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도 기행 / 김 난 석
(1)
길은 오동도 방파제를 따라 바닷길 등대로 이어지는 길, 여수항을 바라보며 해미 자욱한 안갯속을 걷는다. 배호는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거닐며 늙은 고목을 쓰다듬었고 최백호는 안갯속에 가로등 하나를 바라보며 비라도 내리면 갈 곳을 모른다 했는데 배호가 묵은 인연에 연민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면 최백호는 새로운 인연에 목말라함이라 할까...
순천에서 성장한 김승옥은 60년대 여수 순천만의 안개지대를 배경으로 ‘무진기행’을 써서 발표했다. 안개 포구마을을 거닐었다는 뜻의 무진기행(霧津紀行). 몸이 쇠약한 화자(話者)는 시골에서 잠시 쉬고 오라는 아내의 말에 따라 안개마을로 찾아든다. 덜커덩거리는 버스 탓도 있겠지만 적당한 햇빛과 살갗을 긴장하게 하는 적당한 냉기와 적당한 소금기가 어우러져 꾸벅꾸벅 졸음이 찾아들게도 했다. 그 셋을 한데 섞어 수면제를 만들면 잘 팔리겠다는 상상도 하면서 동승자들의 이야기도 엿듣게 된다.
“이곳은 명물이랄 게 하나도 없어.
안개 자욱한 개펄뿐이고.
한참이나 나가야 수평선의 바다가 있을 뿐인데 어찌들 살아가는지 몰라...... “......“
읍내에 도착한 화자는 서울에서 갓 내려온 음악 선생 하인숙을 고향 후배를 통해 만나 수작하다가 은밀히 살을 나누게 된다. 이어 빨리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무진을 떠나기로 하면서 하인숙에게 서울로 올라오라는 편지를 써보지만 부치지 아니한 채 찢어버리고는 이번 일은 이번 일로 마치자고 다짐하며 무진을 홀로 떠나고 만다.
결국 작가는 무진을 안개 구렁텅이로 묘사하고 그 구렁텅이 속에서 불륜을 저지르게 한 뒤에 모든 걸 안갯속에 묻어버리고 만 것이었다고 할까... 아니면 잠시의 일탈을 통해 평온을 찾으려 했다 할까... 그도 아니면 현실에 침 뱉고 돌아서는 작가의 역설이라고나 할까...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라니 뭐라 하든 누가 뭐라 하랴.
시각은 아침 여덟 시경, 비슷한 연배의 사내가 벤치에 홀로 앉아있다.
“누굴 기다리시나요?”
“다리 아파서 동백열차를 타고 가려고요.”
“동백열차는 아홉 시 반에나 운행한다던데요.”
“그런가요?”
“함께 걸으시지요.”
이렇게 해서 그 사내와 함께 걷기로 한다. 나이를 물어보니 갑신생이라 하는데 이런 땐 말을 먼저 걸어주는 게 말 보시가 되는 것이었다..
“여행은 혼자 해야 제 맛이 나는 건데 저는 이렇게 묶여 왔네요 허허.”
“아이고, 함께 다닐 때가 제일 좋지요.”
이 말을 들은 옆의 아내는 벌써 홀몸임을 눈치챘는지 안쓰러운 표정인데, 이런 땐 또 위로의 말을 찾아야 한다.
“자녀들은 모두 장성했지요?”
“삼 대 일인데, 모두 취직들을 잘해서 결혼하고 잘 살지요.”
“다복하시네요. 저는 딸 둘을 뒀는데 집에 가면 또 거치적거리는 신세랍니다.”
이쯤 되면 위안을 찾았을 법도 해서 다른 말을 이어 본다..
“어디서 주무셨나요?”
“택시기사가 일러주기에 깨끗한 찜질방에 가서 푹 쉬었지요.”
“잘하셨네요. 저는 둘이라서 그런 여유도 못 부리고 모텔 신세를 졌는데요.”
“저도 모텔을 생각해봤지만, 어쩐지......”
말끝을 흐리는 걸 보면 모텔을 몹쓸 호텔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생김생김이 말쑥하고 꼬장꼬장한 걸로 보아 나처럼 월급쟁이를 했거나 아니면 금은방이나 양복점 주인쯤으로 상상된다.
나도 혼자 내려왔다면 찜질방에 들었을까... 아니면 붉은 네온 반짝거리는 모텔에 들었을까... 그도 아니면 전화기를 꺼놓고 어디 술집에 앉아있었을까... 이렇게 세월이 한참 덮인 안갯속에서 잔불로 숨어있을 욕망을 뒤적거려보며 사랑은 구속이기도 하고 자유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앞세워 또 걷는데, 방파제 끝으로 서있을 등대는 바다를 향해 돌아서 있거나 안개에 가려 있으니 나는 홀로 나의 길을 걸어가야 하리라.(2012. 8.)
(2)
봄바람 따라 남도길을 걸었다. 남도길을 걸었다기보다 호남선을 따라 내려갔다고 해야겠다. 봄은 남쪽에서 올라오니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잘도 맞으련만 산 너머 남촌엔 누가 사는지 궁금하다 했으니, 그래서 나선 것이라 해야 할지.... 하지만 자발없어 그랬을 것이다.
봄날 호남선을 따라나서면 갯내음이 난다. 경부선을 따라 나서면 산내음이 난다면 호남선을 따라 나서면 서편제의 가락 속에 아낙네의 치마폭에 꼬막 바지락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고, 이윽고는 갯내음이 난다.
호남선은 늘 여유가 있어 좋다. 경부선은 미리미리 예약을 해야 열차를 타지만 호남선은 아침밥을 먹고 금방 나서도 늘 늘 늘 하다. 이제 호남선도 고속화하여 서울에서 출발하면 한 가닥은 목포에 이르고 또 한 가닥은 여수에 이른다. 어느 것이나 두세 시간이면 그 끝에 닿게 마련이니 목포를 택하면 삼학도의 흔적이, 여수를 택하면 오동도가 반갑게 맞아준다.
이번에 오동도를 찾게 된 건 여수 엑스포의 추억과 함께 지난날 들렸던 기억이 되살아나서였지만, 아마도 무엇을 찾아보려 할 것도 없이 겨우내 입고 다니던 무거운 겉옷을 벗어버린 홀가분한 마음을 즐기려 했던 것이라 해야겠다.
1 제곱킬로미터 조금 넘는 섬엔 많은 상춘객들이 들고 나고 있었다. 갯바람 속에 피어낸 동백꽃을 보잠 인지 등대 위에 올라 두리번거리며 사위 바다를 보잠 인지 그거야 알 바 아니지만 나는 오동도에 오르노라면 왠지 모르게 서러움이 인다.
그 옛날 이곳엔 오동나무가 많았다는데 봉황이 찾아오는 걸 겁내어 다 비어버렸다는 전설이 서럽고, 두 남녀가 귀양 와 외롭게 살던 섬이라서 서럽고, 생계를 위해 남편이 홀로 바다에 나간 사이 아내가 사내들로부터 겁탈당하자 갯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진했다는 그 사연이 서럽다. 그 자리에 하얀 눈이 내리자 빨간 동백꽃이 피었다 졌다는 전설이 또 서러운 것이다.
섬의 북쪽 끄트머리에서 오르기 시작해 동백 숲으로 들어서니 동백꽃들이 어느 건 나뭇가지에 매달려, 어느 건 땅에 떨어져 제각각 시선을 끌었다. 그걸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며 걷노라니 자연 고개가 끄덕여졌다.
댕강! 향이 없으니 벌도 나비도 찾아오지 않고 댕강! 홀로 피었다 지는 소리마저 낼 것도 없이 꽃잎은 어느새 시나브로 떨어져 내려 댕강! 대지에 입맞춤하고 있는 걸 보노라니 내 안에서 재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재깍! 그건 가쁜 숨 돌리는 소리요 재깍! 그건 욕망의 불꽃이 피었다 꺼지는 소리요 재깍! 그건 먼 기억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리요 재깍! 그건 육신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한 바퀴 돌고 나와 갯가에서 꼬막비빔밥 한 그릇 척척 비벼 먹을 양이었지만 이가 부실해 살점이나 파먹고 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지난날의 기행기를 가만히 꺼내보니 여수 엑스포를 방문했던 60대로부터 이제 70대 끝판에 이르렀다. 이제 나이 학벌 지위 외모 상관할 것도 없이 어릴 때의 동무를 만나면 무조건 반가울 때여선지 가까운 글벗과 함께 수학여행하는 기분으로 가고 오는 길에 쌀쌀맞을 봄바람도 낯에 부드럽게 스쳤다.
2022. 4.
첫댓글 무진기행의 배경이 여수 순천만이군요.
얼마 전에 남도여행을 다녀왔는데
이 글을 읽고 갔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동도에 그리 슬픈 전설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대충 풍경만
보고 왔지요.
제 고향이 대구라 결혼 전 서울에서
몇 년 살때는 늘 쫓기는 기분으로
경부선 기차를 타곤 했답니다.
그러다 호남선이나 충북선 기차를
타보고 이렇게 여유로운 기차도
있구나 싶더라고요.
석촌 님의 잔잔한 기행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에
경부선과 호남선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요.
고향에서 가까운 순천이지만 이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순천만이 조성된 초창기에 가보고 못가봤는데 다시 가보고 싶네요~^^
고향이 순천과 가까운 곳이면
좋은곳일 것 같네요.
꽃잎 한 잎 한 잎 떨어져
슬픔이 쌓여가는데
동백꽃은 어찌하여 송이채 툭 떨어질까요?
동백꽃의 슬픔은 쌓여 가는게 아니라 싸인 덩어리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툭 추락하는듯 합니다.
네에 그런 느낌도 들지요.
봄여행을 하셨군요ㅎ
오동도에 전해지는 전설은 처음 알게 되었네요
저도 시간적 여유가 되면 남도 여행 꼭 가고 싶네요
답답한 마음이였지만 대리 만족하며 잘 읽었습니다
네에
조만간 여유가 생기게 되길 바랍니다.
여수 엑스포가 열리던해 처음으로
인천서 출발하는 크루즈선을 타봤었지요.
이태리 선적의 11만톤급의 배로 국내의
L 사가 용선하여 여수에서 엑스포를
관람하고 속초에 들렀다가 불라디보스톡과
일본을 거쳐 부산에서 하선하는 코스로....
10여년전의 여수를 추억하시며
지난달에 오동도를다녀오셨다니
엑스포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여수에도 해상 케이블카가 생겼다니
겸사겸사 향일암에도 한번더 오르고
싶어 지네요
네에
다시 들려봐도 좋을 곳이지요.
오늘 만나 즐거웠어요.
여수 오동도 입구근처에 차를 대어놓고 오동도방파제 에서 밤낚시
를 해보곤 하였지요.
그때가 벌써 이십몇년이 흘렀네요.
여수 엑스포. 순천갯벌생태공원
귀국할때 마다 찿아가본곤 하였는데 이번 귀국길엔 아직 입니다.
수필은 역시 이런것이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올가을에 또 가봐요.
저도 가을에나 겨울에 또 들려볼 생각입니다.
제 어릴적에 여수,선창가
어느 식당에서 먹었던
아귀국밥이 얼마나 맛이 있었던가
지금도 그 때 그 맛을 잊지 못해서
아귀탕이나,아귀찜을 좋아 합니다.
고향이지만 자주 가서,먹거리 풍성한
즐거움은 행복한 시간이 됩니다.
어릴적 먹던 입맛은 평생 가지요.
동백이 빼곡한 섬이 왜? 오동도라 불릴까?
한번도 의심을 안 해봤네요.
언제였는지, 무슨일이었는지 딱 한번 가본
오동도! 그후 다시는 가질 못하고 그저 눈 앞에
그려만 볼 뿐입니다.
무진기행도 자세히 기억나는게 없고~
읽긴 분명 읽어봤는데,,
슬픈 오동도 사연에 백난아의 이 노래
갈매기 쌍쌍이 어울어지면 좀더 가슴이 아릴듯 하군요!
*
아아 여수 통영 저 바다 외고동 울고
방물치마 내가슴에 쌍고동 운다
울어라 외고동아 울어라 쌍고동아
너도나도 응 응 같이울자
- 간 주 중 -
아아 목포 노량 저바다 눈보라 울고
천층만층 내가슴에 꽃보라 친다
울어라 눈보라야 울어라 꽃보라야
절창이네요.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자욱한 안개. 오동도의 붉은 동백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지는 수필. 잘 읽었습니다
네에
오늘 만나 반가웠어요.
무언가 서러운 느낌이 드는 남도 여행
그 곳 특유의 정서가 배어있는 것 같은,
따돌림, 유배의 땅 뭐 그런 이미지가 주는 어설픈 느낌이지만
남도의 먹거리와 더불어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그 곳을 여행 하면
경상도 쪽과는 또 다른 느낌. 저도 남도 여행을 좋아하지요.
오랫만에 카페에서 서정적인 기행문을 읽게 되어
반갑고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네에
오늘 수필방 나들이가 있었는데
한스님 생각도 나데요.