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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고백(1-6)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시지만, 한 번 용서하신 죄는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역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철저히 회개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임과, 하나님의 용서 외에는 어떤 한 희망도 없음을 고백하며 철저히 뉘우치는 것을 시작합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1-6)
이 시는 다윗이 밧세바를 빼앗고 우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에 대해 나단 선지자에게 혹독한 책망을 들은 후 지은 것입니다. 이 시를 읽어 보면, 다윗이 그 죄를 얼마다 철저하게 회개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 인자와 긍휼을 따라 죄를 제하소서(1-2)
시인은 간절함과 애잔함을 가지고 “은총을 베푸소서 나에게 하나님이여”라고 외치며 시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반역죄(페샤)와 죄악(아온)과 죄(하타트)를 고백하고, 이 모든 더러움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따라 지워주시고 씻어주시고 깨끗이 제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용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만이 잃어버린 자신, 소외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멸망과 죽음과 잊힘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시인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기로 합니다. 절망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기기로 합니다.
‘은총을 베푼다’는 히브리어 ‘하난’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는 것으로 강요하거나 주장할 수 없습니다. 시인이 은총을 요구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인자를 따라”입니다. ‘인자’(헤세드)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하기에 은총의 근거가 되기에 적당합니다. 이것은 병행적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많은 긍휼과도 연결됩니다.
‘많은’은 질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긍휼은 원래 자궁(레헴)을 가리키는 명사의 복수형으로 태 안의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반역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더군다나 이 ‘죄악’(페샤)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저지른 반역으로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중죄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반역죄(1)가 지워지기를 바라며, 자신의 죄악(2)은 말갛게 씻기길 바라고, 또 자신의 죄(2)가 깨끗해지길 바란다고 함으로써 모두 ‘정결’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사죄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고’, ‘눈보다 희게 하고’(7), ‘죄악을 지워달라는 간구’(9)로 이어집니다. 이는 정결 의식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레 14:1-9; 민 19:1–22). 말갛게 씻긴다는 것은 ‘여러 번’ 씻는다는 뜻으로, 앞에 나온 ‘많은’ 긍휼과 연결됩니다.
(2) 주 앞에서 범한 죄, 주께서 의롭게 판단하실 죄(3-4)
시인은 여기서 앞에서 사용한 반역죄(‘죄과’는 1절의 ‘죄악’과 같은 단어)와 ‘죄’라는 단어를 가져와 철저히 자신의 죄악을 고백합니다. 시인의 죄는 시인도 알고 하나님도 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가 자기 앞에 있다고 하는데, ‘나의 앞’은 ‘나를 거슬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인의 깊은 죄의식을 반영합니다. 죄가 시인을 고발하고 있는 것을 시인은 깊은 감수성으로 매순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무의식중에 지은 실수가 아니라 “내 죄”라고 분명히 책임소재를 밝힙니다. 3절과 4절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죄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감춰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임을 알면서 범한 변명의 여지없는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지 않으시면 그 죄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어떤 판결을 내려도 그것은 정당하며 또 완벽한 판결이 될 것입니다. 4절 하반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유죄를 선고하실 때 당신은 의로우시고, 심판하실 때 당신은 완전하십니다.” 우리 성경에서 말씀과 심판이 병행을 이루고, 의로우시다와 순전하시다 역시 병행을 이룹니다. 모두 법정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3) 모태로부터의 죄악, 주께서 중심에 가르치실 지혜(5-6)
시인의 자기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이제 그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철저한지를 인정합니다. 어쩌다 한 번 범한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이 죄의 감옥에서 나올 수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지속적인 사랑 한없이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고는 가망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용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지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는 지혜, 죄악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참담함을 아는 지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알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것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기서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고, ‘어머니가 나를 죄중에 잉태하였다’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성적 열망으로 인한 오염의 전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보편성에 대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나올 때부터 죄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해법은 ‘주께’(당신께) 있습니다(6). 모태의 은밀함과 비밀스러움에서부터 죄의 영향을 받았으니, 시인의 ‘중심’에서 주께서 무언가 일을 하셔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은 시인의 양심의 세계를 가리킬 것입니다. 다행히도 주님은 시인의 마음이 진실하기에 기뻐하시고 그래서 남모르게 지혜를 가르쳐주시는 분입니다. 시인이 철저한 자기 절망 가운데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성품이고 기대입니다.
죄 용서를 간구(7-9)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한 심령이 있는지 살피십니다. 상한 심령 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는 것은 외식이며,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뿐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지만, 상한 심령 없이는 아무리 작아 보이는 죄라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7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7-9)
다윗은 자신이 죄악 중에서 출생했고, 어머니가 죄 중에서 그를 잉태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죄에 대해 얼마나 나약한지, 죄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고백합니다. 평생 경건하게 살아온 그가 한순간에 유혹에 무너진 것이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1)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소서(7)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어 1-2절에서 드렸던 기도를 좀더 구체적으로 반복합니다. 시인은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나의 죄를 씻어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우슬초는 나병에서 나았을 때(민 19:18), 죽음으로 부정해진 자를 씻을 때(민 19:18) 쓰입니다. ‘정결하게 하다’라는 동사도 마찬가지 경우에 쓰이고 있습니다. ‘씻어주소서’(카바스)란 동사는 2절에 나온 바 있습니다. 이것은 ‘빨래하다’란 의미입니다. 자신을 걸레 같은 존재로 본 것입니다. 더러움과 주홍빛 죄가 덮어도 하나님께서 빨래하시면 ‘눈보다 희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흰색은 순수, 정결함, 깨끗함, 기쁨을 의미하기에 용서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2)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
그렇게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즐겁고 기쁜 소식’을 들으면 주님께서 징계하심으로 말미암아 꺾인 시인의 뼈들이 즐거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뼈’는 힘의 근원입니다. 뼈들에 힘이 넘치면 온몸에 힘이 넘칩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58:11)이라고 축복합니다. 시인은 잃었던 건강이나 혹은 깊은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육적으로, 영적으로 치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3) 죄악을 지워주소서(9)
이를 위해 시인은 다시 한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죄악을 지워’ 달라고 간구합니다. 아무것도 주님 눈에서 감출 수 없으니 이제 방법은 주께서 얼굴을 돌려서 죄를 보지 않으시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처럼 자신의 죄(값)를 지워달라고 간청합니다. 반역죄뿐만 아니라 그 죄의 실상까지도 흔적 없이 없애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니(시 90:8) 용서와 죄악 지움을 다 함께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사람이 귀한 시대입니다. 겉으로는 잘못했다고 말하고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실상은 제스처만 보이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철저하게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더욱 크다는 것을 믿고, 어떤 죄를 지었든지 다윗처럼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용서받는 자유함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시편 52편 10-19절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릴 때에, 짐승을 죽이거나 곡식을 곱게 갈아서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짐승과 곡식은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제물인 짐승처럼 죽어야 하고, 곡식처럼 갈아지는 존재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10-15)
물질이 많아져도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고 형편이 나아진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과 큰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이 없어도 정신이 풍요로운 사람도 많습니다. 또한 건강을 잃고 오히려 깊은 행복을 되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과 사랑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이 마음이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보다 정직한 마음과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0-15)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고서 느낀 감정은 하나님께 쫓겨난 기분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외면을 당해도 속이 상하고, 짓눌림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이겠습니까? 또한 구약시대에는 성령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때만 임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섬겼던 사울왕에게서 주의 성령이 떠나고 났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 주의 영으로 내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소서(10-12)
이제 시인은 용서를 간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위한 방안을 간구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주의 영이 지배하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은 지, 정, 의를 다 포함한 한 인격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마음이 정결하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새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특히 ‘창조하다’라는 하나님만의 창조를 표현하는 단어를 쓴 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뒤에 나온 “새롭게 하다”와 병행을 이룹니다. 시인은 정결하고 견고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소원합니다. 5절에서 날 때부터 죄의 영향권 아래 놓인 자신을 고백했는데, 새로운 출발은 첫 창조를 하신 하나님께서 새 창조 해주실 때만 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시인은 이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라는 것은 내 죄를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지 말아 달라는 요청입니다. 여기서 ‘나를’은 직역하면 ‘나의 얼굴을’이며 이것은 인격을 가리키는 제유법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쫓겨나는 것은 친밀한 교제를 잃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라”고 바꿔 표현합니다.
사울에게서 떠난 영이 자신에게서는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의 내주만이 범죄의 길로 다시 들어서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12절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돌아섭니다. 시인은 죄를 짓기 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자원하는 심령을 주셔서 자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자원하는 영은 이제 하나님 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영이며, 이것은 죄의 용서를 통해 정결해 진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에 매임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역설적 존재입니다. 시인은 그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얼마나 노예된 삶이었는지를 경험적으로안 것입니다.
(2) 주를 가르치고 찬양하며 선포하리이다(13-15)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시고 회복해주시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서원 형태로 아룁니다. 13절에서는 자신과 같은 범죄자들에게 주의 도, 주의 길을 가르쳐서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게 하겠다고 서원합니다. 자신의 체험담을 통해 용서와 회복의 기쁨을 그들이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회개의 길잡이가 될 수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시인은 자신이 흘리게 만든 ‘피’가 가져올 처벌에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4a). 그러면 자신의 혀로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14b).
이 의는 언약에 충실한 것을 가리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으로 깨어져야 마땅한 언약을 이어주신 하나님의 참다운 ‘의’를 노래하겠다는 것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 죄인들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의’를 바울이 찬양했듯이 말입니다. 15절에서는 이것을 다시 입술을 열어 주를 찬송하며 전파하겠다는 서원으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이 찬양은 감사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찬양입니다. 따라서 모든 찬양은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겠나이다(16-19)
어떤 사람은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자유를 만끽하며 삽니다. 몸의 자유보다 마음의 자유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심령이 중요합니다. 좋은 일도 억지로 하면 불행한 일이 됩니다. 강요된 상태에서 일하는 노예는 힘들게 노동하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땀은 많이 흘리지만 즐거움이 없습니다. 일은 이루지만 보람과 행복은 없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봉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때 깊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16-19)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인간이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16-17)
여기서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다른 방식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자신은 비록 죄로 인한 통증으로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아파하고 주님 뵈올 면목이 없지만, 그래서 감히 제사의 자리로 나아가봐야 소용없을 만큼 가망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주께서 정말 원하시는 제사는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바로 그 참회하는 마음으로 주를 찾는 것임을 알기에 소망을 갖고 나아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주께서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는 곡언법 수사학으로 ‘크게 진노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제사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처럼 들리기에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부정하는 것은 제사제도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진심을 담지 않은 형식적 제사를 의미합니다. 죄라는 것이 제물 제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시인이 이미 드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위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에 변화를 줄 수 없음을 시인은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의 양도 아니고 종류도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구절을 암시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12:1)라고 그 의도를 간파하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보시는 대신에 사람 자체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보기 전에 내 본질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것을 ‘상한 심령(루아흐)’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렙)”으로 표현합니다.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보다 자기 죄로 인하여 깨어지고 부서지고 상한 마음을 먼저 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10절에서 시인이 간구했던 “정한 마음(랩)”과 “정직한 영(루아흐)”이 창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한 (니쉬바르)은 ‘깨다’(샤바르) 동사에서 나온 말로, 우상이나 뭔가 소중한 것을 깨뜨릴 때 쓰입니다. 하나님 대신 소중하게 여긴 것이 남김없이 깨어질 때 찾아온 겸손한 상태가 ‘상한 심령’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슴을 치며 나에게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한 세리의 마음입니다. 여기 ‘마음’은 일부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자아 전체, 시인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도 시인은 주께서 업신여기지 않고 받아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기뻐하고 수용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2) 시온을 위한 간구(18-19)
시편 51편에서 1-17절은 하나님과 내가 맺는 관계를, 18-19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나의 죄악을 씻기시고, 정결한 마음을 내 안에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도 은총을 베푸십니다. 내가 받은 은총(1)이 증폭되어 믿음의 공동체(18)를 덮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고(13)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외치고(14), 하나님을 찬양한(15) 결과입니다.
시인은 주의 은택, 즉 주의 기쁨, 내키심, 호의 선의로 시온에 선을 행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시온을 잘 보살펴달라는 뜻입니다. 또 예루살렘 성을 쌓아달라고 합니다. 이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견고하게 세워달라는 부탁입니다. 시인은 쇠락한 이스라엘의 한 왕일지 모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어짐과 나라의 죄와 허물어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회복만이 아니라 국가의 회복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본질에 충실한 제사, 마음을 먼저 드리는 제사를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면 올바른 영과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내가 지은 죄를 후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게 그 죄의 책임이 있음을 철저히 인정하되 내 안에는 어떠한 선한 것도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회개는 내 마음 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회개는 내 마음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죄가 있는지 돌아보고, 나의 회개를 통해 공동체가 회복되는 역사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