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남아 있는 음성중심주의의 망령
*(책)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박영욱)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거부하는 것이 데리다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데리다는 오히려 보편적인 것이 드러나는 방식, 즉 보편적인 것이 폭력화되는 방식을 거부하고 해체하고자 한다.
가령 그는 법(loi)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극심한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는데, 사실상 이때 법에 대한 비판은 법 자체라기보다 법이 폭력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음성중심주의는 그러한 법의 폭력성을 교묘하게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법은 그 자체가 보편성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법 자체가 이미 당파적인 것으로서 정당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법을 보편적이며 정의로운 것으로 상정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법과 정의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법과 정의 사이에는 애매한 미끄러짐과 균열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균열을 슬쩍 은폐하거나 봉합함으로써 법은 마치 그 자체가 정의의 목소리인 것처럼 행세한다.
법은 강제력을 동원하지만 정의에는 반드시 강제력이 수반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이미 법과 정의 사이에는 균열이 있다.
법은 타자를 환대하는 논리라기보다는 하나의 보편적인 틀 속에 가두는 논리이다.
때로는 법을 어기는 것이 상대방을 환대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정의로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법은 보편성을 결여할 경우 법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므로 누구에게나 강제적으로 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법은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적용가능성이 전제되며 법은 집행의 힘을 부여받을 때만 실행될 수 있다.
법은 ‘법의 힘(force de loi)’으로만 현실화된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보충대리물의 논리를 목격하게 된다.
법은 자신의 보편성을 적용하기 위해서 힘이라는 수단, 즉 보충대리물을 필요로 한다.
이 보충대리물은 단순한 보충대리물을 넘어서 법 자체의 토대가 된다.
법정 모독을 법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하거나 판사에 대한 공격을 법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중죄로 다루는 것 또한 법 자체가 법의 힘과 동일시됨을 반영한다.
말하자면 법이 정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법이 정의의 목소리로 간주됨을 전제로 할 경우이다.
그러한 점에서 법은 자칫 그 자체가 폭력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몇 해 전 국내에서 석궁으로 판사를 위협한 퇴직교수의 행위에 괘씸죄가 적용된 것도 법의 정의로움은 법 자체의 권위에서 나온다는 음성중심주의적 발상과 맞물린 것이다.
폭력이 법을 필요로 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폭력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법을 필요로 한다.
즉 폭력에 합법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폭력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때 법은 폭력을 정의로운 폭력으로 만들기 위한 알리바이가 된다.
여기에는 법이 곧 정의의 목소리라는 음성중심주의의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왜 법과 정의를 구분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데리다가 목도한 또 다른 음성중심주의의 망령은 미국식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당위성으로서의 미래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주의는 사실상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t, 1953)에서의 고도와도 같다.
이 연극에서 고도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지만 고도 없이는 연극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고도는 미래에 반드시 도래해야 하는 것으로 전제되지만 나타날 수 없는 존재이며, 연극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존재이다.
이는 일종의 망령, 정의라는 가면을 쓴 폭력의 망령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망령과 또 다른 대척을 이루는 마르크스의 망령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또한 정의를 가장한 폭력의 음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