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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영성 – 준성사] 준성사, 믿는 만큼 열매 맺는 파스카 신비
왜 성사가 아니고 준(準)성사인가
준성사한테는 미안하지만, 사실 준성사는 없어도 구원에 지장이 없다. 말하자면, 구원에 있어서 성사는 필수이고 준성사는 선택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준성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밖에 어머니인 교회는 준성사(準聖事)들을 제정하였다. 준성사는 어느 정도 성사들을 모방하여 특히 영적 효력을 교회의 간청으로 얻고 이를 표시하는 거룩한 표징들이다. 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성사들의 뛰어난 효과를 받도록 준비되고, 생활의 여러 환경이 성화된다”(전례 헌장, 60항).
전례 헌장이 말하는 준성사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셨고 “신적 제정으로서 변경할 수 없는 부분”인 반면, 준성사는 교회가 제정했으며 “변경할 수 있는 부분”(전례 헌장, 21항)이다.
둘째, 준성사는 준성사에 붙은 ‘준’(準)이 말해 주는 것처럼, 자격이나 효과가 성사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성사에 버금갈 정도는 된다. 말하자면, 준성사가 정식 성사는 아니어도 성사들을 모방한 정도에서는 ‘거의 성사’이고, 준성사를 잘 받으면 곧 ‘성사’도 받으러 가기 때문에 영적 효력 면에서도 사실상 ‘곧 성사’란 뜻이다.
셋째, 준성사는 영적 효력을 얻는 방식이 성사와 다르다. 성사는 사효성(ex opere operato)이라 하여 ‘행위 자체로’ 효력이 발생하지만, 준성사는 인효성(ex opere operantis)이라 하여 ‘행하는 사람의 행위로’ 효력이 주어진다. 따라서 준성사는 거행하고자 모인 “교회의 간청”이 간절할수록 영적 효과를 드러내어, 사람들은 “성사들의 뛰어난 효과를” 받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 결과로 “생활의 여러 환경이 성화된다.”
준성사의 형태
준성사가 성화시키는 여러 환경은 “특정 직무와 신분, 신자 생활의 매우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에게 유익한 물건 등”(가톨릭 교회 교리서, 1668항)이다. 환경은 다양해도 준성사의 형태는 축복과 구마의 두 가지이다.
축복은 두 종류로 나뉜다.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의 축복, 동정녀들과 과부들의 봉헌, 수도 서원 예식, 그리고 교회 직무(독서직, 시종직, 교리 교사 등)를 위한 축복”처럼 사람에 대한 축복과, “성당이나 제대의 봉헌 또는 축복, 성유와 제기와 제의와 종 등의 축복”(가톨릭 교회 교리서, 1672항)같이 사물에 대한 축복이 있다. 하지만 축복의 대상이 무엇이든 “온갖 축복의 원천은 만유 위에 축복받으신 하느님이시다”(「축복 예식」, 1항).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온갖 영적인 복’(에페 1,3)을 받는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71항).
구마에도 두 종류가 있다. 교회가 세례를 거행할 때 행하는 간단한 형식의 구마와, “하느님 자비의 신비로운 계획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가 “하느님의 용인으로 마귀에게 시달리거나 사로잡히게 된 때”(「구마 예식」, 10항) 행하는 장엄 구마가 있다. 특별히 후자는 “주교의 허가를 받아서 사제만이 행할 수 있으며, 교회에서 정한 규칙을 정확하게 지키면서 신중하게 이루어져야”(가톨릭 교회 교리서, 1673항)한다.
축복과 구마 외에 장례 예식도 준성사에 속한다. 장례식은 “그리스도인 죽음의 파스카 성격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야”(전례 헌장, 21항) 한다. 사실 교회의 장례 예식이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세례로 한 몸이 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건너가도록”(「장례 예식」, 1항) 돕는 것, 곧 세례 성사의 은혜가 결실에 이를 수 있도록 온 교회가 간청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준성사의 효과
준성사는 성사를 모방하며 교회의 구원 활동을 끊임없이 돕는다. 이를 위해 “준성사에는 언제나 기도가 포함되며, 흔히 안수, 십자 성호, (세례를 상기시키는) 성수 뿌림 같은 일정한 표징이 따른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68항). 이처럼 준성사의 성사 비슷한 외적 표징들은 “성사들의 뛰어난 효과를”(전례 헌장, 60항) 기억하게 해 준다.
그리하여 십자 성호, 세례수 축복, 성유 축성, 성수 뿌림, 장례 예식 등은 세례 성사와 연결되고, 성당과 제대 봉헌, 성체 강복, 감실의 축복 등은 성체 성사와 연결된다. 이런 식으로, 안수, 학교나 도서관 축복은 견진 성사,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의 축복, 동정녀들과 과부들의 봉헌, 교회 직무를 위한 축복, 수도 서원 예식 등은 성품 성사, 가족과 그 구성원들의 축복, 집과 가정용품들의 축복 등은 혼인 성사와 연결될 수 있다.
끝으로 고백의 기도, 임종 때의 교황 축복, 구마 예식 등은 고해 성사를, 병자들의 축복, 병원이나 병자들을 위한 건물의 축복, 묘지의 축복 등은 병자 성사를 기억하게 한다.
준성사도 핵심은 파스카 신비
준성사가 비록 성사보다는 급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준성사는 엄연히 전례 행위이다. 성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생명을 실어나르는 동맥이라면, 준성사는 교회의 생활 현장 구석구석까지 생생한 은총을 전달하는 모세 혈관에 비길 수 있다.
준성사를 거행하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마음과 정성이 부족하면, 은총의 모세 혈관이 막혀 손발은 저리고 몸에는 병까지 올 수도 있다. 그래도 성사 생활을 하고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그리스도인다운 사랑 실천은 빈약해질 수 있다.
준성사를 정성껏 자주 거행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일상의 모든 것을, 세속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로 성화시키려는 마음, 이 마음 때문에 교회는 새로운 준성사들을 제정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폐지하거나 변경도 한다(교회법 제1167조 1항 참조). 결국 성사든 준성사든 중심은 그리스도이고, 핵심은 파스카 신비이다.
“그러므로 성사와 준성사의 전례는 잘 준비된 신자들에게 생활의 거의 모든 사건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에서 흘러 나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되게 한다. 이 신비에서 모든 성사와 준성사가 그 효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사물을 목적에 맞게 올바로 사용하면 인간 성화를 이루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다”(전례 헌장, 61항).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전례 안내
사랑과 자비 베풀며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기억하자
가톨릭교회는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낸다.
전례력은 가톨릭교회의 달력으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드러난 사건들을 한 해 동안 기념해 거행하는 시간 구조이다. 교회가 전례력을 만들어 시간 흐름에 따라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기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전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이날의 의미와 전례 안에서 주님의 어떤 모습을 닮아야 할지를 살펴본다.
신앙 고백
가톨릭교회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왕으로서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 마지막 날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재림하신다’고 신앙 고백을 한다.
이 믿음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수난을 당하시기 전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을 따로 모아 ‘최후의 심판’에 관해 일러주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마태 25,31)이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왕’은 성경 곳곳에서 드러난다. 먼저, 주님께서는 다윗의 후예로서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분이시다.(마태 1,1-17) 그리고 동방 박사들의 입을 통해 태어난 아기 예수께서 ‘유다인들의 임금’이 선포된다.(마태 2,2) 주님께서는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루카 22,30)이라며 스스로 당신의 왕권을 드러내시기도 했다. 또 주님께서는 ‘유다인의 왕’(요한 18,37)으로 고발되어 조롱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 그리고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마르 15,26)라는 십자가 죄명패가 이를 재확인시켜줬다.
하지만 주님의 왕국은 지상 영화를 위한 권력이 아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복음 선포를 통해 지상에 펼쳐지지만(사도 1,8) 그 완성은 미래에 있고(1코린 15,24-25), 영원히 지속되며(루카 1,33), 진리를 증언하는 것(요한 18,37)이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왕국을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라고 고백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36항)
교회는 그리스도왕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셨다. 교회가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763항) 이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상의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된다. 그동안 이 나라는 지상의 순례 길 위에서 박해를 견디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으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땅끝까지 확장된다.(사도 1,8 참조)
그리스도인은 이를 위해 하느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하여 영광스러운 교회가 완성될 때까지 자신의 신원과 역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을 위한 자비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왕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죄악에 맞서 끊임없이 싸우고, 인간이 행하는 일과 만들어 내는 문화에 그리스도의 가치를 불어넣음으로써 세상의 제도와 환경이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하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의 왕직이라고 한다.(「교회 헌장」 36-38항)
전례 의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비오 11세 교황이 1925년 12월 11일 회칙 「Quas Primas」(꽈스 프리마스, ‘처음의 것’ 또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관하여’)를 통해 제정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 니케아 공의회 1600주년을 기념해 무신론과 세속주의를 경계하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의 참된 왕이심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왕권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날을 선포했다. 1925년 제정 당시에는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전 주일인 10월 마지막 주일에 이 축일을 지내도록 했다. 모든 성인과 함께 주님의 왕권과 영광을 널리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전례를 개혁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즉 그리스도왕의 재림과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축일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 1970년부터 연중 마지막 주일로 옮겨 이날을 지내고 있다.
3년 주기의 이날 복음과 독서는 그리스도를 ‘인류의 목자’(가해: 마태 25,31-46; 에제 34,11-12.15-17; 1코린 15,20-26.28), ‘영원하신 왕’(나해: 요한 18,33-37; 다니 7,13-14; 묵시 1,5-8), ‘십자가 위에 계신 왕’(다해: 루카 23,35-43; 2사무 5,1-3; 콜로 1,12-20)으로 표현한다. 감사송은 그리스도 왕국의 특징을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묘사한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어는 ‘하느님 나라’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이미 지상에서 살기 위해 예수께서 마련해 주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새로운 삶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최후의 심판’(마태 25,31-45) 내용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왕께서 마련해 주신 새로운 삶의 가치 질서이다. 굶주린 이, 목마른 이, 헐벗은 이 등 어려움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 특별히 가난한 사회 약자를 자비로이 보살피며 사는 삶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러한 사랑과 자비의 삶이 복음 정신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향백나무, 왕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나무
- 레바논의 향백나무.
히말라야산맥의 서쪽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동쪽 지역에는 엄청나게 키가 크고 몸통이 굵게 자라는 소나무과의 상록 침엽수가 분포한다. 높이는 30~50미터에, 굵기는 10미터에 이른다. 히말라야산맥이 원산지인 이 나무는 생김새가 잎갈나무와 비슷하지만 낙엽 침엽수인 잎갈나무와는 다르게 상록성이라서 개잎갈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달리는 히말라야시다, 히말라야삼나무, 설송(雪松)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이 나무를 빼닮은 나무들이 오래전에 레바논의 높은 산악지대에도 빽빽하게 분포해 있었다.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지만, 일찍이 1천 년을 넘게 사는 장수 나무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여러 가지 상징성을 지닌 나무로서 구약성경에도 70번 이상 등장할 정도로 빼어난 나무였다. 레바논개잎갈나무가 그것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향백나무 또는 레바논의 향백나무로(개신교에서는 백향목으로) 번역되어 나온다(이 글에서도 ‘향백나무’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레바논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 너머에 있는 나라인데, 이 이름에는 히브리어로 ‘하얗다’라는 뜻이 있다. 레바논의 산악지대가 워낙 높은 지역이어서 늘 눈으로 덮여 있는 까닭이다.
향백나무는 이사야 예언자가 ‘레바논의 영광’(이사 35,2; 41,19; 60,13)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로 아름답고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나무였다. 나무 자체가 길고 굵은데다가 곧게 자란다. 그리고 추운 지방에서 생장하는 까닭에 목질이 견고한데다가 쉽게 벌레 먹거나 부패하지 않는다. 그러니 일찍부터 건축재나 가구재로 요긴하게 쓰였다. 또한 모양새가 우람하고 위엄 있어 보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상용으로, 공원 조경수와 가로수로 인기가 높다.
뿐만 아니라 열매에서 나오는 기름은 곰팡이나 해충에서 보호하는 기능이 있어서 모세오경에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을 정결히 할 때 향백나무(의 기름)를 사용하라고 규정되어 있다(레위 14,4.15-18). 그리고 수지(樹脂)는 진한 향으로 숲에 상쾌한 기운이 돌게 하는 기능이 있으며, 미라를 만드는 방부제나 향수로도 쓰였다.
성경에서 향백나무는 힘과 권능의 상징
예전에 레바논의 산악지대에는 이처럼 유용한 향백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당연히 레바논 산맥의 향백나무 숲은 주변의 건조한 사막지대에 자리 잡은, 그래서 나무가 부족했던 나라들에게 아주 부럽고 매력적인 대상이 되었다. 이집트는 1500년 동안이나 레바논의 침엽수들을 베어다가 배, 신전, 성채 등을 짓고 만드는 데에 썼다. 아시리아도 기원전 12세기부터 레바논 목재 경쟁에 끼어들었는데, 기원전 701년 유다를 공격한 바 있는 산헤립 임금은 자기가 레바논의 나무들을 베어내며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노라고 떠벌린 바 있다(2열왕 19,23).
그리고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마침 레바논의 향백나무 숲이 페니키아의 도시국가인 티로의 소유였던 시기에 티로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그 덕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기원전 1000년경) 티로에서 수입한 향백나무로 궁전을 지었다(2사무 5,11). 뒤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향백나무로 성전을 지었고(1열왕 5,19-24), ‘레바논 수풀 궁’이라는 궁전도 지었다(1열왕 7,2-3).
이렇게 해서 향백나무는 다윗 왕가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다윗 왕가를 레바논에 견주어서 말했다(예레22,6.23; 에제 17,3-4). 아마도 향백나무로 된 건축물을 많이 보유한 까닭에 향백나무 숲이 우거진 레바논과 비슷해 보였던 모양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하다가 돌아와 제2 성전을 지을 때도 향백나무를 사용했다(에즈 3,7). 그때 레바논 숲의 주인은 바빌론을 꺾고 고대 근동을 제패한 페르시아였다.
한편, 시편 저자는 향백나무를 ‘주님의 나무’라고 불렸다(시편 104,16). 에제키엘 예언자는 향백나무가 ‘하느님의 동산’, 곧 에덴동산에서 자라는 과실수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에제 31,8). 오래된 유다 전승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 시대에는 향백나무도 열매를 맺는 과실수였는데, 원조들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으면서 생산성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날, 이스라엘 땅은 에덴처럼 풍요로워지고(에제 36,35) 향백나무도 열매를 맺으리라고 예언한다(에제 17,23).
그리고 성경에서 향백나무는 힘과 권능의 상징으로 소개된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악인을 풀이라고, 의인을 야자나무와 향백나무라고 말한다(92,8.13). 또한 향백나무는 키 큰 나무의 대표였다. 그래서 성경은 향백나무를 키 큰 나무라고, 우슬초를 가장 작은 초목이라고 말한다(1열왕 5,13). 그리고 향백나무는 아름다움과 위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아가서는 연인의 빼어난 모습을 향백나무에 비겨서 노래한다. “그이의 모습은 레바논 같고 향백나무처럼 빼어나답니다.”(아가 5,15)
- 레바논의 향백나무 열매.
구세주와 그분의 왕국을 상징하는 나무
그러나 향백나무가 성경에서 늘 긍정적인 의미로만 소개되지는 않는다. 그 큰 키와 우람한 풍채가 때로는 현세적인 오만방자함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래서 이사야는 향백나무와 참나무들 위로 주님의 날이 닥치면, 세상의 교만이 심판받으리라고 예고한다(2,12-13). 시편 저자는 주님의 목소리가 교만한 향백나무를 부러뜨리고 사막을 뒤흔들 만큼 장엄하다고 찬미한다(29,4-9).
이렇듯 향백나무는 성전과 궁전 건축에서부터 무역 상품을 포장하는 상자, 배의 돛대, 심지어 우상을 만드는 데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용되었다. 그러면서 힘찬 기상과 아름다움, 위엄과 영광, 이스라엘의 번영, 의인의 성장과 번성을 상징했고 때로는 교만, 사치의 대명사로 이해될 만큼 값지고 귀한 나무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긴한 쓰임새로 고대 근동인들에게 사랑받아온 레바논의 향백나무 숲은 오랜 벌채로 말미암아 손상된 상태다. 몇몇 나라들이 향백나무를 키워 보려고 시도했지만, 기후 문제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향백나무는 현재 레바논의 국기에 들어가 있어서 찬란했던 옛 영광을 떠올릴 뿐이다.
그리고 향백나무의 상징성에 대한 구약시대의 전승은 신약시대에도 이어졌다. 중근동지방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찍이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며 향백나무를 나무들 중의 으뜸이라 여긴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향백나무에서 아름다움과 위엄을 보았다. 그러기에 이 나무를 가장 아름다우시고 위엄 있으신 분, 곧 왕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나무로 받아들였다. 나아가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러했듯이, 구세주와 그분의 왕국을 상징하는 나무로 이해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에제 17,22)
[전례, 그 능동적 참여]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과 의탁과 갈색 성의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
성모신심 단체들은 하나같이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고 말하며 성모성월 행사에서도 성모님께 자신을 바치는 기도를 바치기도 한다. 이러한 신심 혹은 전례기도문의 출발점은 어디이고 과연 하느님이 아닌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는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 행위의 바탕이 되는 영성의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신자들에게 그들이 세례 때에 한 약속에 따라 충실히 살 수 있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성모님의 손을 통하여 예수님께 자신을 봉헌하도록 제안하였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
위와 같이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의 “성모님의 손을 통하여” 예수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는 목적의 실현은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자 프랭크 더프에 의해 도입되었다. 레지오 마리애의 봉헌사열식인 아치에스(Acies)의 봉헌 정신은 바로 몽포르 성 루도비꼬의 정신이 그 뿌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요한 19,25–27 참조), 봉헌 행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 성모님이 차지하는 고유한 역할과 복음에 대한 성모님의 증언이 갖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중요성, 성모님의 간구에 대한 믿음, 성모님 보호의 힘, 그리고 성모님께서 어머니로서 지니신 여러 가지 직분을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은총의 질서 안에서 당신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참된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 이라는 단어는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기에 우리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봉헌이라는 말은 하느님에게만 국한된 단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을 하고 있다. “‘성모님께 아이들을 봉헌한다’는 표현은 본래 아이들을 성모님의 보호에 맡기고 성모님의 어머니다운 축복을 요청한다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의탁이나 증여와 같은 다른 용어의 사용을 제안하기도 한다. 전례신학이 발전하면서 용어를 엄격하게 사용함에 따라 봉헌이라는 용어를 하느님께 드리는 전적이고 영속적인 자기증여에만 사용하자는 제안도 있다. 이러한 자기 증여는 교회의 개입으로 보장받으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바탕으로 삼는다.”(대중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204항)
신자들은 위와 같이 복되신 동정마리아에 대한 봉헌 행위에 관하여 철저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러한 행위는 장엄하고 영속적인 행위인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으나 실제로는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의 또 다른 형태일 따름이다. 이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은총의 작용과 관련하여 자유롭고 개별적으로 성숙하게 내려진 결정에서 비롯되며, 전례적으로 올바르게 표현되어야 한다.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행위는 전례에 동화될 수 없는 신심행위이므로 성찬의 희생제사 거행 밖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 행위는 다른 형태의 전례 봉헌과는 실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시하여야 한다. 우리는 세례서약을 지키고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완전히 맡기고 성모님의 전구를 간청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봉헌하는 행위여야 한다.
갈색 성의와 그 밖의 성의들
성모 신심의 역사에는 다양한 성의에 대한 ‘신심’도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은 가르멜 산의 성모 성의에 대한 신심이다. 이 성의는 매우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이는 명백히 공의회가 “여러 세기의 흐름에서 교도권이 권장하여 온”(교회헌장, 67항) 것으로 평가하였던 성모 신심 실천가운데 하나이다.
“이 가르멜 산의 성의는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녀 수도회의 수도복이 축소된 형태이다. 이 성의는 현재 가르멜회에 국한되지 않고 많은 성모 신심단체나 개인적 차원에서의 성모 신심에 기둥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교도권이 인정한 신심실천이다.”(대중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205항)
가르멜 성모의 갈색 성의는 다음과 같은 거룩한 표지의 목적을 갖고 있다
“성의는 가르멜 산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성모님의 보호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그분의 모성적 간구에 의존하며 영성생활의 중요성과 기도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신자들 사이에 맺어진 어머니와 자녀 관계를 외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이다.
성의는 교회의 특별한 예식을 통하여 수여된다. 교회의 설명에 따르면 성의는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세례 때의 결심을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혼인 예식을 갖추어 입고 마침내 천상 고향으로 들어가기까지 성삼위를 찬양하며 그리스도를 닮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축복예식서’, 성의의 축복과 착의, 1214항)
성의 착의식은 그 기원의 진지함을 잃지 않고 거행되어야 한다. 이 성의의 착의는 신자들이 가입하려고 하는 성모신심 단체의 특성과 목적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잘 알 수 있도록 일정기간의 준비를 거친 다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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