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392]북창삼우(北窓三友)
북창삼우(北窓三友)
- 북쪽 창의 세 가지 벗, 거문고와 술과 시
[북녘 북/창 창/석 삼/벗 우]
글을 쓸 때 가까이 두는 紙筆墨硯(지필묵연)의 네 가지 문방구를
文房四友(문방사우)라 하고,
추위에 잘 견디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松竹梅(송죽매)를
歲寒三友(세한삼우)라 한다.
孔子(공자)는 추운 겨울에도 꿋꿋이 지조를 지킨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歲寒松柏(세한송백)이라 기렸고,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가 그린 歲寒圖(세한도)는 국보가 되었다.
여기에 북쪽으로 난 창문(北窓)의 세 가지 벗(三友)이 더해진다.
남향집이 많아 북쪽으로 난 창이 하늘 바라보기 좋다고
북창일 수도 있겠지만
唐(당)나라의 白居易(백거이, 772~846)가
‘北窓三友(북창삼우)’란 시에서
노래한 거문고, 술, 시를 가리킨다.
樂天(낙천)이란 자(字)로 잘 알려진 대시인 백거이는
李白(이백), 杜甫(두보), 韓愈(한유)와 더불어
李杜韓白(이두한백)으로 불릴 정도였고,
아호도 香山居士(향산거사)와 함께
시와 술과 거문고를 三友(삼우)로 한다며
醉吟先生(취음선생)으로 썼다.
세 가지를 벗으로 삼은 것은 각각 스승으로 삼은
세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설명한다.
시는 東晉(동진)의 전원시인 陶淵明(도연명),
거문고를 가까이하며 三樂(삼락)을 자족한
春秋時代(춘추시대)의 은사 榮啓期(영계기),
술을 좋아하여 酒德頌(주덕송)을 남긴
竹林七賢(죽림칠현) 중의 劉伶(유령)이 그들이다.
北窓三友(북창삼우)
白居易 (백거이, 772~846)
今日北窗下 금일북창하 自問何所爲 자문하고위
欣然得三友 흔연득삼우 三友者爲誰 삼우자위수
琴罷輒擧酒 금파첩거주 酒罷輒吟詩 주파첩음시
三友遞相引 삼우체상인 循環無已時 순환무이시
一彈愜中心 일탄협중심 一咏暢四肢 일영창사지
猶恐中有間 유공중유간 以酒彌縫之 이주미봉지
豈獨吾拙好 기독오졸호 古人多若斯 고인다약사
嗜詩有淵明 기시유연명 嗜琴有啓期 기금유계기
嗜酒有伯倫 기주유백륜 三人皆吾師 삼인개오사
或乏儋石儲 혹핍담석저 或穿帶索衣 혹천대삭의
弦歌復觴咏 현가부상영 樂道知所歸 낙도지소귀
三師去已遠 삼사거이원 高風不可追 고풍불가추
三友游甚熟 삼우유심숙 無日不相隨 무일불상수
左擲白玉卮 좌척백옥치 右拂黃金徽 우불황금휘
興酣不疊紙 흥감불첩지 走筆操狂詞 주필조강사
誰能持此詞 수능지차사 爲我謝親知 위아사친지
縱未以爲是 종미이위시 豈以我爲非 기이아위비
오늘도 북창 아래 한가로이 앉아서
해야 할 게 무엇인가 혼잣말하듯 물어보네
생각만 해도 즐거운 벗 셋이나 생겼는데
어떤 것들을 세 벗이라 하는 것인가
칠현금 타다 끝이 나면 술을 마시고
술잔 비운 뒤에는 시를 지어 읊는데
세 벗이 서로 번갈아 서로의 손을 잡아 끌어
몇 번을 돌아도 끝날 기색 보이지 않네
칠현금을 한 번 타면 맘속까지 흡족해지고
시를 한 수 읊으면 온 몸이 편안해지는데
그 사이에 감흥이 끊어지기라도 할까 봐
잔에 술을 가득 채워 그 사이를 없애주네
졸렬한 것을 좋아한 사람 어찌 나 하나 뿐일까
옛날에도 이런 사람 꽤나 많이 있었으니
시를 좋아했던 사람 도연명이 있었고
칠현금 좋아했던 영계기가 있었으며
술 좋아했던 사람으로도 유령이 있었으니
그 세 사람 모두가 나의 스승이라네
누구는 모아둔 게 곡식 한 항아리뿐이고
누구는 노끈을 허리띠로 쓰지만
칠현금 뜯고 술 마시고 시를 지어 읊으며
인생을 즐기며 가야 할 길 잘 알고 있네
세 스승은 이미 죽어 먼 곳에 있고
옛 선인의 고아한 풍격에 이를 수는 없지만
세 벗과의 교유가 지극하고 돈독하여
하루라도 함께 놀지 않는 날이 없었네
왼손에 들고 있던 백옥잔을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칠현금을 연주하다가
흥 오르면 줄도 없는 종이 펼치고
종잡을 수 없는 말을 내갈겨 쓰네
누구라도 맘에 들어 이 글 지닌 뒤
나를 위해 친지들에게 고맙다고 말해주면
그것이 내게 좋은 일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나쁜 일이 되기야 하겠는가
▶ 欣然(흔연): 흔연히. 기꺼이.
▶ 愜中心(협중심): 마음속으로 만족함을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 彌縫(미봉): 봉합하다. 보완하다.
⟪좌전左傳⋅희공이십육년僖公二十六年⟫에서
‘桓公是以糾合諸侯, 而謀其不協, 彌縫其闕, 而匡救其灾, 昭日職也
(제환공이 이 일로 제후들을 규합하여 협의를 통해 서로의 알력을 해결하고 그들의 허물을 봉합하여 그들이 당한 재난을 도왔는데 이것은 제나라 대공이 원래 해야 할 일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했다. 일의 빈 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하여 꾸며대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 拙(졸): 처세술이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 淵明(연명): 동진東晉 말기의 전원시인田園詩人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古今隱逸詩人之宗’으로 불린다.
▶ 啓期(계기): 춘추시대의 은사隱士 영계기榮啓期를 가리킨다.
금琴 연주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스스로는 공자孔子가 말한 군자삼락君子三樂에 빗대어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 남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나이 아흔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것’을 자신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고 말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지족자락知足自樂의 전고가 되었다.
▶ 伯倫(백륜): 위진魏晉 시기의 명사로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인
유령劉伶을 가리킨다. 취후醉侯로 불릴 만큼 술을 좋아하여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남길 정도였다.
▶ 儋石(담석): ‘儋’은 두 섬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를 가리킨다.
한 섬을 ‘石’이라 하고 두 섬을 ‘儋’이라 하여 한 사람이 질 수 있는 무게라 했다는 설명도 있다. 곡식의 양이 적은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 帶索(대삭): 끈으로 허리띠를 대신할 정도로 사는 것이
빈한하고 입성이 초라한 것을 가리킨다.
⟪열자列子⋅천단天端⟫에서 ‘孔子游於太山, 見榮啓期行乎郕之野,
鹿裘帶索, 鼓琴而歌(공자가 태산을 유람하다가 성읍의 교외에서
영계기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를 끈으로 매고 있던 영계기가 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라고 했다.
▶ 樂道(낙도) 구: 성현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樂道’은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돌아가야 할 곳을 뜻하는
‘所歸’는 삶의 진행방향을 이끌고 가야 할 길의 뜻으로 새겨 읽었다.
▶ 高風(고풍):
고상 高尙하고 고아高雅한 지조志操와 풍격風格을 가리킨다.
▶ 黃金徽(황금휘):
금으로 장식된 금琴을 가리킨다.
옥휘玉徽와 함께 금琴의 미칭으로 쓰인다.
▶ 不疊紙(불첩지):
‘疊’을 글씨를 쓸 때 줄을 잘 맞출 수 있도록 종이를 접어
가상의 줄(線)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이해하여 아무 표시도
되지 않은 맨 종이라는 뜻으로 새겨 읽었다.
대화大和 8년(834), 낙양洛陽에 살 곳을 정한 낙천이
하는 일 없이 금琴과 술(酒)과 시詩 세 가지를 벗 삼아
유유자적 살아갈 때 쓴 것이다.
제목으로 쓴 ‘北窗’은 북쪽으로 낸 창문을 뜻하기도 하지만
도연명陶淵明이 쓴 「엄이를 비롯한 자식들이
새기기를 바라며 남기는 글」에서 유래하여
‘한적하고 편안하며 여유로운 삶(淸閑自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 말이다.
見樹木交蔭, 時鳥變聲, 亦復歡然有喜.
常言五六月中, 北窗下臥, 遇凉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
나무의 가지와 잎이 엇갈려 그늘이 된 것을 보고
철 따라 달라지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나 역시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래서) 언제나 말하기를 ‘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 누워 있을 때
어쩌다 시원한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내가
마치 복희씨 이전의 옛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 도연명陶淵明의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 중에서
자신이 역사상 금琴과 술(酒)과 시詩를 사랑했던 선인先人들,
즉 영계기榮啓期와 유령劉伶과 도연명陶淵明을
스승으로 삼은 제자라고 했으면서도
끝 부분에서 세상에 대한 체면을 의식하는 듯한 대목을 읽을 때는
평생을 관리로 살아온 사람답다는 생각을 했다.
◈ 백거이白居易 [772~846]
당나라 때 시인으로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와 취음선생醉吟先生을 썼다.
조적祖籍은 산시성山西省 태원太原이지만 증조부 때
하규下邽로 옮겼고, 하남河南 신정新鄭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벼슬은 한림학사와 좌찬선대부를 지냈다.
당대唐代의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으로 당대 3대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원진元稹과 함께 신악부운동을 이끌어 사람들이 원백元白으로 불렀고,
유우석劉禹錫과 병칭하여 유백劉白으로 부르기도 했다.
시의 제재가 광범위하고 형식이 다양하며 언어가 평이하고
통속적이어서 시마詩魔 또는 시왕詩王 등의 칭호를 얻었고,
일본에서는 시신詩神으로 불렸다.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을 남겼는데
대표작으로 「장한가長恨歌」, 「매탄옹賣炭翁」,
「비파행琵琶行」 등을 꼽는다.
낙양에서 세상을 뜬 뒤 향산香山에 묻혔다.
[출처] 백거이 - 북창삼우|작성자 들돌
오늘도 북창 아래 앉아서,
해야 할 게 무엇인가 자문하네
(今日北窗下 自問何所爲/ 금일북창하 자문하소위),
생각만 해도 즐거운 벗 셋을 얻었으니,
세 벗은 누구인가
(欣然得三友 三友者爲誰/ 흔연득삼우 삼우자위수),
거문고를 뜯다가 술 마시고,
술 마시다 문득 시를 읊으니
(琴罷輒擧酒 酒口輒吟詩/ 금파첩거주 주구첩음시),
세 벗이 번갈아 서로를 끌어주어,
돌고 돌아 끝이 없구나
(三友遞相引 循環無已時/ 삼우체상인 순환무이시).
窗은 窓의 본자인데 北窗(북창)이란 말도 도연명의 시구
‘북창 아래 누워 있다(北窗下臥/ 북창하와)’는 표현에서
따와 한적하고 여유로운 삶을 가리킨 말이라 한다.
옛날의 문인들이라도 거문고를 연주하다가 싫증나면
술을 마시고 또 흥이 나면 문득 시를 짓는 처지라면
누구나 부러워했을 것이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비생산적인 일에 빈둥거린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유유자적하던 옛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며 가야할 길을 잘 알고 그 길을 후세에 남기기도 했다.
물질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없이
항상 쫓기는 현대인들은 그저 부러울 뿐이다.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출처] 고사성어_북창삼우(北窓三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