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49
2월27일 [연중 제8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kAxqS_MKxk (배존희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3218462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시선을 보내면서, 이웃들을 바라보는 제 시선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모릅니다. 제가 공동 기도 시간에 참여하지 못할 때는 피치 못할 사목상의 이유라고 스스로를 두둔합니다. 형제가 공동 기도 시간에 참여하지 못할 때는 영적 생활에 우선권을 두는 노력이 부족하다, 수도 정신이 형편없다고 야단을 칩니다. 이런 오늘 제게 건네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복음 6장 41~42절)
참 인간이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 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누구나 세상 앞에서 지도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쇄신, 쉼 없는 자기 계발과 자기 연마는 지도자인 우리에게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강론글 낭독)
https://www.youtube.com/watch?v=krQS-l8k4nI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xHv65z3ZrSI
++++++++++++++++++
<눈먼 인도자를 분별하는 손쉬운 방법>
오늘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당신 제자들을 심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에 불행하다고 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심판하지 말고 기도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며 오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는데, 바로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이웃의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바리사이들이 눈먼 인도자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는 이들이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루카복음 6장의 줄거리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인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다 인도자들이 알려준 것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나를 인도해주는 인도자가 ‘자아’입니다. 자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줘도 되고 아니 입히며 살아야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라는 인도자는 그러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니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아이는 갈등을 느끼지 못합니다. 힘이 들기는 하지만 부모와 함께 머무는 행복을 위해 자아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게 두 발로 일어서고 말도 할 줄 알고 형제를 위할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가면 상황이 바뀝니다. 세상은 다시 자아의 인도를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남을 이기는 사람이 되고 약탈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경쟁’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많은 부모도 처음에는 자아와 싸우게 만드는 인도자였다가 이쯤 되면 다시 자아와 세상의 인도를 받는 자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아이는 다시 돈을 좋아하고 이웃을 심판하는 약탈자가 되어갑니다. 부모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눈먼 인도자로 머물게 됩니다. 나중엔 약탈자가 된 자녀에게 약탈당하는 부모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약탈자를 많이 양산하는 사회에서는 노인 빈곤율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바이킹스’에서 바이킹을 세계 최고의 약탈자로 이끌었던 그들 나름의 위대한 인도자가 나옵니다. 라그나 로스브로크라는 실제 인물입니다. 척박한 땅에서 인구가 불어나자 어쩔 수 없이 남을 약탈하며 살아야 했던 스칸디나비아반도 북 게르만족은 엄청난 몸의 크기와 싸움에 누구보다 특화되어 전 유럽의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약탈과 몰살이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아들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아버지의 명맥을 잇습니다. 모두가 약탈자가 되고 또 모두가 아버지와 같이 안 좋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라그나 로스브로크는 결국 자녀들에게도 버려져 뱀 굴에 던져져 죽습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약탈자로 키운 잘못된 부모의 결말입니다.
여기에 라그나의 형제 롤로가 나옵니다. 라그나가 이젠 약탈을 넘어서 세계 정복을 꿈꿀 때 그는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형을 따라 싸움을 하기는 하였지만 기회만 있으면 그냥 싸우지 않고 살고 싶었습니다. 라그나가 영국을 넘어 이제 프랑스까지 점령하려고 하자 롤로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성벽이 너무 높아 점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그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주력 부대를 파리 외곽에 두고 자신은 자신의 빼앗긴 땅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때 파리의 왕이 롤로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입니다. 롤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딸과 혼인시킨 것입니다. 공주는 처음엔 완강히 거부했지만 롤로가 자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라그나로부터 자신들의 나라를 보호해 줄 인물이 될 것을 믿었기에 결국엔 대의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라그나는 동생에게 분노하여 모든 병력을 이끌고 롤로가 왕으로 있는 노르망디로 쳐들어옵니다. 바이킹의 전술을 전부 알고 있는 롤로는 프랑크 왕국을 위해 싸웁니다. 그리고 그들을 물리칩니다.
자신의 동족을 배반하면서까지 프랑크 왕국을 지키려 했던 롤로, 그리고 끝없는 정복의 야욕을 불태웠던 라그나. 누구의 삶이 옳았다고 보아야 할까요? 바이킹스 시리즈에서는 라그나 로스브로크가 주인공이어서 롤로가 배신자로 묘사되고는 있으나 종말은 롤로의 승리입니다. 라그나는 자녀들에게도 버려지고 독사굴에 떨어져 죽지만 롤로는 끝까지 승승장구합니다. 그리고 다른 바이킹들에게도 비옥한 땅에 정착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약탈자로 사는 삶을 선택합니다.
약탈한다는 말은 남을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양심상 사람을 착하게 보고 그 사람을 약탈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힘들다고 판단을 해야 남을 약탈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밟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내 사랑하는 부모나 형제들이라고 여긴다면 경쟁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아와 세상은 사람들을 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아우슈비츠에서 독일 병사들이 수많은 유대인을 죽이려면 일단 그들의 양심의 가책을 줄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판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수치와 모욕, 그리고 먹을 것 하나 때문에 개처럼 되게 만들었습니다. 변을 함부로 볼 수 없게 만들어 자신들이 식량을 배급받는 통에 변을 보고 또 그것을 씻어 음식을 타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먹을 것으로 서로 싸우게 만들어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비슷하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을 약탈하고 죽일 때 양심의 가책이 적습니다.
히틀러와 같은 이런 인도자 밑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이끈 사람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을까요? 마지막 때 누구도 그를 목숨 걸고 지켜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을 개로 본다면 언제든 자신도 개로 볼 수 있는 이들이 자신들이 키운 군사들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은 언제든 자신도 판단할 수 있는 자녀가 된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경쟁시켜서 성공하게 만들다가 결국 부모도 자녀들에게 밟히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프랑크 왕국의 왕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는 바이킹을 자신의 아름다운 딸과 혼인시켰습니다. 그리고 더는 다른 사람을 약탈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비록 상대가 자신을 약탈하는 종족일지라도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자신과 같은 풍요로운 땅에서는 변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아끼는 딸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롤로는 변했습니다. 그리고 롤로 덕분에 바이킹에 자신의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의 인도자입니다. 내가 먼저 남을 심판할 수 없는 땅에 살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입니다. 내가 에덴동산에서 풍요롭게 산다면 남을 경쟁자로 인식하고 그래서 남을 판단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남을 나처럼 이끌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자녀들도 그런 사람이 되고 나의 미래도 구덩이로 빠지지 않습니다.
바리사이와 같은 인도자들이 되지 맙시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바이킹이 되었고 그들을 따르던 이들도 구덩이로 다 빠졌습니다. 모든 죄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은 탐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 살며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도 이름을 지어줄 대상들입니다. 우리가 좋은 인도자가 되어 내가 에덴동산에 사는 태초의 아담과 하와임을 증명합시다. 좋은 인도자는 이웃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지난 주일에 우리는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그가 하느님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의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것에 대해 들었다. 오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행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자신을 열어 보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나누는 도구 중 하나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집회서에서는 말이 인격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사용하는 말이나 말씨야말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재는 저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속뜻을 드러내신 것이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말씀은 창조적인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인간을 해방할 수도 있고 구원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니 우리가 하는 말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늘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 루카 6,39-45: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온다.
오늘 복음은 평지설교의 결론 부분이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라 행동하라고 가르치신다.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며, 올바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쳐주는 것도 힘들다. ,먼저 자신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신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스승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은 큰 잘못을 범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남이 범하는 조그만 잘못도 참아주지 못하고 드러내려는 위선적인 면을 없애라고 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7)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다.
나무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잘 기른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절대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반대로 나쁜 나무는 즉, 손질을 받지 못한 나무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열매를 맺는다.(43절) 나무가 어떤지는 그 나무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아주 맛있는 무화과를 거둘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다(44절). 이제 이 비유는 사람에게 적용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착하다면 좋은 나무와 같이 자기 마음의 좋은 보물창고에서 선을 내어놓을 것이다. 반대로 악한 사람은 그의 마음의 악한 창고에서 오직 악만 흘러나올 것이다.(45절) 사실 인격을 나타내는 마음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통하여 말하게 되는 것이며, 선이나 악을 말한다면 그것은 각자 안에 담겨 있는 “창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입은 인격의 도구이며, 행위에 있어서 전 인격을 가리킨다. 이것은 긍정적일 수 있거나 파괴적일 수 있다.(45절) 그러므로 좋은 나뭇가지에 시간에 맞추어 붙어있으면서 좋은 나무를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자녀의 마음에 하느님 자신이 주시는 아주 귀한 보물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 있어서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제2독서: 1코린 15,54-58: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하라
사도 바오로는 부활의 희망이 주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때문에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은 헛되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닮고 또 잘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행하지 않고 사탄의 말에 그 마음을 빼앗긴 결과 죄를 짓게 되었다. 잘못된 말과 거짓된 말을 받아들여 표현한 것이 죄를 지었고 죽게 되었다. 우리 마음의 창고가 악으로 가득 차 있어 거기에서 거짓된 말이나, 잘못된 말을 꺼내게 되면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참된 좋은 말을 꺼내면 우리를 또 다른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사탄과 거짓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셨다. 이 거짓된 마음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마음에서 좋은 것을 꺼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할 때,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다. 그러기에 주님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이제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이라는 창고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재고조사를 해보자. 재고조사를 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더럽힐 수 있는 악한 것들은 모두 버리고 좋은 것들을 잘 정리하여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좋은 것을 꺼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 보자. 항상 좋은 열매를 꺼낼 수 있으려면 이러한 마음의 정리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을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의 창고에서 무엇을 꺼낼 수 있을까?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나 잘해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여기서 ‘눈먼 이’는 ‘영적으로 눈먼 이’, 즉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그 길로 가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자기가 먼저 그 길을 걸어가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 자신이 먼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구덩이’는 ‘멸망의 구덩이’입니다. 사실 ‘구원의 길’ 외에는 모두 멸망을 향해서 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5)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선교활동의 결과가 구원이 아니라 멸망이라면, 그 일은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뒤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4-17)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가서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10)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거나, 또는 교리를 가르쳐 줄 때에는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그대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덧붙여도 안 되고, 빼도 안 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1-42)
이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일이 연상됩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4) (여기서 ‘케파’는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안 먹은 척’을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 위선을 공개적으로 정면 비판했습니다.) 열두 사도가 아닌 사람이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 사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에 베드로 사도가, 또는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에게 “너나 잘해라.” 라는 반응을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오로 사도의 불같은 성격을 생각하면, 큰 싸움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너나 잘해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겸손하게 바오로 사도의 비판을 수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 실수를 누군가가 지적하고 비판할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바오로 사도는 언제 어디서든지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라고 말하는 ‘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어라.”라는 반박을 들을 각오를 하고서 그런 비판을 했을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잘못된 일인데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면, 또 모두가 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소심하게 지나친다면, 교회 공동체는, 또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루카 6,43-44)
이 말씀을 앞의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좋은 나무’는 눈 속에 들보가 없는 사람, 작은 티 하나라도 빼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나쁜 나무’는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나는 티 하나도 없다.”라고 큰소리치는 위선자들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신앙생활의 결과’, 또는 ‘선교활동의 결과’를 뜻합니다. ‘좋은 나무’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자기 자신도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나쁜 나무’는 그 자신도 구원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멸망’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
이 말씀은 ‘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말’과 ‘혀’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야고 3,2) 그런데 위선자들이 마음속의 ‘악’을 감추려고 ‘선한 말’을 하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그 식별 기준은 ‘삶’입니다. ‘선한 말’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한 삶’이 더 중요하고, ‘말’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1988년 한국천주교회는 ‘내 탓이오.’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당시 사회에 만연한 반목과 갈등 그리고 분열과 다툼은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못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자동차 뒤에 ‘내 탓이오’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천주교회에서 시작하였지만 언론과 방송에서도 소개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습니다. ‘내 탓이오.’라는 말은 미사를 시작하면서 사제가 신자들과 함께 죄를 고백하면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모든 허물과 잘못을 남에게 돌리기보다는 나의 허물과 잘못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이 하였나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가난한 세리가 겸손하게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며 바쳤던 기도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하느님께 바쳤던 기도와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밝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경제가 풍요로워지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부유한 나라에서도 폭력과 갈등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물질적인 풍요만으로는 메말라가는 감성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과 총기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로는 삶의 외로움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를 밝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서로를 향해서 마음을 열고 주고받는 ‘말 한 마디’입니다. 어떤 말이 있을 까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와 같은 말입니다. 간단하고,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아무나 하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서로의 감정에 큰 상처를 주는 말을 아주 쉽게 합니다. ‘당신의 잘못입니다.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왜 늘 그렇습니까? 잘 할 줄 아는 게 없네요.’와 같은 말입니다. 가족 간에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이웃 간에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면 고마울 일들이 생깁니다.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굳게 닫혔던 마음이 열리기 마련입니다. 가족 간에도 불평을 이야기하면 불평할 일들이 생깁니다. 이웃 간에도 비난의 화살을 쏘면 다툼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합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향기가 되어 가족과 이웃의 마음에 위로와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보좌신부 때입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본당 주임신부님께 많은 것을 배울 때였습니다. 용산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주일학교 교사 모임이 있어서 늦게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임신부님께서 문을 안에서 잠갔습니다. 밖에서는 열 수가 없어서 벨을 눌렀습니다. 주임신부님께서 문을 열어 주면서 ‘지금 몇 시야!’라고 하셨습니다. 늦어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신부님의 말씀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들어오라고 하셨으면, 늦은 이유를 물었으면 저는 자초지종 말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시계가 없어서 묻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지구 초등부 주일학교 지도신부를 맡았기 때문에 늦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도 나중에는 이해를 하셨습니다. 제기동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월요일에는 주임신부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늘 일찍 성당에 가서 조배를 했는데 한번은 미사에 조금 늦었습니다. 미사 후에 신부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임신부님께서 수녀님을 부르더니 말씀하였습니다. ‘조 신부가 늦을 사람이 아니니, 20분 전에도 나오지 않으면 미리 연락하세요.’ 저를 야단치지 않으시고, 저를 믿어주시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감사했고, 고마웠습니다. 주임신부가 되었을 때 저도 보좌신부님을 평가하고 비난하기 전에 먼저 들어주고 믿어주기로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티를 꺼낼 수 있다.” 신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내가 하지 못했던 선행을 하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지 못했던 자선을 베푸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힘겹게 투쟁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제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분들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내색 없이 차량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늘 함께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우리 눈의 들보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분들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분들입니다. 이제 곧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서 파릇파릇한 봄의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아무리 겨울이 추웠고, 길었다고 해도 봄의 기운은 이길 수 없고 그 봄의 기운은 대지 위에 생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남의 눈에 티를 바라보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고, 부당한 일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의 들보를 깨닫는 것은 더욱 지혜로운 일이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은 더욱 큰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곧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많이 했으면 합니다.
++++++++++++++++++
(2) 2월26일 토요일 묵상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면서 옆 본당에 있던 큰 텐트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다행히 신문사에 있는 차고는 눈의 무게를 잘 견디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지붕을 덮은 천막이 조금 아래로 쳐졌습니다. 신문사의 일을 도와주시는 형제님께서 지지대 사이에 줄을 매달아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다시 눈이 내렸지만 지지대를 보강해 주어서 차고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차고는 이번 겨울은 잘 견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차량에 컴퓨터가 내장 되어있습니다. 차량의 컴퓨터는 차에 이상이 있으면 신호를 보내줍니다. 색으로 알려줍니다. 당장 자동차 운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이상을 알려주는 적색 신호가 있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점검을 필요로 하는 황색 신호가 있습니다. 현재 주행 상태를 알려주는 녹색 신호가 있습니다. 자동차가 운전자에게 보내는 표시가 있습니다. 엔진오일을 갈 때를 알려줍니다. 타이어의 공기압 상태도 알려줍니다. 문이 닫히지 않은 것도 알려줍니다. 안전벨트 미착용 상태를 알려줍니다. 기름이 얼마 남았는지도 알려줍니다. 차선을 이탈하면 알려줍니다. 차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차가 알려주는 신호를 잘 살피면 운전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2013년 교구 성소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전임 신부님께서 컴퓨터에 ‘인수인계’ 자료를 남겨 주었습니다. 가장 큰 행사인 서품식과 성소주일에 대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매월 있는 성소후원회 미사와 성소후원회 지구장님들에 대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매주 있는 교구청 회의에 대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성소국에 필요한 재정에 대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예비신학생과 담당 신학생들에 대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남겨준 자료는 마치 보물 상자 같았습니다. 답답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열어보면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2018년 후임신부님께 인수인계 자료를 넘겨주고 떠났습니다. 2019년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로 왔습니다. 전임신부님께서 ‘인수인계’ 자료를 남겨주었습니다. 홍보를 많이 다니셔서 재정상태도 양호하였습니다. 신부님이 남겨준 보물 상자를 열어서 성지순례, 강의, 홍보를 야심차게 준비했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왔습니다. 5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1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2년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팬데믹의 강을 넘어가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도 후임 신부님께 ‘보물 상자’를 남겨 주고 가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신앙인에게 필요한 ‘보물 상자’를 이야기합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보물 상자는 ‘기도’입니다. 즐거운 사람에게 필요한 보물 상자는 찬양 노래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보물 상자는 교회의 원로들입니다. 원로들은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발라줍니다.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보물 상자는 기도와 찬양 그리고 교회와의 연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광주대교구 김용원 토마스 신부님]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
어떤 랍비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하고 나왔는데, 한 아이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그을음 하나 없이 깨끗했네. 두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었겠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물론 얼굴이 더러운 아이겠지요.”
랍비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지 않네.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얼굴이 깨끗한 아이를 보고 자기 얼굴도 깨끗한 줄 알고 씻지 않고, 얼굴이 깨끗한 아이는 얼굴이 더러운 아이를 보고 자기 얼굴도 더러울 거라 생각하고 얼굴을 씻었다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일부 인용한 것입니다. 상대방은 바로 자신의 내면의 거울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이 보이는 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에 상대방과 같은 단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단점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의 결점이 무엇인지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눈곱만큼도 참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신은 남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며 흉을 보고 비난하기를 일삼습니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으로부터는 늘 좋은 말만 들으려 하며 사는 것이 혹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요?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2)
자신 안에 더 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작은 결점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결점과 문제점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에 대해 험담하거나 뒷담화를 일삼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의 모습 속에는 그들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결점과 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은 바로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상대방을 비난하고 흉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백의 기도를 바치면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며 가슴을 칩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그렇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당에서는 내 탓이라고 하지만 성당 밖으로만 나가면 “네 탓이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제 탓이요”라는 기도를 입으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해야 하고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문제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사람도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어떤 사람도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멘!
=====================
[대전교구 김기범 본시아노 신부님]
<들보를 꺼내라>
맛있게 생선을 먹다가 그 가시가 목에 걸려본 적이 있을까요? 그 작은 가시를 빼낼 때까지는 심란하고 성가십니다. 내 마음 안에 들보가 걸려 있으면, 그걸 통해 이웃과 사물을 보게 되거든요. 따라서 이웃에게는 없는 티끌이, 내 안의 들보 때문에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내 안의 들보를 꺼냈는데, 오히려 이웃에게서 보이던 티끌이 감쪽같이 사라진 현상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웃에게서 ‘티끌’이 보이거든,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 ‘들보’를 들어내야겠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자유와 기쁨의 선물을 안겨 주는 격이지요. 내 안의 들보를 제거했다 해서, 이웃 사람의 티끌을 빼내 주겠다고 덤빌 일도 아닙니다. 이웃에게서 ‘티끌’은 쉽게 찾아낼 수 있지만, 아무리 작은 ‘티끌’이라도 뽑아내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이웃의 마음에서 천당을 보고, 이웃의 마음에서 꽃밭을 본다면, 이 또한 내 내면에 그 좋은 풍경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마주 앉은 이웃을 통해 눈부처처럼 반영되는 것이지요. 이웃과, 세상과,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그러려면 내 안의 들보를 빼내야 합니다.
‘한 부인이 자연을 묵상하며 산책을 나왔다. 그녀는 담장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는 황금색 호박을 보았다. 들의 끝에서 그녀는 크고 높이 솟아있는 참나무를 보았다. 그 부인은 참나무 밑에 앉아서 자연의 기이한 뒤틀림에 대하여 묵상했다. 왜 작은 상수리가 커다란 가지에 붙어있으며 커다란 호박이 작은 줄기에 매달려있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하느님이 창조 때 큰 실수를 하셨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작은 상수리는 작은 줄기에, 커다란 호박은 거대한 가지에 달려있게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그 부인은 늦은 가을의 햇볕을 쬐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작은 상수리가 그녀의 코를 맞고 튀어나갈 때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자신을 비웃으면서 이전의 생각을 고쳤다, 결국 하느님이 옳으셨다.’
잘 익은 호박을 따다가 상수리 나뭇가지에 매달고, 가을날 숲속에 떨어진 상수리를 주워 호박 줄기에 붙이다가 날 샙니다. 단단하게 잘 익은 호박이 높은 상수리 나뭇가지에서 콧등에 떨어져 깨지고 난 후에야, 아! 나의 ‘밖’은 최선이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더 늦기 전에, 내 마음의 ‘들보’를 꺼내면 될 일입니다.
=====================
[청주교구 이제현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님]
<내 눈의 들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집회 27,6) 교구의 어느 신부님께서 사제 수품 25주년을 맞으셨을 때 소회를 밝힌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 첫 마디는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과 동료 사제들, …….”로 다소 평범한 것이었지만, 선배만 있을 뿐 후배가 없는 그 첫 말씀에 참된 형제애를 간직해 온 삶의 품격이 느껴졌습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2)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보는 그분 마음이라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겉으로만 좋은 사람인 척하는 우리의 모습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 듯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들어보면 비난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을 우리 자신보다 더 깊이 신뢰하는 마음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말이든 사람이든 겉을 보고 판단하고, 쉽게 실망하거나 환호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속을 보시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바라는 갈망이 어떻게 열매 맺을 수 있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지적은 따끔하지만, 애써 피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을 때 복음적 삶의 열매는 영글게 됩니다. “주님,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이끌어주시고 교회가 자유로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소서.”(오늘 본기도)
미사의 ‘본기도’에는 그 주간의 삶의 주제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말 한 마디로 우리는 위선자로 살 수도 있지만, 미사 때 함께 기도한 것처럼 세상의 정의와 평화, 자유로운 섬김을 실천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이 아닌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들어내는 것부터 해 봅시다.
우리말로 ‘성찰’과 ‘실천’은 자음이 ‘ㅅㅊ’으로 같습니다. 내 눈의 들보를 들어내는 성찰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미사 시작할 때 모두 ‘제 탓이오.’라고 말했다면, 일상에서도 ‘제 탓이오.’라고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제 눈의 들보를 들어내는 삶은 자기 합리화의 굴레를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과 맺는 다양한 관계, 이웃을 수용하고, 공동체를 정의와 평화로 이끌어줍니다. 그래서 다원화된 세상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 중에서 무엇보다 형제애를 선택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코린토 1서 15,58)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연중 8주일입니다. 2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기승을 부리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옵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사순시기를 준비하면서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우리의 ‘혀’와 ‘눈’을 통해서 ‘마음’을 보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혀)에서 드러나고”(집회 27,4), “사람의 말(혀)은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낸다.”(집회27,6)고 말하며,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라고 말합니다. 또한 <복음>은 눈 속에 있는 ‘티’와 ‘들보’도 ‘마음의 곳간’에서 흘러나옴을 말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5)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찬미하오며, 우리의 ‘혀’가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시 92,3) 하고 <화답송>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마음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을 품으신 아버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1코린 15,57).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14-15)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1코린 15,58)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시 13,6) 하고 <영성체송>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실,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먼저 “눈 먼 스승의 비유”, 곧 제 눈에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형제 이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는 위선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앞 장면과 연결해 볼 때, 결국, ‘판단하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판단보다 앞서, 하느님의 “선의(호의,자애)의 마음”(헤세드)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
구약에서 ‘열매’는 주로 행동을 가리키고(이사 3,10;예레 17,10;21,14;호세 10,13), ‘나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거짓 열매를 맺고, 참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내지 못하고, 가시덤불이 포도를 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매’는 ‘혀와 눈’, 곧 ‘말과 판단’을 통해 드러나는 행실로, ‘나무’는 ‘마음의 곳간’으로 표현됩니다. 곧 ‘열매’는 우리의 입으로 하는 ‘말’과, 눈으로 하는 ‘판단’으로 드러납니다. 곧 ‘마음의 곳간’에 선한 것이 담겨 있는지 악한 것이 담겨 있는지에 따라 말과 판단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말과 판단의 곳간이요, ‘말과 판단’은 마음의 열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열매인 말과 판단을 보면, 나무인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 곧 ‘호의의 마음’을 품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과 판단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몸으로 하는 ‘실행’으로 드러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하면서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을 실행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셨고, 오늘 <복음>의 뒷 절에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라고 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의 ‘실행’이야말로 진정한 향기일 것입니다. 비록 홍수가 들이닥쳐도 떠내려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되게 하소서!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주님!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도 다른 이를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보는 것을 넘어 있는 보지 못함을 보게 하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제 눈의 들보를 빼내 주소서.
형제의 눈에서 티가 아닌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이미 선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하며 이미 주어진 선함을 잘 간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살아가면서 말은 청산유수인데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만 보고는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잘못은 크게 보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대단히 중대한 것일지라도 작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6,42)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철저한 자기성찰만이 우리에게 이웃의 잘못 앞에서 자비롭고 인정 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남의 허물을 보기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선함을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 ‘너나 잘해, 잘난 체 하지마’ 하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속으로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가 봅니다. 삶이 풍요롭지 못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헛소리요, 위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이 아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안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위선을 경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 앞에 서게 될 때 손발에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미게와 아기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미게가 아기게의 걷는 모습을 보니 걷는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미게가 말합니다. “제발 옆으로 걷지 마라.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라.”그러자 아기게가 말합니다. “네, 엄마. 그러면 엄마가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어미게는 “그래. 따라서 하렴”하고 걷는데 자꾸 옆으로 옆으로 걷습니다. 아기게가 뒤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었습니다. 교훈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부터 똑바로 살고, 똑바로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며 가슴을 펑펑 칩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용서를 할 수 있고 화해를 이루며 화목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남의 탓하지 않는 하루의 삶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맺음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 스승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잘살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아름다워지며 가슴을 여는 만큼 풍족해집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내 자신을 바꾸고 쇄신시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요?”“우선 네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부터 하여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는 이미 선한 곳간입니다.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분에 넘치지 않습니다. 선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을 잔 부스러기 같은 ‘티’와 일반 성인 크기의 배에 달하는 ‘들보’가 함께 비교되는 해학의 말씀 속에서, 우리네 인간의 타고난 기질이 엿보입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얻는 자기만족과 뿌듯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상대보다 우위에 서서 그의 단점을 고쳐 주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곤 합니다.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와 비슷한 말들을 얼마나 자주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그 비판적인 시선을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돌리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남을 지적할 때 들이대는 엄격한 잣대로 먼저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상주하고 있는 저에게 오늘 복음 말씀은 큰 묵상 거리로 다가옵니다. 신학생들을 지도하며 ‘진실해야 한다’, ‘성실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형제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등 다양한 요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생들의 잘못이나 단점이 보일 때면 어김없이 지적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이나 잣대가 나에게도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부끄럽게도 저 자신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한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누군가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에게 ‘본’(本)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상대방의 눈 속에 박힌 티를 빼내 주겠다고 신나게 소매를 걷어붙이기보다, 자기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빼내려는 노력을 상대방에게 보여 주는 것이 훨씬 감동적입니다. 회개는 그렇게 쌍방에서 함께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위선자!>
오늘 복음(루카6,39-45)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평지설교'로써,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과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눈먼 이', 곧 '위선자'는 율법의 세부규정은 강조하면서도 율법 안에 담긴 참뜻(본질)을 저버린 '바리사이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본질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저버리고, 오직 율법의 형식만 중요하게 여긴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먼저 '나의 이런 위선을 씻어 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 '내가 먼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내 마음의 밭을 잘 살피고 가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3.45)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집회27,4)
내 마음 안에서 '무엇이' 흘러넘치고 있는가?
내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가?
너를 살리는 '선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가?
아니면, 너를 죽이는 '악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상스러운 말, 험한 말을 하거나, 너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띠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6,42)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풍성한 나뭇잎과 더불어 최대 15m까지 성장하는 만치닐 나무라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바람을 막는 방풍림으로 해변 도시에 널리 심겨 있으며, 단단하고 조밀해서 배나 가구를 만드는 데 이용됩니다. 특별히 이 나무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사과 모양의 작은 열매를 만드는데, 이 열매가 아주 위험합니다.
너무나 달콤한 향기에 먹어도 되는 과일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의 맹독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향기가 난다고 덥석 물었다가는 큰일이 나는 만치닐 나무처럼, 우리 곁에도 달콤한 향기로 유혹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돈, 지위, 명예… 등으로 욕심과 이기심을 통해 물고 싶게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제로 순간의 만족을 가져오지만 이로 인해 소중한 만남이 깨지면서 더 나쁜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 때가 참 많습니다.
아마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것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고, 실제로 당첨이 되면 정말로 기쁠 것입니다. 그런데 당첨된 사람들의 말미는 대부분 불행과 연결됩니다. 돈 때문에 형제간의 우애가 깨지게 되고, 자신의 욕심만을 부리다가 처음보다 더 나쁜 상황에 부닥쳐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향기로운 ‘돈’이 내게 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유혹이 참으로 많은 세상입니다. 이 죄의 유혹에 쉽게 그리고 자주 넘어가게 되면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열매도 당연히 맺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올바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나쁜 나무에서 생산하는 나쁜 열매가 남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마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해서 주님의 뜻보다 죄의 유혹에 계속 넘어가는 우리를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의 승리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코린 15,57 참조) 유혹은 언제나 경계하고 이길 수 없다면 피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우리는 아닐까요?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패배보다 승리 때문에 몰락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승리를 좇기보다는 하늘 나라에서 승리를 좇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내가 보는 너가 전부일까? 내가 보는 하느님이 전부일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문제는 스스로 본다고 착각하며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심리적, 영적 장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너, 우리가 보는 나, 우리가 보는 하느님은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나와 너, 그리고 하느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자신만 바라보며, 혹은 다른 사람만 바라보며, 예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우리 마음의 어둠과 죄를 주님께 봉헌하며 그분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이 전부일까요?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을까요? 가령 우리 인간이 잘 본다고 하면 시력이 2.0 정도 된다면 타조의 시력은 25.0으로 10-20km 밖의 물체도 선명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먼 것을 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늘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지구는 산과 바다, 울퉁불퉁하고 저 높이 구름도 있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우주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 그저 둥근 원의 모습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마스크를 하며 거리두기의 삶을 사는 것은 직접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현미경으로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우리의 건강을 헤치고 목숨까지도 죽일 수 있는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릇된 믿음이나 신념 때문에 마음의 눈이 멀어 잘못된 길로 가는 경우도 참 많이 보아 왔습니다. 히틀러의 잘못된 인도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죽였습니다. 공산주의가 이론적으로는 자본주의보다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인간의 소유욕이라는 본능을 간과했기에 많은 이들을 눈멀게 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결국 중요한 것은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의식의 변화라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변화되지 않습니다.
2000년 전에도 사랑을 외치며 목숨바쳐 인간을 구하고자 몸소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사람들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 속에는 하느님께 아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멀어 있던 그들은 하느님을 죽이고 맙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 부활한 예수님은 우리 곁에 나타나셨고 우리는 그분을 알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가질 때 우리는 그분이 바로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사랑을 넘어 너를 위해 나를 내어 놓는 사랑을 하면 할수록 그분은 우리 가운데 더욱더 성장하고 자라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우리가 눈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마음의 눈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때때로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산의 앞면만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산의 뒷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너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와 잠재된 사랑의 마음까지 바라보며 마음의 눈으로 어루만져 주고, 영의 눈으로 거룩함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더 가지고 더 누리는 사람만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더 나누고 더 낮아지기를 바라보며 더 큰 사랑으로 들어가려는 이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도해 주는 이도 있습니다. 자신만 바라보기를 바라며 사랑에 집착하는 초보적 단계에 머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함께 더 큰 사랑의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초대하는 이도 있습니다. 내어 주는 사랑이 없는 사랑은 결국 서로를 질식시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며 서로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눈 먼이가 눈 먼이를 인도할 수 없다고 하신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나는 지금, 우리는 지금 과연 눈을 뜨고 있는가? 과연 제대로 보고 있는가?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저 자신도 사람들을 제대로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있는가?" 반성하게 됩니다.
타고난 시력 장애인이있는가 하면 우리 주변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의 눈이 먼 사람, 영적인 눈이 먼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런 종류의 눈 먼이들을 바라보면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만 바라보려고 하기에 다른 것은 보지 못합니다. 현세의 삶만을 바라보기에 내세의 참된 행복에 대해 눈 멀어 있습니다. 재물, 웰빙, 건강, 사회적 존경과 인정 등만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애벌레가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때로는 자아에 집착하고 있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인정 받고, 사랑받고, 존중 받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을 그렇게 해 주지 못할 때도 많고,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렇게 해 주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화내고 무시당하고 상처받았다고 호소합니다.
결국 문제는 마음의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며,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는 눈을 뜨고 있다고 스스로 교만해져서 또 다른 어둠이 찾아 왔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들보와 같은 어둠과 상처, 미움과 증오를 치워내고 자신의 내면을 먼저 들여 다 보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을 예수님께 내어 보여 드리며 치유와 용서와 사랑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인도할 수 없는 사람이며 우리는 그저 예수님께로 가야만 하는 장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영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을 살고 계신 예수님을 깨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분이 깨어나게 하는 길은 바로 사랑, 이기적이고 집착하는 사랑이 아니라, 나를 넘어 너를 위해 나를 내어 놓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하게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오늘도 나와 너를 바라보면 모두가 이쁘고 멋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지금 여기 계신,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처럼 말입니다. (스마일^^)
오늘도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을 볼 수도 없는 장님임을 인정하며,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예수님의 사랑의 눈을 가지기를 청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고요히 그분 곁에 머무는 우리가 되시길 빕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 마음정화, 자기인식, 예수사랑 -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92,2-3)
미사중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이런 하느님 찬미와 더불어 순조롭게 전개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매일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합리적 소통, 결정에 움직이는 사회, 예언이 아닌 주술은 ‘죄’다.”
어제 한겨레 신문 <토요기획> 10면, 단테 서거 700주기 기사중 머릿 말이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내용도 의미심장합니다.
‘단테의 신곡을 구성하는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끝구절은 모두 “별(stella)”이라는 단어를 품고 있다. 지옥에서는 별을 그리며, 연옥에서는 별을 올려다보며, 천국에서는 별과 함께 단테는 길을 만들어갔다.’
새삼 지옥과 연옥, 천국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됨을 봅니다. 별이신 그리스도 없이 지내는 곳이 지옥이고, 별이신 그리스도를 올려다 보며 지내는 곳이 연옥이고, 별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내며 살아가는 지금 여기가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새삼 지옥, 연옥, 천국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사막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부부간의 익어가는 관계를 “열정熱情, 애정愛情, 우정友情, 동정同情”의 과정으로 정의한 대목이 깊은 공감을 주었습니다. 명시적 하느님 믿음 없이도 양심 따라 나름대로 바르게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참 다양한 고유의 소중한 인생임을 깨닫게 한 “책(최민희:아버지)”이었습니다. 책 후반에 나오는 인상적인 일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최민희 의원’을 처음 본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를 처음 본 순간 그는 내게 ‘어머! 눈이 참 맑다’라고 했다. 그날로 채용이 되었다. 생전 처음 들어본 ‘눈이 맑다’라는 말도 놀라웠지만 내가 채용되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최민희 의원과 함께 하고 있다.”
눈은 목소리와 더불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눈빛이나 눈길을, 음성을 들으면 그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와닿습니다. 이어지는 에필로그 끝부분 내용입니다.
“정말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새옹지마의 가르침과 인지상정의 냉혹함을 배웠다. 지치지 말기, 포기하지 말기, 끝까지 함께 하기, 그리고 애정하며 버티기, 나는 우리 아버지의 딸이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배웁니다. 어제는 33년 만에(1989년 방문) 수도원을 찾아 피정 온 자매의 면담성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더 좋은 그대로의 모습이라며 반가워했습니다. 33년 동안 참 고단하게 살아왔고 큰 수술을 앞둔 자매였습니다. 대부분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분들을 보면 저절로 연민의 마음 가득해 집니다.
“삶은 이제부터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는 불문에 붙입니다. 하느님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는 것을 보십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지의 말씀과 더불어 이사야서 말씀도 자주 보속 처방전으로 드리곤 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 43,18-19ㄱ).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참 행복합니다. 주님과 함께 목표 뚜렷한 “예닮의 여정”의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요. 참으로 회개의 깨달음과 시작하면 언제든 늦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예닮의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세 주제별로 나눔을 갖고자 합니다.
첫째, 마음이, 사람이 먼저입니다.
마음이, 사람이 좋아야 생각도 말도 글도 행동도 좋습니다. 이들은 그대로 마음을 정직하게 반영합니다. 오늘 복음의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아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절대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시 나무에서 무화과를,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지 못합니다.
결론하여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습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오늘 1독서 집회서 내용도 대동소이합니다. 마음의 표현인 “말”이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주는지 설파합니다.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된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조심에 앞서 맘조심이 우선입니다. 맘의 표현이 말과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정화와 성화가 우선입니다. 좋은 마음에서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이듯이, 반대로 좋은 수행의 습관화에서 좋은 마음이 형성됩니다. 타고난 순수의 선인도 타고난 불순의 악인도 없습니다. 부단한 사랑의 수행이 마음을 정화할 때 선인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수행의 훈련과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둘째, 자기 인식認識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인간입니다.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입니다. 결국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하느님과 자기를 알아가는 앎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알아가고 나를 알아가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하느님 공부와 참나의 공부는 함께 갑니다. 이런 평생공부에 항구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나를 알게 되어 무지의 어둠에서 서서히 벗어납니다. 몰라서 무지해서 남 판단하지 참으로 나를 안다면 절대로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무지한 이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용서할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분별할 뿐입니다. 주제 넘게도 자기도 모르는 주제에 이웃을 교정하려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천둥같은 말씀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너가 무엇인데, 너나 잘 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나를 비춰주는 공동체 형제들의 거울이 필요합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거울에 환히 드러나는 내 마음의 얼굴입니다. 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부끄럽게도 하지만 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공동체 형제들이 고맙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래서 저는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 라고 기꺼이 고백합니다. 그러니 공동체 삶의 여정은 서로 겸손히 배워 깨달아 알아가는 ‘배움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겸손히 배움의 여정에,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할 때 눈속의 티는, 들보는 점차 사라져 맑고 밝은 심안心眼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직시할 것입니다.
셋째, 유일한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은 한몸의 지체들로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얼굴을 반영합니다. 공동체 형제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그러니 바로 공동체 중심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참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스승 예수님을 배워 닮으라는 것입니다. 스승 예수님을 목표로, 롤모델로 삼아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끊임없고 한결같은 말씀공부와 기도와 회개의 수행이 필수입니다. 복음 환호송의 가르침이 적절합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필리 2,15-16)
저절로가 아닌 이런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기 위한 분투의 수행 노력과 더불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러니 끊임없고 한결같은 말씀공부와 기도, 회개의 수행과 더불어 마음의 정화와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게 하시며, 우리 마음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어 무지에서 벗어나 참 나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이르게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7-58) 아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고
그것을 통해
참 아름다움이신 주님을
보게 되니까요.
나의 주님!
저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눈으로 세상 곳곳에 만연해 있고
사람의 마음 속에 간사하게 숨어 있는 악을 보고
그것을 통해
참 어둠인 악마의 어른거림도
보게 되니까요.
나의 하느님!
저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적인 아름다움
외적인 추함 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아름다움
마음의 추함을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을 주셔서
그 내면의 눈을 통해
하느님과 사탄의 엥까지도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을 주시니까요.
오, 하느님!
하오나, 더 잘 볼 수 있게 하소서.
육안보다 심안이
심안보다 영안이 더 밝아지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잘 잘못보다
나의 잘 잘못을 더 잘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세상과 사람을 굽어보시는
그 눈으로 저도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게 하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MLsk5dxJSw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 45)
우리의
마음이란
성찰의 부단한
담금질을 통해
깨닫게 되는
마음의 눈떰이며
마음의 간절한
기도이다.
깨닫지 못하면
우리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빼낼 수
없다.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에서
열매는 탄생한다.
열매는 마음을
끌어당기고
마음은 열매를
물들인다.
좋은 열매를
줄 수 있는
마음이
좋은 사람이다.
좋은 마음은
좋은 마음으로
되돌아옴을
보게 된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곳간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의 마음으로
결정된다.
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도
이해할 수 없다.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도
달라지지 않는다.
서로가
쌓아놓은
어리석음의
아픈 열매들을
보게 된다.
나쁜 것들을
털어내고
버리고
비워야
마음은
되살아난다.
나의 마음이
살아나야
상대의 마음에
좋은 열매를
나누며
줄 수 있다.
마음의
주님께서는
마음을 만나도록
우리를
일으키신다.
차갑게 굳어버린
마음을 깨뜨리시는
예수님의 선하고
진실하신 마음이다.
사랑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다.
마음에 눈먼 이는
사랑에도
눈먼 이다.
마음의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길은
구덩이를 메우고
꽃을 심는 것이다.
마음도
대대적인
수리공사가
필요하다.
마음의 물꼬를
터주는 넘치는
마음의 주일이다.
눈먼 이들의
구덩이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마음의 새로운
물꼬이다.
새로운
복음의 물꼬를
트니 마구
쏟아지는
은총의 새날이다.
새날은
새마음에
담고 기쁘게
나누어야 할
오늘이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