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甯武子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다. 그 지혜로움은 내가 미칠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에는 미치지 못하겠다.”
○ 甯武子, 衛大夫, 名兪. 按『春秋傳』, 武子仕衛, 當文公ㆍ成公之時. 文公有道, 而武子無事可見, 此其知之可及也. 成公無道, 至於失國, 而武子周旋其閒, 盡心竭力, 不避艱險. 凡其所處, 皆智巧之士所深避而不肯爲者. 而能卒保其身以濟其君, 此其愚之不可及也. 영무자는 위나라 대부이고 이름은 유다. 춘추전에 따르면, 무자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한 것은 문공과 성공의 때에 해당하였다. 문공 시절에는 도가 있었는데, 영무자에게 볼 만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것이 바로 그의 지혜로움에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은 도가 없어서 나라를 잃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영무자는 그 사이에서 두루 돌아다니면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였으며, 어떠한 어려움과 위험도 피하지 않았다. 무릇 그가 처리한 것이라면 모두 지혜롭고 교묘한 선비들이 깊이 피하면서 하려 들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마침내 능히 제 몸을 보전하여 제 임금을 구제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 어리석음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左傳僖公二十八年 衛侯聞楚師敗(楚成王與晉文公戰于城濮 衛地也 楚師敗績) 懼出奔楚(初晉侯將伐曹假道于衛 衛弗許 晉伐衛 衛侯請盟 晉人弗許 衛侯欲與楚 國人弗欲 故出其君以說于晉 衛侯聞楚敗 出居襄牛之地 以避晉而遂奔楚) 遂適陳使元咺奉叔武以受盟(元咺 衛大夫 叔武衛侯弟 使攝君事以受盟于踐土) 癸亥王子虎盟諸侯于王庭 或訴元咺於衛侯曰 立叔武矣 其子角從公 公使殺之 咺不廢命 奉夷叔以入守(音狩 夷叔卽叔武) 六月晉人復衛侯 甯武子與衛人盟于宛濮(甯兪時從衛侯在外 故與衛人盟) 衛侯先期入 甯子先(先入欲安喩國人) 長牂(音臧) 守門以爲使也 與之乘而入(長牂與甯子共載而入國) 公子歂犬華仲前驅(歂時專反 華去聲 二子並衛大夫) 衛侯遂驅(揜甯子未備) 叔武將沐聞君至 喜捉髮走出 前驅射以殺之 公知其無罪也 枕之股而哭之 歂犬走出 公使殺之 元咺出奔晉 冬會于溫 討不服也 衛侯與元咺訟 甯武子爲輔 鍼(其廉反)莊子爲坐(坐獄爲坐) 士榮爲大士(治獄官也 周禮命夫命婦 不躬坐獄訟 元咺又不宜與君對坐 故使鍼莊子爲坐 又使衛之忠臣及其獄官 質正元咺 蓋今勘吏有罪 先驗吏卒之義) 衛侯不勝(三子辭屈 故不勝) 殺士榮刖鍼莊子 謂甯兪忠而免之 執衛侯歸之于京師 寘諸深室 甯子職納槖饘焉(槖音託 衣裳也 饘音旃糜也 甯兪以君在幽隘 故親以衣食爲己職 言其忠至 所慮者深) 元咺歸于衛 立公子瑕(瑕衛公子道也) 춘추좌씨전 노희공 28년에 위나라 제후가 초나라 군대가 패배했다는 소문을 듣고서(초성왕과 진문공이 성복에서 싸웠는데, 제나라 땅이었고, 초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두려워서 출국하여 초나라로 도망쳤다(처음에 진나라 제후는 장차 조나라를 치고자 위나라에 길을 빌리고자 하였는데, 위나라가 허락하지 않았기에, 진나라는 위나라를 쳤다. 위나라 제후는 회맹을 요청하였지만, 진나라 사람들이 불허하였다. 위나라 제후는 초나라와 더불어 연합하고자 하였지만, 나라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 임금을 축출하여 진나라에 예쁘게 보이고자 하였다. 위나라 제후는 초나라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출국하여 양우의 땅에 거하여 진나라를 피하다가, 마침내 초나라로 도망쳤던 것이다). 마침내 진나라로 가서, 원훤으로 하여금 숙무를 받들어 회맹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원헌은 위나라 대부이고, 숙무는 위나라 제후의 동생인데, 임금의 일을 대신하여 천토에서 회맹을 받도록 한 것이다). 계해일에 왕자(천자의 아들) 호가 왕정에서 제후들과 회맹을 하였다. 혹자(천견)가 위나라 제후에게 원훤을 참소하여 말하길, 숙무를 제나라 임금으로 세우려고 한다고 하였다. 원훤의 아들 각이 제나라 제후를 따르고 있었기에, 제나라 제후는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원훤은 받은 명을 저버리지 않고서, 이숙을 받들어 제나라에 들어가 지키고 있었다(이숙은 곧 숙무다). 6월에 진나라 사람들이 위나라 제후를 회복시켜 주었다. 영무자는 위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완복에서 회맹하였다(영무자는 당시에 위나라 제후를 따라 밖에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회맹하였던 것이다). 위나라 제후는 먼저 입국하고자 기대하였지만, 영무자가 먼저 입국하였다(먼저 들어가 나라 사람들이 편안하도록 깨우쳐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장장이 문을 지키다 사신으로 여기고서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들어갔다(장장이 영무자와 함께 수레를 타고서 입국하였다는 것이다). 공자 천견과 화중이 앞에서 달려갔고(歂의 음은 시전반이고, 華는 거성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위나라 대부다), 위나라 제후가 뒤따라 말을 몰았다(영무자가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덮어서 가린 것이다). 숙무는 장차 목욕을 하려다, 임금이 오신 것을 듣고서, 기뻐하며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뛰어나왔다. 앞에서 달리던 사람들(천견)이 화살을 쏘아 죽여버렸다. 위나라 제후는 그가 죄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무릎을 굽히고 엎드려 그를 위해 곡을 하였다. 천견이 달아나 출국하려 하자, 위나라 제후는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원훤은 출국하여 진나라로 도망쳤다. (천자가) 겨울에 온 땅에서 회맹하였고, 회맹에 불복하는 자를 성토하였다. (진문공에게) 위나라 제후는 원훤과 더불어 송사를 하였는데, 영무자는 보좌역이 되었고, 침장자는 위나라 제후의 대리인이 되어 앉았으며(옥중에 앉는 것을 坐라고 한다), 사영은 大士[변호인, 옥사를 다스리는 관리다. 주례에 의하면, 命夫와 命婦(초상에 와서 곡하는 사람)는 옥송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하였고, 원훤 또한 임금과 마주 앉기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침장자로 하여금 대신 옥송의 자리에 앉도록 한 것이고, 또한 위나라의 충신과 그 옥관으로 하여금 원훤을 질정하게 한 것이니, 대체로 지금 감리에게 죄가 있으면, 먼저 리졸에게 징험해본다는 의미와 같다]가 되었다. 위나라 제후가 이기지 못하였다(세 사람은 말이 달렸기에, 이기지 못한 것이다). (진문공은) 사영을 죽이고, 침장자의 발목을 베었으며, 영유(영무자)는 충성스럽다고 말하며 형을 면해주었다. 그리고는 위나라 제후를 붙잡아다 주나라 수도에 주어서, 깊은 방에 두도록 하였다. 영무자는 옷과 죽을 들이는 일을 맡았다(橐은 음이 託이고, 의복이란 뜻이다. 饘은 음이 旃(전)인데, 죽이라는 뜻이다. 영무자는 임금이 깊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직접 옷과 음식을 들이는 일을 자기 담당으로 여겼다. 그의 충성이 지극하였고 생각하는 바가 깊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원훤은 위나라에 돌아가 공자 하를 임금으로 세웠다(하는 위나라 공자 道였다).
僖公三十年夏 晉侯使醫衍酖衛侯(衍醫名 晉文欲殺衛侯而罪不至死 故使醫因治疾而加酖毒) 甯兪貨醫(甯子視衛侯衣食 得知其謀 乃以貨賂醫) 使薄其酖 公爲之請(魯僖公爲之請) 納玉於王與晉侯 皆十殼(與珏同 二玉相合曰珏) 王許之(襄王許之) 秋乃釋衛侯 杜氏曰 按左氏僖公二十五年 衛文公卒 子成公立 僖二十六年 卽衛成公元年也 經稱公會衛甯速盟于向 甯速莊子也 則莊子嘗逮事成公矣 至僖公二十八年傳稱甯武子與衛人盟于宛濮 武子名兪 速之子 卽成公卽位之三年也 以此考之 甯莊子當死于成公二年左右 而後子兪爲大夫 則武子未嘗事文公 集註謂武子仕衛當文公成公之時 與此少異 노희공 30년 여름에, 진나라 제후(진문공)는 의원 衍으로 하여금 위나라 제후에게 짐독을 쓰도록 하였는데(衍은 의원 이름이다. 진문공은 위나라 제후를 죽이고자 하였지만 그 죄가 사형에는 이르지 않았기에, 의원으로 하여금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짐독을 타도록 하였다), 영유(영무자)가 의원을 매수하여(영무자는 위나라 제후의 옷과 음식을 돌보았기 때문에, 그 모의를 알 수 있었다. 이에 재물로 의원을 매수한 것이다), 짐독을 옅게 타도록 하였다. 공이 그를 위하여 풀어줄 것을 간청하였고(노희공이 그를 위하여 간청하였다), 영무자가 천자와 진나라 제후에게 옥을 바쳤는데, 모두 10殼(珏과 같은데, 옥 두 개가 서로 부합하는 것을 珏이라고 한다)이었다. 천자께서 이를 허락하였고(양왕이 허락한 것이다), 가을에 마침내 위나라 제후를 석방하였다. 두씨가 말하길, 좌씨전에 따르면, 희공 25년에 위문공이 죽었고, 아들 성공이 즉위하였다. 희공 26년은 곧 위성공 원년이다. 경전에 칭하길, “노희공이 위나라 영속과 회동하여 향 땅에서 결맹하였으니, 영속은 장자다.”라고 하였으니, 장자(영속)은 일찍이 성공을 모시는 데에 이르렀다. 노희공 28년에 이르자, 춘추좌씨전에 칭하길, “영무자가 위나라 사람들과 완복에서 회맹하였으니, 영무자는 이름이 兪이고, 영속의 아들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위성공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이로써 고찰해보면, 영장자는 성공 2년 정도에서 죽었고, 그 이후 아들인 영유가 대부가 되었어야 마땅하니, 그렇다면 영무자는 일찍이 위문공을 섬긴 적이 없었다. 집주에서는 영무자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가 문공과 성공의 시대에 해당한다고 말하였으니, 이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
2 | ○ 程子曰: “邦無道能沈晦以免患, 故曰不可及也. 亦有不當愚者, 比干是也.” 정자가 말했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 능히 자신을 깊숙이 감추어서 화를 면할 줄 알았으니, 그래서 미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마땅히 어리석지 말았어야 사람도 있으니, 비간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新安陳氏曰 朱子謂其不避難險 程子以爲能沈晦者 蓋於難險中能沈晦 非避事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주자는 그가 어렵고 위험한 일을 피하지 않았다고 말하였고, 정자는 자신을 깊숙이 숨길 줄 아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대체로 어렵고 위험한 일 안에서 자신을 깊숙이 숨길 줄 안다는 것이지, 일을 피한다는 것은 아니다.”
朱子曰 邦無道時 全身退聽 人皆能之 武子不全身退聽 却似愚然 又事事處置得去 且不表著其能 所以爲愚不可及也 又曰 武子九世公族 與國同休戚 却與尋常無干涉底人不同 주자가 말하길, “나라에 도가 없을 때, 제 몸을 온전히 한 채 물러나 남의 말을 듣는 것은 사람들마다 전부 할 수 있는 일이다. 영무자가 제 몸을 온전히 한 채 물러나 남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듯 보였지만, 또한 일마다 잘 처치해갔으면서도 그 유능함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바로 어리석은 것에는 미칠 수 없는 것이 된 까닭이다. 또 말하길, 영무자는 9세대 동안 公族으로서 나라와 평안과 근심을 함께하는 사람이니, 평범하게 아무런 간섭도 없는 사람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成公失國 若智巧之士必且隱避不肯出 武子竭力其間至誠懇惻不避難險 却能擺脫禍患 卒得兩全 非能沈晦 何以致此 若比以智自免之士 武子却似箇愚底人 但愚得來好 若使他人處之 縱免禍患 不失於此 必失於彼 위성공이 나라를 잃자, 지혜롭고 재주가 많은 선비 같은 경우는 반드시 숨어 피하면서 나서려 하지 않았지만, 영무자는 그 사이에서 힘을 다하고 지극정성으로 간절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어렵고 위험한 일을 피하지 않았음에도, 도리어 능히 재앙과 근심에서 벗어나 마침내 둘(위성공과 영무자) 다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니, 능히 자신을 깊숙이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만약 지혜로써 스스로 면한 사람과 비교한다면, 영무자는 도리어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다만 어리석어서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남들에게 대처하도록 하였다면, 설사 재앙과 근심을 면할 수 있을지라도, 여기서 잃지 않으면 반드시 저기에서 잃었을 것이다.
他人於邦無道時 要正救者不免禍患 要避患者 又却偸安 若武子之愚 旣能韜晦而自處不失其正 此所以不可及 타인의 경우에,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바로잡아 구하고자 하는 자는 화환(재앙과 근심)을 면하지 못하고, 화환을 피하고자 하는 자는 또한 도리어 구차하게편안하기만 한다. 만약 영무자의 어리석음이라면, 이미 자신을 숨길 수 있으면서 스스로 대처함도 그 올바름을 잃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미칠 수 없는 까닭이다.
問甯武子世臣 他人不必如此 曰 然 又看事如何 若羈旅之臣 見幾先去 則可 若事已爾 又豈可去 此事最難 當權其輕重 누군가 묻기를, “영무자는 世臣이었므로,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이렇게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 또한 일이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羈旅之臣(떠돌이 신하)이라면, 그 기미를 보아서, 먼저 떠나야 옳은 것이다. 만약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다면, 또 어찌 떠나갈 수 있겠는가? 이 일이 제일 어렵다. 마땅히 그 경중을 저울질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武子於衛爲公族 比干於紂爲父族 皆與國存亡者也 特衛成公之患在外 欲免之 非沈晦不可 紂之惡在己 不諫之而諉於沈晦 亦不可 程子所謂亦有不當愚者 最見時中之義 운봉호씨가 말하길, “영무자는 위나라에 있어서 公族이었고, 비간은 주왕에게 있어서 父族이었으니, 모두 나라와 더불어 함께 죽고 사는 사람이었다. 다만 위성공의 근심은 밖에 있었기에, 그것을 면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깊숙이 숨기는 것이 아니고는 불가능하였다. 주왕의 악행은 자신에게 있었으니, 그것을 간하지 않고서 沈晦에 핑계를 댄다면, 이 또한 불가한 것이다. 정자가 말한 이른바 또한 마땅히 어리석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은 時中을 제일 잘 알아보아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以有道則見 無道則隱 及稱南容不廢免刑戮 遽伯玉 仕卷懷等例之 則有道而知 當是發舒以自見 無道則愚 當是韜晦而無爲 今證以武子之時與事 無事可見 反謂之知 盡忠濟難 反謂之愚 何也 蓋處有道而安常者易 處無道而濟變者難 武子當文公時 安常處順 知者 行所無事 此可及之知也 當成公之失國 國家多事而能竭忠冒險保身全君 此知者所避而不敢爲 乃若愚而冒爲之 非眞愚也 柳子厚曰 甯武子 邦無道則愚 知而爲愚者也 不得爲眞愚 是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도가 있으면 드러내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는 것이나, 남용이 (도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고 (도가 없으면) 형륙을 면할 수 있다고 칭찬한 것이나, 거백옥이 (도가 있으면)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재주를 거두어서 숨긴다는 것으로써 예를 들자면, 도가 있으면 지혜로워서 마땅히 발현하고 폄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고, 도가 없으면 곧 어리석어서 마땅히 깊숙이 숨겨서 행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영무자의 때와 일로써 증명함에 있어, 볼만한 일이 없는 것을 가리켜 도리어 지혜롭다고 말하고, 충성을 다하여 난을 구제하는 것을 일컬어 도리어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체로 도가 있는 나라에 거처하면서, 편안하고 떳떳해 하는 것은 쉽고, 도가 없는 나라에 처하여 난을 구제하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영무자가 문공의 시절에 당해서는 편안하고 떳떳하며 처신함이 순하였는데, 지혜로운 자라면 일삼음이 없는 바를 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충분히 이를 수 있는 지혜인 것이다. 영무자는 위성공이 나라를 잃고서 국가에 일이 많은 때를 당해서는, 능히 충성을 다하고 위험을 무릅써서 제 몸을 보전하고 임금을 온전히 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지혜로운 자라면 피하는 바여서 감히 하지 않는 것이지만, 도리어 마치 어리석은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행한 것은 진짜로 어리석었던 것이 아니다. 류자후가 말하길,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다고 하였는데, 지혜롭지만 어리석을 수 있는 자였으니, 진짜로 어리석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