 치구표(공을 흩어 놓은 지점)는 50걸음, 치구표와 구문(毬門)까지는 200걸음, 구문 사이 거리는 5걸음으로 정해야한다는 규정이 그것이다. 구멍에 공을 넣는 장치기 1421년 11월 25일 세종은 상왕(上王)인 태종, 효령대군 등과 함께 날씨가 추운 탓에 교외에 나가지 않고 궁궐 안마당에서 타구(打毬)를 했다. 이때의 타구 방식이 [세종실록]에 설명되어 있는데,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며, 몽둥이의 모양은 숟가락과 같고, 몽둥이 머리는 손바닥 크기이며, 물소 가죽과 대나무를 합해 자루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마노(碼碯), 혹은 나무로 만든 공의 크기는 달걀만 하며, 와아(窩兒)라는 구멍에 공을 넣으면 점수를 얻게 되는데, 구멍은 넣기 힘들기 섬돌 위에, 혹은 평지에도 만들었다고 한다. 또 공을 치기 위해서 꿇어앉기도 하고, 혹은 서서 치기도 했다고 한다.
기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타구는 하키보다는 골프나 게이트볼에 가깝다. 이를 장치기, 격봉(擊捧), 봉희(棒戱)라고도 했다. 타구(打毬)는 원나라 말에 유행하던 것이 조선 초기에 전해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55년 세조가 등극한 이후에는 격구가 아닌 봉희를 관람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장치기는 막대기와 돌 정도만으로 놀 수 있기에, 서민들의 놀이로 유행하게 되었다. 양반, 공놀이를 멀리하다 세종 시기 절정을 이루었던 격구였지만, 차츰 신하들이 고려 말의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격구의 폐단과 병폐를 지적하며 중단을 요청하는 예가 늘어갔다. 게다가 조선은 건국 이후 많은 말들을 명나라에 빼앗김으로써 말이 많이 부족해졌다. 또한 조총(鳥銃)이 등장한 이후에는 말을 타고 격구를 하면서 기마 무예를 연마할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1790년에 편찬된 무예 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에는 격구보(擊毬譜)가 따로 수록되어 있기는 했지만, 말을 타고 하는 격구는 조선 후기에는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양반층에서는 차츰 몸으로 하는 것은 천한 놈이 하는 짓이라고 여겨 타구(打毬) 또한 지배층의 활동을 적은 기록 속에서 사라져갔다. 양반들은 활쏘기, 투호 등 심신을 닦고 덕을 함양하는 놀이는 즐겼지만, 야외에서 자유로운 신체활동을 하는 것은 점점 꺼렸다. 고려시대 말을 타고 격구를 하던 여성들은 조선시대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걸으면서 공을 쳐 골문에 공을 넣는 격구인 얼레공치기와 장치기와 제기차기, 축국 정도만이 백성들의 공놀이로 조선 말기까지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참고문헌: 나순성, [한국 축국ㆍ격구고], [민족문화연구] 3호, 1969;이태웅,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임금들의 신체활동과 유희오락], [한국체육학회지], 35-4, 1996;심승구, [축국과 공놀이], [한국역사민속학강의] 1, 민속원, 2010;심승구, [아이들도 왕도 신나는 장치기 놀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1997;范永聰, [唐代球類運動探析], [중국사연구] 73집,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