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림'(פּוּרִים, Pūrīm, “제비들”)의 환희가 도시를 밝히기 전, 유대인들은 한 걸음 물러나 침묵의 고요함으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집니다. 기쁨의 폭발 직전에 찾아오는 이 고요한 날이 '타아니트 에스델'(תַּעֲנִית אֶסְתֵּר, Taʿanít ʾEstēr, “에스더의 금식”)입니다. 웃음이 있기 전에 침묵이 있고, 잔치가 있기 전에 먼저 낮아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더 금식일'은 한 마디로 환호의 문턱에서 스스로를 비우는 경계를 두는 영적 문지방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름에 담긴 숨겨진 영성
'에스더 금식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금식”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직하게 묻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금식은 단지 배고픔을 견디는 일종의 고행이라 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높이를 낮추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겸비함을 나타내는 영적 태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타아니트'(תַּעֲנִית, Taʿanít, “금식”)라는 단어에는 ‘자기 낮춤’의 결이 스며 있습니다. 그 뿌리는 “낮추다, 겸비하다”라는 뜻을 가지는 동사 '아나'(עָנָה, ʿānāh)입니다. 금식, 즉 식음을 폐하고 배를 비우는 행위는 곧 자아의 소음을 줄이는 행위가 되고, 혀의 분주함이 멎을수록 마음의 귀는 더 민감해지고, 선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먹지 않는 날”이기보다 “더 깊이 듣는 날”입니다. 침묵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날, 그리고 공동체가 한 방향으로 마음을 모으는 날입니다.
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숨어계신다고 곡해하는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숨김은 결코 부재가 아닙니다. 해가 구름 뒤에 가린다고 낮이 사라지지 않듯, 하나님의 일하심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타아니트 에스델'(תַּעֲנִיתאֶסְתֵּר, Taʿanít ʾEstēr)은 바로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향해 공동체가 한 몸이 되어 귀 기울이는 날입니다.
전통의 형성
랍비 전승은 이 사건을 기억의 리듬 안에 오롯이 담아놓았습니다. 탈무드 Megillah 13a–15a는 에스더의 금식을 회개와 간구의 상징으로 읽는 동시에 “숨겨진 섭리와 언약적 구원의 드라마”로 해석하는 탈무드적 신학의 핵심 본문으로 해석합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먼저 이름에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숨김은 부재가 아니며, 금식은 역사적 반전을 준비하는 통로이고,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마치 웨슬리의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과 같이 위기 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푸림'(פּוּרִים, Pūrīm)은 아말렉 이야기의 종결 편이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입증하고 있는 것이지요.
에스더서는 짙게 깔린 긴장으로 시작됩니다. 왕궁의 문은 높은 문턱이었고, 그 문턱을 넘는 일은 생명을 내놓는 일이었습니다. 에스더는 홀로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공동체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녀의 요청은 명령이라기보다 간곡한 눈물의 부탁이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금식하라.” 그 목소리에는 개인의 경건이 아니라 민족의 숨결이 들어 있습니다. 그때 울려 퍼진 구절을, 원어의 리듬으로 다시 적어 둡니다.
"레크 케노스 에트 콜 하예후딤"(לֵךְ כְּנוֹס אֶת־כָּל־הַיְּהוּדִים, Lēkh kenōs ʾet kol ha-yehūdīm, “가서 모든 유다인을 모으라”) 이어지는 말, "베추무 알라이"(וְצוּמוּ עָלַי, ve-tsūmū ʿālay, “나를 위하여 금식하라”)(에스더 4:16)
이 요청은 단지 “기도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호흡을 하나로 맞추어 달라는 말입니다. 흩어진 마음을 한 그릇에 담아 달라는 말입니다. 이때 3일간의 금식은 두려움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생과 사를 가르는 대전환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금식은 ‘개인의 영적 수행’을 뛰어넘어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는 결의가 됩니다. 누군가의 위기 앞에서 공동체가 함께 배를 비우고, 함께 시간을 비우는 것—그것이 '타아니트 에스델'(תַּעֲנִיתאֶסְתֵּר, Taʿanít ʾEstēr)의 핵심입니다.
오늘 유대 전통에서 '에스더 금식일'은 보통 '푸림'(פּוּרִים, Pūrīm, “제비들”) 전날, 히브리력 아달월 13일에 지켜집니다. 만약, 이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하루를 앞당겨 시행합니다. 이날의 금식은 성경의 ‘3일 금식’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푸림'(פּוּרִים, Pūrīm, “제비들”)으로 들어가기 직전 공동체가 마음을 정돈하는 “경계의 하루”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금식의 시간은 대체로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에 중요한 시간적 표현들이 있습니다.
'알로트 하샤하르'(עֲלוֹת הַשַּׁחַר, ʿAlōt ha-shaḥar, “동틀 무렵/새벽 여명”)에 시작하고, '체이트 하코하빔'(צֵאת הַכּוֹכָבִים, Tzēt ha-kokhāvīm, “별이 나올 때-최소 3개 이상/해진 뒤”)이 마칩니다. 하루 온종일(25-26시간) 금식하는 '욤 카푸르'(יוֹםכִּפּוּר, Yōm Kippūr, "속죄일")와 달리 이날은 주요 활동하는 낮 시간에 국한됩니다. 이를 시간적으로 계산하면, 대략 12-14시간 정도입니다.
금식의 실천은 대개 음식과 음료를 삼가는 형태로 나타납니다(단, 병자·임산부·노약자 등은 전통적으로 면제나 완화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을 단지 ‘무엇을 먹지 않는다’로만 설명한다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유대적 금식은 “결핍을 통해 은혜를 요청하는 방식”이며, ‘비움’의 시간은 새로운 차원의 ‘열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배가 비면 마음이 더 빨리 하나님께로 기울고, 혀가 절제되면 기도는 더 간절하고 진실해집니다.
이날 회당의 분위기는, 말하자면 “기쁨을 앞둔 경건한 긴장”입니다. 많은 공동체는 "회개와 용서를 구하는 기도들"로 번역되는 '슬리호트'(סְלִיחוֹת, Selīḥōt, “용서의 기도들/참회 기도문”)를 더합니다. '슬리호트'는 죄책을 과장하기 위한 주문이 아니라, 마음의 각질을 벗겨 내기 위한 은총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발걸음은 늘 당당함을 벗고 ‘겸비’라는 신발을 신습니다. 금식은 그 신발 끈을 다시 매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아니트 에스델'(תַּעֲנִיתאֶסְתֵּר, Taʿanít ʾEstēr, “에스더의 금식”)의 가장 고요한 중심은, “하나님이 숨어계신 듯한 시대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라는 확신입니다. 에스더서의 침묵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영적인 성숙함으로 인도합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찾는 법, 설명되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법,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도 공동체가 결속되어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을 가르칩니다. 결국 '에스더의 금식'은 '푸림'(פּוּרִים, Pūrīm)의 전주곡입니다. 전주곡은 짧지만, 곡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금식의 하루가 가볍다면, 기쁨의 밤도 얄팍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낮아짐이 깊다면, 누리게 될 기쁨 역시 그만큼 더 깊어짐도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요?
'에스더 금식일'인 '타아니트 에스델'(תַּעֲנִית אֶסְתֵּר, Taʿanít ʾEstēr)은 우리에게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를 교훈합니다. 첫째, 숨겨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 둘째, 공동체적 회개와 연대의 영성, 셋째, 겸비함에서 비롯되는 담대함입니다. 이를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에스더 금식일'은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 않는 역사 속에서도 섭리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며 공동체가 금식으로 응답할 때,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됩니다. 이는 신앙이 감정적 확신이 아니라,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결단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 에스더는 홀로 기도하지 않고 “모든 유다인”을 모아 함께 금식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때의 금식은 개인의 경건을 넘어 공동체적 책임과 연대를 형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위기 앞에서 서로를 향해 마음을 모으고, 공동체 전체가 낮아지고 하나 될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시작되고, 궁극적 완성에 다다르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범이 됩니다. 이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사도 바울의 선포와 같이 우리의 신앙이 영웅 한 사람의 영성이 아니라, 공동체의 연합된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모범적 예시입니다.
셋째, 금식은 자기 비움이지만, 그 결과는 소극성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드러나는 가장 강력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낮아진 심령으로 금식한 뒤 왕 앞에 나아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담대함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겸비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금식을 통한 하나님 앞에서의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사명을 향한 완비된 영적 대비태세인 것입니다.
'메시아' 되시는 '예수아'께서는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 '에스더'의 본을 따라서 유대인의 회복을 위한 복음의 대업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복음에 빚진 자(롬 15:27)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한다면, 이러한 부르심에 선두로 나서는 일에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대도(중보)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쉬지 않으시는 언약의 하나님,
'타아니트 에스델'(תַּעֲנִית אֶסְתֵּר, Taʿanít ʾEstēr)의 겸비한 영으로 우리가 주 앞에 섭니다. 위기 속에서 금식하며 부르짖던 그날처럼, 오늘 전쟁과 불안, 상실과 분열 속에 서 있는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소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 하신 약속대로, 국경의 위협과 로켓의 공포, 인질과 포로의 눈물, 군인과 가족들의 떨림 위에 주의 손을 얹어 주소서.
분노가 복수로 번지지 않게 하시고, 정의가 잔혹으로 기울지 않게 하소서. “정의를 구하며 압제당하는 자를 도우라”(사 1:17) 하신 말씀처럼, 지혜롭고 정직한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공의와 자비가 입 맞추게 하소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증오와 반유대주의의 그늘 아래서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며, 교회가 침묵하지 않고 경청과 섬김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하신 음성이 오늘의 위로가 되게 하소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하신 명령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마른 뼈 같은 절망 위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며(겔 37:5),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는(겔 36:26) 주의 회복이 이스라엘과 온 열방 가운데 임하게 하소서. '타아니트 에스델'의 낮아짐이 우리를 교만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숨으신 듯 보일 때에도 일하시는 주의 섭리를 신뢰하게 하소서. 이스라엘과 그 이웃 가운데 정의와 자비가 함께 서는 평화를 허락하시고, 샬롬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메시아' 예수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맺음 말
'에스더 금식일'은 단순히 어둠의 하루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요 속에 구원의 빛을 준비하는 비장하고, 결의에 찬 아주 특별한 하루입니다. 배고픔 속에서 공동체는 자신을 낮추고, 침묵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믿음의 완성을 기다리는 하루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푸림'(פּוּרִים, Pūrīm, “제비들”)의 환희가 타오를 때, 그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것은 낮아짐을 통과한 기쁨, 눈물의 깊은 강을 지나온 영광스러운 환희 그 차제인 것입니다. 숨겨진 하나님, 그럼에도 여전히 놀라운 섭리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금식의 날에도, 잔치의 밤에도. 하나님께 영광!!! 할렐루야!!!
유대인 회복과 선교동원의 '길을 여는 사람들'(미 2ㅣ12-13)
김성수(Yochanan), 현정(Rebekah)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