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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내가 강이 또 있느냐고 물어본 데는 이유가 있었다. 회랑처럼 길게 뻗은 숲길 끄트머리에 우거져 있는 나뭇가지들 아래쪽에, 빛이 춤추는 듯 어른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상에서는 흐르는 물에 빛이 반사되어 위쪽으로 비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근처에 강이 있나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실수를 깨달았다. 행렬 비슷한 것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행렬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몸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영이 아닌 빛나는 영들이 맨 앞에 오면서 춤을 추며 꽃잎을 뿌렸다. 꽃잎들은 소리 없이 떨어지며 가볍게 공기 중을 떠다녔지만, 유령 세계였다면 한 장 한 장이 너무 육중한 나머지 돌처럼 바닥에 추락해 버렸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숲길 양쪽, 좌우에서 젊은 형상들이 나타났는데, 한쪽에서는 소년들이 나타났고 다른 쪽에서는 소녀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부른 노래를 기억해서 악보로 옮겨 적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들어도 질리거나 유행에 뒤지지 않는 곡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들 사이로 악사들이 걸어나왔다. 그 뒤에 부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 영예의 주인공이었다.
그 부인이 옷을 벗고 있었는지 입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약 벗고 있었는데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가 남기고 간 공손함과 기쁨의 분위기가 꼭 눈에 보일 듯 선명했던 나머지, 마치 크고 빛나는 옷자락을 끌며 행복한 풀밭 위로 지나간 듯한 착각이 기억 속에 남은 탓이리라. 또 입고 있었는데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라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의 영혼이 입고 있는 옷을 뚫고 너무도 분명히 빛난 탓이리라. 그 나라에서 옷은 위장의 수단이 아니다. 실 한 오라기 한 오라기 사이에서 숨쉬고 있는 영의 몸 덕분에 천 전체가 살아 있는 유기체가 되어 버린다. 긴 옷이나 왕관은 눈이나 입술처럼 그것을 입거나 쓰고 있는 사람의 생김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던 얼굴만 부분적으로 기억날 뿐이다.
“저 부인이 누구더라? …… 저 부인 이름이 ……?”
내가 안내자에게 속삭였다.
“아니, 자네는 전혀 모르는 사람일걸. 지상에서 쓰던 이름은 사라 스미스였고, 골더즈 그린에 살았지.”
“저 부인은…… 글쎄요, 특별히 중요한 인물 같은데요.”
“물론이지. 부인은 위대한 인물일세. 이 나라에서 명성 있는 것과 지상에서 명성 있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는 말은 자네도 들어 본 적이 있겠지.”
“그런데 저 거인 같은 사람들은 누구지요……. 보세요! 꼭 에메랄드 같아요……. 부인 앞에서 춤을 추며 꽃을 뿌리고 있는 저들은 누구지요?”
“자네는 밀턴도 안 읽어 봤나? ‘제복을 입은 천 명의 천사가 종이 되어 그녀를 섬기리라.’”
“그러면 양쪽에 서 있는 소년 소녀들은요?”
“저 부인이 낳은 아들 딸들이지.”
“굉장한 대가족이었나 보군요, 선생님.”
“부인과 한 번이라도 마주친 청년이나 소년은 다 아들이 되었다네. 뒷문으로 고기를 배달해 주었던 아이까지 말일세. 저 부인을 만난 소녀들도 전부 딸이 되었고.”
“아이들의 진짜 부모한테는 좀 가혹한 일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 물론 남의 아이를 훔치는 자들도 있긴 하지. 하지만 부인의 모성애는 종류가 달랐네. 그의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 더 큰 사랑을 품고 돌아갔지. 또 부인을 바라본 남자 중에, 어떤 식으로든 부인을 사랑하지 않게 된 사람은 거의 없었네.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불륜에 빠지기는커녕 더욱더 아내에게 충실한 남편들이 되었지.”
“하지만 어떻게…… 이것 보세요! 이 동물들은 다 뭐지요? 고양이가 한 마리, 두 마리, 여남은 마리 정도 되는데요. 그리고 이 개들……. 이거, 셀 수도 없네요. 새도 있어요. 말도 있구요.”
“부인의 짐승들일세.”
“동물원이라도 차렸었나요? 이건 좀 수가 많은데요.”
“부인에게 다가간 짐승이나 새들은 전부 사랑을 얻었지. 짐승들은 부인 안에서 자기들은 본질을 되찾았다네. 그리고 이제 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풍성한 생명이 그들에게까지 흘러넘치고 있는 걸세.”
나는 놀라움에 할 말을 잃고 스승을 쳐다보았다.
“맞아, 자네가 연못에 돌맹이를 던지면 물이 동심원을 그리며 점점 더 멀리 퍼져 나가는 것과 마찬가질세. 그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누가 알겠는가? 갓 구원받은 인간은 아직 어려서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가 없네. 그러나 저 부인처럼 위대한 성인은 새끼손가락 하나에도 우주의 죽은 것들을 전부 살려 낼 수 있는 기쁨이 깃들여 있다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귀부인Lady 은 우리 쪽으로 꾸준히 다가오고 있었지만, 시건은 우리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기이한 형상의 허깨비 하나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허깨비 들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키가 엄청나게 큰 데다가 끔찍할 정도로 깡마른 유령이, 풍금 연주자가 데리고 다니는 원숭이만큼 자그마한 유령을 사슬에 묶어 끌고 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키 큰 유령은 부드러운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아도 어쩐지 전에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부인과 불과 몇 피트 안 되는 곳에 이르자, 그 유령이 가늘고 휘청거리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쫙 벌린 채 가슴에 갖다 대더니 공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만났군!”
문득 그가 누구를 연상시키는지 깨달았다. 그는 구식 극단의 초라한 삼류 배우 같았다.
“여보! 마침내 만났네요!”
귀부인이 말했다.
‘맙소사!’
나는 생각했다.
‘저 부인이 설마…….’
그러자 두 가지 사실이 새삼 눈에 띄었다. 첫째로, 작은 유령은 큰 유령에게 끌려다니는 게 아니었다. 손에 사슬을 들고 있는 쪽은 난쟁이 같은 형체였고, 목에 족쇄를 차고 있는 쪽이 배우 같은 유령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나는 부인의 시선이 난쟁이 유령 쪽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눈치챘다. 난쟁이Dwarf 가 말을 걸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키 큰 유령을 일부러 무시하는 듯했다. 부인은 가련한 난쟁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부인의 얼굴에서만 사랑이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 목욕물에 온몸을 담그고 난 사람처럼 팔다리에서도 사랑이 뚝뚝 듣고 있었다. 부인은 놀랍게도 난쟁이에게 더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더니 난쟁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차갑고 축축하고 쭈글쭈글한 존재와 그토록 친밀한 접촉을 하다니,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부인은 몸서리를 치지 않았다.
“프랭크, 무엇보다 먼저 날 용서해 줘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제가 당신에게 저지른 모든 잘못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 당신의 용서를 구하고 싶어요.”
그제야 처음으로 난쟁이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부인의 입맞춤을 받고 나서 좀더 잘 보이는 존재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봤자 사람이었을 때 어떤 얼굴이었을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작은 타원형 얼굴에 하관이 약하고 주근깨가 나 있었으며, 보잘것없는 콧수염이 볼품없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그는 부인을 흘낏 보았을 뿐,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비극배우Trageedian를 곁눈질하더니 사슬을 홱 잡아챘다. 그러자 난쟁이가 아니라 비극배우가 부인에게 대답했다.
“저런, 저런!”
비극배우가 말했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실수는 우리 모두 하는 거니까.”
그 말을 할 때 배우의 얼굴 모양이 기괴하게 비틀어졌는데, 내 생각에는 너그럽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려 했던 것 같았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구. 난 내 생각은 하지 않아. 당신 생각을 하지. 그동안 내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건 바로 당신 생각이라구. 그래, 당신 생각. 당신이 여기서 홀로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있으리라는 생각.”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그만 접어 버리셔도 돼요. 그런 생각은 다시 하지 마세요. 이젠 다 끝났으니까요.”
부인이 난쟁이에게 말했다. 부인의 아름다움이 어찌나 화사하게 빛나던지, 다른 것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 달콤한 강요에 못 이겨 난쟁이는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한순간, 그가 좀더 사람 같아지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말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직접 들었을 때의 실망감이란!
“당신, 내가 보고 싶었어?”
그가 투덜거리는 듯한 작은 소리로 깍깍거렸다. 그러나 부인은 전혀 움찔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랑과 공손함이 흘러넘쳤다.
“여보, 그 문제는 곧 이해하게 될 거예요.”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충격적이었다. 난쟁이와 비극배우가 부인이 아닌 서로를 향해 한목소리로 “자네도 봤지”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경고했다.
“우리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그 순간 나는 두 유령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 엄밀하게 말해 한때 한 사람이었던 존재의 잔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쟁이가 다시 한 번 사슬을 쩔렁거리며 흔들었다.
“내가 보고 싶었냐니까?”
비극배우가 소름끼치게 연극적인 떨림이 담김이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
부인은 여전히 난쟁이만 보면서 말했다.
“그 점은 물론이고 다른 부분에서도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런 건 영영 잊어버리세요.”
나는 그 순간, 정말로 난쟁이가 그 말에 따르리라고 생각했다. 난쟁이의 얼굴 윤곽선이 좀더 또렷해지기도 했거니와, 4월 저녁에 노래하는 새처럼 전 존재로 노래하며 기쁨으로 초대하는 부인의 말을 누가 감히 거절할까 싶어서였다. 난쟁이는 흠칫 망설였다. 그러더니 또 한 번 공범자와 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대답을 너무 강요하진 않는 편이 관대하고 좋은 일일 것 같군.”
그들은 서로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다고 아내가 알아줄까? 전에도 그랬잖아. 집에 남은 마지막 우표로 자기 어머니한테 편지를 쓰게 해 주었는데, 우리도 편지를 쓰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 우리는 아내가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둘 거라고,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인지 기억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 또 언젠가는…… 오, 어디 그런 적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그러자 난쟁이는 또 사슬을 철렁거리며 흔들었고, “난 잊을 수 없어”라고 비극배우가 소리쳤다.
“난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여기 사람들이 나한테 저지른 짓들은 용서할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을 불행에 빠뜨린 건…….”
“오, 아직 모르겠어요? 이곳에 불행이란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비극배우를 깜박 잊어버린 것처럼 난쟁이가 직접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간 행복했단 말이지?”
“당신은 내 행복을 바라지 않았던가요? 아니, 과거에 바랐느냐 바라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바라면 되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 문제는 아예 생각하지도 마세요.”
난쟁이는 부인을 보고 눈을 껌벅거렸다. 이때까지 꿈도 못 꾸어 본 생각이 그의 조그만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그에게도 약간의 다정함은 있다는 점이 보인 것이다. 그 순간, 그는 거의 사슬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그는 사슬이 무슨 생명선이라도 되는 양 다시 꽉 움켜쥐었다.
“이봐, 우리는 상황을 똑바로 파악해야 해.”
비극배우가 말했다. 이번에는 ‘남자답게’으르는 말투를 쓰고 있었다. 여자들을 정신차리게 만들 때 쓰는 그런 말투 말이다.
“여보, 똑바로 파악해야 할 상황 같은 건 없어요. 불행 그 자체를 위해 제가 불행했길 바라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은 단지 제가 당신을 사랑했다면 불행했을 것이 틀림없겠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잠깐만 기다리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사랑!”
비극배우는 자기 앞이마를 탁 치더니, 몇 음 더 낮게 목소리를 내리깔면서 말했다.
“사랑! 당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부인이 말했다.
“저 자신이 사랑에 빠져 있는걸요, 사랑에. 모르시겠어요? 그래요. 전 지금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 말은,”
비극배우가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예전에는 날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로군.”
“아주 빈곤한 방식으로 사랑했을 뿐이지요.”
부인이 대답했다.
“그래서 용서해 달라고 말했잖아요. 진정한 사랑은 아주 조금 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우리가 저 아래 세상에서 ‘사랑’이라고 부르던 건. 진정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사랑받고 싶어하는 갈망이었지요. 저는 주로 저 자신을 위해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은!”
비극배우가 닳고닳은 절망의 몸짓을 취하며 외쳤다.
“지금은 내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건가?”
“물론이죠!”
부인이 말했다. 그 미소를 보니, 두 유령이 어떻게 기쁨으로 소리치지 않고 버리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게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모든 걸 다 가졌는데. 이제 전 공허하지 않고 충만해요. 사랑이신 그분 안에 있으니 전혀 외롭지 않아요. 전 약하지 않고 강해요. 그리고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어서 와서 보세요. 우린 더 이상 서로가 필요치 않을 거예요. 이제부터 우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어요.”
하지만 비극배우는 여전히 잘난 척 폼만 잡고 있었다.
“내가 더 이상 필요 없대. 더 이상 필요 없대, 더 이상.”
그는 특별히 염두에 둔 대상 없이. 목멘 소리로 말했다.
“하나님께 바라건대,”
그는 ‘하나님’을 ‘하너님’으로 발음하며 말을 이었다.
“하나님께 바라건대, 저런 소릴 듣느니 차라리 그녀가 내 발 밑에 죽어 쓰러진 모습을 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죽어 쓰러진 모습을, 죽어 쓰러진 모습을.”
부인이 그 혼잣말을 끊지 않았다면, 도대체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을지 모르겠다.
“프랭크! 프랭크!”
부인이 소리치자 온 숲이 쩌렁쩌렁 울렸다.
“날 좀 봐요. 날 좀 보라구요. 그 크고 추한 인형을 가지고 뭘 하는 거예요? 사슬을 놓으세요. 멀리 보내 버려요.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이에요. 저 인형이 하는 말이 얼마나 한심한 헛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즐거움이 부인의 눈빛 속에서 춤을 추었다. 부인은 난쟁이의 머리 바로 위에서 난쟁이와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가끔 미소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을 표정이 난쟁이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이제 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인의 웃음소리가 첫 번째 방어선을 뚫고 들어갔다. 그는 버텨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완벽하게 성공할 수는 없었다. 자기 뜻과는 달리 몸집까지 더 커졌던 것이다.
“오, 당신은 정말 어리석어요.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지요? 제가 오래오래 전에 이미 죽어 쓰러졌다는 걸 당신도 잘 알면서 말예요. 물론 ‘당신 발 밑’은 아니었지만 요양원 침대 위에서 죽어잖아요. 아주 좋은 요양원이었지요. 길바닥에 죽어 쓰러진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하다니, 그곳 간병인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에요.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이곳에서 인형 따위가 죽음을 가지고 감동적인 말을 하려 드는 게 정말 우습군요. 그런 말을 해 봤자 여기선 절대 통하지도 않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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