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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죄사함의 복음
시편 32:1~7
오늘은 사도행전의 강해를 잠시 미루고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복음의 그 풍부한 내용은 한없이 크고 높고 깊고 풍성하지만 특별히 오늘은 완전한 죄사함의 은혜에 대한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32편의 저자는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 32편 1절과 2절 시작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은 죄사함의 큰 행복에 대하여 소리높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의 이 감격어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죄사함의 행복의 찬가는 그가 그의 부하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불법으로 취했고 그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고의적으로 화살 맞아 죽게 한 후에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어 크게 책망하셨을 때 납작 엎드려 회개한 후에 지은 시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비록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지만 그가 진심으로 참회했을 때 그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것은 별도로 하실 것이지만 그가 지은 죄를 완전히 용서해주셨습니다. 죄값으로 영원히 패망하고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다윗의 진심어린 죄 고백과 겸손한 순종을 보시고 하나님은 다윗이 범한 그 큰 허물과 죄를 완전히 사해주셨습니다. 지은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하여 정죄하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해주심을 확인한 다윗은 한없는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죄사함받은 행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다윗뿐입니까? 성경에는 크나큰 죄악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용서해주심으로 죄사함받은 행복을 누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남편이 죽었는데도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 시아버지 유다에게 창기로 위장하여 접근하여 베리스와 세라 두 아들을 낳았던 다말을 하나님은 불의하게 여겨 심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가문을 잇게 하는 믿음의 여인으로 받아주셨습니다. 또한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천한 신분을 보지 않으시고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그 여인을 축복하사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는 영광스러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때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아 식사하는 중에 그 동네에 살던 유명한 죄인 된 여인이 그 집 식사 시간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기대어 누워 식사하는 그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주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그 발에 입맞추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며 자기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는 것을 묵묵히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 집 주인 바리새인이 그 여인의 죄를 속으로 비난하자 주님은 그 여인을 두둔하면서 사함을 많이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는 말을 언급하시면서, 그 여인이 주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많이 받았기에 그만큼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발치에 앉아 있는 그 여인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오랫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마음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온 한 중년 여인에게도 아무 것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현재도 결혼식도 없이 비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아시는데도 그녀를 향하여 아무런 정죄를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녀에게 지상 생애 최초로 자기가 세상에 오신 구주 그리스도라고 밝혀주셨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고 그럼으로써 그 여인의 모든 죄를 남김없이 용서해주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큰 죄를 범했었습니다. 심지어 맹세하며 저주까지 하면서 자기가 예수님을 절대로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 중에 가장 먼저 개인적으로 만나주시고 공개적으로 그를 인정해주고 사도의 권위를 회복시켜주셨으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큰 죄를 완전히 사해주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 저 아메리카 신대륙에 노예로 팔아넘기던 영국인 노예 상인 존 뉴톤이 배가 침몰하는 위기 때에 살려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를 건져주시고 그를 주의 종으로 불러주시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많은 은혜의 사역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시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Amaging Grace”는 오늘날까지 불신자들까지 즐겨 부르는 유명한 찬송가가 되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초대 교회 시대에 위대한 부흥 운동의 기수가 되셨던 길선주 목사님은 본래 깊은 산에 들어가서 차력술을 연마하던 도인이었는데 하나님은 천지신명께 기도할 때 자기를 계시해주셨고 그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황해도 신천 장터에서 술만 마시고 소란을 피우고 툭하면 사람들을 두들겨 패던 깡패 김익두를 불러주시고 그의 죄대로 갚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를 귀한 주의 종으로 부리시고 신유의 은사까지 풍성히 주셔서 일제 시대 때에 많은 영혼을 건지는 큰 일꾼으로 사용해주셨습니다.
어찌 이렇게 나열한 사람들뿐이겠습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가 가진 믿음이 참된 믿음일진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죄사함의 행복을 노래한 다윗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죄를 다 사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하여 깊은 감격을 가지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실로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다 죄인입니다. 사람들 중에 오직 예수님 외에는 모두가 다 한결같이 죄를 지은 죄인들입니다. 다윗이 쓴 시편 14편 말씀에 보면 1절 이하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편 14:1~3)
솔로몬 왕도 예루살렘에 성전을 완공한 후에 성전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고백하기를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열왕기상 8:46)라
고 말했으며, 전도서에서도 솔로몬은 고백하기를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전도서 7:20)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의 종이요 그들은 다 깊이 부패한 존재들입니다. 그 죄와 부패의 정도가 세상에 있는 만물보다 더 극심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9 말씀에서 이르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것들은 다 이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인간이 행하는 모든 선행 가운데에도 죄의 독소들이 조금씩 다 스며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선행에도 자기 만족, 자기 자랑, 자기 의가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죄가 없는 완전한 의인은 없으며 아무리 의인일지라도 다 흠과 점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저 동방의 의인 욥조차도 극심한 시험의 와중에 인간의 흠결이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욥기를 통하여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어느 누구도 결코 자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결코 자기 의로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대 앞에서 반드시 심판받고 저주받고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공의의 기준에 의하여 달아볼진대, 적합한 사람을 한 사람도 건질 수 없기에, 모두가 다 심판받고 저주받고 지옥에 보내야 하지만 그의 자비로우신 성품을 인하여 값없이 조건없이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으니, 그것이 바로 대속의 원리에 따른 구원입니다. 대속의 원리란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은 다 멸망당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다 받는 죄 없는 자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바로 그렇게 대속의 원리에 따라 죄인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활짝 열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것과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대신 당하심으로써 죄인의 죄를 사하고 의롭게 하여 구원한다는 약속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부터 주어졌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요 대적의 문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이후에 하나님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보내어 장차 대속의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계속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 중 한 구절만 여기서 언급하면 이사야 53:4~6 말씀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고난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장차 오시는 그리스도는 장차 세상에 와서 죄인들의 죄악과 허물과 그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찔리고 채찍질당하고 두드려 맞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속죄일에 죄 없는 속죄염소가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에 가서 홀로 비참한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사해지고 옮겨져 없어지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와서 대신하여 그 죄값을 짊어지고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 그대로 이사야 53장 말씀이 선포된 지 7백년 후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을 입었기에 죄가 전혀 없는 자로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자 체포되어 채찍질당하시고 매 맞으시고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시며 십자가에서 매달려 가장 악한 죄인으로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대속의 원리에 의하여 죄인들에게 죄사함의 은혜와 의롭다 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의 죽음은 한편으로서는 죄가 그 죄를 범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 값을 반드시 묻는다는 완전한 공의의 원리도 충족하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형벌 원칙을 다 충족시키면서도 동시에 죄인들에게 값없이 완전한 죄 사함을 선물로 주며 그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도 완전히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인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쏟을 온갖 저주와 진노를 그리스도께 다 쏟으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죄가 다 속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 값이 다 치러졌기 때문에 우리의 과거의 죄와 우리의 현재의 죄와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도 다 청산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과거의 죄만이 씻어지고 과거의 죄만이 용서받는다고 한다면, 우리 중에 한 사람도 구원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종종 죄를 범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마지막 육신의 호흡을 마치는 그 날까지 우리들은 늘 마음속으로나 입술로나 행실로나 늘 죄의 공격을 당하여 넘어지고 자빠지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면에는 타락한 육신의 본성과 강력한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시험이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도 해서 그냥 봐두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우리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과거의 죄만 사해주시고 예수님 믿은 후에 지은 죄는 놔둔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죄가 조금인들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천국 문 안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대속의 효력은 구원받은 우리들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대속해주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주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완전한 죄사함의 효력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성경에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이사야 38:17 말씀에서 이르기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시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로 던지셨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3:25 말씀에서 이르기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7:18,19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1:34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장차 우리가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맞이할 심판의 그 날에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알고 계실지라도 그것을 천사들 앞에서나 다른 성도들 앞에서 공개하시면서 우리에게 비난과 심판을 가하지 아니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18 말씀에 주께서 이르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범한 부끄러운 많은 죄악들을 주님은 심판의 그 날에 천사들이나 다른 성도들 앞에서 결코 드러내지 아니하실 것이요 우리의 모든 행위를 기록한 행위 책에서 우리가 범한 죄의 기록들을 주님께서 다 들춰내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 모든 죄의 기록들 위에는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로 다 덮으시어 깨끗하게 도말해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하나님께서 건네주신 그 진노의 잔에 담긴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와 심판의 술을 다 마셨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의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쏟아부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의 기록들을 다 지워버리셨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죄가 아무리 진하고 더럽고 악하고 많을지라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샘에서 나오는 깨끗하게 씻는 물은 그 수량이 어마 어마 합니다. 스가랴서 13:1 말씀에서 나오는 바로 그 샘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매달려 죽으신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으니, 그 물과 피가 곧 세상의 모든 죄인들의 그 많은 죄와 허물들을 다 씻어내기에 족한 무한정의 샘물인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악의 더러움도 한없이 진하고 그 양이 많지만 우리 주님이 자기 몸을 찢고 깨뜨려 열어놓으신 죄사함의 보혈 샘물의 수량은 한없이 많고 능력이 있어서 우리의 모든 죄들을 깨끗이 영원히 씻어주시기에 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용서받지 못할 자는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흉악한 죄들을 더 덮어버리시고 그가 열어놓은 정결케 하는 씻는 샘물은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다 씻어 영원히 깨끗하게 하시기에 족한 것입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십자가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이렇듯 주님께서 대속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를 다 담당하여 완전한 죄사함을 베풀어주셨고 거룩한 주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먼저, 당연히 우리들은 죄를 미워하고 주님의 백성답게 의롭고 거룩하게 살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르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서 구속받아서 은혜로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자 되었으니 그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6:15,19 말씀에서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 자녀로 구원해주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우리 몸과 마음을 죄악에 내주지 말고 의에게 내주어 죄의 종노릇을 그치고 의에 종이 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삼십팔년 된 중풍병자를 고친 후에 그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이르신 말씀도 이것입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5:14)
또한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지시고 보내시기 전에 이른 말씀도 이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6:11)
그러므로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구원의 조건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답게 주님의 그 십자가 희생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자로서 당연히 죄를 거부하고 의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치 설에 부모님이 새 옷을 사주셨을 때에 그 옷을 입고 다니되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진창이나 눈밭에 들어가 뒹글지 아니하고 조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고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던 시절의 어둠의 자식으로 살아가던 옛 사람의 모든 행실들을 버리고 새 사람답게, 빛의 자녀답게 빛의 열매 곧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어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살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우리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자신에게 자주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목적과 이유가 믿기 이전에 가졌던 것과 같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자주 상기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새로워진 피조물로서 온전한 삶의 목적을 이루어가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늘 충만해져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충만해지면 우리가 세상 욕심을 따라 살거나 타락의 본성이 내 안에서 마음대로 악영향을 끼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며 내 속에서 육신의 욕심이 기승을 부리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막아주십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성령 충만하도록 늘 기도에 힘쓰고 말씀으로 늘 마음을 채워가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 말씀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하였고 시편 119편 11절에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디모데전서 4:5 말씀에서 일러주기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 묵상과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말씀의 빛이 우리 심령을 밝히게 하여서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죄를 멀리하고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종종 넘어지고 자빠지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자각하게 되고 마음으로 낙심하게 됩니다. 믿음의 힘이 없어지고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귀와 세상 유혹 앞에서 아직도 힘이 없고 자신의 내면에 부패한 본성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깨닫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면의 괴로움과 탄식은 오히려 구원받은 자의 증거인데, 이러한 고민과 탄식은 사도 바울조차 겪었던 고민이었습니다. 그가 거듭한 후에도 여전히 자신 속에 선을 행하기보다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타락한 본성이 있음을 깨닫고 이렇게 탄식합니다.
로마서 7:21 이하를 읽어보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21~25)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조차 거듭난 후에도 이렇듯 자기 내면의 갈등과 싸움이 치열함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거듭난 신자라도 천사처럼 죄를 한번도 범하지 않고 내면에 어떤 갈등과 싸움 한번도 없이 살다가 천국 문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할 때가 종종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탄식 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고백한 대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객관적 희생 공로가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연약할지라도 우리 구원은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죄와 사망과 마귀와 세상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과 승리는 우리 구주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승리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미 주님의 순종으로 승리로 끝났고 우리도 주님 안에서 이미 승리했음을 기억합시다. 할렐루야.
다만 이렇게 종종 죄에 넘어지고 쓰러질 때에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의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다시 굳게 붙들고 감사하면서, 우리 죄를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고백하면서 긍휼히 여겨주시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다시금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1:9 말씀과 2:1,2 말씀에서 이르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보혜사)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니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 잘 하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고 세상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면 즉시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고백하면서 주님이 사해주시기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럴진대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서 중보 기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시고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타락의 본성을 극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속에 시들어가던 구원의 즐거움이 다시 회복되고 영적인 활력이 생기고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고 주님의 영이 우리를 자유하게 해주고 삶에 활력과 기쁨이 다시 넘쳐서 범사에 주님을 위하여 힘있게 일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다윗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 사함받은 감격 속에서 지은 시편 32편에서 노래한 바 완전한 죄사함의 행복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참으로 완전한 죄사함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대속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요 다른 어떤 종교, 어떤 철학, 어떤 심리적 치료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대속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완전히 영원히 사함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사람이 되사 십자가에 못박혀 그토록 까닭없이 죽으셔야 했던 것은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로우심과 한없는 사랑의 필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만세전에 작정하사 택정함을 받은 자로서 이 대속의 원리를 따라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을 받은 자 되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자입니다. 죄사함의 은혜는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가장 값진 복입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한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가장 행복한 자가 되었으니, 이 귀한 은혜 받은 자답게 늘 감격하며 감사하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가 됩시다. 이 지극히 복된 죄사함의 복음을 아직도 모르는 자들에게 힘을 다해 전합시다. 또한 주님께서 그토록 피를 흘려서 값주고 건져낸 죄악의 구렁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의와 거룩함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도록 경건의 연습을 다합시다. 말씀과 성령으로 늘 무장하여 죄를 이기고 거룩함의 열매를 맺읍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질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럴 때 좌절하지 맙시다. 그렇게 넘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으니 낙심하지 마십시다. 그럴 때면 즉시 주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자백합시다. 그리할 때에 주님께서 그 피로써 씻어주실 것이요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 대언의 기도를 드려주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힘을 얻고 다시금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다시금 죄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 영혼에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완전한 죄사함의 복음을 선물로 주신 우리 구원의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영원히 올려 드립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