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S2잃어버린5000년찾아서S2 원문보기 글쓴이: S2다물추모S2
[불멸의 제국 가야] 고대 4대국 '가야' 삼국사기서 의도적 삭제 | ||
3인 정담 | ||
부산일보 2004/09/10일자 042면 서비스시간: 08:53:15 | ||
소설가 최인호씨의 본격 가야사 소설 '제4의 제국'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가야사 대담을 꾸몄다. 대담에는 최씨와 고고학과 문헌사학 분야에서 가야사의 권위자인 신경철 부산대 교수,그리고 김태식 홍익대 교수가 참석했다. 대담은 지난 6일 본사 회의실에서 열렸고,대담 후 복천동 고분군을 둘러보았다.
△최인호=가야사는 한국사에서 아직껏 실종돼 있습니다. 이번에 자료를 검토한다고 논문들을 보니 무슨 이방인의 역서 같더군요.
이런저런 얘기는 뭔가 많은데 주관적이고 제각각이며,취할 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위험한 것 같고 말입니다. 마치 분명히 있으나 실체가 없는 전설 속의 용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일견,그 실체 없는 용의 꼬리에 올라탄 기분이었습니다.
△김태식=백제는 부여,신라는 경주 중심으로,그러니까 고도(古都)를 하나의 강고한 중심으로 삼아 그 역사적 의식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가야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경남 전체에 걸쳐 '나는 가야의 후손이다'라는 의식으로 남아있습니다.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가야를 아끼는 마음이 경남 전역에 퍼져있다는 것입니다.
△최인호=아주 좋은 일입니다. 경주와 부여를 역사적 고도라고 하지만 부산에 들어서니 '문화의 도시,부산에 잘 오셨습니다'라는 문구가 보였습니다. 문화의 도시,란 문구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염두에 둔 것인데 저는 차라리 부산과,그리고 김해를 '역사의 도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4의 제국인 가야를 잉태한 고도로서 말입니다. 지리적 자각과 자부심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야사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김태식=가야가 끼고 있던 낙동강은 대단합니다. 고대사 3대 강의 하나였습니다. 낙동강은 일본 문화와 관련한 고대사의 창구였고,대동강은 중국 문화권과 밀접했고,한강은 그 가운데서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권역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낙동강 유역 가야권에 변진 12국,6가야,22국의 형태로 소국이 다양하게 있었습니다. 일찍이 국가와 왕이 있었다는 것이죠. 신라가 아직 여물기도 전에 말입니다.
△신경철=고고학적으로 볼 때 4세기 대까지 신라의 문화적 정체성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낙동강 하류 권역의 가야 지역은 달랐습니다. 이 지역에는 언어를 같이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가야다'라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제가 보건대 이 지역은 일찍이,그러니까 기원전 4세기 말부터 한국 철기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때 석기가 갑자기 소멸합니다. 철기로 대체됐다는 것이죠. 물론 철기는 재가공해서 썼고,무덤의 부장품으로는 청동기를 넣었습니다. 철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문명에서 또 하나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철의 왕국 가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가야는 자체의 역사서도 편찬했을 것입니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원래 '사국사기'여야 하는데 가야의 역사를 담아야 할 '가야본기(加耶本記)'가 의도적으로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 신라가 가야를 없앴다
△김태식='가야본기' 부분은 신라에 의해 누락됐을 겁니다. 신라는 7세기 경,고구려 백제 신라를 아우르는 삼한(三韓)을 통일했다는 관념을 지니게 됐습니다. 삼한을 한반도 전역으로 보았던 것이죠. 하지만 원래 삼한이란,한강 이북의 고구려를 뺀 한강 이남을 말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애초 삼한이란 개념 속에는 가야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고구려로 대체했던 거죠. 신라는 가야(562년)를 백제(660년)보다 98년 앞서 합병한 까닭에 가야를 당연히 자기 것으로 여기면서 가야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한국 고대사의 정형으로 만들어졌고,신라의 후손인 고려의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가까스로 고려 말에 일연이 삼국 '나머지의 일'이란 뜻의 '삼국유사'에서 가야를 고조선 발해 등과 더불어 언급했습니다. 조선에 들어 가야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던 것은 '7년 전쟁(임진왜란)' 이후입니다. 전쟁 당시 옛 가야 지역에서 특히 많이 일어났던 의병은 광해군 때의 대북파(大北派)정권(조선 이전의 역사에서 경남 사람들이 집권했던 유일한 정권이다)으로 수렴되고 가야사에 대한 자각을 심었습니다.
이후 그것은 역사서 '동사강목''지봉유설'의 '4국 시대관'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 싹은 일제에 의해 처참하게 잘렸습니다. 가야는 4국이 아니라 일본에 속하는 '임나'로 전락됐습니다. 4국 시대는 그렇게 정착의 기회를 놓쳤던 것입니다.
△최인호=20년 전에 백제를 다룬 '잃어버린 왕국'을 쓰면서 일본은 백제지향적이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백제가 영향을 주기 전인 4~5세기의 일본은 가야를 빼놓고 말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습니다. 예컨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인덕천황은 가야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가야는 일본 역사의 머릿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가야와 왜가 뒤섞인 제4의 제국을 추론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은 금관가야의 유적인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발굴 성과를 보고서 전율로 이어졌습니다.
가야 유적에서 통형동기 파형동기 따위의 왜계 유물이 대량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광개토대왕비가 증명하듯 광개토대왕 당시에 가야와 왜는 뒤섞여 있습니다. 상당히 논쟁적이지만 그것은 아마도 가야와 왜가 운명 공동체,즉 하나의 제국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까지 가능하게 합니다.
# 가야와 왜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
△신경철=운명 공동체라는 것에는 다양한 뉘앙스가 있습니다만,하나의 제국이라는 얘기는 지나친 것입니다. 가야와 왜가 하나의 제국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의 이데올로기,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공동의 제사 형태,즉 무덤 양식이 전제돼야 합니다. 하지만 4~5세기 가야와 일본 고분시대의 무덤 양식은 다릅니다.
가야는 목곽묘로 내부 지향적이었던 데 반해 일본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으로 외관 지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라 밀접합니다. 그 점이 미묘합니다. 일반적으로 중국 남조-백제-가야-왜가 하나의 라인을 형성하고,중국 북조-고구려-신라가 또 다른 라인을 형성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분명 가야와 왜는 아주 가까운 관계이며,더욱이 가야의 선진 철기 문화는,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 고분시대를 이끌어냈습니다. 가야의 철 때문에 일본의 역사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일본의 고분시대에서 4~5세기는 변혁의 시대였고,북부 규슈 정권에서 오사카 일대 긴기(近畿)의 야마토(大和) 정권으로 전환된 시기였습니다. 야마토 정권은 가야의 철 수입 루트를 장악해,즉 철기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4~5세기의 가야와 왜는 주목해야 합니다. 가야가 선진 철을 일본에 공수했지만,일본의 주민들은 직접 가야에 와서 왜계 가야인(倭系 加耶人)으로 정착해 살기도 했습니다.
또 가야는 급할 때 왜의 용병도 불러온 것으로 보입니다. 서민들이 사용하던 일본계 토기(하지키·士師器)가 부산 김해에서 나온 것 등이 그 증거입니다. 최 선생이 언급한 광개토대왕비문으로 돌아가서,가야와 왜가 그런 관계에 놓여있었다면 당시 고구려의 눈으로 볼 때 굳이 복잡한 구분않고 가야를 변방의 미미한 존재로서 그냥 왜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태식=가야는 중앙집권적인 체제이기보다는 교류 중심의 체제였습니다.
당시의 왜는 가야의 소비자로서 이를테면 일본의 야마토 정권은 소비자 중심의 세력이었고,가야는 그 소비처가 있었기에 더욱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야는 좀더 우월한 위치에서 왜와 밀접했습니다. 그게 가야와 왜가 뒤섞이는 지점들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가야본기'는 빠졌지만,가야가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가야와 왜를 관련시켜 많이 서술하고 있고 아예 가야를 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가령,왜가 동해 바다를 통해 신라에 쳐들어왔다는 식의 기록에서 그 왜는 일본이기도 하지만,어떤 경우 가야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삼국사기의 '왜'는 미개한 족속이라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광개토대왕 전후에 황해도에 왜가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였을 것입니다. 고구려 입장에서 백제는 할아버지(고국원왕)를 죽인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고구려는 백제를 무시하고 싶었을 겁니다. 당시 백제는 가야와 왜의 용병도 갖추었을 것인데 고구려는 그들을 멸시하는 감정으로 뭉뚱그려 '왜'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왜'의 다양한 용법이자,백제 가야 왜로 통하는 하나의 라인을 느끼게 하는 바입니다.
△최인호=신 선생의 논문을 보면 김해 대성동고분군 세력은 5세기 대에 종적을 감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성동의 주력은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의 변혁을 이끌어 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일본으로 넘어간 대성동고분군 세력이 '일본서기'의 신공황후,15세 응신천황,16세 인덕천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추론합니다. 그들이 아마도 가야 계통의 지배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야계였던 그들이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야와 왜가 공동 운명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가야와 왜가 공동 운명체였고 연합왕국이었을 수 있다는 것은 미지의 점들을 많이 열어주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북방의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에 와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한반도 남부와 일본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는,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과 상통하는 점이 있긴 합니다만,'기마민족설'을 세부적으로 보완하면 큰 틀은 취할 바가 많을 것 같습니다.
# 가야는 한국·일본서 모두 서자 취급
△신경철=일본의 정서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일본은 백제지향적이며 가야를 멸시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백제의 고도 부여를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인 '나라'와 비슷한 곳이라며 향수 달래듯 찾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가야는 임나(任那)라며 정복했던 곳으로만 부각시켰을 뿐,일본 역사와 문화의 원류로서 조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야는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서자 취급을 받고 있는 양상입니다.
△김태식=가야는 5세기까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중엽 이후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학자들의 글과 말은 대개 어려운데 이번 소설을 통해 가야사가 언어의 힘을 통해,삶의 차원에서 더욱 가깝게 다가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인호=저는 역사는 침묵하는 게 아니다,라는 걸 느낍니다. 대성동고분군에서 그 침묵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만,제가 열심히 쓴다면 숱한 가야의 혼령들과 유민들이 저를 도와줄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그 믿음 속에서 '가야가 이제는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정리=최학림기자 theos@
사진=정종회기자 jjh@
|
출처:부산일보
첫댓글 양심위에서 잠자는 지식인이 칼든 도둑놈보다 더 무섭다는 얘기가 생각납니다. 고대사를 비롯한 역사를 도둑맞고 왜곡되었다면 이를 바로잡는 노력을 해야지요. 형제야 죽든말든 저만 잘난체하는 그런 알량한 덜 떨어진 지식인이 되어서는 아니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