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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료 제290호인 '산청읍청정'(山淸挹淸亭:아래 그림1.2)은 안동권씨 33세손인
권두희씨가 지었다는 정자다.
조상의 얼을 받들고 고을의 번영과 화목을 기원하며 각지의 유학자와 학문적 교류를
위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적벽산과 백마산, 굽이쳐 돌아가는 경호강 맑은 물 등 산수
(山水)가 빼어난 이 곳에 1917년에 시작해 1919년에 완성했단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측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인 팔작(八作)지붕이며,
건물 양옆에 누마루를 구성한 이 정자는 100년이 채 못된 일제강점기에 지은 집이다.
"방문살과 창호의 처리에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정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전통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하나 고백컨대 문외한인 나는 모르겠다.
단성교 저편의 퇴적층처럼 보이는 산이 해발166m적벽산(赤壁山:아래그림3) )이며
경호강을 끼고 난 길(아래그림4)이 옛 3번국도, 아래그림5는 백마산(白馬山)이다.
산밑 구3번국도 앞의 검은 건물이 산청읍청정이며 강은 남강, 경호강, 적벽강 등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단성교 저편의 퇴적층처럼 보이는 산이 해발166m적벽산(赤壁山:아래그림1) )이며
경호강을 끼고 난 길(아래그림2)이 옛 3번국도, 아래그림3은 백마산(白馬山)이다.
산밑 구3번국도 앞의 검은 건물이 산청읍청정이며 강은 남강, 경호강, 적벽강 등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산75-1번지 일대는 '삼우당문익점선생사적지'(三憂堂文益漸先生史蹟址:
아래그림1))다.
신도비(神道碑), 묘(墓), 도천서원(道川書院), 신안사재(新安思齋) 등 문익점성지다.
도기념물 제66호인 '문익점의 묘소'(아래그림2)는 사각형 형태(方形墳)로 만들어졌으며 앞에는
상석과 비석,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 석등(石燈)이 세워졌다.
지난날, 종이품(從二品)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우는
비가 신도비다.
도문화재자료 제53호인 문익점신도비(아래그림3)는 고려 후기의 문신 문익점의 공적을 적었다.
(메뉴 옛길89번글 참조)
비는 조선 순조 34년(1834)에 세웠는데, 강화도 물 가운데에서 돌을 캐어 등짐으로 3년여를 옮긴
후 마을의 도로변에 세워놓은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 후 비각은 소실되고, 1943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단다.
훗날, 처사 남명 조식(南冥曺植)은 "江城忠孝 是文公 衣被生民 后稷同"(강성고을의 충효이신 님,
백성에게 옷 입힌 공이 후직과 같도다)고 찬양했다.
이 율곡(栗谷李珥)은 "神農敎民耕 后稷敎民穡 忠宣衣我民 豊功倍前昔"(신농과 후직이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쳤다면 충선공은 우리 백성에게 옷을 입혔으니 님의 공은 옛날보다 더 많도다)이라
극찬했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거유(巨儒), 명현(明賢)들을 제사하는 사당인 동시에 학문을 강론하고 인재를
키우던 사설교육기관이다.
도유형문화재 제237호 도천서원(道川書院:아래그림4.5)은 애초에는 문익점의 공적을 기리려 지은
사당이었다.
이조 세조7년(1461)에 건립되었으며, 1554년(명종9)에 '道川書院' 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하나 험난으로 점철되었다.
임진왜란때 소실된 후 1612년(광해군5)에 중건되고, 1787년(정조11)에 다시 동명의 사액을 받는다.
그 뒤 권도(權濤:1557∼1644 이조중기 학자)를 추가 배향하지만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훼철된다.
1891년(고종28)부터 단성사림들(丹城士林)에 의해 노산정사(蘆山精舍)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
하다가 1975년 사당인 삼우사(三憂祠)를 재건하고 서원으로 복원된다.
서원 내의 신안사재(新安思齋:아래그림6))는 명종(明宗) 6년(1551)에 창건된 문익점의 향사(享祠)
때 제관(祭官)들의 숙소다.
현 신안사재는 소실된 후 순조(純祖)4년(1804)에 재건된 건물이란다.
옛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에 딸린 정곡역이 있던 산청읍 정곡리 초입 도로변.
사람 만나기가 하도 어려워 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집으로 부러 찾아갔다.
이 지역 지리를 물어보려 들렀을 뿐인데 생면부지의 늙은 이에게 자고 가기를 권하는
정곡리(正谷)462-1번지, 멋장이 새 집의 주인 68세의 박풍규(아래그림1)
얘기 범위를 조금 넓히다 보니까 그는 서울 내 집과 지근인 덕성여대 옆(쌍문동)에서
살다가 귀향했단다.
정녕, 그는 솔밭공원과 4.19국립묘역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내 집 앞을 지나기도 했을 터.
이 사실을 알고난 그는 호의를 정중히 사양하는 내게 더욱 아쉬움을 표하며 산청 방문
기회가 오면 꼭 들러서 쉬어가란다.
넓은 듯 하나 좁은 세상이다.
삭막한 듯 하나 살 만한 세상이기도 하다.
산음현 전신은 지품천현(知品川縣)이었으며 그 현의 중심부였던 곳이 바로 정곡리다.
이 마을이 지품현의 중심부였음을 말해주는 지품초등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급격한 이농(離農)과 산아(産兒) 기피로 인해 교실을 채울 학생이 없기 때문이다.
한 대사업가가 교사(校舍)를 개보수하고 증축해 군(郡)에 헌납했단다.(아래그림2)
군은 '우정학사'라는 이름으로 군내우수 중고생들의 영재교육장으로 재활용중이란다.
성과에 따라서는 인구 유출의 억제는 물론 유입 효과도 거둘 것이다.
자녀 교육을 위해 희생하려는 부모들이니까.
다만, 운영 주체가 공공기관이라면 이 특별한 혜택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계층의 상실
감 또는 위화감도 동시에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군민의 세금으로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는 불만이 적잖다니까.
이처럼 전군적(全郡) 안간힘으로 인구 감소현상이 정지되었다는데도 문닫는 학교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로, 다시 대학으로 연쇄적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산청읍내에 있는 사립 산청여자중.고등학교(아래그림3)도 2007년에 산청중.고등학교
(공립)에 통합되었단다.
교사 터는 한 건설회사가 아파트 신축용으로 매입하였으나 경기 침체로 인해 방치해
흉물처럼 변해가고, 우범지대로 전락될까 지역민들의 걱정이 늘어간단다.
세종22년(1440)에 건립된 산청향교(아래그림1)는'임진 병자'전란때 소실(燒失)되었단다.
도 유형문화재 제224호 향교 안내판의 해설 글이다.(아래그림2)
아니, 병자년 호란때 청국병들이 산청까지 내려와 향교에 불 지르고 갔다는 말인가.
'임진. 정유'의 잘못임에 틀림 없다.
비록, 오류투성이지만 영어해설에서는 왜란이라 하고 '임진 정유'때 임을 밝혀주는 연대를
밝히고 있는데('1592~1598'이라고)
방문객중에는 건성인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꼼꼼히 살피기도 할 텐데 긴 세월을 저리
방치해 두고 있다니.
아씨시(Assisi)의 부유한 의류상의 아들로 많은 것을 소유했으나 일체를 버리고,
낮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온 몸으로 껴안았던 거리의 성자 프란치스꼬.
성심원(聖心院: 아래 그림들))은 프란치스꼬(St. Francesco: 1181~1226)성인의
'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가 1959년에 세운 구라(救癩)시설이다.
<그리스도 복음의 정신과 프란치스꼬 성인의 모범에 따라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한센인을 한가족으로 받아들여 보호와 치료에 헌신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아주며 복지증진을 통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그들은 산청읍 내리, 지리산 웅석봉 자락에 한센노인요양원을 세웠다.
그래서, 170여명의 남녀 노인들과 60여명 직원들의 이 공동체에는 "환자는 없고
오직 가족이 있을 뿐"이란다.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는....."
(신약성서 1데살 5:16~18)
하지만, 이해와 지원의 폭이 넓어진 이즈음과 달리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멸시와
기피의 대상이었던가.
정적이 감도는 이른 아침의 성심원. 경호강 건너 산기슭 곳곳에 그들이 자기네의
그리스도와 성모에게 온몸으로 매달리고 있는 처절한 자국들이 보이는 듯 했다.
나는 가톨릭신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순수한 사회구원활동에 대해서만은 한 없는 경의를 표한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정신을 표방하지만 비리 투성이이며 그나마도 외화내빈(外
華內貧)인 개신교의 활동과 달리 진정성이 있으니까.
단성면 방목리, 웅석봉자락의 어천(魚川: 아래그림1))마을은 오지마을이다.
그래도, 여름에 경호강, 어천계곡을 찾는 이들과 지리산 태극종주자들, 웅석봉
등산객들에게는 인기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지나 한재(大峴)를 넘기 위하여 가파르게 돌고 도는 고갯길을 힘겨웁게
오르는데 어천계곡 갈림길에 활짝 핀 진달래꽃(아래그림2)이 반기는 듯 했다.
아뿔싸, 봄을 가지러 간다고 떠난 늙은 이가 봄을 까마득이 잊고 있었네.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 는 뜻으로 속리(俗離)보다 단호한 결의가
담긴, 왠지 무거운 느낌을 준다.
공양받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길래 단속사로 개명까지 했을까.
불교 중흥기인 신라35대 경덕왕(재위742~764)22년에 창건되었다는 절이다.
산문인 광제암문(廣濟嵒門:아래그림1)에서 짚신을 갈아신고 들어가 절 구경을 하고
나면 짚신이 다 닳아 못신을 만큼 큰 규모였단다.
그런데, 왜 겨우 3층석탑 2기만(보물 제72, 73호:아래그림2) 남은 처지가 되었을까.
원래의 이름은 '금계사'(金溪寺 錦溪寺?)였는데 너무 많은 식객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개명한 후 사나와진 사찰인심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폐사된 것이란다.
비록 구전(口傳)이라 하나 시사하는 바(메시지)가 크지 않은가.
높이 3.5m, 지름50cm의 당간지주(아래그림3) 또한 절단되어 석탑 앞 솔밭에 방치
되어 있었는데 1984년에 복원했단다.
절터 뒤편의 매화나무(政堂梅:아래그림4)는 나이 640여세로 고려말에 대사헌에 올
랐던 통정 강회백(通亭姜淮伯)이 단속사에서 수학하던 소년시절에 심었단다.
남사리 분양매(汾陽梅또는元正梅), 시천면 산천재 남명매(山天齋南冥梅)와 더불어
산청삼매(三梅)중 하나란다.
단성면 운리, 다물민족학교(多勿民族)는 특수교육기관이다.
다물(多勿)은 '되물린다', '되찾는다'는 의미의 순수 우리말이란다.
'위복구토위다물(謂復舊土爲多勿)'이라 하여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찾는다는 의미로
고구려건국정신이기도 하다는 것.
1990년 4월에 서울 우이동(강북구)에서 개교했는데 1994년에 이 곳으로 옮겨왔단다.
왜 그랬을까.
삼국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외세와 결탁, 고구려의 웅지를 꺾어버린 신라땅에서
고구려 건국정신을 부활시키겠다는 것인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아래그림들은 다물미족학교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