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속의 공과 연기법
행복으로의 초대
2008. 7. 4. 6:55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본론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앞으로 색(色)과 공(空)의 개념이 눈에 보이는데, 색이란 물질을 나타내는 것이며,
오온[색수상행식] 중에서 물질적 개념인 ‘색’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공(空)이라고 하면, 앞에서 누차 설명했던 연기, 중도, 무자성(無自性)의 의미로서의 공을 의미합니다.
즉, 여기에서 쓰인 ‘공’이라는 개념은, ‘없다’는 의미의 단순 부정이 아니라,
인과 연에 의해서 모였으므로 인과 연이 다하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연기의 법칙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공이 곧 연기’라는 논리는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연기에는 '시간적 개념에서 바라본 연기'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가 있고,
'공간적 개념에서 바라본 연기'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제행무상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며,
제법무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과 삼법인의 제행무상, 제법무아가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본론에 앞선 순서일 것 같습니다.
불교의 근본사상을 연기법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연기법이라 할 수 있다고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내용의 핵심이 바로 연기법인 것입니다.
『소부경전』의 우다나 편에 보면,
참으로 진지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의혹이란, 생사에 대한 의혹, 일체에 대한 궁금함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에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고 말하십니다. 즉 생사의 매듭이 풀리고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일체 존재의 실상을 연기를 통해 깨쳤다고 한 것입니다.
『중아함경』 제 7 권에서는 연기를,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바로 연기를 본 것이다. 라고 설하고 있으며, 『잡아함경』 제 12 권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던지, 안하던지 간에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 연설하며 깨우치나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기는 팔리어로 ‘Paticca-Samuppada'' 입니다. 이것은 차례로 ‘말미암아, 때문에’,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연기의 내용[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의 기본공식]은
과연 무엇인가?
『잡아함경』 권 15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 彼有] - 공간적 상의성 [無我]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此生故 彼生] - 시간적 상의성 [無常]
이는 다시 말해, 일체의 모든 것들은 항상 무엇과 서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함께 공존하며, 함께 변해가고, 이윽고 함께 의존하여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주이멸(生住離滅), 성주괴공(成住壞空)].
즉, 우리들은 자기 생각으로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고, 나와 남을 갈라놓으며 살아가지만,
사실은 이것은 저것이 바탕 되어 일어나며, 나는 남을 의지하여, 남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변해 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혼자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하나’ 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유 방법은 그 당시에는 새로운 개념이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리불은 자기 친구에게 비유로써 연기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여기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있다고 하자.
그 두 개의 갈대 묶음은 서로 의존하고 있을 때는 서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그러나, 두 개의 갈대 묶음에서 어느 하나를 떼어 낸다면 다른 한 쪽은 넘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 또한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연기법이란,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서로 상의상관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덩그러니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 같은 우리 존재는
이 우주 만유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서로 의존하며 서로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연기라는 말은 인연(因緣)에 의해 생긴다(起)는 말입니다. 인연생기(因緣生起) 한다는
말이지요. 혹은 인연에 의해 생하고 멸한다는 인연생멸(因緣生滅)의 법을 따로이
인과(因果)의 법칙이라 이해하기도 합니다.
인연이란, 일체 모든 것은 인과 연의 결합에 의해서 생겨나고 변화해간다는 것입니다.
인(因)이란 결과(果)를 생기게 하는 내적(內的)인 직접원인이며, 연(緣)이란 외부에서 이를 돕는 외적(外的) 간접 원인을 말합니다. 이것을 내인(內因), 외연(外緣),
혹은 친인(親因), 소연(疏緣)이라고도 합니다.
일체만유가 ‘변화’함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바로 이 인연화합의 법칙은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유[因]에 외적 발효의 조건[緣]을 주면 치즈[果]가 되고, 또 이 치즈는 다시 버터를
만드는 원인이 되어 치즈[因]에 발효의 조건[緣]을 주면 버터[果]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사과나무[인]를 땅에 심어 우리들이 거기에 비료도 주고, 잘 가꾸는 행위[연]를 하여 이윽고 열매가 열리게 되며[과], 잘 기른 결과 우리들은 맛있는 사과를 먹을 수 있게 됩니다[보]. 이것이 인연과보(因緣果報)의 법칙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꼭 사과나무만 인(因)이고, 우리의 행위가 꼭 연(緣)인 것은 아닙니다.
그 둘은 어느 것이 더 직접적일 수도, 간접적일 수도 있으므로 인, 연이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과 연은,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둘 모두가, 과보의 중요한 두 바퀴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비유하면, 두 나무를 서로 비벼서 불을 내어 도리어 그 나무를 태워서 나무가 다하면 불이 다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제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인연이 모이면
곧 이루어지고, 인연이 흩어지면 곧 멸합니다.
제법은 좇아오는 곳도 없고, 또한 이르러 가는 곳도 없다는 것입니다.
유(有)는 원래 스스로 무(無)인데, 인연의 이룬 바이다.
다시 말해, 본래 불[火]은 원래 있지 않았으나(無), 나무와 나무[인]를 서로 비벼 줌으로써[연] 불이 생(生)하는[과] 것입니다. 이렇게, 무(無)에서 생긴 유(有)도, 나무가 다 타면 불이 꺼지고 마는 것처럼, 사라지게 되고 맙니다.
이처럼, 인과 연이 화합하므로 불이 일어나고, 인과 연이 다하므로 불은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불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다만 인연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불이란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인과 연이 화합하면 잠시 나타났다가 인과 연이 멸할 때 소멸되는 인연생 인연멸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 모든 존재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 또한 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잠시 태어났다가 인연이 다 하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일체 제법이 이와 같이 인연생 인연멸 인과의 법칙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업보(業報)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위에서 언급했던 우리들이 비료도 주고,
잘 가꾸는 등의 행위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인 것이며, 이러한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바로
업(業)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업에 의하여 우리는 사과를 얻을 수 있고, 먹을 수 있으니 이것이 보(報)인 것입니다. 인과의 도리를 인간의 행위에 관련시켜 설명하면 업보(業報)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듯 인간의 의지적 작용[인]에 의해 그 결과[과]가 분명히 나타나므로,
이를, 인과의 법칙, 인과응보(因果應報), 혹은 인과율(因果律)이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인과율은 주체적 인간[육근(六根)]과 객체적 대상[육경(六境)] 사이에서의 법칙이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성립하는 관계임은 물론입니다. 일체 정신이 있고 없는 물질계와
정신계를 아우르는 법칙이란 말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일체 만물이라도
인연따라 이루어 지고 인연따라 멸하는 것입니다.
인연생 인연멸이기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닌 ,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생(空生)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야심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는 일체제법의 실상을 공(空)이라 하는 연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인연의 법칙을 환하게 깨달으신 것입니다. 인연에 대해 확연하게 깨달았다는 말은 이 세상이 생긴 인과 연, 내가 태어나게 된 인과 연, 일체제법이 만들어 지게 된 인과 연에 대해 확연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어디에서 왔는지, 또 죽어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태초에 나온 자리가 어디인지 조차 확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나온 자리를 안다는 것은 가야할 곳이 어딘지를 안다는 것이며 확연히 깨달았다는 말은 이미 그 본래자리로 돌아왔음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궁금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체의 의혹이 다 풀릴 수 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인연을 알고, 일체 모든 것에 확연하며, 본래 자리로 귀의 하였으니 괴로움이 모두 소멸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모르니 괴롭지 알면 괴롭지 않습니다. 일체 제법이 모두 공이며 인연생이므로 환영과 같고, 신기루와 같음을 알진데 어찌 환영에 얽매여 괴로워 할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지요. 그것이 연기를 통해 깨달으신 부처님의 마음 살림인 것입니다.
세상이 만들어 진 근원이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 하지만 불교에서는 그 양자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연기론, 인과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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