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품/ 박미라 시인
수상작
전조 증상 외 4편
벽지 안쪽 가득 곰팡이가 피었다는 은밀한 말씀 듣는다
어쩌자고, 피었다는 말은 여기서도 환한가
그러니까 곰팡이꽃이 피어 번지고 번져서 벽에 가득하다는
그 집에는
곰팡이도 피고, 검버섯도 피고, 시름도 피고, 마침내 고독까지 우거져서
꽃그늘 아래 홀로,
하마 들릴까, 웃자란 귓바퀴를 창틀에 걸어 두었는데
저 물속 같은 혼자가 놀랄까, 세상이 모두 까치발로 지나가더라고
도대체 이 꽃소식을 어떤 꽃나무에 걸어야 하나
동굴
아주 어릴 적에 빈 항아리 속에 내 목소리를 가두며 놀았는데 그때 몇 마리 풀거미가 항아리를 빠져나갔는데
내가 빈 항아리처럼 텅텅 비었을 때 하늘 쪽으로 우우우우 빈 울음을 내보내다가 빈 항아리네, 툭툭 치면서 지나가거나 까닭 없이 휙 돌려보는 손이 있을 때면 풀거미 생각이 나곤 했는데
그렇게 떠난 풀거미를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눌러살 것도 아니면서 항아리 가득 목소리를 가두던 그 일은 미안하게 되었다고 혼자서 중얼거려 보기도 하는데
바늘 끝만큼도 빈틈없이 쟁여둔 목소리가 자꾸 가랑비 소리를 흉내 내는데
내 저장 강박의 품목은 하나뿐이지만 그만하면 비루하게 산 것은 아니어서
이미 있는 것들을 없다고 여기거나 내 것이라고 우기면서
동굴 속에서도 고슬고슬 마르는 적막에 손을 적신다
나비 촛대
불에서 태어난 나비가 촛불에 앉았다
이미 나비가 되었으므로, 더 무엇을 빌어야 하나, 궁리 깊은 듯한데
우선은 제 몫의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이번 생에서는 접지 않을 날개를 탁본 중이다
달아오른다고 모두 타오르는 것은 아닐 테지만
사실은 세상이 눈치채지 못할 날갯짓으로 촛불은 일렁이고 어쩌면 좋겠느냐고, 함께 흔들리는 창밖 오동나무 그림자에게 언제고 한 번은 네게 날아가 앉아보겠다고 없는 입술을 깨무는 나비를
굳이 믿고 싶어진다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을 옮겨 적은 죄를 묻겠다는 것인가 흔들리는 촛불이 뜨거운 나비를 운다
빗소리 외전
빗소리를 흠모하여, 푸른 이파리들을 내 귀로 삼았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맨 처음이 하늘이거나 마음이었다면
오리나무 밑을 뛰어가던 숨소리와 콩 튀듯 다급한 빗소리가 같은 목소리인 걸 알아들을 것이다
얼마나 멀고 깊은 길을 지나왔는지 소리의 격론이 어떻게 바다에 이르는지
없는 길을 더듬거나 제가 제게 침수당하다가도
마침내 고요해지는 것은 잦아든 것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바다도 가끔씩 크게 뒤집힌다
빗소리와 아무 연고 없는 나도 수시로 뒤집힌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 그렇게 살 걸 그랬나?
나사論
볼트와 너트’를 ‘나사’라고 일러줬다. 뭐든지 다 알고 뭐든지 다 알게 했다. 우산도 없이, 과꽃 모종을 들고 나서며 메밀 싹 같은 이슬비를 웃었다, 세상이 떠넘긴 여러 개의 대명사를 지녔으므로 수시로 비틀댔다.
틈만 나면 나사를 조이고 다녔다. 부엌에도 창문에도 내 종아리에도 나사가 박혀 있었다. 가장 많은 나사를 조이고 조인 그이의 몸에서는 입을 틀어막은 어떤 것들이 불씨를 사르거나 탁탁 터졌다. 사르다가 만 불씨에 그을려 사계절 내내 캄캄했다.
시난고난 견딘 과꽃이 환해지면 배실배실 웃고 다녔지만, 다섯 살에 보낸 어린 것이 별이 되었다는 건 믿지 않았다.
도대체 그 많은 나사를 조이고 갔으면서 아직도 남았는지, 오늘은 내 손목에 나사를 조인다.
이런, 그이가 두고 간 손이 내 손목에 달려 있었다.
왜 자꾸 헐거워지나?
수상소감
나의 날들은 늘 뜻밖이었다
아름다움과 처연함의 교집합 속에서 솟구치는 멀미를 기꺼이 감당했다
이미, 들켜버린 것들을 다시 들춰보는 손이 계셔서 오늘은 나의 누추가 한결 환하다
지금은 서쪽을 바라고 걷는 중이지만 노을을 탐하지는 않겠다 어둠이야 늘 저 혼자 깊었으니까 그러려니 웃겠다
저이들이 모두 나의 벗이고 꽃이고 길이다 마침내, 울타리이다
바람의 길을 열어두고 오래, 망연히, 빗소리 듣는다 누군가 멀어지는 소리이다 흘러간다는 전갈이다
나는 또 버릇처럼 먼 이름을 부를 것이다
박미라 약력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비 긋는 저녁에 도착할 수 있을까?』(2020아르코문학창작기금) 『울음을 불러내어 밤새 놀았다』(충남문화재단창작지원금) 『이것은 어떤 감옥의 평면도이다』(충남문화재단창작지원금) 『우리 집에 왜 왔니?』(2015.우수도서선정) 『안개 부족』(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산문집 『유랑의 뼈를 수습하다』(충남문화재단창작지원금) 『그리운 것은 곁에 있다』 수상 대전일보문학상 본상. 충남시인협회상 본상. 서귀포문학상 대상. 천안문학상, 제18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現)나사렛대학교 평생교육원 출강.
이메일 matar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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