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 풍산리 황희 정승 조부 묘(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1 나옹대사가 소점한 명혈인가?
간산기들은 나옹대사가 소점한 명혈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쓰고 있다. 나옹대사가 소점했다는 것은 팩트(사실)가 아니고 형기풍수 입장에서 볼때 바람이 불고 혈장(묘역)이 좁아서 명혈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황희의 시조가계(始祖家系)가 흐릿하던 중 황희라는 특출한 인물이 배출되어 장수황씨의 시조(남원 황씨는 후대에 분파된 것)가 되었으니 만큼 이 묘를 대혈이 아니라고 한다면 뭇 풍수로부터 몰매를 맞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간산해 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2. 황희와 조부묘의 전설
* 황희는 1363년 개성출생, 1452년 사망하여 파주 금송리 산1(사목리 산122은 유적지로 4키로 떨어져 있다)에 묻혔다.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하다. 청렴 충효하고 강직하여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다. 그러나 사위가 아전을 버릇없다고 때려 죽인 사건에 관하여 맹사성과 공모하여 사실을 조작하였고 서자가 궁중물건을 훔친 사건을 은폐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그리고 지붕에 비가 샐 정도로 가난하였다는 일화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조선 4대 名재상으로 황희 맹사성 류성룡 이원익을 꼽는데 황희와 맹사성은 세종때 함께 근무했다. 두분을 비교하면 황정승 선조들은 광한루 부근에 살았던 부자이었고 맹정승은 두문동72현 후손으로 원천적으로 가난하였다. 맹정승은 허름한 집 한채와 피리 검은 소 한 마리를 유산으로 남겼다고 하니 더 청렴하였다.
* 장수황씨는 신라말 황경이 원 시조인데 계대(系代)가 불명한 탓으로 18세손 황석부(황희의 증조부)가 장수황씨의 기세조(起世祖)가 되었고 인구는 17만명이다. 황희이후 자손이 번성하자 본관을 장수로 한 장수황씨를 표방하였다.
* 조부의 묘는 남원 풍산리 산촌마을(풍산리 산6)에 있는데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다.
무학스승 나옹대사가 윤지사에게 명혈을 구해주기로 하고 3백냥을 시주받아 절을 고쳐지었다. 나옹대사가 이 혈을 찾은 다음 윤진사를 대동하고 찾아가면 눈이 흐려져 혈처가 보이지 아니한 탓으로 혈을 점지해주지 못했다. 참지 못한윤진사가 나옹을 사기꾼이라 욕하면서 저자거리로 끌고 다니며 챙피를 주자 황희의 아버지 황군서가 삼백냥을 대신 갚아 주었다. 나옹은 그 보답으로 이 혈을 가르켜주려고 황군서를 대동하고 혈을 찾아가자 혈처가 확연하게 보여서 소점해주었고 황군서는 그의 아버지 황균비 묘를 이장했다. 묘지이장 후 고향을 떠나야 발복받는다는 말에 개성으로 이사가서 4년뒤 황희를 낳았다.
3. 답사
* 홍곡단풍(鴻鵠摶風, 큰 기러기가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는 형) 또는 秋谷丹風穴 또는 명홍조풍(鳴鴻遭風形, 기러기가 바람을 마주치자 길게 울면서 날아가는 형상)이라고 한다.
* 마이산-부귀산-묘복산-풍악산의 경로를 거쳐 갈지자를 그리며 내려와서 입수하였다. 주산도 몇 개 봉우리의 중심이므로 입수까지는 나무랄데 없고 명당(明堂)과 조안산도 좋다. 물이 명당(明堂)에서 직수로 흐르고 있어서 재물이 弱하겠다는 중론이 있다. 그런데 5부 능선 쯤되는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안산이 멀어서 바람막이 역할을 할 수 없다. 등산길에 있는 조망점 같다. 가장 큰 문제는 혈장이 좁은 점이다. 크다란 봉분을 만들었는데 청룡쪽은 봉분 가장자리에서 한 발짝 여유밖에 없고 그 밑으로는 깊은 수직절벽으로 벌초할 때 발밑을 조심해야될 지경이다. 봉분을 크게 조성한 것은 바람을 막으려는 의도와 투장을 막으려는 의도(오랜 기간 묘지 송사를 하엿다고 한다)가 있었을 것이다(파주에 있는 황정승 본인 묘도 봉분이 엄청 큰다). 원래 陳씨 묘가 있었는데 그 위에 이 묘를 썼다. 관룡자로 측정해보니 가운데 쪽으로 미미한 생기가 있었다. 대혈로 보기에는 머리를 가웃둥할 수 밖에 없다. 물형은 안산이 큰 까닭에 명홍조풍형이 맘에 든다.
* 나옹선사는 경북 영덕 갈천리에서 1320년 출생하여 1341년 출가하고 공부가 어느정도 이루어지자 1347년 원나라로 유학가서 지공화상 밑에서 공부한 뒤 실력을 인정받고 1355년 원 순제의 명으로 광제사 주지를 맡았다가 1358년 순제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하였다. 1361년 공민왕의 간청에 따라 신광사의 주지를 맡았고 그 뒤 용문산 금강산등지를 순례하고 회암사 주지를 맡았다. 일시 송광사에 온 일이 있으나 곧 회암사로 돌아갔다. 회암사에서 교화활동을 할 때 신자들이 몰려들어 길이 메어질 지경이었다. 1371년 왕사로 봉해지고 1376년 순례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고려말 보우와 함께 국사 칭호를 받고 노래를 많이 지어 나옹집으로 남겼다. 스님들이 즐겨 쓰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라는 청산가는 나옹선사 작품이다.
* 전설은 황정승이 탄생(1363년)하기 4년전 조부묘를 소점받았다고 하니까 1359년경인데 그때는 나옹대사가 중국에서 귀국한 이듬해로서 오대산에 막 은거한 시기이다. 첫째 귀국직후인데 언제 윤진사 돈을 빌려서 어떤 사찰을 중창하였단 말인가? 둘째 나옹하상은 원나라 왕사로 있다가 귀국하였으므로 이미 고승으로 이름나 있었으니 상좌를 데리고 나녔을 터이니 윤진사에게 끌려다니면서 얻어 맞았다는 일는 상상할 수 없다. 셋째 나옹화상이 명혈을 소점해주기로 약속하였다면 다른 명혈을 구해주면 될터인데 이 혈을 고집하여 얻어맞고 다녔겠는가?
4 어떻게 이해해야 될가?
* 나옹 소점설은 허구인데 나옹의 위상을 깍아내리고 있다.
* 혈처의 모양을 단순하게 본다면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동네 길지급수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상에서 내려오는 입수래룡이 좋고 안산과 전면의 사격이 좋다는 점, 황정승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어 장수 황씨문파를 세운 계기가 된 점을 고려한다면 이 혈은 명혈로 보아야 될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혈처는 전면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혈장이 빈약하고 무엇보다도 생기가 미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이런 여러 사정을 종합해보면 복흥 황앵탁목형(기정진의 조모묘, 기정진의 묘가 명혈이다)처럼 일회용 발복처로서 황정승을 배출하고는 역량(力量)이 소진된 奇穴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정승 후대가 번성한 것은 황정승 본인 묘등 다른 명혈의 덕택으로 보아야 될 것 같다. 김두규교수는 전북 7대 명당이라고 평가하고 명혈이라는데 異說이 없는 상황인데 의문을 제기한다면 “공부 더 하라”는 뭇매를 맞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묘가 나옹대사의 소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기탐지기로 측정을 해보면 장기 발복할 혈처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풍수도 있을 것이다.(2023. 2)
5 현장사진
* 산등—묘아래 산등이 왼쪽으로 굽어지면서 내려 왔다. 그 곳에 있는 묘 또한 혈이 된다는 견해도 있으나 지각으로 보인다.
* 봉분—백호쪽이 여유가 없는데다가 수십길 절벽에 잇대어 있다
* 좌향—당판 중앙으로 한걸음 옮긴 재혈이 맘에 든다(백순호작품, 감사)
* 파주 황정승 묘---이 정도로 후덕해야 오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