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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침묵, 둔황
둔황으로 가기위한 방법은 비행기가 편하지만, 그래도 2박3일 소요되는 기차여행이 멋스럽다. 둔황을 보고나서 실크로드로 갈 사람은 다시 우루무치로 가면되고, 티베트고원으로 갈 사람은 거르무[格爾木]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쿤륜산맥과 당구라산을 넘는 라싸 행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 “옴 마니 빠드마 훔”
727년 10월 쯤, 사막의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대 사막을 건너 당나라의 서역 전초기지인 뚠황에 도착한 혜초스님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말은 “옴 마니 빠드마 훔” 그 한마디였을 것이리라…….
물론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가 있었던 쿠처[高車]부터 당나라의 영향권이었지만, 그 곳에서는 아직 앞길에 ‘고비탄’라는 대사막이 가로놓여 있기에 순례가 완전히 끝났다고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러나 마지막 시령을 무사히 견디고 뚠황에 도착한 순간 혜초사문은 7년여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겪었던 숱한 일들이 마치 그가 서역 어디에선가 자주 보았던 ‘주마등(走馬燈)’이란 신기한 물건처럼, 그렇게 눈앞을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제는 정말 살았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이란 원초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일종의 희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고생에 비해 얻은 것이 별로 없는 그런 여행이었다는 아쉬움이 뒤섞인 자조어린 말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혜초의 서역에의 꿈은 불교학의 본산이며, 세계 최고의 대학인 나란다(Nalanda)에서 당시 유행하는 신사조의 불교를 마음껏 호흡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나란다의 문턱이 너무 높았던 탓<2>으로 할 수 없이 그냥 부처님의 체취가 생생하게 묻어있는 ‘8대 불적(佛跡)’ 을 순례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도 더욱 어려웠다. 천축으로 갈 때야 배에 그냥 타고 있었으면 되었지만 돌아올 때는 설산을 넘고 대 사막을 건너야했기 때문이었다. 도중에 수차례의 목숨을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으면서는 살아서 장안으로 돌아오는 것이 절실한 명제였다. 그 다음에야 다시 그리운 고향 계림으로 갈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뚠황에 도착했을 때 그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 나온 말이 바로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그 여섯 마디 만트라(Mantra, 呪文)가 무심코 튀어나왔을 것이리라……마치 불교신자들이 어려울 때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처럼.
여기서 나는 그 동안 우리가 무심코 관심을 두지 못했던 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왕오천축국전』속에는 불교의 전문교리나, 더구나 밀교적인 용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보아서는 혜초가 천축으로 가기 전에 당시 중원에서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조류인 밀교(密敎)의 전문교육을 받았을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지만 신라란 변방에서 막 중원 땅에 발을 디딘 피 끓은 젊은 구도자에게 ‘천축으로의 유학’이라는 무지개 꿈을 키워준 사람이 바로 중원에 밀교를 뿌리내리게 한 유명한 인도의 밀교승이고 또한 혜초가 여행할 당시인 8세기 초, 천축이란 대륙은 온통 ‘옴’ 소리에 젖어 있을 때였기에 일반적인 밀주(密呪)의 암송은 자연스런 행위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렇기에 천신만고 끝에 순례를 끝낸 감회를 그는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리라…….
하여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천불동(千佛洞)에 도착한 혜초는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최종 목적지인 장안으로는 출발하지 않고 여독을 풀 겸해서 겨울을 그곳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바로 여행기를 저술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물론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목숨을 담보로 얻은 소중한 경험을 그냥 혼자만이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고 나아가 여행기의 저술은 당시 천축을 순례한 구법승들의 일반적 풍조였기에 아마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천축에서의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혜초는 우선 지난 몇 년간 오천축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짬짬이 메모해 두었던 기록들과 주워들은 참고자료를 정리하여 여정(旅程)순으로 써나갔다. 그래서 직접 가본 나라와, 그리고 가보지는 않았지만 귀 동냥으로 주워들은 나라로 구분하여 초안(草案)을 잡아 나갔다. 그러다가 여러 번의 힘든 작업과 수정 끝에 마침내 어떤 공식을 만들어 내게 되었는데, 그 공식이란 바로, 직접 다녀온 곳은『從… 行… 月(日)… 至』즉『어디에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렀다.』라는, 일종의 한 문장을 시작하는 글귀[始文句]를 사용하는 식이었다. 이 부분은 유심히 뜯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곳이기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원문 하나를 예로 들어보겠다.
『卽‘從’中天竺國南‘行’三箇餘‘月’‘至’南天竺國王所住…/ 又‘從’南天竺國北‘行’兩‘月’ ‘至’西天竺國王住城…』
다시 풀이하면,『중천축에서 남쪽으로 3개월 가서 남천축국왕이 사는 곳에 이르렀다./ 또 남천축에서 북쪽으로 2개월 가서 서천축국왕이 사는 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직접 가보지 않은 나라에 대하여는『어디에, 어느 방향에, 어떠한 곳이 있다.』라는 객관적 표현을 사용하여 ‘이르렀다[至]’라는 동사를 쓰지 않았다. 이런 조직적이면서 고급스런 문장의 구사는 당나라 말과 글을 능숙하게 할 수 없는, 외국인 혜초에게는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면면들을 보면 그가 얼마큼이나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바로 그런 자세로 인해 혜초는 후에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중국 밀교의 제3대를 잇는 우뚝한 사문이 되었겠지만…….
<둔황역 전경>
<둔황의 상징 비천상>
<17굴-장경동에서 문헌을 고르는 벨리오>
인간 혜초는 강인한 체력과 총명한 머리 그리고 굳은 의지를 모두 겸비했지만 그 외에도 다정다감한 예술가적 기질도 가슴 한 편에 고여 있었던 듯, 때때로 감격에 겹다든가, 처절하게 슬프거나 외롭거나 할 때는 시상(詩想)을 가다듬어 시 구절을 짓기도 하였다. 혜초가 남긴 시는 총 ‘5수(首)’의 ‘오언절구(五言絶句)’가 있는데, 모두가 절창(絶唱)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적어야 하는 기록에다 간간히 이런 촉촉한 시 구절을 섞어 놓은 것은 일반적으로 자칫하면 무미건조한 기록으로만 머물 수 있는 사실적 여행기를 한층 격조 있는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면에서도, 천축순례기의 대명사가 된 현장(玄獎, 602~664)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3>를 비롯한 다른 여행기와 비교할 때『왕오천축국전』의 격조가 한층 돋보인다. 우리는 앞으로 그의 체취를 따라가며 그 현장에 이르러 시인, 혜초의 진솔한 감정이 오롯이 담긴 그 절창들을 한 수씩, 5수 모두를 감상하게 되리라. 물론 3권으로 된 원본에는 그보다 많은 시 구절이 있으리라 여겨지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것들을 감상할 수 없으니, 어쩌랴!
각설하고, 그렇게 기본 줄거리가 완성된 초안을 혜초사문은 종이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 종이에다 몇 번이나 옮겨 적으면서 깨끗하게 정서(淨書)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가 천불동을 떠나 장안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 그 중 제일 깨끗한 한 부만을 말아가지고 돌아왔다. 물론 이 필사본(筆寫本) 초안은 그 뒤 장안에서 더욱 보완되어 넓게 읽히게 되었다.<4> 이런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주변 상황은 여러 가지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만 우선 들어보자. 먼저 혜초 보다 약 반세기 후의 인물인 혜림(慧琳, 768-820)이 편찬한 일종의 사전(字典)인『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왕오천축국전』이란 이름이 선명히 인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역 출신의 역경승이 지은 이 책은 일체의 경전 속에서 중요한 단어들을 발췌하여 그 뜻과 음을 달아 100권으로 만든 일종의 불교백과자전으로 그 마지막 권100 에 상중하 3권으로 된『왕오천축국전』의 어휘 중에서 총85자구(字句)가 해석까지 붙여져 있는데, 이는 바로 그 여행기가 이미 보편적인 경전처럼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족을 여기서 하나 붙이자면, 천여 년 뒤에, 펠리오가 뚠황에서 찾아낸 앞뒤도, 제목도 없는 필사본의 어휘 중에서 ‘총18자’가『일체경음의』에 적힌 ‘85자’와 일치하는 점에 유의하여 그가 찾아낸 두루마리 종이가 바로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당나라 구법승 혜초가 지은『왕오천축국전』3권을 간략하게 발췌해서 옮겨 적은 것으로 단정 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천여 년이란 세월은 우리들로 하여금 위대한 유산을 온전하게 볼 수 없게 만들었으니……. 그렇지만 천만 다행으로 혜초가 뚠황을 떠나며 누군가 신세진 사람에게 주고 온 필사본 두루마리 하나가 뚠황에서 돌아다니다가, 비록 제목도, 저자도, 앞뒤도 없는 채였지만, 마치 불랙 홀(Black hall)에서 튀어나오듯 속칭 ‘장경동(藏經洞)’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도 코쟁이 외국인에게 발견되어 바로 암암리에 바다건너로 이주를 하게 된 기구한 신세로 말이다.
이렇게 되어 『왕오천축국전』은 그 후로도 주로 외국인들<5> 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 우리 학자들의 연구도 진행되어서 ‘혜초학’은 현재 양적으로는 진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일부분만 전하는 원문과 연계자료의 한계성 때문에 외국학자가 밝혀낸 것에서 질적으로는 별 진전이 없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많은 부분들이, 특히 순례행로에 대하여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이 『왕오천축국전』은 길에서 탄생된 작품이기에 사실성이 강한 것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의문의 실마리는 혜초사문이 걸어갔을 그 길에서만 풀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제, 나는 나그네가 되어 길을 떠나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명사산(鳴沙山) 위 언덕에 섰다. 내일부터 길을 떠나기 위해 다시 그 길 위에 섰다. 찬란한 낙조 속에서 빛나는 명사산과 이미 어둠에 덮여가는 벌집 같은 천불동 근처에는 관광객이 모두 떠난 뒤여서 모래바람만 이따금 스쳐갈 뿐 온통 정적뿐이었다.
그래, 그건 허허로움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천여 년 동안, 청아한 염불소리, 석굴을 울리는 목탁소리 그리고 돌을 다듬는 징소리가 가득했을 곳이었겠지만, 지금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온통 귀신의 울부짖음 같은 바람소리뿐이었으니까…….
* 천불동이여! 막고굴이여!
천불동 또는 막고굴(莫高窟)은 '뚠황학'<6>이란 학문 분야가 새로 생기게 한 곳이고 또한 세계적인 불교학의 메카이기도 한 곳이고 또한 세계 최대규모의 불교예술 박물관인 셈이어서 별도로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는 유명한 곳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뚠황은 ‘실크로드’의 목 줄기에 해당된다. 그렇기에 중원의 패자들이나 서역의 주인들이었던- 흉노․월지․동서투르크․ 몽골․티베트․서하․위구르 등의-민족들은 이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고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막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종교는 서로 다른 지역간의 문화를 실어 나르는 가장 확실한 운송수단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실크로드에서는 그 역할이 더욱 두드러졌는데, 그 중에서 불교는 더욱 그랬다. 현재의 뚠황에서 동남쪽 25㎞ 떨어진 명사산 석굴들은 “중원불교의 일번지”였다. 불교의 고향인 천축에서 유행하는 신진사조가 제일 먼저 도착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시작된 석굴의 개창은 마치 사막에 피어난 상서로운 ‘우담바라’ 꽃처럼 만개하였다. 전성기 때는 천 개나 되었다고 해서 천불동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이 석굴들의 다른 이름은 ‘막고굴’인데, 삼수변이 붙은 ‘사막 막자(漠)’와 통해 쓰기에- 사막 높은 곳에 있는 굴-이라는 뜻처럼 석굴군 전체가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마치 밝은 진리가 오는 방향으로 도열해 있듯 파져 있다.
천불동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4세기로, 전진(前秦)의 한 수도승이 이곳을 지나다 홀연 ‘금빛 찬란한 천불의 비전’을 보고 굴을 파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뚠황은 ‘오호(五胡) 16국’, 즉 다섯 이민족의 각축장이었는데, 439년 북위(北魏)가 하서지방을 지배하면서 난립상황도 막을 내렸다. 이 북위는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기에 뚠황은 중원불교의 일번지로 발돋움을 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 11개 왕조를 거치는 천여 년 동안, 글자 그대로 천 개나 되는 석굴군으로 확대되었다. 현재까지 발굴․정리되어 일련번호가<7> 붙은 것만도 492개 정도이나, 아직도 모래에 파묻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천 개란 숫자가 허수만이 아닐 것 같다.
현재 남북으로 1.6㎞나 길게 뻗어 있는 이 석굴들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불공을 위한 전당굴(殿堂窟)과 탑을 돌기 위한 탑묘굴(塔廟窟)- 차이탸Caitya) 식으로 대체로 장방형인 구조에 안쪽 끝이 둥근 말발굽 형태로 되어 그곳에 탑 같은 예배의 대상물을 안치하는 형식을 말한다. ‘차이탸’라는 말 자체가 “사리 없는 탑”이란 뜻으로, 원시불교의 무불상(無佛像) 시대의 예배 대상물이 불상이 아니라 탑이었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수행과 거주를 위한 선굴(禪窟)- 비하라(Vihara)식을 들 수 있다. ‘비하라’라는 뜻이 승려들이 안거를 하기 위한 승방(僧房)을 의미하듯, 커다란 정방형의 중앙 홀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작은 방들을 만든 형식의 수도원, 즉 현재의 수행과 거주를 위한 용도이다. 물론 이 두 가지 형식의 구분법은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변해가는 불교사적 변천사에 따라 후에는 엄격한 구분이 없어지게 되는데,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아잔타(Ajanta) 석굴이다. 이런 양상은 그대로 실크로드를 타고 동쪽으로 향해 뚠황으로 전파되었다. 이는 수대(隋代) 이전의 42개 석굴이 주로 선굴, 탑묘굴인 반면 수․당 이후의 것은 주로 전당굴인 것을 보면 증명되는 일이다.
막고굴이 유명한 이유는 물론 다른 곳에 비해 대규모라는 이유도 있을 터이지만, 그것보다는 세계적으로 모든 석굴이 모두 거의 폐허화 된 것과 비교하면 막고굴은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여 년이란 세월의 불가항력적 훼손 이외에도, 수없는 인위적인 파손과 약탈에도 불구하고, 현재 막고굴 안에는 불보살상과 천인상(天人像) 등의 소상(塑像)이 약 2천5백여 개 정도 남아 있고 또한 천불동의 또 다른 자랑인, 오래되고 격조 있는 벽화가 1m 높이로 한 줄로 세워 놓으면 45㎞에 달하는 분량이 남아 있어서 가히 불교미술의 최대 박물관인 셈이기 때문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지만, 더 이상의 파손을 막기 위해 중국정부는 뚠황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보존 문제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87년에는 석굴사원과 총6만 ㎡에 달하는 벽화들과 3천 점의 조소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국제적인 보호를 받게 되었다. 현재 ‘뚠황학’의 문제들 중 하나는 유물들이 각숫자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조사된 통계에 의하면 반출된 유물은 중국 본토 내에 약 2만 점, 영국에 1만3천7백, 러시아에 1만2천, 프랑스에 6천, 인도에 2천, 일본에 45점이 있으며 그밖에도 타이완, 미국, 독일, 덴마크, 핀란드,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에도 적지 않은 분량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도 이 명단 속에 끼어 있다. 우리 경우는 능동적으로 수집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침략기에 '오다니 탐험대'가 가져와 미쳐 본토로 반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제17굴’- ‘장경동(藏經洞)’의 발견
그러나 이런 명성보다도, 정확히 한 세기 전에 일어난, 한 드라마틱한 사건은 그 동안 격변의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가던 뚠황을 다시 한 번 전 세계의 이목을 받았다. 이는 실크로드가 가진 강렬한 매력과 뚠황 석굴의 은밀한 이미지가 합해져서 상승작용을 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치 금광을 찾아 ‘엘도라도’를 찾아 헤매던 시절처럼, 많은 호사가들을 몰려들게 하여 ‘보물찾기 붐’을 일게 하였다. 그 사건이란 다름 아닌 ‘제17굴’, 즉 속칭 ‘장경동(藏經洞)’ 의 발견을 말하는 것인데,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서 별로 신선할 것이 없는 그 사건을 다시 들먹이는 것은 혜초란 위대한 세계인을 따라 나선 우리의 여행과 깊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세계 최대의 유물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 초에 홀연히 나타나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것일까?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하나는 11세기 고비사막 건너에서 일어난 서하(西夏)가 침입한다는 소문이 뚠황에 퍼지자 약탈을 두려워 한 승려들이 장시간의 토의 끝에 손 타기 쉬운 불상, 경전, 회화 종류 등을 한 곳에 모아놓고 그 입구를 밖에서 밀봉하여 흔적을 없애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는 것과 또 하나는 10세기 카슈가르에서 일어난 이슬람의 카라한 왕조가 서역남로의 코탄까지 밀려들어오자 역시 약탈과 훼손을 두려워하여 역시 입구를 봉한 다음 피난을 갔다는 설이다.
그러나 전란이 지나간 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감춘 사실 자체가 잊혀져 버렸다. 그렇게 천년의 침묵이 흐른 뒤, 1900년 6월 22일 홀연히 드디어 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었던 그 유물들은 기연(奇緣)을 만나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된다. 도교의 태청궁(太淸宮) 도사 왕웬루[王圓籙]에 의해, 한 석굴에서 비밀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그 발견 일화도 또한 드라마틱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몽환의 세계로 잡아끌게 하는 마력이 있다.
떠돌이 왕도사가 석굴에서 살기위해 인부를 사서 한 석굴을 수리하던 중에 벽 안이 빈 것을 발견하고 벽을 뜯어보니 사방 3m의 방이 나타났는데 그 속에는 흰 천으로 쌓인 물건이 가득히 들어 있었다. 또 다른 설은 왕도사가 사경생(寫經生)을 한 사람 고용했는데 그가 일하는 자리가 마침 제16굴의 입구였었다. 그는 사경을 하면서 틈틈이 마약을 피웠는데 그 연기가 벽 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두드려 보니 벽이 비어 있었기에 허물어 보았다는 것이다.
이쯤해서 당연히, 그럼 그 석굴이 어떻게 생긴 구조였기에 천년이란 시간 속에서 인간의 눈길이 닿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독자제위도 그 유명한 석굴 속으로 들어가 우리의 혜초스님의 체취와 아울러『왕오천축국전』의 묵향을 맡아보기로 하자. 현재 문제의 석굴은 북단 근처 3층 누각으로 된 1층에 있어서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 제16굴은 개창은 당나라 말기 당 선종(宣宗) 때로 70년간의 토번(吐蕃)의 지배에서 막 벗어난 때였다. 파미르고원 너머의 소발율국[小勃律國, Gilgit]으로부터 뚠황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전 지역을 장악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떨치던 토번제국이 붕괴를 시작할 때였다. 바로 혜초가 뚠황을 지나간 직후였다. 막강하던 토번이 내부적 갈등으로 쇠약해지자 호족이었던 장의조(張議潮)가 반기를 들어 토번군을 몰아내고 뚠황을 수복하고는 당나라로의 복귀를 선언하였다. 이에 당에서는 크게 기뻐하며 장의조를 ‘귀의군절도사(歸依軍節度使)’로 임명하여 뚠황의 통치를 위임하였는데, 장의조는 수복기념으로 당시 제 16굴을 만들었다.
제16굴은 상당히 넓고 크다. 복도를 따라 가다보면 양쪽으로 보살상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한 가운데는 약 10m 되는 본존불이 자리 잡고 있다. 이 16굴의 입구에서 5m 정도 걸어 들어가면 오른쪽에 작은 입구가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제17굴인 장경동의 입구이다. 입구 옆에는 흰색의 조그만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 아래에는, ‘C 151’, 즉 장따치엔[張大千]의 분류번호가, 위에는 ‘만당(晩唐) 821/900AD’라는 연구소의 분류번호가 쓰여 있다.
그 유명한 장경동 안은 어두웠고 생각이상으로 좁았다. 준비해간 손전등으로 비추어보니 방 가운데, 한 선사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바로 홍변대사의 소상(塑像)과 뒷벽에는 보리수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 커다란 부채를 든 비구와 지팡이를 든 여인이 각기 좌우로 서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장의조는 토번군을 몰아낸 후 먼저 장안에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았는데, 이 때 의논 상대자가 바로 막고굴의 주지였던 고승 홍변이었다. 당시 장안으로의 길에는 아직 토번군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 많았던지라 위험부담이 있었기에 홍변의 제자들이 이 일을 맡았다. 고생 끝에 장안에 도착한 이들 사신은 황제를 만나 뚠황의 수복사실을 아뢰었다. 이에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홍변에게 ‘하서도승통(河西都僧統)’이란 벼슬을 내렸다. 황제에게서 큰 벼슬을 받은 장의조는 그 공을 홍변에게 돌려 석굴을 만들어주었는데, 그 것이 천년 뒤에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경동이 된, 즉 제17굴이란 일련번호가 붙여진 바로 그 석굴이었다. 물론 장의조 자신도 제156굴을 파서 그 벽에 <장의조출행도(張議潮出行圖)>라는 거창한 개선행진 벽화를 그리게 한 것을 보면 한 개인이 석굴을 만드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듯하다.
<3-25 1908년의 둔황 16굴 전경1>
문제는 어떤 한 석굴의 복도에서 연결된 부속실 같은 석굴이 뚠황석굴을 다 뒤져도 없다는 점이다. 거기에 ‘천년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 석굴의 제작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아니면, 만약 그 입구만 교묘하게 가려진다면, 그런 곳에 석굴이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막대한 유물을 감춘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뚠황으로 돌아올 수 없었기에 그곳은 영원히 베일에 싸여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발견된 유물을 왕도사가 몰래 처분하고 있다는 소문은 바람결에 온 사막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1905년 먼저 러시아의 오브르체프가 와서 두 다발의 문서를 가져간 다음, 1907년 3월 12일 영국 국적의 스타인(A.Stein, 1862~1943)이 찾아왔다. 그는 13세기에 이곳에 와 『동방견문록』에 기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Marco Polo) 이후 처음으로 이곳에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긴 첫 서구인으로 다음과 같은 감회를 남겼다.
『비록 외관이 몹시 붕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동굴사원들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성소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더욱 그 인상을 깊게 한 것은 일 년에 한 번 있다는 축제일, 즉 5월 중순에 열리는 석가모니 붓다의 탄신일에는, 주민 수천 명이 이 성지에 모여들어 축하행사를 여는 광경이었다.』<8>
스타인이 뚠황에 도착하였을 때 소문 속의 그 석굴은 닫혀 있었고 왕도사라는 사람은 만날 수 없었지만 대신 젊은 승려가 석굴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필사본 몇 개를 스타인에게 보여주었다. 스타인은 그것들이 뛰어난 가치가 있는 고문서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리고 중국인 조수에게 탐문을 지시하여 아직 석굴에는 확실히 많은 분량의 문서들이 있고 그것들은 지방 관청의 지시로 왕도사가 자물쇠를 채워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1907년 5월 21일, 마침내 스타인은 석굴 근처에서 문제의 도교승려를 만나 현장법사의 이야기를 꺼내는 수법으로 왕도사의 호감을 얻었다. 이 작전은 바로 효과를 발휘하였는데, 바로 그날 저녁 왕도사가 두루마리 하나를 법복 밑에 감추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게 점차로 석굴을 가리고 있던 장벽이 제거되었다. 드디어 스타인은 그 석굴로 들어가 왕도사가 밝혀주는 등불 아래에서 처음으로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천년간이나 숨겨져 있던 것이기에 의심할 여지없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서고(書庫)였던 그 석굴에는 한자, 산스크리트, 소그디아나, 티베트, 고대 투르크족의 룬 문자, 페르시아 그리고 오래 전에 사멸한 미지의 문자로 쓰인 수많은 문서들이 있었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배교자들,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이단자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제작 연대가 868년으로 확인된 『금강경(金剛經)』 목판본도 있었는데, 당시로써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9> 알려진 것이었는데, 이 책은 일곱 겹의 종이를 겹쳐대어 있고 첫 장에는 뛰어난 변상도(變相圖)도 붙어 있었다. 이 최고의 고적은 현재에도 대영관물관의 자랑거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다음해에는 프랑스의 펠리오(P.Pelliot, 1878~ 1945)가 달려왔다. 당시 그는 28세의 약관이었지만 해박한 학식을 겸비했고 특히 중국어에 능했기에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프랑스의 중앙아시아 탐사대의 대장으로서 서역에 왔을 때 소식을 듣고는 뚠황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왕도사를 설득해서 장경동의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는 그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오늘과 같은 전통 명절[3월 3일- 삼짇날]을 하루 10시간씩 계속 문서가 가득 쌓인 석굴 속에서 사팔뜨기로 보냈다. 이곳은 사방 3m의 넓이의 좁은 방으로 3방향은 모두 이중삼중으로 책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지면에 바로 서지 않는다면 책을 다시 쌓을 수도 없을 정도다. 매우 피곤한 하루였지만 나는 오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펠리오는 남아 있는 문헌들을 대충 한번 훑어본 다음, 왕도사가 8년 동안에 수많은 문헌들을 빼돌렸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것들이 1만~2만 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앞서 다녀간 스타인이 중국어를 해독할 수 없었기에 귀중한 문헌을 일부밖에 추리지 못했던 반면 펠리오는 석굴에 며칠동안 틀어박혀 알짜배기들만 골라내어, 남아 있는 유물들의 1/3에 해당되는 총 6천 종- 경전류 24상자, 회화․직물류 5상자를 골라내었다. 그런 다음 용의주도하게 유물만을 먼저 배편으로 본국으로 보내놓고는 마치 빈털터리처럼 위장하고는 베트남의 하노이로 돌아왔다. 펠리오는 그 다음 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중국에 들려 견본으로 숨겨두었던 고서들을 안면 있는 학자들에게 보여주면서 감정을 의뢰하는 척 하였다. 이에 중국의 학계가 발칵 뒤집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귀국한 펠리오는 그 방대한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앞뒤가 잘려나간 짧은 두루마리의 필사본을 발견하고는, 이것이 바로 당의 헤림(慧琳)이 지은『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 이름만 전해지는 여행기의 절약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물론 그는 혜초가 한국인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였지만…….
『마침내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한 새로운 여행기를 찾아내었다. 이것은 의정(義淨)과 오공(悟空)과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불완전하기는 하였지만, 나는 제목과 필자를 ……. (중략) 내가 발견한 이 무명여행기가 바로『혜초 왕오천축국전』이다. 』
다음으로 1912년에는 오다니[大谷] 탐사대<10>가 나타났다. 그들도 왕도사가 따로 숨겨두었던 것들 중에서 대략 6백 종의 문헌을 받아갔다. 당시는 청 말기의 혼란기라 중앙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약탈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재미가 들린 스타인이 두 번째로 와서 여섯 상자를 가득 담아 떠났고 이어서 러시아의 올덴부르크가, 마지막으로 미국의 랭든워너(R Wanner)가 찾아왔는데, 그는 한겨울에 동굴 벽에서 접착제가 묻은 천을 벽화에 발라 접착제가 굳으면 벽화를 떼어내는 방법으로 몇 개의 벽화까지 떼어갔다. 이런 방법은 독일의 르코크(LeCoq)가 투르판의 베제크리그 석굴에서 벽화를 톱질해서 절단하는 수법으로 강탈한 것과 쌍벽을 이루는 행위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한 시대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잊혀진다. 하지만 그런 약탈 행위는 단지 한 나라, 한 세대에 대한 모독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문화적 후진국들이 겪었던 상처들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채로 아직까지 도처에 남아있다. 그 후 중국 내에서 외국인에 대한 적대 감정이 거세졌기 때문에 “와이꿔 꾸이쯔[外國鬼子]” 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붙여지게 되면서 어떤 약탈자도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도굴범이냐, 학자이냐를 따지기 전에 중국인들의 자세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 당한 일들은 그렇다고 치고, 그렇게 서양 약탈자를 매도하면서도 천불동 막고굴의 제323호굴 등을 비롯한 수많은 석굴을, 예전도 아니고 바로 얼마 전인 1966년부터 시작된 10년간의 ‘문화혁명<11> 때, 그들 스스로 무참히 파괴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은 이 때 파괴한 유물에 대한 정확한 통계 숫치를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티베트에서 자행한 행동을- 85%에 가까운 사원들을 파괴한 행위- 미루어보아 또한 심지어는 전국의 공자(孔子)의 사당까지도 무차별 파괴한 것을 보면, 나머지 종교적 유물들은 말해 무엇 하랴!
장경동 유물강탈 사건의 당사자인 왕도사의 뒤처리 문제도 그렇다. 1900년에 장경동을 발견한 뒤 그는 스타인이 오기 전에 이미 7년 동안이나 값나가는 물건들을 임의대로 처분한 뒤였다. 그런 왕도사에게 중국정부는 사형을 언도했다지만, 그는 뇌물을 주고 무죄 방면되어 그 뒤로도 ‘유물 브로커’ 노릇을 해가며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막고굴 앞에 그의 기념탑까지 세워져 있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문제는 그런 행위가 지금도 ‘진행형’이라는데 있다. 자신들 스스로 고대 유물을 파괴하는 행위가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대 유적은 대개 짚을 썰어 넣어 흙벽돌을 만들었기에 천연비료로는 최고라는 인식이 있는데, 특히 채색벽화를 그린 부분의 흙은 더욱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렇기에 유적이 우연히 발견되어도 신고하지 않고 우선 부셔서 비료로 쓴다고 한다. 또 다른 사례는 모슬렘들은 고대 석굴이 발견되면 대낮에 석굴로 찾아들어가 몰래 벽화 속의 인물들을 긁어내는데, 특히 눈과 입은 무조건 파낸다는 것이다. 불교유적을 혐오의 대상이라 여기기도 하지만, 밤에 벽화 속의 인물들이 살아나서 그들을 해친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중국당국은 현상금제도를 시행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종교관이 바뀌기 전에는 실효를 보기 힘든 현실이다. 자기의 조상들이 심혈을 기우려 만들어 놓은 귀중한 유산을 단지 자기가 지금 믿는 종교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무참히 훼손하는 행위는 비단 그들만의 문제인가에 대해 우리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흘러간 과거는 ‘만약’이란 가정을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왕오천축국전』이, 그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 앞뒤도 없는 두루마리 필사본 상태로 산더미 같은 서류더미 속에 섞여 있었다면, 당시 그 누구라도 그 가치를 가려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행초서(行草書)를 능히 읽을 수 있는 눈 밝은 학자의 눈에 띤 것이 다행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다. 그가 ‘시양꾸이쯔[西洋鬼子]’면 뭐 어떠리……. 만약 펠리오의 눈에 띠지 않았다면, 최악의 경우, 우리의 최고의 국보인『왕오천축국전』이 쏘시개 땔감으로 전락하였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각설하고, 이렇게 천년의 잠에서 깨어난『왕오천축국전』의 운명은 그 뒤 급물살을 타게 된다. 중국의 당대 석학이었던 나진옥(羅振玉)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고 1915년에는 일본의 다카스키[高楠順次郞]가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면서『대일본불교전서』에 실리게 되고 1938년에는 독일의 동양학자 푹스(W. Fuchs)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후 최남선(崔南善)<12>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는 후일담은 후에 ‘혜초학’의 현주소 편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우리는 일단 길을 떠나야겠다.
* 3권짜리 『왕오천축국전』
뚠황을 떠나기 전날 나는 혜초사문과 잠시 헤어지기 위해 그의 체취가 묻어 있을 곳을 다시 한 번 더 돌아보기 위해 먼저 월아천(月牙泉)으로 갔다. 여인의 아미(蛾眉) 같은 오아시스는 여전히 푸른 하늘을 담고 있었다. 다음은 옛 사주고성(沙州古城), 즉 옛 뚠황 유적지로 갔다. 그곳은 현재의 시내에서 서남쪽 3키로 지점에 모래에 묻혀 있지만 중․일(中․日)합작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든 새로 만든 성곽이 대신 나그네를 맞는다.
마지막 코스로 혜초가 대 사막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던 곳인 옥문관(玉門關)으로 달려갔다. 바로 서역북도(西域北道)<13>의 관문으로 양관(陽關)과 함께 지옥으로 들어가는 대문 같은 곳이었다. ‘타클라마칸’은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곳은 말 그대로 삶도 죽음도 아닌 중음(中陰)세계의 땅이란 말이다. 그러기에 당나라 어떤 음유시인 도 떠나는 친구를 보내면서 이렇게 읊지 않았던가?
『위성(渭城) 아침 비 살짝 뿌린 뒤 주막집 버들 빛 한결 새로워라.
여보게, 한 잔만 더 들고 가게나. 서쪽 양관을 지나면 적막강산 아닌가.』
역시 그 곳에 ‘길’은 없었다. 큰 길도, 작은 길도, 오는 길도, 가는 길도 역시 없었다. 다만 소리만 나그네를 맞이했다. 그건 그냥 바람이 아니었다. 마치 소름끼치는 귀곡성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그 바람과 마주 서 있다보니 어디선가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서역을 주름 잡던 병사들의 말발굽소리였다. 진귀한 물건을 가득 실은 낙타들의 방울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서 청아한 “옴 마니 빠드마 훔” 소리도 들려왔다. 바로 님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그래 그건 ‘아니차[Anicha, 無常]’였다. 그래, 그 때나 지금이나, 중생으로의 삶을 사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변하지 않은 ‘진리’라는, 그 알량한 것을 찾기 위해 이 관문을 드나들었던 순례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었으리……. 그리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막막한 사막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하였을까?
영원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저 모래바람 속으로 발길을 내디뎠을까? 그들의 가슴속에 꿈틀대고 있었던 그 바람기는 자기의 에고를 빛내기 위한 공명심이었을까, 아니면 가슴 가득 꿈틀대던 ‘역마살’이었을까, 아니면 미지의 세계로 향한 무지개 빛의 찬란한 비전(vision)이었을까?
물론 저 바람 속으로 들어갔던 유, 무명의 구도승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보면, 3세기에서 11세기까지 약 180여 명이라는, 적지 않은 이름을 확인할 수는 있다. 의정(義凈)의『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을 보면 당나라 때만해도 육로로 23명이 천축행을 하였고 그리고 티베트를 경유하여 천축으로 갔다는 구법승도 8명이 된다고 하지만, 아마도 더 많은 무명의 순례자가 사막의 고혼이 되었으리라…….
그 중에서 우리의 혜초(慧超)는 우뚝하다. 비록 현장(玄獎)의 『대당서역기』같은 방대한 저술은 못 남겼더라도, 처음 목적이었던 나란다대학의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여 학승으로 대성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우뚝하다. 혜초는 중국말도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던 변방의 외국인이었고, 물질적 후원자도 없었고 또한 준비기간마저 짧아서 현지 언어조차 제대로 배울 시간도 모자랐다. 더구나 ‘5만리(五萬里)’<14> 나 되는 머나먼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걸었다는 자체는 더욱 의미 깊은 일이다. 물론 우리 한민족 중에서는 혜초에 앞서 15명의 승려들이 천축행을 하였지만 다른 민족, 그러니까 일본 같은 경우를 예를 들어보면, 일본에서 중원 땅까지 건너 온 유학승은 여러 명이 있었고, 9세기의 엔닌[圓仁]법사 같은 경우는『입당구법순레기(入唐求法巡禮行記)』<15> 라는 걸출한 여행기도 남겼지만, 그렇지만 일본인으로 천축행을 꿈꾼 인물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천축구법은 중원인들만의 잔치였다. 그렇기에 님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더구나 님은『왕오천축국전』이란 불후의 순례기를 남겼다. 문제는 이 의미 있는 작품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님을 흠모하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기에, 그래서 되풀이 되는 이야기이지만, 만약 전 3권으로 된 완본이 전해 왔으면 하는 백일몽(白日夢)을 꾸어보게 된다.
티베트 불교에는 ‘떼르뙨’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숨겨진 경전이나 성물(聖物)을 찾아내는 밀교승을 말한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 또는 전생에서의 영혼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새로 환생해서도 기억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을 발탁하여 다시 엄격한 훈련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자격을 갖추게 되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서장(書藏)’으로 숨겨야할 경전 자체를 동굴 같은 비밀스런 장소에 숨겼다가 시절인연이 되었을 때 다시 찾아내는 방법이다. 물론 이 때 이번 생에 자기가 숨겨놓고 몇 년 뒤에 찾아낸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수백 년 뒤에 숨긴 사람의 후생이 직접 찾아내거나 아니면 제자 같은 대리인에게 찾게 한다. 이런 방법으로 찾아낸 경전 중에는 『티베트 사자의 서』<16>가 우리에겐 널리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식장(識藏)’의 경우가 더욱 신비의 구름너머로 우리들을 끌고 간다. 이 방법은 책의 내용을 본인 또는 대리인의 의식 속에 숨겼다가 윤회를 거쳐서 다시 태어난 후에 전생(前生)의 의식 속에 숨겨진 기억을 되살려 내는 술법을 말한다. 세계최장의 영웅서사시 『거싸르 전기』<17> 를 문자도 모르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신(神)이 들린 듯 무아지경에 들어 읊어 내는 경우에 해당된다.
위의 이야기들은 합리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뜻은 다만 우리의『왕오천축국전』이 어디에선가 천년의 침묵에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배재하지 말자는 뜻이다. 만약 그것이 마치, 1947년 사해의 쿰란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구약성서처럼 사막의 모래 밑에서 천년의 잠을 자고 있다면, 그렇다면 수백 년에 한두 명 태어난다는 티베트 고승의 신통력을 빌어서라도 그것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것을 찾지 못해도 좋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미래로부터의 선물만은, 포기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둔황의 또 하나의 상징, 명사산과 월아천>
첫댓글 아. 둔황...
*^^*
귀한 글 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_()()()_
월아천의 풀이 아직은 갈색...
제일 뒤에 낙타를 타신 어르신은 .......삼배를 올리옵니다.
오~ 귀하신 글 잘 읽고 , 잘보고... 또 읽고,보고
공항에서의 사진 좋았습니다.
낙타타보고 파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