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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60
10월31일[연중 제30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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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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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0bhqj3SkxY8
[서울대교구 이준혁 바오로 신부님 집전(이문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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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따지고 보니 작은 것이 작은 게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백퍼센트 명료하게는 아니지만,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어느 정도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의 특징은 폭발적이고 역동적인 확장성입니다.
그러한 확장성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자연 안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즘 넘실거리는 황금 들녘이라든지, 튼실하게 열매 맺은 과실수를 통해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린 묘목 하나 심었을 뿐인데, 그 여린 것들이 성장하고 또 성장해 큰 나무가 되고, 자라고 또 자라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거목으로 변화됩니다. 어마어마한 나무는 수많은 새들이 머무는 안식처요 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휴식처가 됩니다.
우리가 교육하고 동반했던 아이들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때 잘 못먹은 탓에 성장이 더딘 아이의 모습을 측은해하며, 대체 언제 어른이 되고, 대체 언제 사람 노릇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뭉치들이 무럭무럭 성장해,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되고, 좋은 사람 만나 성가정을 꾸미고, 사회 안에서도 그럴듯한 위치에 자리 잡고, 이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겨자씨의 비유를 실감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랄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간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 교육을 통해서 상상만 해왔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몇백 배 몇천 배 아름답고 풍요로워서 놀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랄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내가 그리도 싫어했던 그, 견디기 힘들어 했던 그가 떡 하니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와 여유롭게 산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놀랄 일, 나 같은 대죄인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겠나? 했었는데, 내가 딱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놀랄 일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지상에 머무는 동안 내가 실천했던, 작은 선행 한 가지, 따뜻한 친절 하나가, 엄청나게 확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것을 작게 보지 않으시고, 크게 어여삐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작은 것이 작은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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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tcTKqt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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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태엽만 감을 줄 알면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영원히 삽니다.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면 이 세상에서부터 지옥을 체험하고 결국 그곳으로 갑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 안에 겨자씨와 누룩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와 누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2022)에서 한 중국 시골 노총각은 단돈 4만 원에 장애가 있는 여자를 아내로 사옵니다. 이런 관계가 잘 될 수 있을까요? 결국 잘 됩니다. 노총각은 사랑을 해 보지는 못했지만, 사랑은 주는 것임을 압니다. 아내도 남편의 진심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내가 사고로 죽습니다. 남편은 더는 살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아내를 따라갑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사랑을 몰랐을 것이고 그러면 더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알고 나서 사랑하지 않는 삶은 사는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하는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시계는 태엽을 감거나 건전지만 갈아주면 저절로 갑니다. 우리는 겨자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어떻게 자라는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겨자씨가 심겨지면 자라서 새들을 쉬게 할 수 있음만 알면 됩니다. 새들은 힘든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심겨지면 사람들을 쉬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도가에서는 이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합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떨어지면 나를 정화시킵니다. 밀가루 서 말은 곧 우리 안의 삼구, 곧 탐욕-성욕-교만을 꺾어 정화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덕이 생겨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기로 남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나 자신이 정화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붙어있기만 하려니까 저절로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도만 하면 됩니다. 기도란 은총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성찬의 전례, 말씀의 전례와 같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은 후였습니다. 그것을 읽으니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결혼 안 하고 혼자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성체에서 울려 나오는 다 주셨다는 그분의 목소리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저 사랑을 받아들이면 인간은 마치 다시 태엽기 감긴 시계처럼 째깍째깍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튜브 동영상에서 한 아빠가 코로나로 식당이 잘되지 않자 새 메뉴 개발을 한다고 힘들어 식당 의자에 앉아 엎드려 자고 있었습니다.
작은 딸아이가 아빠를 찾다가 피곤해서 자는 모습을 보더니 자기 조끼를 벗어 아빠를 덮어드립니다. 아빠는 자고 일어나 자기 등에 아이의 조끼가 있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것입니다.
삶에 힘이 빠진다면 사랑받지 못해서입니다. 그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기 위해 열심히 진리를 받아들입시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고 저 같으면 하.사.시.를 추천합니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그분께서 성체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느끼기만 해도 그분께서 우리를 감싸주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살 힘을 얻습니다.
연료를 넣지 않고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자동차는 없듯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우리에겐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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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순례 중에 ‘남양 성모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저는 성지를 담당하는 신부님을 보면서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경청하였던 마리아가 생각났습니다. 신부님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34년 동안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성모님의 성당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한결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저의 친한 동창 신부의 형님이기에 30년 전에 ‘남양 성모 성지’엘 몇 번 갔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빈들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었는데 34년이 지난 지금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성모님의 성당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성당에 자리를 잡기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괴로움은 동료 사제들의 몰이해와 오해였을 것입니다.
60이 훌쩍 넘은 신부님은 아직도 청년과 같은 ‘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지난 팬데믹 때입니다. 3000곳이 넘는 성모성지 중에서 남양 성모 성지가 교황청에 의해서 선택되었다고 합니다. 남양 성모 성지는 교황님과 함께 팬데믹 종식을 기원하는 ‘묵주기도’ 성지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교황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 30곳의 성지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성모님과 함께하려는 좋은 몫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은 성모 대성전 아래에 ‘예술원’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예술원에는 공연장, 극장, 식당, 카페, 전시관이 들어설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성모 대성전으로 향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했던 것처럼 신부님은 ‘예술원’이라는 그물을 던지려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성모님의 전구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번 성지순례 중에 4번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였습니다. 밀양의 김범우 토마스 하느님의 종이 있는 묘소에서 하였습니다. 거제의 윤봉문 요셉 복자가 있는 순교 탑에서 하였습니다. 전주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의 가족이 있는 묘소에서 하였습니다. 베티의 무명 순교자가 있는 묘소에서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모두 산이나 언덕을 오르는 곳에 있었습니다. 남양 성모 성지의 신부님은 기존의 십자가의 길과는 다른 십자가의 길을 ‘꿈’ 꾸었습니다.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십자가의 길을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지만 부활하셨던 것처럼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십자가의 길을 만들고 그 끝에는 순교자의 무덤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상으로 나와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것처럼 부활을 희망하는 그런 십자가의 길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신부님과 이야기하면서 ‘겨자씨’를 보았습니다. ‘누룩’을 보았습니다. 신부님께서 좋은 몫을 ‘선택’했으니 겨자씨는 큰 나무가 될 것입니다. 누룩은 부풀어서 맛있는 빵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이 넘쳐나는 신부님의 꿈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성모님의 사랑으로 신부님이 늘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사랑의 겨자씨, 희망의 겨자씨, 믿음의 겨자씨’를 키우면 좋겠습니다. ‘청빈의 누룩, 순명의 누룩, 정결의 누룩’을 키우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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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18-21: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에 비유되는 것은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모습이 믿음이 커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로 왔고, 들으므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씨가 뿌려진다. 믿음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희망으로 자란다. 그 나라는 신앙고백으로 퍼져나가고 덕행으로 넓어진다. 그러면서 많은 가지로 뻗어 간다. 그리고 그 가지들을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로 내어 준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 그 나라와 믿음이 우리 안에 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말씀하셨다.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열쇠를 받았다(마태 16,19 참조). 겨자씨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낮게 겸손한 모습으로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심으로 나무처럼 커지셨다. 고난을 겪으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시다. 복음에서 그분은 당신을 씨앗으로 표현하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금세 반죽 전체에 퍼져 제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서 이렇게 작용한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든다. 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고루 배어들어 영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우리는 이성적이며 거룩한 누룩을 마음에 받아들인다. 이 값지고 거룩하고 순결한 누룩 덕분에 하느님 자녀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누룩이시다. 반죽 속의 누룩이 겉모양이 아니라, 능력으로 반죽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을 능가하신다.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여인의 반죽이며, 여인은 하늘 지혜의 빛이 우리의 영을 속속들이 모두 덮을 때까지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주님을 숨겨 둔다.
우리 인간의 뜻과 욕망이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육을 거스르지 않을 때(갈라 5,17 참조), 우리 안에 변화, 즉 발효가 일어난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를 죽이면(로마 8,13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통해 생명의 숨을 얻었음을 알게 되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여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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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겨자씨, 누룩>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8-19)
‘겨자씨의 비유’는 표현만 보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처음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일로 시작되지만 그 일은 크고 위대한 일로 완성된다.”라는 말씀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항상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겨자씨의 비유’의 진짜 뜻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입니다. 그 일이 처음에 작고 보잘것없는 일로 시작될 때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인간들의 눈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일로 보이는 일이더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시작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뜻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라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겨자씨를 심어서 겨자나무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본래 의도를 생각하면,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 건설은 씨를 심는 일로 시작한다. 그 씨는 언젠가는 모든 민족들을 위한 나무가 된다. 너희는 그 씨를 심는 일과 심고 나서 가꾸고 돌보는 일에 동참하여라.”입니다.
우리는 씨를 심으면 그 씨에서 싹이 나와서 자라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그 일에 참여할 때, 그 일이 하나의 씨가 된다는 것을, 또 그 씨가 무엇인가로 자라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은 이 세상에 하나의 씨를 심으신 일과 같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이 먼저 하느님을 찾거나 부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인류 구원’은 인간들이 청하기도 전에,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고, 하느님께서 바라신 일입니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의 ‘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 12,10-11) 믿음 없는 인간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씨라고 생각해서 버렸지만(죽였지만), 그 씨에서 교회가, 또 하느님 나라가 크게 자라고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 하나의 씨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자신이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이라고 해도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작고 보잘것없는 씨에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학식이 많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그 교만 때문에 추락해서 보잘것없는 존재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20-21)
여기서 ‘누룩’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좋은 예가 초대 교회 때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7)
여기서 중요한 말은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 찬 신앙인들의 생활 모습이 당시 백성들의 마음을 변화시켰음을 나타냅니다. 신앙인들이 사는 모습 자체가 곧 ‘복음 선포’였습니다. ‘삶’ 자체가 누룩이었고, 그 누룩이 온 백성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 전에 먼저, 신앙인 자신이 신앙인답게 변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룩의 비유’는 그렇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가정에, 동네에, 직장에 신앙인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한 명의 신앙인이 사는 모습 덕분에 가정이 변화되고, 동네가 변화되고, 직장이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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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비유는 각각 겨자씨와 누룩을 은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두 비유는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한 쌍의 비유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대한 전반부 이야기(9,51―13,21)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팔레스티나 지방에 사는 주민들에게 친숙한 식물인 겨자씨를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작은 씨앗이 자라서 새들이 둥지를 만들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하는 현상을 예시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당신께서 갈릴래아에서 보여 주신 ‘현재’의 모습이 하느님 나라에서 보게 될 ‘미래’의 모습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이어서 누룩의 비유가 소개됩니다. 이 비유는 누룩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서 덩어리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설명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지만, 하느님 나라가 지닌 생명의 힘은 세상 전체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빵을 만드는 데 밀가루는 꼭 필요한 재료이지만 누룩이 없다면 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의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필연적 성장과 그 역동적 현상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비밀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지성을 초월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겨자씨의 성장은 신비로운 신적 권능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져올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이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비유로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참조) 여러분은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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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맨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작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닌 힘까지 작은 것은 아닙니다. 작은 씨앗이 나무가 되고, 또 누룩은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이유는 하느님 나라가 지닌 역동성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누룩이 부풀어 오르려면, 겨자씨를 땅에 심고,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이 지닌 역동성이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홀로 만들어 가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당신 나라를 완성하시는 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하여 오늘도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에 역동성을 부여하시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씨앗이 심어지지 않고 누룩이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이 지닌 역동성은 결코 발휘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신앙을 지녔지만, 하느님보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더 따르고 싶은 우리지만, 그런 우리의 손길을 하느님께서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꿈과 희망입니다.
그분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보잘것없는 힘이라도 보태고자 노력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곁에 세워지고,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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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겨자씨와 같다>
미술의 역사에서, 인상파를 탈피해서 점을 찍어서 그린 그림을 점묘화법이라고 하지요. 프랑스의 시냐크(Paul Signac 1863-1935), 쇠라(Pierre Seurat 1851-1891)는 이 점묘 화법의 좋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후에 네델란드 출신 테오 반 리세베르그(Theo van Rysselverghe 1862-1926)도 이 화풍에 합세해서 ‘돛단배와 항구’라는 그림을 이 점묘화법으로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점을 여러개 찍어서 그림을 완성한 느낌을 받습니다. 점들이 모여서 하나의 면을 이루고 그것이 원근과 공간을 표현해 주는 것이지요.
이들의 그림은 하나의 점들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더 확대해서 화폭에 자신의 그림을 아름답게 완성하는 것입니다.
미술의 이 점묘화법을 우리 인생에 대입한다면 오늘 하루는 나의 전체 인생에서 하나의 점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그림에서 점이 모여 하나의 물체를 그리듯, 사실 현재의 나의 삶은 나의 전체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루가 시시하고 특별한 것이 없어서 별 의미가 없다고 할지 몰라도 사실 ‘잘 지낸 하루가 잘 지낸 삶을 말해 주는 것이다.’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일상적으로 잘 볼 수 없는 ‘겨자씨’는 주님의 비유 말씀으로는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작은 겨자씨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장 18절-19절)
이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밀가루 속에 들어가는 누룩에도 비유하십니다. 눈에 보이기 힘든 작은 누룩이 그 밀가루 서 말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든 누룩이든 눈에 띄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땅에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면 새가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되고 밀가루 반죽에 넣는 누룩이 양은 작지만 그 밀가루를 부풀어 크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현재 작은 기도와 선행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큰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큰 것을 희망하고 거기서 결실을 이루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현실이 미소한 것이라도 가볍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당장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은 것에 희망을 두라고 당부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서 8장 24절-25절)
오늘 하루를 지내며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따뜻한 한 마디, 잔잔한 미소, 친절한 안내, 아름다운 말 한마디의 소중함을 알고 이웃에게 전합시다. 겨자씨의 비밀, 누룩의 비밀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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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교해 아주 보잘것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를 이룹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사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순간순간이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성장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 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으로 갈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을 스쳐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누룩이 반죽 된 밀가루 덩이를 통째로 발효시키듯,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과 인류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익을 찾는 이는 사랑을 갈망하고, 사리사욕을 찾는 마음은 희생 봉사로, 교만은 겸손으로 바뀔 것이고 어둠은 밝음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소리 없는 변화의 도구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런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런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17,21)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유대교 랍비와 신부님이 만났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어제 밤 꿈에 유다교의 천국을 보았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고 유다인들만 우글거리고 있더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간밤 꿈에 천주교인들의 천국을 보았지요. 밝고 화사하고 꽃이 만발한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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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장애물을 만나 목표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덜 중요한 목표를 추구하다가 진정한 목표에서 멀어진다.”
미국의 작가 로버트 브롤트의 말로, 크게 공감되는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 정상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펼쳐 보니, 예상처럼 산 정상과 전혀 다른 쪽으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첫 번째, ‘어차피 길은 하나로 통한다고 하잖아? 가다 보면 다시 정상으로 가겠지.’
두 번째, ‘그냥 산에 가기만 하면 되잖아? 굳이 정상에 가지 못했어도, 이 산은 간 거지.’
이런 마음으로는 산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산 정상이라는 목표를 결정했다면 산 정상만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 걸어야 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목표만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이 다쳤습니다. 다친 아이를 데리고 어디에 가겠습니까? 당연히 병원이고 병원만을 바라보고 바쁘게 뛰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목요일마다 신학교에 가서 강의합니다. 어느 날 강의하러 가기가 너무 싫은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싫다고 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강의하러 갔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이기에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인 ‘사랑 실천’이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이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목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작고 중요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바라보고 실천해 나갈 때, 목표에 가까워지면서 엄청난 결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점점 성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표에 가까워지면 어떨까요? 엄청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중요한 것을 과연 소홀히 해야 할까요?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사랑 실천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의 삶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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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품>
루카 13,18-21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나의 품>
힘들고 지친
벗 하나가
나의 작은 품에
스르르 깃들어
머물고픈 만큼
마냥 머물고
쉬고픈 만큼
맘껏 쉬다가
제 길 찾아 떠난
나의 빈 품에
벗 둘 벗 셋
수많은 벗이
머물고 쉬다
그렇게 떠나고
이내 또다시
그렇게 깃드니
자그마한 나의 품은
어느덧 사라지고
나는 어느새
벗들의 온누리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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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래 관조하고, 오래 관상하면>
누가 더 내세의 희망을 지니고 있을까? 누가 더 내세의 희망을 간절히 바랄까?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고 행복한 사람일까? 그 반대의 사람일까?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고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라지 내세의 희망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 삶이 고통뿐이고 행복이 도대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이 빨리 끝나길 바랄 것입니다.
이는 이번 시합에서 패색이 짙은 사람이 이번 시합은 빨리 포기하고 다음 시합이나 이길 것을 희망하며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그런데 고통뿐인 사람이 이 세상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들 모두가 내세 희망을 바라고 더 간절히 바랄지, 이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바라고 더 바라는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사랑은커녕 하느님 존재에 대한 믿음도 없는 사람은, 하느님으로 인한 내세의 희망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겠지요?
사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고통이 너무 오래가면 하느님 사랑을 의심하다가 아예 불신케 되고 희망도 꺾이곤 하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 없는 내세가 있겠습니까? 있다고 한들 그런 내세를 우리가 희망하겠습니까?
하느님 없는 내세를 우리가 살아낼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살아낼 수 있다고 한들 왜 삽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믿음은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희망의 근거입니다.
비록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특히나 고통 속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지속되는 고통 속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당황하거나 희망을 빨리 포기하지 않고, 지속되는 고통과 고통의 어둠을 관조하고 오래 관상하면, 마치 어둠이 오래되면 어둠 속에서도 보게 되듯 하느님 사랑이 차츰 보일 것이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그렇게 희망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내세를 기다릴 겁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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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소원>
-우리 하나하나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삽시다-
하느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늘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이점 잊지 말고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쓰는 강론이지만, 제일 힘든 일이 강론 쓰는 일입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매일 산을 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강론을 쓰는 일은 살아 있음의 확인이기에 살아 있는 그 날까지 하루하루 산을 넘듯 강론을 쓰려 합니다. 때로 생각이 안 날 때, 막막할 때 옛 시집을 펼쳐 봅니다. 18년전 2005년도 이때쯤 시가 눈에 띄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그렇다
흘러간 것들에 마음
아파해하지 말자
아쉬워하지 말자
쓸쓸해하지 말자
흘러간 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흘러간 사람은
사랑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사람에, 사랑에, 시간에 충실한 게 제일이다
이게 영원한 현재를, 젊음을 사는 길이다
흐르고 흘러도
늘 새롭게 만나는 주님이 우리의 기쁨이요 행복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예수님의 평생 화두가, 평생 희망이자 꿈이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삶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꿈의 사랑, 희망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꿈은, 희망은 바로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아니 이미 이런 하느님의 나라 꿈을 앞당겨 살고 있는 바오로입니다. 이런 궁극의 꿈이, 희망이 있어야 비로소 인내심을 지니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29일 교황님의 주일 강론중 한 대목도 감동적입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꿈꾸도록(dream)’ 불림을 받았으니 ‘꿈꾸는 교회’ 바로 이게 교회입니다. 모든 이의 종, 가장 미소한 형제자매들의 종인 교회의 꿈입니다. 교회는 결코 좋은 행동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영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교회는 모두에게 활짝 열린 문들을 지닌 ‘자비의 안식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겨자씨와 누룩의 한쌍의 비유도 하느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현실과 유리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임을 가르쳐주고 깨우쳐줍니다. 이 비유자체가 우리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다.”
너무 평범하고 자명한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비단 겨자씨만 아니라 눈만 열리면 곳곳에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로 가득합니다. 봄에 꽃피고 가을에 큰 열매들을 낸 배나무들, 연약한 배추모종이 큰 배추가 되어 먹게 된 일 등, 참 놀라운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놀랍다, 새롭다, 좋다 이게 하느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눈만 열리면 늘 놀랍고 새롭고 좋은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배수확이 끝난 “텅빈 충만”의 넉넉하고 편안한 배밭사이 오솔길 산책 역시 하느님 나라의 체험입니다. 만일 흉작이었다면 텅빈 충만이 아닌 “텅빈 허무”의 참 쓸쓸한 배밭의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새삼 우리의 가을 인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중에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하고 확장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요,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중에 활짝 깨어 관상의 눈, 관상의 귀로 하느님의 나라 현실을 잘 보고 잘 들으며 하느님께 최대한 잘 협조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적변화의 현실을 가리킵니다. 누룩이 상징하는바 무궁무진합니다. 부패인생을 하늘 나라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누룩같은 효소들이 바로 희망이요 기쁨이요 감사요 기도요 성령이요 말씀입니다. 희망의 누룩, 기쁨의 누룩, 감사의 누룩, 성령의 누룩, 말씀의 누룩, 기도의 누룩등, 개인은 물로 공동체를 내적으로 변화시켜 하늘 나라의 현실을 체험하고 살게 합니다.
성장하는 겨자씨같은 개인이나 공동체, 변화시키는 누룩같은 개인이나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겨자씨처럼 작았던 요셉수도원이 이제는 많은 이들이 깃들 수 있는 커다란 나무로 계속 성장중에 있고, 또 알게 모르게 세상의 누룩이 되어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 가득한 하느님의 나라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 또한 수도원의 존재이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말씀의 겨자씨”가 잘 자라게 하시고, “성체의 누룩”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 모두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사랑의 겨자 나무”가 되고 “주님 사랑의 누룩”이 되어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궁극의 꿈이자 소원은 우리 하나하나가,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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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루카13,18)
<작음의 기적!>
오늘 복음(루카 13,18-21)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에 비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크기가 참깨만 한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그것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누룩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 없으면 결코 맛나는 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보잘것없어 보이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것에 충실할 때,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을 귀하게 여길 때 마주하게 되는 나라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만든다.'
이것이 바로 '나비효과'입니다.
'나의 작은 기도, 마음, 관심(사랑), 작은 몸짓들, 말 한마디, 미소, 내미는 손, 희생, 감사 등등'
오늘 복음이 '하느님의 나라와 기적은 이 작은 것들로부터 시작된다.'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독서(로마8,18-25)의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8,24-25)
'우리의 희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희망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라는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어제 함안성당에서 마산교구 가톨릭 우리농본부가 주관한 추수감사제 미사(11시)가 있었는데, 신은근 바오로 교구장 서리 신부님의 강론 말씀 중에서, "감사는 계속 감사를 낳고, 불평은 계속 불평을 낳는다."라는 말씀이 의미 깊게 다가왔습니다.
'감사의 기적'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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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HoVFT_fF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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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 19)
겨자씨가
자라나
겨자 나무가
됩니다.
자라나는
모든 순간이
축복의
순간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도
변화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변화를
살려내시는
변화의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오늘이
자라나는
변화의
오늘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을
위한 변화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를 위한
구원은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변화가
벗어놓은
옛것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변화를 통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씨앗은
변화를 따라
구원의 길을
만듭니다.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느님 나라의
지극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지극한
하느님의 나라는
변화의 기쁨
변화를 위한
기다림을 위한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자라나는 변화를
믿고
자라나는
변화를
기다려주는
행복입니다.
깨어나는
씨앗과 누룩의
행복입니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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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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