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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慶(문경)에서 전해오는 '朴正熙 교사 傳說'
"朴 선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 언덕에 올라 나팔을 불어 마을사람들을 깨웠다고 합니다. 그분은 대통령이 된 뒤엔 한국인들을 깨워서 가난을 물리치도록 한 사람입니다."
趙甲濟
지난 금요일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강연회가 있어 서울 강남 터미널에서 오전 9시10분에 버스를 탔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따라 정확히 두 시간 만에 문경시 점촌에 도착했다. 시청은 점촌에 있다. 문경문화원에서 있은 나의 강연 제목은 '박정희의 네 얼굴: 교사, 군인, 혁명가, CEO'였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에서 5년간 공부하고 졸업, 1937년 초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3년간 학교 앞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그 하숙집이 청운각이란 이름의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6년 전에 찾았을 때는 안내하는 사람도 없이 스산했었는데 이번에 가 보니 기념 전시실도 마련되어 작지만 情感(정감)이 가는 시설로 확충되어 있었다. 창원에서 온 관광버스에서 내린 이들이 작은 영사실에서 박정희의 교사 시절을 다룬 비디오를 본 뒤 나오고 있었다.
이 비디오에서 청운각 보존에 공이 많은 박남우 선생이 이렇게 설명했다.
"朴 선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 언덕에 올라 나팔을 불어 마을사람들을 깨웠다고 합니다. 그분은 대통령이 된 뒤엔 한국인들을 깨워서 가난을 물리치도록 한 사람입니다."
한국인의 잠자던 야성을 깨우고 에너지를 폭발시킨 분이 박정희다.
비디오엔 생존 제자들이 등장, 스승 박정희 교사와 얽힌 에피소드를 전했다. 겉으론 엄격하지만 속이 깊고 따뜻하였던 분, 정의감이 강하고 민족혼을 심으려 애썼던 분, 못 사는 집안의 아이들을 특히 아껴주셨던 분, 맨발로 다니는 아이에게 검정 고무신을 선물하셨던 분, 학교에서 보관하던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고 교장에게 혼이 난 아이들을 당직 때 불러 고구마를 삶아주시던 분,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살려낸 분 등등.
박 대통령은 親族(친족)들의 부탁은 매정하게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자들의 부탁은 잘 들어주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교사, 군인, 혁명가, CEO의 네 얼굴을 가졌지만 바탕은 교사적 자질이었다.
박정희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년) 교사로 근무하다가 군인의 길로 들어섰기에 교사로서의 박정희는 불만에 차 있어 불성실한 근무 자세를 보였을 것이라는 선입감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오해다. 교사 박정희는 대구사범에서 배운 全人 교육을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실천하려고 했고 김영기 등 조선인 교사들로부터 배운 민족혼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려고 했던 이였다. 한 제자(주영배)는 그를 ‘方定煥(방정환) 선생을 연상시키는 선생님’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1962년에 작성된 《이낙선(작고·전 상공부장관·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 비망록》 중에서 박정희 선생의 제자 鄭順玉(정순옥)의 회상기를 싣는다.
<글이라 하기엔 부끄럽습니다만 20년 전 은사로 모셨던 선생님을 지금 이 나라 영도자로 모시게 되니 기쁨과 두려움을 금할 길 없어 어린 시절 제자로 돌아가서 기쁘고 슬펐던 추억을 몇 가지 더듬어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의 학교에 부임하셨을 때 저는 소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이 저의 집을 찾아와 새로 오신 선생님께 가보자고 하기에 선생님 하숙집을 찾아갔습니다. 어린 호기심에 선생님 방안은 얼마나 장치가 잘 되어 있나 하고 방안을 살펴 보았습니다. 선생님 책상 위에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사진에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주룩 달려 있는 외국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면서 그의 전기를 자세히 이야기하여 주셨습니다. 4월 어느 날 봄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가지고 학교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등산복에 어깨에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장난을 하거나 줄이 비뚤어지면 한 대씩 맞아가면서 목적지인 鎭南橋(진남교)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즐겁게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다고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박 선생님은 깊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이 죽는다고 고함을 치며 다른 5~6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둑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한참 만에 박 선생님이 다 죽은 아이를 물 속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인공호흡을 시켜 물을 토하게 하니 그제서야 깨어나는 아이를 보니 선생님이 하느님같이 고마웠습니다.
어느 일요일 저희들은 박 선생님과 일본 선생 두 분이 노는 자리에 갔습니다. 일본 선생 한 분이 말하기를 조선 여성은 예의가 없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고 우리나라 여성들의 흉을 보고 있었습니다. 박 선생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우리말로써 “너희들 저 말 잘 새겨들어라”고 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은 우리끼리 있을 때는 꼭 우리말을 쓰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철없는 우리들은 아무 의미도 모르고 “선생님 조선말 하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래요” 하고 반박을 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어느덧 우리들은 6학년이 되었습니다. 그해 봄 소풍은 5, 6년생이 우리 학교에서 70리나 되는 산고개를 넘어 金龍寺(김룡사)라는 데에 가서 하룻밤을 쉬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소낙비를 만났습니다. 우리 어린 것들이 70리 산고개를 다 넘도록 비는 그치지 않아 미끄러져 웃는 아이, 넘어져 우는 아이, 고인 물 속에 일부러 들어가 첨벙대는 아이… 웃으며 울면서 넘어가고 있는데 먼 행길이 보이면서 트럭이 한 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인솔하는 선생님께 저 차를 잡아가지고 우리들을 태워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 트럭은 우리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차는 바로 박 선생님이 우리를 마중하려고 몰고 오신 차였습니다. 저희들은 물귀신처럼 되었지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차에 태워 주시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래를 부르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지고 오신 나팔을 부시면서 우리들에게 용기를 나게 하셨습니다. 서글펐던 소풍이 웃음과 즐거움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합니다.
저희들이 졸업한 후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편에 박 선생님께서 학교를 그만두시고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섭섭하여 선생님을 뵈러 학교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안 하시고 가서 편지를 해주겠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또 “너희들에게 꼭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은 공부 잘하여 씩씩하고 굳센 조선 여성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을 다시는 못 뵈올 줄 알고 울었습니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편지를 보내 주셨는데 봉투에 만주군관학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편지 구절에는 언제나 ‘공부 잘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다오. 올해도 풍년이 들어 잘살 수 있도록 기원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선생님
박정희 교사에 대한 제자들과 주민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이런 이미지이다. 아침마다 나팔 불고 청소에 철저한 사람, 운동과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학생들과 잘 놀아 주는 선생, 일본사람들에게 얕보여서는 안된다고 끊임없이 투지를 불어넣어 주던 분, 貧富貴賤(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사랑한 사람, 일본인들도 어려워 한 대담한 배짱, 술을 좋아하는 교사, 가정 방문을 많이 하고 학부형들과 잘 어울렸던 선생, 나팔·스파이크 달린 운동화·목검으로 기억되는 사람, 그리고 교사로 만족할 분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 선생. 周永培(주영배·전 초등학교장)는 자신이 3학년일 때 막 부임해 와서 담임이 되었던 박정희를 이렇게 묘사했다(《이낙선 비망록》에 있는 증언록 발췌).
<박정희 선생님은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청소시간에는 마스크를 하고 나와서 총채를 휘두르면서 학생들과 같이 청소를 했다. 깔끔한 성격의 그분은 청소에는 매우 까다로웠다. 청소 당번이 가서 “청소 다 했습니다”라고 보고하면 꼭 와서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꼼꼼히 살펴보고 부족한 점이 발견되면 두 번 세 번 “다시!” 하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거나 유리창을 닦는 청소를 할 때는 키가 작은 어린이들이 할 수 없으므로 박 선생이 직접 해주기도 했다. 방과 후에는 어김없이 운동장에 나가 철봉 체조를 하고 달리기를 했다. 박 선생은 5학년에게는 조선어를 가르쳤다. 한글을 배워야 민족혼을 이어 갈 수 있다고 암시했다. 나는 5학년 상급생들이 “박 선생은 사상가야”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상급생들이 “왜 우리나라가 망했지”, “우리나라의 국기는 어떻게 생겼나”라고 소곤대는 것을 듣고는 박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박 선생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은 분이었다. 모든 학급원을 똑같이 대우해주시면서 개성을 살려 주셨다.>
주영배는 박정희가 자신의 집을 찾아 준 일을 평생 잊지 못하겠다고 썼다.
<가정 실습 지도시 문경에서 12km나 떨어진 벽촌에 있는 저희 집에까지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뻐서 부모님에게 여쭈었더니 “이렇게 먼 곳까지 오시겠니”라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정말 오셨습니다. 농촌이라 별다른 접대는 없었지만 만족하시고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모습이 山麓(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어요.>
제자 全慶俊(전경준)은 “선생님은 열등아나 사고아 등의 가정을 자주 방문했다”고 기억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떼내어 도와주었다고도 한다. 박 선생은 또 학교에서 가까운 제자 咸成伯(함성백)의 집에 종종 찾아와서는 그의 형과 농업 진흥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학교에선 農繁期(농번기)인 봄·가을에 학생들에게 4∼5일씩의 휴가를 주어 농사와 가사를 돕도록 했다. 이 기간에 박정희는 학급원들의 가정을 찾아가서 농업과 家事 실태를 조사했다. 제자 김경운은 자기 집을 찾아온 박 선생이 보리밥과 살구를 맛있게 먹고 가던 기억을 오래 간직했다.
제자 李永泰(이영태)는 박정희 선생이 조선어 시간에 태극기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복도를 향해서 立哨(입초)를 배치한 뒤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대구사범 때 김영기 선생이 쓰던 방법이었다. 박 선생은 또 음악시간엔 '황성옛터'와 심청이의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이영태는 박 선생을 통해서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영태는 박 선생이 경찰 지서의 사찰주임인 오가와 순사부장하고 자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제자 朴俊福(박준복)의 증언에 따르면 박 선생은 일본인 교사들하고도 사이가 좋았는데 아리마 교장과 야나자와(柳澤) 교사와는 말다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박정희가 담임했던 5학년의 급장이었던 申現均(신현균)은 박 선생이 특히 우리말의 지도에 열성을 보였다고 기억했다. 박 선생은 운동회 때 100m 달리기에서 일본인 교사 쓰루다에게 졌는데 연습을 많이 하여 다음 시합에서는 그를 물리쳐 문경에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박 선생은 제자들을 모아서 나팔조를 만들고 지도했다. 박 선생은 새벽 4∼5시만 되면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나팔을 불었다. 마을 사람들은 “야, 박 선생 나팔소리다. 일어나서 소여물을 끓여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잠든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대구사범 동창생들에게 ‘박정희’ 하면 즉각 ‘나팔수’란 말이 떠오르듯이 문경사람들에게 ‘박 선생’ 하면 ‘새벽 나팔소리’가 연상된다. 제자 신현균은 1962년에 ‘지금도 아침 6시 서울제일방송에서 기상 나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간절합니다’라고 썼다(《이낙선 비망록》).
박정희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서 악단을 만든 뒤 출장공연도 했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에 “산으로 둘러싸인 문경이 답답하게 느껴졌다”고 회고했었다. 답답한 것은 地形 (지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한 박 선생에게 있어서 나팔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소년기에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傳記(전기)를 읽으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고 대구사범 시절에 그런 소질을 확인한 박정희는 교사가 되어서는 그 꿈을 구체화시키게 된다. 박 선생이 부임한 첫해, 그가 담임했던 3학년 반의 급장이었던 주영배(전 초등학교 교장)는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박 선생이 심심하면 자신에게 “니는 임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서 되받은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러면 이 담에 뭐가 될낍니꺼.”
“나. 나중에 봐라. 나는 대장이 될란다. 전장에 나가서 용감히 싸워 이기는 대장이 될란다.”
“나는 대장이 될란다”는 말이 박정희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내력은 오래이다. 대구사범 시절 동급생으로서 친하게 지냈던 金昞熙(김병희·전 인하대 학장) 회고록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 신관 복도에서 이성조, 박정희와 나는 北窓(북창) 너머 흰 구름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한 조선 사람이 ‘前途多望(전도다망)’을 일본어로 ‘젠토타보’가 아닌 ‘젠토타바’로 읽은 데 대해 핀잔을 주던 중이었다.
박정희: 우리는 과연 ‘젠토타바’일까.
이성조: 평생 선생질이나 해야지. 운이 좋으면 군수까지는 될 수 있다더라만.
김병희: 군수가 되면 뭘 해, 왜놈의 종질이지. 그러나저러나 조선 사람은 아무리 날뛰어도 관리생활에서는 현실이 증명하듯 도지사가 한계란다.
박정희: 나는 선생질 때려치우고 군인이 될 거야.
김병희: 넌 나팔을 잘 부니까 군악대장이 될거야.
박정희: 아니야, 나는 육군대장이 될 거야.
이성조: 엿장사 마음대로. 의무 연한은 어쩌고. 나는 의무 연한만 채우면 선생질을 때려치우고 발명가가 될란다.>
1959년 박정희 장군은 당시 중앙대학 교수이던 김병희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이 ‘젠토타바’로 시작된 학창시절의 대화를 기억해내었다.
“병희야, 우리 동기 중에 니가 가장 출세했구나. 그러나 이놈아 두고 보자. 계엄령만 내리면 넌 내 앞에서 꼼짝 못하겠지.”
문경의 박 선생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아이들을 불러모아서 학교 앞산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편을 갈라서 전쟁놀이를 시켰다. 나무 막대기를 주워 와서 총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박 선생은 목검을 들고 ‘얏, 얏’ 하면서 검도도 가르쳐 주었다. 제자 朴命來(박명래·전 점촌초등학교 교장)는 가을 운동회 때 박 선생이 지도하여 전쟁놀이를 단체 경기로 보여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목총을 만들게 하여 실을 잡아당기면 화약이 터져서 폭음이 들리도록 했다. 박 선생은 재빠른 아이들은 일본군으로, 동작이 굼뜨는 아이들은 중국군으로 편성하여 高地戰을 벌이는 연출을 했다. 물론 중국군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났다.
6학년생 박명래는 중대장이 되어 “돌격!” 하면서 달려가니 많은 부하들이 따라 주어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학예회 때도 박 선생의 학급에서는 ‘지원병 출정’이란 제목의 연극을 했다. 각본은 박정희가 썼다. 당시 군국주의 분위기에 호응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확대시켜 대륙의 심장부로 밀려들고 있었다. 난징(南京)과 쉬저우(徐州)가 함락되자 일제는 보통학교까지도 학생들을 모아서 축하대회를 열도록 했다.
1939년에 1학년 담임이었던 박 선생은 숙직실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숙직하는 날에는 학생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1학년 학생들은 집에서 저녁을 먹고 놀러갔다. 박 선생은 귀한 과자를 어디서 구했는지 아이들에게 나눠 준다는 소문이 돌아서 과자를 얻어먹으러 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종기는 숙직실에서 들은 박 선생의 구수한 이야기를, 입안에서 녹아들던 과자 맛과 함께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우리글과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순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일본의 영웅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패주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거북선 그림을 그려가면서 실감 있게 전투장면을 묘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놈들이 배 지붕으로 올라오면 송곳으로 찌르게 만들었다느니 물 속으로 잠수까지 했다느니 하시면서 몸짓을 해가며 연기를 하시는데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박정희는 아리마 교장을 설득하여 나팔 네 개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박영래, 조영호, 전세호, 홍봉출을 나팔수로 뽑아 지도했다. 이들은 한 달 후부터는 조회 시간에 등장하여 학생들이 조회를 끝내고 교실로 들어갈 때 나팔 소리에 발을 맞추도록 했다. 운동회나 遠足(원족, 소풍의 일본식 표현·편집자 注) 때도 나팔수들이 행진곡을 불어 분위기를 돋우었다. 박정희는 1938년에는 이미 만주군관학교에 시험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김순아 여인의 하숙집을 나와서 학교 숙직실에서 기거하기 시작하면서 시험 공부를 할 시간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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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의 문경 기행
며칠 전 경북 문경시를 다녀왔다. 市에서 운영하는 강좌에서 '한국 현대사의 흐름'이란 제목의 강연을 했다. 서울 도심에서 출발하면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 잔 하고도 2시간30분만에 문경에 도착할 수 있다.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로 내려가니 가을이 깔리기 시작한 山河가 상쾌했다.
문경에 일찍 도착하여 음식점에서 일행 세 사람이 식사를 했다. 조기조림 세 마리, 고등어조림 한 마리, 파전 하나를 시켜서 된장 한 그릇을 중심으로 맛있게 먹고나니 3인분 값이 1만5000원이었다.
주인한테 '문경은 한자로 어떻게 씁니까'하고 물었다. 40대의 통통한 얼굴을 한 주인은 자신있게 답변했다.
'문 門에 서울 京이지요'
'왜 그렇게 쓰게 되었습니까'
'옛날에 서울로 갈 때 여기가 관문 아니었습니까. 북쪽 새재(鳥嶺)를 넘어야 서울로 갈 수 있었거든요'
물론 문경의 한자표기는 聞慶이다.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다. 즉 문경에 살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희망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문경이라고 한글로만 표기해놓으니 아름다운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강연장엔 주로 50代 이상 주민들이 참석하여 경청해주었다. 지난 7월 충북 丹陽郡(단양군)에서도 느꼈지만 이런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자세와 옷차림, 그리고 질문 수준은 서울과 같다. 聞慶시청 사람들은 李明博 전 서울시장의 브랜드가 된 남북 大運河 계획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충북 수안보의 남한강과 문경의 낙동강(枝流) 상류를 지하 터널로 연결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핵심이다. 그렇게 되면 문경은 내륙항구가 되어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긴다는 기대감이었다.
문경은 1000미터급 산으로 둘러싸여 답답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2년여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朴正熙는 그런 답답함을 트럼펫으로 달랬다. 아침 일찍 하숙집에서 일어난 朴교사는 定時에 트럼펫을 불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문경읍 사람들은 '朴 선생 나팔소리다. 이제 일어나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그 박정희 교사가 하숙했던 집은 '청운각'이란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방명록은 있으나 관리인이 보이지 않았다. 설명을 해줄 사람도 없었다. 7년 전에 들렀을 때도 그러했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대구사범 재학중 결혼했던 박정희는 신혼살림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 하숙집에도 혼자 있었다. 제자들은 총각선생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에겐 자상한 선생이었지만 일본인 교장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그는 만주로 떠나 군인이 되었다. 그가 문경에서 부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면, 日帝下 교사직에 만족했더라면 그는 군인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고,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한국의 현대사도 다소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죽은 지 27년이 지났으나 대한민국은 아직도 그를 기념하기 위한 건물 한 채도 지어주지 않고 있다. 건국 대통령 李承晩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金九 기념관은 굉장하다. 여론조사에선 박정희가 세종대왕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국민들의 지지가 현실의 세계에서 무력화된 이유는 물론 대한민국의 건국과 근대화를 부정하는 좌파의 득세 때문이다.
문경에서 돌아오는 車中에선 이미자 노래 테이프만 들었다. 바깥이 캄캄해서 경치 구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2014-11-24, 17:26 ] 조회수 : 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