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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오탁번
멋대로 해도 될 나이에서 에헴 !
오탁번 시인은……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 고려대 영문과,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손님》 《우리 동네》등 다수. ●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김삿갓문학상, 고산문학상 등 수상. ● 고려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 역임. ● 현재 《시안》 발행인, 고려대 명예교수.
초등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두 분의 선생님이 계신다. 내가 5학년 때 조중흡 교장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왔다. 콧수염을 살짝 기른 무서운 선생님이었는데 방과 후에 문예반을 직접 지도했다. 학년마다 우등생을 뽑아서 직접 글짓기 지도를 했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교장 선생님이 칭찬해주신 내가 쓴 글은 “바람이 옥수수 잎을 어루만지며 지나갑니다”라는 아주 짤막한 글이었다. 그분은, 내가 커서 알게 되었는데, 소설 〈낙동강〉을 쓴 작가 포석 조명희의 조카가 되는 분이었다. 그러니까 시골학교에서 교장의 신분으로 문예반을 만들어 학생들은 직접 지도까지 하는 열정을 보였던 것이다. 내가 지닌 문학적인 싹을 최초로 알아보신 분인 것 같다.
권영희 선생은 충주사범을 갓 졸업하고 교사로 첫 부임하였다가, 공부는 잘하지만 눈만 큰 가난한 나를 만나서 대뜸 누나가 돼준 분이다. 지금 불러보아도 다정다감한 ‘영희 누나’는 그때부터 우리 집의 친딸처럼 지냈다.
내가 백운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충주사범을 갓 졸업한 권영희 선생님이 나의 담임교사로 부임해 왔다 내 생애의 한복판에 민들레꽃으로 피어서 배고픈 열한 살의 나를 숨막히게 했다 멀리 솟은 천둥산 아래 잠든 마을에 풍금을 잘 치는 예쁜 여교사가 왔다 어느 날 하교길에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며 들국화 한 송이 가리키듯 나를 손짓했다 탁번아 너 내 동생 되지 않을래? 전쟁 때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오빠도 군대에 가서 나는 너무 외롭단다 선생님이 누나가 되는 정말 이상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났다 송화가루 날리는 봄 언덕에서 나는 산새처럼 지저귀며 날아올랐다 누나다 누나다 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영희누나다 영희누나다 개울물 반짝이는 평장골 뒷개울에서도 고드름 떨어지는 겨울 한나절에도 누나와 동생으로 꾸는 꿈은 솔개그늘처럼 아늑했다 영희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숙제도 잘했다 영희누나한테 착한 어린이가 되지 못한 날은 꿈속에서 벌서며 오줌을 쌌다
— 〈영희누나〉
6학년 1학기에 권영희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어 사표를 냈다. 누나의 오빠는 원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충주사범을 졸업하고 입대하여 결혼도 한 군인이었다.
6학년 2학기 어느 날 원주에 가 있던 영희 누나가 우리 집에 왔다. 어머니에게 나의 중학교 진학 문제를 물어보았다. 당시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그저 농사짓다가 나이 들면 군대에 가는 거였지 우리 집 형편으로는 충주나 제천 읍내로 진학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졸업생 가운데서 부잣집 아들 한두 명이 진학하면 그게 다였다. 나는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원주중학으로 보내세요. 오빠네 집에서 다니면 돼요.” 누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학교 진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누나의 말을 듣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어머니는 물론 우리 집 식구들도 다 놀랐다. 내 운명은 이렇게 하여 열네 살 소년의 뜻과는 상관없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우수학생 무시험 진학제도가 있어서 나는 원주중학교에 무시험으로 합격이 되었다. 시골 학교이기는 해도 6년간 내리 1등을 하고 도지사상까지 받았으니 무시험으로 합격이 된 것이었다. 입학식 날 ‘중(中)’이라는 금빛 모표가 붙은 모자를 쓰고 등교할 때 나는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학교 모자를 쓰고 입학식 날 등굣길에 서 있는 ‘나’가 그 순간부터 내가 생각하지도 못할 운명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까머리 어린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농사짓고 지게 지고 나무하는 ‘나’가 되는 게 내 인생의 궤도였을 텐데 권영희 누나로 인하여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입학식이 끝나고 반 편성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원주는 규모가 큰 군인 도시였으므로 원주중학교는 한 학년이 여섯 반이나 되었고 일반 전형은 심한 경쟁을 치러야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나는 5반에 편성이 되었다. ‘아, 이젠 반장을 하지 않아서 좋겠다.’ 초등학교 내내 반장을 하느라고 장난도 치지 못하고 지냈는데 원주에는 아는 친구들이 아무도 없으니 이제 맘껏 놀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더니 한마디 했다.
“오탁번! 네가 임시반장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360명 중에서 내가 5등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중학교 3년 동안 또 반장을 하게 되었다.
백운초등학교 같은 시골 학교를 나온 학생은 아무리 1등짜리라도 읍내로 진학하면 반에서 5등 하기도 바빴는데 전교에서 5등이라니! 우리 집은 물론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도 모두 놀랐다. 특히 어머니는 당신의 믿음이 증명되었다는 듯 숙연한 표정까지 지었다.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나는 어머니의 유일한 꿈이었는지도 몰랐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 일류 학교를 수석으로 합격하는 천재나 이름난 수재 경력이 있는 사람한테는 우습게 들리겠지만, 백운초등학교를 나온 시골뜨기가 대도시 원주중학교에 5등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내 고향에서는 잊히지 않는 토픽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 학년도에는 2학년 2반이 되었다. 1년간의 평균 석차가 360분의 2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옆에 방 하나를 얻어서 어머님이 나를 건사해주었다. 앞에서 말한 권영희 누나의 오빠가 철원으로 부대 이동을 가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수업료는 면제받았지만 먹고 잠잘 데가 없어져 버렸으니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어머니가 아예 원주로 와서 어렵사리 방을 얻어 나를 뒷바라지해주었던 것이다. 삯바느질을 하시고 치악산 발치까지 가서 땔나무를 해서 머리에 이고 오시면서 어머니는 오직 막내를 공부시키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셨다. 매일매일 치악산을 바라보며 살았지만 그 당시에는 기아와 절망의 산으로만 보였다. 겨울이면 냉골이 어찌나 지독했던지 머리맡의 잉크병이 얼어서 터지곤 했다. 잉크가 결빙하는 춥고 무서운 추억은 그 뒤 오늘날까지 나를 강인한 정신으로 묶는 매개가 되고 있다.
그때 내 나이가 열여섯이었다. 영희 누나는 나보다 열 살 위 겨우 스물여섯이었고 오빠인 영철 형님은 서른 살도 채 안 된 청년이었다. 이런 청년들이 무슨 장학사업을 할 리도 없고 불우이웃을 도울 수도 없는 처지였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앞뒤 재지 않고 나를 원주중학교에 입학시켜 주었다. 나는 요즘도 춘천으로 영희 누나를 찾아뵙는다. 여든 살이 넘은 누나는 치매에 걸려서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지만 나는 흑백사진첩을 보듯 누나를 보다가 돌아오며 눈물 흘린다.
중학교 2학년 때 《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에 내 글이 처음 실렸다. 맨 처음 실린 글은 산문이었는데 문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억이 아리송하지만 〈청소년과 과학〉이라는 글이었지 싶다. 자신감이 생긴 나는 《학원》에다가 시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보내면 매번 평과 함께 실렸다. 초등학교 때의 조중흡 교장 선생님과 《학원》이 나의 문학적 소양을 일찍 눈여겨본 셈이었다.
권영희 선생(사진 오른쪽)과 함께. 앞줄 왼쪽이 필자.(1954년)
당시에 나 정도로 공부깨나 하는 친구들은 중학교를 졸업하면 다들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오셔서 뒷바라지해주던 나의 생활은 우리 집이 풍비박산되는 바람에 그마저도 끝이 났다. 나는 원주고등학교에 꼭 무슨 찌꺼기같이 입학은 했지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같은 반 친구 김세호 집에서 한 학기 동안 공짜로 밥을 얻어먹다가 3학년 때는 다른 친구 집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3학년 2학기 어느 날, 입주 가정교사로 있는 친구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밥숟갈에 갑자기 물방울이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물방울이 다름 아닌 내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3이었지만 나는 처지를 비관하고 막 나가는 사춘기 학생이었다. 이미 술과 담배도 다 배운, 학교에 나가면 마지못해 모범생 반장 행세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조폭과도 같은 불량기로 무장된 상황이었다. 밥숟가락에 눈물방울이 떨어진 것을 본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대로 학교를 더 다니다가는 아예 미쳐버리든가 원주역전 깡패들과 어울려 놀다가 교도소 단골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3학년 2학기를 반쯤이나 다녔을까.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졸업장은 우편으로 받았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나를 중퇴로 처리하지 않고 졸업을 시켜준 것일까.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한 학기 동안 밥을 먹여준 김세호의 어머니는 텍사스 휴스턴에서 몇 년 전 돌아가셨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나는 휴스턴까지 가서 친구의 어머니를 만났다. 3천 달러를 용돈으로 드렸다.
2.
한 해를 놀면서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지내다가 나는 엉뚱하게도 K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게 되었다. 이때의 이야기는 이미 여기저기서 엽기적으로 한 적이 있으니까, 건너뛰어서 입학시험 볼 때의 이야기를 하겠다. 35년 전 《진학》이라는 학생잡지에 낸 글 중에서 내가 봐도 절묘한 콩트 같은 삽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삽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나는 서울에 무슨 무슨 대학이 있는지도 모르는 시골 학생이어서 별달리 입시 공부를 할 생각도 않고 그냥 막연히 입학원서를 냈었다. 석탄연기를 내뿜는 야간열차를 타고 처음 서울에 내렸을 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전차를 타고 가다가 또 걷고 하면서 간신히 K대학을 찾아 예비소집 장소에 도착하니까 벌써 다 끝난 후였다. 이튿날이 시험이었다. 둘째 시간이 끝나고 시험장 밖에서 피워놓은 모닥불로 가서 언 손을 녹이고 있었다. 워낙 날씨가 추워서 그랬겠지만 사람들이 어디서 나무토막을 주워다가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모닥불에 손을 쪼이면서 불이 잘 붙도록 나무를 얼기설기 쌓아 놓았다. “아니, 자네 시험 치는 학생 아닌가?” 한참 신 나게 모닥불을 피우고 있을 때 어느 아저씨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가슴에 붙인 수험표를 부끄럽게 의식하면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 당시 나의 가슴속에는 비현실적이고 엉뚱한 생각만이 가득 차 있어서 대학에 진학하는 녀석들을 속물로 비웃어 주는 마음이 많았다. 그래서 나 스스로 수험표를 붙이고 입시를 치르는 꼴이 공연히 부끄럽고 민망하다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내가 수험생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기분 나쁘기도 했다. “이 녀석아. 셋째 시간 시작한 지가 20분이 넘었어.” 그 아저씨는 손목시계를 내보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모닥불 옆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피하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얼른 시험장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내가 허겁지겁 시험장으로 들어서자 감독 선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우물쭈물했다. “나갓!” 답안지에 날인을 하던 감독 선생은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 순간 두 번째 줄 중간에 내 자리가 텅 비어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왜 늦었나?” 교탁 앞 의자에 앉아 있던 다른 감독 선생이 물었다. 날인을 하는 젊은 선생보다는 인자한 목소리였다. 백발의 노교수였다. “모닥불을 피우다가 늦었습니다.” “흐흐…….” 노교수의 웃음소리는 묘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는 뜻일까. 나는 되돌아서서 밖으로 나오려 했다. “자리에 가 앉아.” “선생님, 규정상 퇴장시켜야 합니다. 25분이나 늦었어요.” 젊은 감독이 말하자 노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어서 자리에 가 앉아 시험을 보라는 시늉을 내게 했다. 그러면서 젊은 감독에게 말했다. “그냥 둬. 결시가 되면 괜히 성가시다고.” 이렇게 돼서 나는 수학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다. 그냥 백지 답안을 내려고 하다가 나는 3번 문제에 눈이 갔다. 시험지는 학생이 가지고 가고 답안지만 제출하게 돼 있었다. 3번 문제는 허수 문제였다. i가 나오는 문제는 늘 해답이 간단해서 0 또는 1, -1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문제는 굉장히 복잡하고 길지만 해답은 간단한 게 허수 문제의 특징이다. 나는 무턱대고 3번 답안에다가 “-1”이라고 썼다. 이튿날 조간신문에 난 모범 답안을 보니 이게 바로 그대로 들어맞았다.
허수의 개념이 뭔지 다 까먹어서 이제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다. “허수 □명 〈수〉 복소수 중에서 실수가 아닌 것. 제곱하여 음수가 되는 수를 가리킴. ↔실수. ▷복소수.”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복소수, 음수, 실수 항목을 다 찾아봐도 더 아리송할 뿐이다. 나는 작은 글을 쓸 때도 꼭 사전을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 이 사전이란 것이 어떤 때는 정말 웃길 때가 있다. A라는 말의 뜻을 찾아보면 B의 반대어라는 표가 나온다. 그래서 B를 찾아면 또 A의 반대어라는 표가 나온다. 그러니까 A의 반대어가 B이고 B의 반대어가 A라는 물리적인 뜻은 훤히 알아도 정작 A와 B의 참뜻은 오리무중이다. 허수라는 말을 소재로 이야기하는 마당이니까 독자들에게 그 말의 뜻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내가 픽션으로 꾸며서 둘러대는 것으로 치부해도 되긴 되겠다. 그때 K 대학 입시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그리고 선택과목 하나였다. 수학을 20점 받고도 합격한 걸 보면, 아마도 국어나 영어, 선택과목인 국사는 한두 개밖에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3.
영문학과에 입학하였지만 전혀 신 나는 구석이 없었다. 나이에 비해서는 벌써 늙어버린 기분이었고 같은 학년의 나이 적은 학생들과는 유치해서 이야기가 안 통한다고 생각했다. 남모를 고독과 싸우면서 시와 소설을 많이 읽고 쓰고 하였다. 1학년 때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했는데 최종심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당선된 시가 꼭 내 것보다 좋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도 몰라주는 비극의 천재시인이 되려는 고통의 악몽을 꾸면서 지냈다. 어쩌다가 2학년 때 학교신문 기자가 되었는데 하루는 게재할 학생 작품이 없어서 난로 가에서 급히 쓴 콩트를 가명으로 실었다. 그 후 신춘문예 광고가 요란스럽게 나던 날 나는 신문사마다 시를 세 편씩 골고루 투고한 다음 앞에 소개한 콩트를 동화체로 만들어서 〈동아일보〉에 투고하였다. 시는 모조리 낙선하고 이 콩트가 당선되었다. 나는 《새벗》과 〈소년동아일보〉에 동화를 써서 받은 원고료로 그 후 1년도 넘게 낙원동 다락방과 종로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먹을 것이 없어서 진달래꽃 따먹고 송기를 해먹고 콩서리를 하면서 보낸 나의 어린 시절이지만 내가 이렇게 동화도 쓰고 지금도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시와 소설로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 걸 보면, 그때 나의 소년 시절이 결코 기아와 고독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어디 끝 간 데 없는 끈질긴 애정이 밑바닥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제 운명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르면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 야뇨증이 심했던 나에게 그러한 빈궁이 어찌하여 끈질긴 애정의 근원이 되고 있을까.
어머니, 나의 어머니다. 백운초등학교 터를 잡을 때 지관이 말하기를 장차 이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 큰 인물이 나온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나에게 수없이 들려주신 어머니, 그분이 바로 이 모든 불가사의한 애정의 밑바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삼십오 년이 됐지만 나는 지금도 어머니 품속에 있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다. 영양실조에 기생충에 야뇨증이 심한 철부지 아들일 뿐이다. 나의 문학의 근원은 어머니의 헐벗은 품속, 이미 나를 낳을 때는 젖이 말라붙어서 미음으로 나를 키운, 서른세 살에 홀로 되신 어머니의 운명 속에 있다.
3학년 때부터 나는 소설 습작을 본격적으로 했다. 거의 미친 듯이 소설 쪽에 매달렸다. 시를 써봐야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절망 속에서 살았다. 대학을 다니는 일 자체가 소설과 흡사하게 어울리는 끈적끈적한 우울과 허구로 꽉 차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해에 나는 신문사마다 소설을 응모했다. 그중에서 적어도 몇 편은 꼭 당선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다가 소년 시절부터 습작해온 시가 어쩐지 아까웠다. 시를 그냥 작파해버리려고 했는데, 시가 자꾸 보챘다. “알았어. 이게 정말 마지막이다!” 하는 마음으로 시를 세 편 써서 〈중앙일보〉에 투고했다. 창간된 지 1년밖에 안 된 〈중앙일보〉에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당선되었다. 누구보다도 김종길 교수가 가장 좋아했다. 소설은 모조리 낙선이었다.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시를 버리려는 내 뜻 자체가 이미 글러 먹은 생각이었음을 안 것은 그 후의 일이었고 시야말로 내 운명의 일부가 어느새 돼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내 소갈머리로는 참으로 이상하기만 했다.
〈주간한국〉에서 갓 등단한 시인을 모아서 ‘금주의 인물’이라는 좌담회를 했다. 권오운, 윤상규 그리고 나였다. 한국일보사 옆 골목 무슨 다방에서였는데 기자가 맨 끝에 가서 묻기를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누구냐고 했다. 나는 박성룡 시인이 그중 좋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오운이와 상규가 옆에서 웃었다. 그렇게 질문한 기자가 바로 시인 박성룡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문답은 기사화되지 않았다. 기자가 쑥스러워서였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렇게 아둔했다. 기자가 누군지 신문사 문화부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그냥 시가 좋아서 시를 쓰고 좋은 시인의 시를 만나면 밤새워서 읽고 또 읽었다.
속칭 동화작가에다 시인이라는 이름까지 얻었으니 나의 한이 풀렸을 법도 한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한의 구덩이를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게 바로 소설이었다. 죽음의 구덩이였다.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 소설은 잘 쓰이지 않았다. 나는 시를 가끔씩 쓰고 주문돈, 이유경, 김영태, 박의상, 이승훈, 김종해가 하던 ‘현대시’ 동인에 들게 되어 그들과 소주를 마셨다. 대학을 나와서도 아무 일도 않고 친구들 신세나 지면서, 그리고 아직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여러 여자들을 울리며 소설을 쓰다가 찢고 또 찢었다. 소설 쪽의 한이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무엇도 안 풀릴 것 같은 절박한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대학을 나와서도 사회에 적응하지 않고 이렇게 참담한 상황을 스스로 만든 것일까. 취직은 생각도 안 했고 연애를 하면서도 결혼은 꿈도 안 꾸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몽상, 차라리 악몽 속에서 자학의 아픔을 즐겼다. 이렇게 된 것은 원주에서의 6년과 그 후의 서울 생활이 주었던, 내 책임이 결코 아닌 현실적 고난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게 내연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를 줄기차게 괴롭혀 온 현실에 그대로 소속되는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못 견디고 나는 현실 앞에 백기를 들기로 했다. 나이가 많아서 병역도 마치지 않은 채로 대학을 다녔고 재학 때 영장이 몇 번 나왔지만 응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입영기피자였다. 따라서 어디 떳떳하게 시험을 치고 들어갈 데도 없었다. K 대학교 차낙훈 교수가 중앙일보 홍진기 사장에게 청탁하여 낙하산으로 중앙일보에 들어가서 견습기자가 되었다. 그러나 두 달도 채 못 돼 사표를 던졌다. 백기를 들기에는 아직도 건방진 구석이 있었다. 밤 아홉 시가 가까워서 하는 퇴근, 일의 보잘것없음, 자신의 무력함 등이 나를 짓눌렀고 인사과에서 병역문제를 문의할 때 식은땀이 흘렀다. 군대는 갈 기회가 있으면 간다는 생각만 했지 병역기피가 어떤 죄와 벌을 의미하는지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스스로 택한 악몽 속으로 아주 죽을 셈 치고 빠져들어 갔다. 소설을 써서 어떻게 하든 출구를 만들어 함정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왕 빗나간 운명이라면 끝 간 데까지 따라가 보자는 생각이었다. 〈한국일보〉에 〈가등사〉, 〈조선일보〉에 또 한 작품, 〈대한일보〉에 〈처형의 땅〉 이렇게 세 편을 투고했다. 우선은 돈이 급했다. 여기저기서 꾸어 쓴 돈이 상당했고 대학원 입학금도 있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참담한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소설의 역량이 향상됐다는 자신도 있었으므로 이 세 편이 당선되면 모두 38만 원, 지금 돈 가치로는 2천만 원도 훨씬 넘는 거금으로 당시 대졸 신입사원 1년 치 봉급은 되었다. 당선통지가 날아올 12월 20일경이 되었다. 눈이 몹시 내렸다. 무교동에서 친구들과 술을 많이 마시고 그때 맏형이 살던 오류동으로 밤늦게 돌아갔다. ‘전보가 석 장이나 왔구나.’ 대문을 들어서기가 바쁘게 이런 목소리가 들리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목소리 대신에 맏형과 어머니가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주고받는 말뿐이었다. “저 녀석 아주 버리는 거 아닙니까.” “아니다. 그냥 둬라. 탁번이는 내가 안다.” 나는 술을 토하면서 울었다. 어머니가 안 계셨더라면 정말 자살이라고 하고 싶었다.
날짜는 자꾸만 흘러갔다. 성탄절이 지났다. 다음 날 한 장의 전보만이 뒤늦게 왔다. 〈처형의 땅〉의 당선을 알리는 전보였다. 기쁘지도 않았다. 겨우 삼 분의 일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 기쁠 게 뭐냐는 게 내 마음이었지만 옆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축하해주었다. 새해가 되어 각 신문을 보니 나의 다른 작품도 모두 최종까지 갔다가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13만 원을 받아 빚을 엔간히 갚고 대학원 입시 준비를 벼락치기로 하기 위해서 국문학책을 몇 권 샀다. 그해 1월에 〈주간한국〉에서 ‘금주의 인물’ 난에 ‘신춘문예 3종 3연패’라는 제목으로 나를 소개했다. 학자나 대학교수가 되려는 생각보다는 글을 쓰는 공간을 갖고 싶었다. 함정이나 덫이 더 이상 깊어지면 안 되었다. 좋은 친구와 차와 술을 마시면서 일생을 걸 문학적 공간이 절실해서 택한 대학원이었다. 대학원에서는 주로 현대문학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 시와 소설을 써 나갔다.
4.
석사논문 〈정지용 연구〉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어떤 마음을 먹게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는 일과 결혼하는 일을 한꺼번에 끝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1970년 10월 28일에 결혼을 했고 유성으로 신혼여행을 가서도 논문을 썼다. 며칠 후면 논문제출 마감일이었다. 석사학위를 받지 못하면 군 입대에 차질이 오게 돼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 요원을 모집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병적상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응시하여 합격이 되었고 그쪽에서 기피사실을 말소해 주었다. 따라서 대학원을 졸업하면 소정의 훈련을 마친 다음 중위로 임관되어 육사 생도들에게 국어와 문학개론을 강의하게 돼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한 일, 고등학교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은 일, 대학 입학시험을 볼 때 수학문제를 풀어보지도 않고 답을 쓴 일과 더불어, 입영기피 사실을 육사에서 말소시켜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운명의 장난’인 것 같다.
삼양동 비탈에 10만 원짜리 방을 얻어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이제 논문심사를 받으려는 녀석이 참으로 당돌한 모험을 한 것이었고 이러한 모험이 어떤 현실적인 고통과 비애를 수반하는지도 모른 채 무슨 문학동인 결성하듯 결혼을 한 것이었다.
1973년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하면서 첫 시집 《아침의 예언》을 냈다. 소설을 부지런히 발표하면서도 늘 공책에다 시를 쓰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교단생활이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지만 부지런히 소설도 발표하였다. 1974년 일지사에서 첫 창작집 《처형의 땅》을 냈다. 그해에 아내가 첫아들을 낳았고 나는 제대하여 수도여자사범대에서 문학을 가르쳤다. 삼선개헌과 유신으로 치닫는 현실의 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소설 〈우화의 집〉은 삼선개헌을 맞대놓고 풍자한 소설이다. 사람들은 그런 소설을 내고도 내가 곤욕을 치르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언제나 문학작품으로서 현실을 다룰 때는, 그 현실조차도 문학 일부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문학의 위쪽이거나 혹은 아래쪽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사회현실을 고발하고 질타하는 형식으로서의 문학은 가장 무력하지만 영원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언제나 앞서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있을 때 참으로 안타까워서 나는 현직교수의 신분이면서도 내 이름 석 자를 떡하니 밝혀서 성금 광고를 냈다. 시인 아무개, 소설가 아무개, 대학교수 아무개가 아니라, 그저 유권자 아무개가 그렇게 시킨 것이었다.
1978년 가을에 모교의 귀퉁이로 연구실을 옮기고 나서 나는 약속 하나를 갚았다. 내가 1970년 겨울 처음으로 부산에 가서 장모 될 분을 만나서 딸을 달라고 하니까 장래에 무엇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못돼도 고려대 교수는 되겠지요 했던 것인데 바로 그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이듬해 봄에 어머니를 잃었다. 나의 이때의 눈물겨움과 절망은 소설 〈해피 버스데이〉에 그대로 나와 있어서 나는 요즘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울고 싶을 때 그 작품을 다시 읽으며 운다.
육군사관학교 전역증(1974년).
1983년 9월에 국비파견 해외 연구교수가 되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대학교수로서 하버드에 가서 연구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내심으로는 그쪽 사람들의 문학 하는 꼴을 구경하고 싶은 단순한 생각이 앞섰다. 1년 동안을 꿈같이 보냈다. 그들의 문학교실의 풍경을 책이나 영화에서보다는 훨씬 실감 나게 보았고 문학이 문화 자체가 되어 있는 점도 보았고 창작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작업이라는 생각도 확인하였다. 여행을 많이 했다. 가족과 함께 한달 가까이 유럽 여행도 다녀왔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은 천등산 박달재의 내 소년 시절의 황금과도 같은 소재, 그리고 내가 원한의 늪으로 생각했던 나의 현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독약과도 같은 매력, 우리나라의 못생긴 산과 시시한 강물이 주는 시시한 아름다움, 이 모든 것이 나의 문학의 세계요 내 영혼의 고향임을 새삼 알았다. 그리고 ‘나’를 많이도 생각했다. 내가 저지른 죄와 아직 받지 못한 벌을 생각하면서 처음으로 나를 밖에서 관찰하고 꾸짖었다.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손바닥같이 좁아서, 작품보다는 알음알음으로 모든 것이 좌지우지된다고 어찌 흰 이미를 더럽힐 수 있느냐는 반성도 했다. 1984년 가을에 귀국하여 한 달 동안에 단편소설 〈아가의 말〉 〈달맞이꽃〉 〈저녁연기〉를 썼다. 이 작품들은 마치 탕아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 평화로운 마음으로 밤을 새우면서 작품을 썼다.
5.
1985년 가을에 낸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에는 두 편의 이상한 시가 들어 있다. 〈가랑비〉와 〈저녁연기〉가 그것인데 이것은 나의 소설에서 거의 그냥 따다가 쓴 시다. 〈가랑비〉는 〈세우〉라는 소설의 한 문장을 앞의 행을 끊어서 옮겨 쓰고 나머지 다섯 행은 덧붙인 것이다.
짓눌려 내리는 가랑비, 비랄 것도 못되어 안개처럼 보이는 철 아닌 가랑비는 눅눅하고 끈끈하게 나의 몸을 휘감아 버리고 있었다. 좀 더 세차게 운전석 지붕을 쾅쾅 두드렸다. 트럭이 다시 기어를 갈아 넣으며 고갯길로 접어들 때 나는 얼굴에 달라붙는 가랑비를 뜯어내면서 다른 한 손을 여자의 젖가슴 속으로 쑥 넣었다.
— 소설 〈세우〉의 끝부분
머리칼에 달라붙는 가랑비를 한 손으로 뜯어내면서 탁번이는 여자의 젖가슴 속으로 다른 한 손을 쑥 넣었다. 감자꽃 내음이 났다. 한 여름 담뱃잎 내음도 났다. 헛간에서 썩고 건조실에서 매달려 죽을 날을 생각하며 탁번이는 드디어 울었다. 가랑비처럼 그렇게 그렇게 울었다.
— 〈가랑비〉 전문
소설에서는 화자가 ‘나’이지만 시에서는 내 고유명사로 바꿨다. 여자의 젖가슴에서 감자꽃 내음이 나고 담뱃잎 내음이 난다고 가필을 했다. 문장은 손끝 재간이 아니라 그 작가의 모든 정신이라고 믿고 있다. 소설을 쓸 때도 나는 사건이 진전되지 않아서 파지를 내는 적은 거의 없으나, 그 사건을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파지를 많이 낸다. 〈저녁연기〉라는 시는 같은 제목의 소설에서 아예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 적은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나의 문학정신은 시와 소설을 딱 칼로 베는 식의 이분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천성이 있다. 시와 소설은 방법의 문제이지 본질의 문제는 아니다. 시를 모르는 소설가 또는 소설을 모르는 시인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정말이지 소설과 시의 차이는 거의 없는 정도의 차이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때 시적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쓰고 나면 소설이 되고 어떤 것은 그 반대도 된다. 시인일 때는 시인으로 정당하게, 소설가일 때는 소설가로 혹독하게 읽었으면 좋겠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쓰는 글이 진정한 독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형벌일 수 있고 우리 문학사의 죄악일 수 있다. 모든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쓴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평가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참 좋겠다. 무인도의 고독은 차라리 큰 평화일 수 있지만, 알음알음으로 알고 비비고 밀고 돌아가는 작금의 세태는 진정한 문학의 배신일 뿐이다.
만일 내가 1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됐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손끝 재주만 믿고 기고만장하다가 종당에는 인생이고 문학이고 다 망치지나 않았을까. 정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대학 3학년 때 ‘이게 마지막이다’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응모한 시가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보이지 않는 축복이요 나침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날 버리고 돌아서려는 마지막 순간, 벼랑 끝에서 붙잡은 애인과 함께 45년 넘게 살아오고 있는 셈이다. 요즘 내가 살아가는 이러한 모습이 그때그때 내 작품 속에서 맨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아직도 아득히 흘러간 세월 속에, 밤송이 머리로, 여드름이 난 사춘기 소년으로, 불안하기만 했던 청년의 모습으로 붙박여 있다. 나는 지금 제 나이는 다 까먹고 정신적으로 소년 고착증후군에 붙잡혀 있는 신세다.
6.
1995년 여름, 백두산 천지에서. 왼쪽부터 필자, 오세영, 이가림 시인.
나는 시를 쓸 때 사전을 많이 찾아본다. 꼭 처음 말을 배우는 아기가 된 듯 뻔히 아는 말도 사전을 다시 찾아보는 것이다. 우리말이 지닌 넉넉하고 낙낙한 오묘한 뜻에 푹 빠져 있는 셈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형용사나 부사는 ‘큰 말’ ‘작은 말’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밥냄새〉라는 시에서, 진외가집에 가서 진외당숙모가 밥소라에서 퍼주는 밥을 먹는 어린 날의 내 모습을 형상화할 때였다. 허겁지겁, 부리나케, 허둥지둥……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으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사전을 찾아보았다. ‘허둥지둥’의 작은말이 ‘하동지동’ 아닌가. 나는 ‘하동지동’이라는 말을 찾아내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 때 되면 만 날 온나”라는 구절을 다시 읽을 때마다 내가 시인으로 태어난 것이 그지없이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우리 집 사립 앞에서 큰기침을 했다 ―이리 오너라! 동무들과 소꿉놀이를 하던 나는 바느질하는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는 바늘겨레에 바늘을 꽂으며 말했다 ―누구시냐고 여쭈어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사립에 닿자마자 우리 집을 찾아온 노인이 대꾸했다 ―충주 오생원이라고 여쭈어라!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섬돌로 내려서며 반갑게 말했다 ―당숙 어른 아니세요? 어서 오세요 노인은 큰기침을 하면서 들어왔다 어린 흰둥개도 덩달아 섬돌까지 따라오며 꼬리를 쳤다
— 〈손님〉 1
‘바늘겨레’라는 정말 예쁜 우리말을 알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는다. 유년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을 소재로 시를 쓰면서 바느질하던 어머니의 형상을 담아낼 때였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아주 잘했다. 고향 동네에서 혼인하는 집 신랑 신부의 예복은 물론이려니와 내가 원주에서 중학교 다닐 때도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언제나 집안으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사립문 밖에서 “이리 오너라” 하고 점잖게 누군가를 불렀다. 마당에서 소꿉놀이하는 아이들을 부르는 게 아니었다. 마치 우리 집에 심부름하는 하인이라도 있다는 듯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방에서 바느질하던 어머니는 “누구시냐고 여쭈어라.” 하셨다. 한 편의 콩트 같기도 한 토막극이 끝나야 손님은 집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이 시를 쓰면서 ‘바늘겨레’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국어사전을 수도 없이 찾아본 결과였다. 나의 시집 《1미터의 사랑》(1999), 《벙어리장갑》(2002), 《손님》(2006), 《우리 동네》(2010)에는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궁핍과 소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나의 시적 이정표가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뒷짐 지고 노을 지는 서녘 들판을 거닐며, 그 옛날 밥숟가락에 문득 떨어지던 눈물방울을 그리워한다.
원서헌 어머니의 조상 앞에서 아내 김은자와 함께.2008년 가을.
정년 한 지가 5년째다. 요즘은 1주일에 반은 서울에서 살고 반은 원서헌에서 산다. ‘문학관’이라고 괜히 이름을 붙였더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대학생들이 문학기행을 오기도 하고, 제 고향의 폐교된 분교를 인수하여 문학관으로 개설했다는 소문이 제법 그럴싸하게 났는지 일반인들도 큰 기대를 하고 찾아온다. 오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는 무료이나 시집을 한 권씩 사가라고 하지만 그냥 말뿐이다. 올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눈 치우느라고 허리가 아팠다. 눈을 열심히 치우고 겨울이면 장작난로도 피운다. 겨울은 겨울대로 봄은 봄대로 마냥 절경이다. 나는 축복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찾아오는 이들과 어울려 술도 제법 마신다. 지난주에는 청주 CJB에서 2박 3일 동안 촬영을 왔다. 아마도 나 같이 어쭙잖은 사람이 사는 방식이 한편으로는 꽤 재미있는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그저 그렇다. 요즘 지자체마다 수십억 원씩을 들여서 문학관을 건립하는 통에 원서헌은 이제 문학관이랍시고 명함도 내놓지 못하게 되었다. 전혀 문학관답지 않은 문학관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원서헌이라고 하겠다.
어떤 하찮은 사물을 보는 순간에도 이상한 울림이 가슴에 와 닿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울림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수첩에다 그냥 몇 자 적어두곤 한다. 짐짓 모른 체하고 내버려두면 이내 잠잠해져서 내가 왜 그런 기록을 했는지 스스로도 땅띔 못할 때가 있고,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별별 심상과 이야기로 피어나면서 수첩 속에서 얼른 해방시켜 달라고 조를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섣불리 그놈들을 호출하지 않는다.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이것이 나의 절필이라는 독한 마음을 먹고 유혹을 뿌리치고 또 뿌리친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과정은 참말 지루하고 괴롭다.
이제 나는 하늘과 땅의 모습이 환히 보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습이 도렷이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 멋대로 해도 법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가 마침내 되었다. 에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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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처절한 한편의 서사시를 봅니다 고통과 절망속에 의인을 마주한행운 그래서 인생은 "모파상"의말처럼 살만한 가치가 있나봅니다
귀한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 깊은 글입니다.
선생님 어디서 이런 자료를
대단하세요
잘 읽어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옮겨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