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주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 사조로서, 인간 개인의 삶이 언어적·문화적·사회적 구조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강조하는 철학 사상이다.
구조주의가 나오기 전까지는 인간은 이성을 바탕으로 사유하며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적 존재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 아래에 무의식이라는 세계가 있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표면적인 현실에는 그 현실을 만들어 내는 근원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고, 그 진실은 표면에 드러난 것이 아닌 그 아래에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숨겨져 있는 것은 언어의 규칙일 수도 있고, 문화나 제도의 법칙일 수도 있다. 이 숨겨져 있는 언어의 규칙이나 문화나 제도의 법칙을 구조라고 한다. 인간이 이성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언어나 문화, 그리고 제도 등을 주체가 되어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 구조가 인간을 지배한다고 하는 사상이 구조주의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나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구조의 영향력 아래에서 지배를 받고 그 힘을 받아들이는 객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제일로 삼던 이성은 구조 앞에 무너진 것이다.
이 구조주의는 20세기 중반에 등장하였는데 원래 소쉬르(Ferdinand de Soussure)의 언어이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면 먼저 소쉬르의 언어이론을 한번 살펴보자.
그는 ‘구조주의 언어학’을 주장한 사람으로서, 언어를 서로 관련된 기호의 체계로 보았으며, 이 기호는 기표(記標, signifiant)와 기의(記意 , signfié)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기표는 음성적 기호이고 기의는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를 가리킨다. 우리는 ‘人’을 [sa:ram]이라 소리낸다. 이때 [sa:ram]이라는 소리는 기표이고 ‘人’이란 뜻은 기의이다. 그런데 이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人’을 우리는 [sa:ram]이라 하지만 중국인은 [rén]이라 하고, 일본인은 [hito]라 하고, 영어로는 [mæn]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기호가 필연적이라면 언어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의 이 비필연적 관계를 자의적(恣意的)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언어기호를 구사할 때, 개인에 따라 차이가 나며, 동일인인 경우에라도 때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우리는 때에 따라 시시로 달라지는 이 말을 그대로 따라 배우지는 않는다. ‘감기’라는 말의 ‘감’의 ‘ㄱ’과 ‘기’의 ‘ㄱ’은 음성학적으로 보면 다른 소리다. ‘감’의 기역은 무성음 [k]이고 ‘기’의 기역은 유성음 [g]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ㄱ’을 우리는 각각 다른 소리로 머릿속에 저장하지는 않고 똑같은 ‘ㄱ’으로 기억한다. 어떤 언어 장애자가 “어마 저 짬자리 자붜 주”라고 말해도 우리는 “엄마 저 잠자리 잡아 줘”라고 머릿속에 저장된 뜻으로 그 말을 알아듣는다. 또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자기 엄마를 부르면서, ‘마마, 마미, 맘마, 마’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부르는 개별적 언어들을 우리는 ‘엄마’로 알아듣는다. 전자는 밖으로 실현된 말이고, 후자는 우리 머릿속에 저장된 말이다. 이처럼 개별적으로 현실에서 실현된 말을 빠롤(parole)이라 하고,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공통적인 말의 묶음을 랑그(langue)라 한다. 언어를 일괄적으로 묶을 수 있는 틀이 랑그다. 이처럼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랑그의 틀을 구조라고 한다. 소쉬르는 언어의 체계, 의미, 규칙인 이 랑그를 언어학의 대상이라 하였고, 이러한 언어학을 구조언어학이라고 이름하였다. 구조주의라고 하는 말도 여기서 시원한다.
우리는 우리가 쓰는 언어의 그 구조 속에 던져진 존재다. 한국 사람은 한국어의 구조에 따라 말을 하고, 그 구조 속에서 의식을 다듬는다. 한국의 ‘아버지’와 미국의 ‘father’는 같지 않다. 미국의 ‘father’ 는 ‘하느님’의 뜻을 갖고 있지만, 한국의 ‘아버지’는 자기를 낳아준 사람이라는 뜻뿐이다. 영어의 ‘poor’는 ‘가난하다’는 뜻과 함께 ‘불쌍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국어의 ‘가난하다’는 ‘수입이 적어 살림살이가 어렵다’는 뜻뿐이다. 우리는 ‘누나’와 ‘여동생’을 명확히 구분하지만, 영어권에서는 ‘sister’라는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 또 우리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papillon(빠삐용)’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며, ‘개’와 ‘너구리’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chien’이라는 한 단어로 표기한다. 우리와 그들은 언어의 구조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그들은 의식구조가 다르다.우리는 한국어의 구조 즉 체계와 규칙에 따라 말을 해야 하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국어의 구조 즉 랑그 속에서 의식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한정 짓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가 주는 구조(랑그) 속에서 생각할 뿐이다. 인간이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데까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여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주제한다고 선언했지만, 구조주의는 언어가 제공하는 대로 인간은 생각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언어는 실상 자기가 만들지 않은 구조에 따라 단어를 나열하고 인간은 그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말을 할 때 언어의 구조속에 들어간다는 말이 이런 뜻이다.
이는 실존주의와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세계내에 던져진 실존은 주어진 상황에 결단하며 살아나가고, 그것의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실존주의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주어진 언어의 구조에 던져지고 그 구조에 의하여 규정되고 만들어진다. 인간 자신이 주체가 아니고 언어 구조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적 측면에서 성립된 구조주의는 많은 학자들이 이에 동참했다. 그중에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적 측면에서 구조주의를 전개했다. 그는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미개인이라 불리는 아마존의 브로드족이나 남비크라와족 등의 삶을 연구했다. 그때 서양인들은, 미개인들은 미신 투성이에 유치하고 원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습속을 연구해 보니,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합리적이고 깊은, 서양과는 다른 독자적인 사회 시스템 즉 문화적 구조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일례를 들면, 그들은 부모의 성별이 다른 형제의 자식(교차 사촌)과는 결혼할 수 있지만, 부모와 성별이 같은 형제의 자식(평행 사촌)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습속을 가지고 있었다. 평행사촌(平行四寸)이란 부모와 성별(性別)이 같은 형제자매의 자녀인 친사촌과 이종사촌을 말한다. 반면, 교차사촌(交叉四寸)이란 부모와 성별이 다른 형제자매의 자녀인 외종사촌과 고종사촌을 말한다.
이는 서구의 관점에서 보면 미개한 인습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부족만 번영하거나 쇠퇴하지 않도록 하는 규범 즉 구조가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미개사회에 존재하는 그러한 사고체계를 과학이라 설명하면서, 서양의 근대적 사고만이 이성적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그는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을 적용하여 언어의 구조처럼 부족 구성원들의 삶도 그것을 구성하는 체계 즉 구조에 의하여 결정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간을 갖고 더 깊이 읽어야 구조에 대하여 좀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