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국가고객만족지수 1위'… 영진전문대의 신화(神話) 같은 설립자
최달곤
[최보식이 만난 사람]/조선일보 : 2012.02.20.
"이 학생들 '석두'라 부르진 말라… 여태 칭찬 한 번 받은 적 없다" “교수가 짜놓은 과목과 교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지 않으면 대학은 망하고 난 교도소行” 궁핍한 집안, 空軍서 기술 배워 ‘TV 라디오 학원’ 하다 학교 세워 기업이 주문하는 과목을 가르쳐
대구 영진전문대는 얼마 전 대학, 기업, 호텔, 공공기관까지 포함된 ‘국가고객만족지수’ 조사에서 전체 1위를 했다. 전문대학 부문에서는 이미 10년 연속 1위를 지켜왔다.
“설립(1977년) 초에는 학생을 모집하느라 고등학교를 찾아가 원서 한 장당 30만원, 40만원씩 주곤 했습니다. 그때 입학 정원이 1000명도 안 됐는데도 36%밖에 못 채웠어요. 전문대 후기였으니 학생 수준은 최하위였지요.
그렇게 모집해놓아도 다른 전문대에서 편입 공고를 내면 그쪽으로 빠져나갑니다. 다른 전문대 학장을 찾아가 ‘제발 편입공고 내지 마이소. 술 사겠으니 좀 봐주이소’ 간청했지만…편입공고는 그대로 나오데요.”
◀ 1977년 전문대 설립 후 학도호국단 창단 때.
‘주문식 교육’ 신화(神話)를 만든 영진전문대의 설립자인 최달곤(76)씨는 점심 밥상 앞에서 먹는 걸 잊은 듯했다.
당초 그는 “바깥에 얼굴을 내밀기가 그렇습니다. 진작에 초야(草野)에 묻혀 삽니다. 대학 업무도 보고받지 않습니다. 온갖 병(病)치레를 하고 있심더. 한 번만 좀 봐주이소”라는 말로 만나길 피해왔다. 몇 차례 통화가 있은 뒤 만나니 언성도 높았고, 무엇보다 대학 얘기만 나오면 기운이 뻗는 듯했다.
“2년제 전문대에서 바랄 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서울대 교수 될 인재를 키웁니까. 취직이지요. 그걸 못 하면 학생들을 붙들어놓고 졸업장 팔아먹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게 사회와 국가를 위하는 겁니다. 직장 없으면 결혼도 못하는 세월 아닙니까.”
한때 ‘존재’ 자체가 없었던 이 대학의 작년 졸업생 취업률은 78.2%였다. 4년제 대졸자에게도 문턱이 높은 삼성전자, LG, 두산, 하이닉스반도체 등에 쑥쑥 입사한다. 소프트뱅크 등 일본 현지 기업에도 24명이 면접을 봐 22명이 합격했다.
“기업에서 대학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도대체 대학에서 뭘 가르쳤나. 기업에서 써먹으려면 다시 교육시켜야 한다’고 불평했지요. 그런 말을 듣고서 ‘당신들이 요구하는 대로 가르쳐주면 될 것 아니냐’ 했지만, 실행에 옮긴 학교가 없어요. 정말 우리가 ‘주문식 교육’을 시작하자 다들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왜 기적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어떻게 교수님들이 짜놓은 교과목과 교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 있었느냐, 그게 기적이라는 겁니다.”
―글쎄, 왜 기적입니까?
“자신이 쓰던 전공 교재 대신 기업이 주문하는 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니까요. 자기 밥그릇과 관련있는데 누가 양보합니까. 처음 10년 동안 시끄러웠죠.”
―교수들의 기득권과 싸웠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겁니다. 가령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6개월만 되면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됩니다. 학교에서는 컴퓨터가 도입돼도 주판과 타자 과목을 없애지 못했어요. 담당 교수가 ‘타자를 연습하면 컴퓨터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버팁니다.
‘공장에서는 동남아 노동자들이 주물과 용접일을 도맡아 하고 있으니 그 과목을 없애자’고 하면, ‘이건 기초 필수과목이라 꼭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는 식이지요. 개설 과목은 계속 늘어나지만 기업에서 원하는 것을 학생들이 못 배우는 겁니다.”
―무엇을 가르치라고 주문하면 교수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것 같은데요.
“자신이 대학원에서 쓰던 교재를 그대로 전문대 학생에게 가르쳐요. 2년 만에 수준 낮은 학생에게 그걸 가르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미적분·인수분해에 학생들이 다 나가떨어져요. 수학 하나 안 가르쳐도 다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데. 교수님들은 자신이 만든 커리큘럼을 양보하지 않아요. 그 때문에 옥신각신한 거죠.”
―최 선생님의 스타일을 보니 말 안 듣는 교수들을 많이 잘랐을 것 같군요.
“성질대로 하면 만날 싸웁니다. 제 말 안 듣는다고 자른 적은 없어요.”
―칼바람을 일으키지 않고 가능했다는 뜻입니까?
“10년간 잔소리하고 술시중 들고 설득해서 이뤄낸 것이지요. 80년대 말이 되면서 대학 운영이 어려웠어요. 내가 교수님들을 모아놓고 선언 비슷하게 말했어요. ‘이대로는 더 이상 존속 못한다.
어차피 세월이 갈수록 학생 수는 모자라게 돼 있다. 학교는 부도날 게 뻔하다. 몇몇 능력있는 교수님은 다른 자리를 구할지 모르나 대부분은 집에서 아이나 돌봐야 될 것이다. 나는 부도낸 책임으로 교도소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살려면 기업이 요구하는 교육을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기득권을 양보받은 게 혁명(革命)이지요.”
―지금은 기업에서 주문하는 과목만 가르칩니까?
“계열별로 전공코스를 개설합니다. 기업에서 주문이 오면 가르치고, 주문이 없으면 개설 코스가 폐기됩니다. 우리 교수님이 해당기업에서 합숙 연수를 받고 와서 가르칩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아침에 취직하면 오후부터 업무가 가능합니다.”
―누군가가 기업에서 주문을 따와야 하지 않습니까?
“교수님들이 안 했습니까.”
―교수들이 기업에 주문을 받으러 다녀야 한다는 뜻인데.
“2004년 ‘구미공단 200억달러 수출 기념’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왔어요. 그 자리에 초청을 받았는데, 노 대통령이 ‘누가 주문을 따옵니까?’ 바로 그 질문을 했어요. 그러자 한 참석자가 ‘영진전문대 교수들은 대한민국에서 최고 혹사당한다’고 했어요.”
'주문식 교육'을 도입한 최달곤 설립자는“대구에선 최 아무개가 잠자는 교수들을 깨웠다고 한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
―상식적으로 그럴 것 같군요.
“우리 교수님들 불평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최 선생님의 생각일 테고요.(웃음)
“아닙니다. 바로 그해에 우리 학생 121명이 삼성전자에 입사했어요. 공부 못해서 전문대학에 들어온 학생이 최고의 대기업에 들어간 것은, 조상묘를 잘 써서도 아니고 부모가 교육 잘 시켜서 된 것도 아니지요.
교수님들이 잘 가르쳐준 덕분 아닙니까. 이게 교수님의 보람이지, 뭐가 보람입니까. 우리 학교에 학생들이 서로 들어오려고 하지. 다른 지방대에서는 교수들이 사표 써놓고 고등학교로 학생들을 모집하러 다닙니다. 그거야말로 진짜 혹사당하는 거지요.”
―수준 낮은 전문대로는 기업에 ‘주문’을 따오는 것 자체가 어려울 텐데요.
“학교 인지도도 없지, 그래서 오래 고생한 겁니다. 처음엔 대구 지역의 중소기업에서 받았지요. 주문해놓고 채용을 안 해주기 일쑤였어요. 그렇게 양성된 학생들이 서울로 간 겁니다. 당시 기계설계 분야에서 ‘영진 출신이 최고’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어요. 2003년 하이닉스에서 우리 학생들의 수준을 듣고 40명을 채용했습니다. 그때 물꼬가 터진 겁니다.”
―주문식 교육을 해도 학생들이 따라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교수님들을 임용할 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석두나 머저리라는 말은 금물이다. 이 아이들은 자기 집에서나 학교 선생님한테도 칭찬 한 번 못 받았을 것이다. 정말 열의를 갖고 쉽게 가르치면, 학생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바뀔 수 있다’라고요.”
―교수들이 강의하는 것을 캠코더로 찍어 감시했다면서요?
“(낯을 붉히며) 자기 강의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보라는 겁니다. 자극받는 것 아닙니까. 끝까지 안 하겠다는 교수는 내버려뒀어예.”
―요즘에야 교수들이 자신의 강의를 동영상으로 올리는 게 유행이지만, 그때는….
“아 요즘에는 다 찍습니까? 대구에서는 ‘최 아무개가 잠자는 교수를 깨웠다’고 합니다. 나는 체면불구하고 강의실에도 한 번씩 들어갑니다. 어떻게 가르치나 보려고. 강의 내내 자기가 본 영화 얘기만 하는 교수, 칠판에 글씨만 적다가 끝내는 교수도 있고, 별별 교수 다 있습니다.”
―교권 침해라고 항의는 안 받았나요?
“학교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게 우선이니까요. 당시 환등기를 사줘도 사용도 안 해요. 교수라면 가르치는 방법을 알아야지. 나중에는 현장 실무 경력이 있는 사람만을 교수로 채용했어요.”
―최 선생님의 기준에 못 드는 교수는 어떻게 합니까?
“교수 평가도 우리 학교가 제일 먼저 했어요. 반발이 심했죠. ‘잘 가르치는지 못 가르치는지 학생들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느냐.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자. 대신 공개는 안 한다’고 했어요.”
―교수 간에 연봉 차이가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성과급으로 8억원을 떼놨어요. 우리 내부에서 평가하면 승복을 잘 안 합니다. 외부평가기관에 의뢰했어요. 그 점수를 잘 받으면 몰아주는 식으로 했어요. 하지만 청와대에 투서하는 교수도 있었어요. 학교도 정권과 사회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어, 그 뒤로는 ‘신바람 격려금’ ‘표창금’으로 줍니다. ”
―대학이 단지 기술만 가르치는 학원이냐 하는 비판도 있었지요.
“한때 주문식 교육을 해서 완전히 ‘왕따’당했어요. 다른 대학 교수들이 ‘이게 문제고 저게 잘못됐다’고들 했어요. 전부 장점만 있는 게 어딨습니까.”
―교양이나 인성 교육이 함께 이뤄져야 하지 않습니까?
“학생들을 의자에 앉혀놓고 아무리 윤리 교육을 시킨들 아무 변화가 없어요. 내가 학과장들에게 ‘계열별로 인사 잘하는 걸 경쟁시켜라’고 했어요. 학생간부들에게는 ‘놀고 마시는 수련회 대신 가나안농군학교 입소 체험이 어떠냐. 경비가 더 많이 들더라도 남는 것을 해봐라’고 제의했어요. 반응이 좋아 매년 하고 있습니다. 윤리 도덕 과목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는 성장 과정의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너무 궁핍해 그 시절 속 자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부끄럽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나온 뒤로는 학교를 제대로 다닌 적이 없었다. 학업을 여러 번 중단하고 잇곤 했다고 한다. 지붕을 이을 짚이 없어 비 오면 방안에 비가 줄줄 샜다는 상황만 말하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공군에 입대해 레이더 분야의 기술을 배웠다. 군에서도 무슨 시험을 치면 1등이었다고 한다. 군 시절 미국 연수 시험에 합격해 미공군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6년간 군생활을 한 뒤 중사로 전역했다. 37만원의 전역금을 받았다. 그 돈으로 대구에서 ‘TV 라디오 학원’을 차렸다.
“TV와 라디오를 만들고 수리하는 것을 가르쳤어요. 그때는 고급기술이었어요. 내 강의가 소문나면서 돈을 많이 벌었지요. 건물도 지었고. 학원을 운영하면서 찔끔찔끔 내 학업을 계속 했어요.”
―학원에서 돈을 많이 벌었으면 됐지, 왜 대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까?
“학원을 하면 ‘장사’라고 했지 교육이라고 봐줬습니까. 장사꾼이라는 낙인을 떼고 싶었어요. 정말 내가 만들고 싶은 학교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부와 사회는 규정대로만 하라는 주문뿐입니다. 마치 버스에 써붙여놓은 ‘오늘도 무사히’처럼 말이죠.” 그는 2008년 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한 교육관료에게 ‘회식비’를 건넨 일이 문제가 돼 그가 책임을 졌다.
“나는 남의 돈 떼먹어본 적 없고, 외상 술도 안 마셨어요. 정치인이나 관리들에게 인사를 안 해 ‘별종’ 소리를 들었는데…. 아이고 부끄럽지요. 대학에서 물러났을 때 이미 온몸에 병이 들었어요. 녹내장, 척수염 수술을 받았고.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을 아무도 안 만났어요. 요즘도 집안에서만 지내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